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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후룩∼ 탁!
마지막 한 방울의 육수까지 들이켠 방립 사내가 그릇을 식탁에 소리 나도록 내려놓는다.
“후아! 이거 끝 맛이 죽여주는구먼요.”
그가 고개를 들며 양쪽 엄지를 올렸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사람들.
뭐랄까. 그냥 보기만 했는데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허허. 보다보다 여기 음식이 맛있다는 이는 처음 보네그려.”
아까와는 달리 쥐꼬리 수염의 음성에서 편안함과 여유가 넘쳤다. 가볍게 말을 뱉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보다보다? 이 사내도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요. 주인장! 주인자앙∼! 저 좀 봅시다.”
“예?”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늙고 마른 반점의 주인이 조금은 멍청한 얼굴로 나타났다.
“실례가 되는 줄 뻔히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물어봅니다.”
“마, 말씀하시오.”
사내가 방립을 벗었다. 그 아래에 나타난 얼굴의 주인은 바로 공천록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저분한 천은 그의 머리를 감고 내려와 있다.
“뭘로 우려낸 겁니까.”
“에?”
“아아, 공짜로 알려달라고는 안 해요.”
공천록은 식탁에 올려놓았던 등짐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잠시 후, 그의 손가락 사이에 통보(通寶) 두 닢이 끼인 채 끌려나왔다.
“하나는 귀한 식사에 대한 대가이고 하나는… 알죠?”
눈을 찡긋하는 공천록은 정말로 주인의 솜씨를 탐내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와, 이분 진짜.”
공천록은 주변 사람들의 기이한 시선을 받고도 눈 한 번 돌리지 않으며 또 등짐을 뒤졌다. 그리고 또 두 닢의 통보가 더해진다.
“더 이상은 안 돼요.”
짐짓 엄한 표정의 공천록이었다.
반점 주인은 그런 그를 멍하게 바라만보며 뭐라 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입만 벙긋벙긋거렸다.
“허, 주고받음의 이치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네. 쩝.”
공천록이 고개를 살살 흔들며 한 닢을 더 추가하여 도합 다섯 닢의 통보를 식탁에 쫙 펼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주인이 눈알을 굴리며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천록은 그 모습을 느긋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주인이 결심한 듯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려는 찰나, 공천록이 조용히 통보 한 닢을 손가락으로 짚어 등짐 쪽으로 살살 민다.
“자, 잠깐만. 말씀드리겠소.”
주인이 급히 공천록을 제지하며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아우성이다.
“하, 하하. 쉿! 듣는 귀가 많으니 나중에 알려주세요. 꼭!”
이리 말하고선 바로 통보 세 닢을 등짐 안에 쏙 넣어버렸다.
“하나는 미리 드리는 것이니 혹여나 제가 장난쳤다고 생각지 마세요. 전 진심이니까.”
순식간에 사람의 혼을 빼버리는 그를 보며 쥐꼬리 수염을 포함한 열 명은 혀를 내둘렀다.
잠깐의 소란이었지만 자신의 존재를 이상한 방식으로, 이렇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재주는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재미있는 친구야.”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보시게, 자네도 혹시 하가장의 행사에 관심이 있어 온 겐가?”
쥐꼬리 수염이 물었다.
“뭐, 일거리가 많다기에. 아, 합비성 북문 앞에 서 계시던 분께서 여기로 가보라더군요.”
“북문이라면…….”
쥐꼬리 수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짓는다.
“두렵지 않은가? 하가장을 위협하는 여섯 문파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텐데.”
“공(空)으로 부려먹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즉,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맞네, 맞아.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들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체 두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표정들이다.
그때, 쥐꼬리 수염이 일어섰다.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중압감이 인다.
“시간이 되었군.”
터벅터벅 반점의 입구까지 걸어가는 쥐꼬리 수염. 그는 곧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헛!”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가 먼저 놀라 작게 소리를 냈다.
쥐꼬리 수염이 그의 수염을 잡아 쭉 뜯은 것이다. 마치 얼굴의 가죽이 생으로 뜯겨지듯 그가 쓰고 있던 면구(面具)가 벗겨졌다.
면구가 사라진 그는 날렵하게 빠진 얼굴을 한 중년인이었다. 이마 가운데에서 시작한 십자형 상처가 한쪽 눈썹을 절반으로 가르고 광대뼈에도 가느다란 상흔을 낸 흉측한 면상의.
“본인은 하가장 적운단(赤雲團)에서 한 개 조(組)의 장을 맡고 있는 양계라 한다. 그대들의 용기를 칭찬하지.”
씨익 웃는 양계의 모습에 중인들이 얼어붙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 주인장. 저기 밖에 기름 좔좔한 말 한 마리가 있어요. 제가 자주 찾아와 보관료와 수고비, 여물 값을 드릴 테니 좀 맡아주시죠? 아,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
“다음.”
작은 탁자에 앉은 이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가 부른 자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곧 큼큼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름.”
눈이 매서운 문사 차림의 중년인은 보기에도 꽤 깐깐하게 생겼다. 마치 자신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좋을 것 없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는 듯했다.
“손달이라 합니다.”
“특기는?”
손달이라는 이름의 낭인이 금과(金瓜)를 들어올렸다.
“이십팔식 용권풍(龍捲風)이 본인의 진신절기이며 한때 대막(大漠)을 주름잡던…….”
“되었고. 몇 명이나 죽여 봤나?”
툭 던지듯 내뱉는 중년 문사의 물음에 손달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게 보자… 딱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못해도 삼십은 넘지 싶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중년 문사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던 낭인보다 열 명은 더 해치웠음을 강조하며 가슴을 펴는 손달이었다.
중년 문사가 옆에 있는 나이든 무인에게 뭔가를 소곤거렸다. 나이든 무인은 손달을 흘끗거리며 중년 문사에게 또 작게 답해준다.
“적룡단(赤龍團).”
중년 문사가 손달을 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아! 흐흐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달은 크게 기뻐하며 큰 나무판에 ‘적룡’이라 쓰인 자리로 가서 줄을 다시 섰다.
공터는 상당히 넓었다.
허름한, 아니 거의 다 무너져가는 도관 앞에 놓인 탁자에 중년 문사가 자리했고, 그의 뒤로 열 명의 붉은 무복인들이 서 있다.
도관 입구 쪽에는 ‘적룡(赤龍)’, ‘적풍(赤風)’, ‘적호(赤虎)’, ‘적운(赤雲)’ 이렇게 네 개의 나무판이 있었고 몇 십 명의 낭인들이 각각의 나무판에 줄선 채, 다시 공터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적룡, 적호에 선 이들은 밝은 표정이었고 적운, 적풍 쪽은 눈가에 그늘이 져있다.
그것은 아마도 적룡, 적호단은 네 용병단 중에서도 꽤 괜찮은 실력자들이 배치되는 곳이라 바로 하가장 본가 내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적운단은 최근에 만들어진 용병단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적풍단 쪽 낭인들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누가 억지로 똥을 떠먹여 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또 그렇게 중년 문사가 몇 명의 낭인들을 대충 가늠한 실력대로 나누어 보냈다.
“다음.”
척척척.
경쾌한 걸음으로 나서는 이는 공천록.
마르고 더운 날씨에도 피풍과 머리에 쓴 천을 결코 벗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천록입니다.”
공천록은 막 이름을 물으려는 중년 문사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해 버린다.
뭐 이런 자식이, 하는 눈으로 공천록을 쳐다보는 중년 문사. 그는 곧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입술을 움직이려 했다.
“대충 기억나는 숫자만 오륙백 정도 될 겁니다. 특기는 목 베기.”
“푸웁―!”
중년 문사는 뭘 잘못 먹은 사람처럼 사레가 들렸다. 그의 등을 퉁퉁 두들겨주는 나이든 무인. 그가 공천록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리 곱지는 않았다.
“장난하나?”
“장난 아닌데요.”
정말로 당당한 태도의 공천록을 보는 중년 문사의 벌게진 얼굴에는 황당함만이 가득했다.
“후우… 그래, 그래. 내세울 만한 공부가 있는가?”
이 부분에서 공천록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니까. 뭐, 자네가 이름 붙인 무공이라든가, 그 오륙백 명을 목 베면서 터득한 깨달음 같은 거 말이네.”
대놓고 공천록을 놀리는 그의 언사에 주변 낭인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공천록은 더욱 더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으음, 말하자면 형식을 갖춘 초식이라거나 오랜 시간, 정해진 호흡법을 통해 습득한 내기를 칭하는 명칭, 그것도 아니라면 ‘신병이기의 주인이 알고 보니 자네였다!’라는 좀 우리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를 알려달란 말일세.”
스윽.
공천록이 순간 몸을 굽혀 중년 문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척! 척!
하가장 무인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공천록의 멀뚱한 눈을 보노라면 그가 어떤 불의한 행위를 할 것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으… 사람을 죽이는데 형(形)이 필요합니까?”
“…….”
갑자기 중년 문사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여기에 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문사 옆에 있던 나이든 무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한낱 낭인에게 이 정도까지 많은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이요.”
“꿈?”
중년 문사는 또 저 소리냐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관심이 가는 지원자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던져보곤 했던 그였다. 몇몇은 현실적인 이유를 말했으나 상당수가 꿈과 이상을 언급하며 하가장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평소 하가장의 검이 되고 싶었다는 둥, 어릴 때 꿈이 당당히 인정받는 무인이었다는 둥.
“그럴 테지…….”
특이한 녀석이긴 하지만 결국은 너도 다른 낭인들과 똑같은 놈이군, 이라고 생각한 중년문사였다. 한데 갑자기 공천록이 다시 입을 연다.
“웬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흑호(黑虎)들이 절 여기까지 이끕디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아, 제가 좀 신령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제 꿈에는 아주 묘한 힘이 있어요. 저의 앞길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제가 몰랐던 저의 먼 과거들을 비추어줄 때도 있지요.”
“허허허. 허허허허!”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중년 문사였다.
“정말이라니까요.”
공천록은 그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표정을 한 채, 씩 웃을 뿐이었다.
“허허허, 그래, 그래. 알았다. 꿈이라 좋지. 네 신령스러운 꿈이 이곳을 가리켰다면 네게 어떤 놀라운 기적을 내려줄 수도 있겠구나.”
중년 문사가 붓을 들었다. 그리고 공천록의 이름을 쓰고 그 옆에 다시 몇 글자를 적는다.
“적풍단.”
“감사합니다.”
다른 낭인들이 적풍단에 배정받자마자 울상을 지었던 것과 달리 공천록은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자, 다음!”
공천록은 적풍단에 속하게 된 용병들 맨 뒤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앞에 선 이들이 자신을 힐끔거려도 그저 기분 좋은 얼굴로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기만 한다.
“자네도 여기구먼.”
공천록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이. 합비 도성 바깥에 위치한 반점에서 본 남자다.
안면을 비스듬히 지나간 상처로 인해 코와 입술이 일그러진 사내.
“예. 먼저 이쪽으로 서신 걸 봤어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면 별로 축하받고 싶지 않은 듯했다. ‘적풍’이란 두 글자가 그와 이곳에 줄 선 이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기에.
“유손이라고 하네.”
“공천록입니다.”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하는 두 사람이었다.
“흠, 쉽게 들을만한 이름은 아니군. 부모께서 지어주셨나?”
유손이 미간을 좁히며 묻는다.
“아뇨. 제가 지었어요. 꼭 기억하고픈 분들이 계셔서.”
“그렇구먼.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 암.”
공천록은 고개를 끄덕이는 유손에게 이를 보이며 웃었다.
“휴우∼!”
“아이고, 벌써부터 땅이 다 꺼졌네요.”
유손의 한숨에 공천록이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다.
“천록이 자넨 아무런 말 못 들었나? 적풍단에 대해서.”
몇 명인가가 공천록과 유손을 돌아보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는 유손과 마찬가지로 반점에 있던 네 낭인 중 둘이 포함되어 있다.
“이름 좋네요. 전 바람을 좋아하죠. 후후훗.”
“문제는 이름만큼 거창하지 않은 데에 있다네. 나도 여기 와서 들었지만.”
유손은 이것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열이 들어와서 아홉이 죽는다 하더군. 적풍단에서.”
유손 대신 다른 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반점에서 적운단의 조장 양계와 대화했던 그 주름 자글자글한 낭인이었다.
후룩∼ 탁!
마지막 한 방울의 육수까지 들이켠 방립 사내가 그릇을 식탁에 소리 나도록 내려놓는다.
“후아! 이거 끝 맛이 죽여주는구먼요.”
그가 고개를 들며 양쪽 엄지를 올렸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사람들.
뭐랄까. 그냥 보기만 했는데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허허. 보다보다 여기 음식이 맛있다는 이는 처음 보네그려.”
아까와는 달리 쥐꼬리 수염의 음성에서 편안함과 여유가 넘쳤다. 가볍게 말을 뱉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보다보다? 이 사내도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요. 주인장! 주인자앙∼! 저 좀 봅시다.”
“예?”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늙고 마른 반점의 주인이 조금은 멍청한 얼굴로 나타났다.
“실례가 되는 줄 뻔히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물어봅니다.”
“마, 말씀하시오.”
사내가 방립을 벗었다. 그 아래에 나타난 얼굴의 주인은 바로 공천록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저분한 천은 그의 머리를 감고 내려와 있다.
“뭘로 우려낸 겁니까.”
“에?”
“아아, 공짜로 알려달라고는 안 해요.”
공천록은 식탁에 올려놓았던 등짐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잠시 후, 그의 손가락 사이에 통보(通寶) 두 닢이 끼인 채 끌려나왔다.
“하나는 귀한 식사에 대한 대가이고 하나는… 알죠?”
눈을 찡긋하는 공천록은 정말로 주인의 솜씨를 탐내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와, 이분 진짜.”
공천록은 주변 사람들의 기이한 시선을 받고도 눈 한 번 돌리지 않으며 또 등짐을 뒤졌다. 그리고 또 두 닢의 통보가 더해진다.
“더 이상은 안 돼요.”
짐짓 엄한 표정의 공천록이었다.
반점 주인은 그런 그를 멍하게 바라만보며 뭐라 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입만 벙긋벙긋거렸다.
“허, 주고받음의 이치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네. 쩝.”
공천록이 고개를 살살 흔들며 한 닢을 더 추가하여 도합 다섯 닢의 통보를 식탁에 쫙 펼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주인이 눈알을 굴리며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공천록은 그 모습을 느긋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주인이 결심한 듯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려는 찰나, 공천록이 조용히 통보 한 닢을 손가락으로 짚어 등짐 쪽으로 살살 민다.
“자, 잠깐만. 말씀드리겠소.”
주인이 급히 공천록을 제지하며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아우성이다.
“하, 하하. 쉿! 듣는 귀가 많으니 나중에 알려주세요. 꼭!”
이리 말하고선 바로 통보 세 닢을 등짐 안에 쏙 넣어버렸다.
“하나는 미리 드리는 것이니 혹여나 제가 장난쳤다고 생각지 마세요. 전 진심이니까.”
순식간에 사람의 혼을 빼버리는 그를 보며 쥐꼬리 수염을 포함한 열 명은 혀를 내둘렀다.
잠깐의 소란이었지만 자신의 존재를 이상한 방식으로, 이렇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재주는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재미있는 친구야.”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보시게, 자네도 혹시 하가장의 행사에 관심이 있어 온 겐가?”
쥐꼬리 수염이 물었다.
“뭐, 일거리가 많다기에. 아, 합비성 북문 앞에 서 계시던 분께서 여기로 가보라더군요.”
“북문이라면…….”
쥐꼬리 수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짓는다.
“두렵지 않은가? 하가장을 위협하는 여섯 문파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텐데.”
“공(空)으로 부려먹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즉,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맞네, 맞아.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들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체 두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표정들이다.
그때, 쥐꼬리 수염이 일어섰다.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중압감이 인다.
“시간이 되었군.”
터벅터벅 반점의 입구까지 걸어가는 쥐꼬리 수염. 그는 곧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헛!”
일그러진 얼굴의 사내가 먼저 놀라 작게 소리를 냈다.
쥐꼬리 수염이 그의 수염을 잡아 쭉 뜯은 것이다. 마치 얼굴의 가죽이 생으로 뜯겨지듯 그가 쓰고 있던 면구(面具)가 벗겨졌다.
면구가 사라진 그는 날렵하게 빠진 얼굴을 한 중년인이었다. 이마 가운데에서 시작한 십자형 상처가 한쪽 눈썹을 절반으로 가르고 광대뼈에도 가느다란 상흔을 낸 흉측한 면상의.
“본인은 하가장 적운단(赤雲團)에서 한 개 조(組)의 장을 맡고 있는 양계라 한다. 그대들의 용기를 칭찬하지.”
씨익 웃는 양계의 모습에 중인들이 얼어붙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 주인장. 저기 밖에 기름 좔좔한 말 한 마리가 있어요. 제가 자주 찾아와 보관료와 수고비, 여물 값을 드릴 테니 좀 맡아주시죠? 아,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다음.”
작은 탁자에 앉은 이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가 부른 자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곧 큼큼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름.”
눈이 매서운 문사 차림의 중년인은 보기에도 꽤 깐깐하게 생겼다. 마치 자신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좋을 것 없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는 듯했다.
“손달이라 합니다.”
“특기는?”
손달이라는 이름의 낭인이 금과(金瓜)를 들어올렸다.
“이십팔식 용권풍(龍捲風)이 본인의 진신절기이며 한때 대막(大漠)을 주름잡던…….”
“되었고. 몇 명이나 죽여 봤나?”
툭 던지듯 내뱉는 중년 문사의 물음에 손달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게 보자… 딱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못해도 삼십은 넘지 싶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중년 문사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던 낭인보다 열 명은 더 해치웠음을 강조하며 가슴을 펴는 손달이었다.
중년 문사가 옆에 있는 나이든 무인에게 뭔가를 소곤거렸다. 나이든 무인은 손달을 흘끗거리며 중년 문사에게 또 작게 답해준다.
“적룡단(赤龍團).”
중년 문사가 손달을 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아! 흐흐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달은 크게 기뻐하며 큰 나무판에 ‘적룡’이라 쓰인 자리로 가서 줄을 다시 섰다.
공터는 상당히 넓었다.
허름한, 아니 거의 다 무너져가는 도관 앞에 놓인 탁자에 중년 문사가 자리했고, 그의 뒤로 열 명의 붉은 무복인들이 서 있다.
도관 입구 쪽에는 ‘적룡(赤龍)’, ‘적풍(赤風)’, ‘적호(赤虎)’, ‘적운(赤雲)’ 이렇게 네 개의 나무판이 있었고 몇 십 명의 낭인들이 각각의 나무판에 줄선 채, 다시 공터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적룡, 적호에 선 이들은 밝은 표정이었고 적운, 적풍 쪽은 눈가에 그늘이 져있다.
그것은 아마도 적룡, 적호단은 네 용병단 중에서도 꽤 괜찮은 실력자들이 배치되는 곳이라 바로 하가장 본가 내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적운단은 최근에 만들어진 용병단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적풍단 쪽 낭인들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누가 억지로 똥을 떠먹여 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또 그렇게 중년 문사가 몇 명의 낭인들을 대충 가늠한 실력대로 나누어 보냈다.
“다음.”
척척척.
경쾌한 걸음으로 나서는 이는 공천록.
마르고 더운 날씨에도 피풍과 머리에 쓴 천을 결코 벗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천록입니다.”
공천록은 막 이름을 물으려는 중년 문사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해 버린다.
뭐 이런 자식이, 하는 눈으로 공천록을 쳐다보는 중년 문사. 그는 곧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입술을 움직이려 했다.
“대충 기억나는 숫자만 오륙백 정도 될 겁니다. 특기는 목 베기.”
“푸웁―!”
중년 문사는 뭘 잘못 먹은 사람처럼 사레가 들렸다. 그의 등을 퉁퉁 두들겨주는 나이든 무인. 그가 공천록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리 곱지는 않았다.
“장난하나?”
“장난 아닌데요.”
정말로 당당한 태도의 공천록을 보는 중년 문사의 벌게진 얼굴에는 황당함만이 가득했다.
“후우… 그래, 그래. 내세울 만한 공부가 있는가?”
이 부분에서 공천록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니까. 뭐, 자네가 이름 붙인 무공이라든가, 그 오륙백 명을 목 베면서 터득한 깨달음 같은 거 말이네.”
대놓고 공천록을 놀리는 그의 언사에 주변 낭인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공천록은 더욱 더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으음, 말하자면 형식을 갖춘 초식이라거나 오랜 시간, 정해진 호흡법을 통해 습득한 내기를 칭하는 명칭, 그것도 아니라면 ‘신병이기의 주인이 알고 보니 자네였다!’라는 좀 우리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를 알려달란 말일세.”
스윽.
공천록이 순간 몸을 굽혀 중년 문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척! 척!
하가장 무인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공천록의 멀뚱한 눈을 보노라면 그가 어떤 불의한 행위를 할 것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으… 사람을 죽이는데 형(形)이 필요합니까?”
“…….”
갑자기 중년 문사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자 여기에 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문사 옆에 있던 나이든 무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한낱 낭인에게 이 정도까지 많은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이요.”
“꿈?”
중년 문사는 또 저 소리냐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관심이 가는 지원자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던져보곤 했던 그였다. 몇몇은 현실적인 이유를 말했으나 상당수가 꿈과 이상을 언급하며 하가장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평소 하가장의 검이 되고 싶었다는 둥, 어릴 때 꿈이 당당히 인정받는 무인이었다는 둥.
“그럴 테지…….”
특이한 녀석이긴 하지만 결국은 너도 다른 낭인들과 똑같은 놈이군, 이라고 생각한 중년문사였다. 한데 갑자기 공천록이 다시 입을 연다.
“웬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흑호(黑虎)들이 절 여기까지 이끕디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아, 제가 좀 신령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제 꿈에는 아주 묘한 힘이 있어요. 저의 앞길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제가 몰랐던 저의 먼 과거들을 비추어줄 때도 있지요.”
“허허허. 허허허허!”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중년 문사였다.
“정말이라니까요.”
공천록은 그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표정을 한 채, 씩 웃을 뿐이었다.
“허허허, 그래, 그래. 알았다. 꿈이라 좋지. 네 신령스러운 꿈이 이곳을 가리켰다면 네게 어떤 놀라운 기적을 내려줄 수도 있겠구나.”
중년 문사가 붓을 들었다. 그리고 공천록의 이름을 쓰고 그 옆에 다시 몇 글자를 적는다.
“적풍단.”
“감사합니다.”
다른 낭인들이 적풍단에 배정받자마자 울상을 지었던 것과 달리 공천록은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자, 다음!”
공천록은 적풍단에 속하게 된 용병들 맨 뒤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앞에 선 이들이 자신을 힐끔거려도 그저 기분 좋은 얼굴로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기만 한다.
“자네도 여기구먼.”
공천록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이. 합비 도성 바깥에 위치한 반점에서 본 남자다.
안면을 비스듬히 지나간 상처로 인해 코와 입술이 일그러진 사내.
“예. 먼저 이쪽으로 서신 걸 봤어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면 별로 축하받고 싶지 않은 듯했다. ‘적풍’이란 두 글자가 그와 이곳에 줄 선 이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기에.
“유손이라고 하네.”
“공천록입니다.”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하는 두 사람이었다.
“흠, 쉽게 들을만한 이름은 아니군. 부모께서 지어주셨나?”
유손이 미간을 좁히며 묻는다.
“아뇨. 제가 지었어요. 꼭 기억하고픈 분들이 계셔서.”
“그렇구먼. 사연 없는 사람은 없지. 암.”
공천록은 고개를 끄덕이는 유손에게 이를 보이며 웃었다.
“휴우∼!”
“아이고, 벌써부터 땅이 다 꺼졌네요.”
유손의 한숨에 공천록이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다.
“천록이 자넨 아무런 말 못 들었나? 적풍단에 대해서.”
몇 명인가가 공천록과 유손을 돌아보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는 유손과 마찬가지로 반점에 있던 네 낭인 중 둘이 포함되어 있다.
“이름 좋네요. 전 바람을 좋아하죠. 후후훗.”
“문제는 이름만큼 거창하지 않은 데에 있다네. 나도 여기 와서 들었지만.”
유손은 이것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열이 들어와서 아홉이 죽는다 하더군. 적풍단에서.”
유손 대신 다른 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반점에서 적운단의 조장 양계와 대화했던 그 주름 자글자글한 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