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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동목재일세.”
“전.......”
“자네 이름은 이미 알았으니 되었고.”
“아, 예. 하하.”
공천록이 머리를 긁으며 무안한 척 하지만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원래 이 적풍단은 다른 용병단과 마찬가지로 합비 주변에 나타나는 육문연합 놈들을 때려잡거나, 가끔 다른 지역에 파견되어 그곳의 거점들을 지키고 또 수복하는 역할을 했었다고 해.”
“지금은 아닌가요?”
“언제부턴가 경험 많은 고참(古參)들도, 갓 들어온 새 친구들도 꾸역꾸역 죽어나갔다지. 저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현재 적풍단 소속 용병들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자가 고작 다섯 달 전에 들어온 이라고 하더군. 여기 속한 후로 석 달을 버티면 주연(酒筵)을 베푼다고 하니 말 다했지. 뭐, 일단 그러다보니 지금은 먼 곳으로 원정은 못가고 정찰이나 지원이 주된 일이라 하이.”
동목재가 공천록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소곤거렸다.
“그게 왜 그런가하니, 뜬금없이 용병대장 놀이를 하겠다는…….”
쿵!
갑자기 도관을 둘러싼 토벽에 난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몇 명의 사내들이 거침없이 들어온다.
무리들의 앞에 선 남자. 수염 하나 없는 젊은 얼굴에 매끈하고 잘생기기까지. 그가 걸치고 있는 황금빛 심의(深衣)는 그 용모와 어울려 무척이나 화려해 보인다.
뒤따르는 이들은 하가장의 상징인 붉은 무복을 입었지만 용병과는 거리가 있게 느껴지는 것이 하가장의 정통 무력 단체 소속임이 분명하다.
중년 문사는 그를 보더니 보일락 말락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젊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소(小)공자를 뵙습니다.”
그가 길게 읍하는 모습이 소공자라 불린 젊은 남자의 지위가 매우 높음을 대변해 주었다.
“어느 쪽? 아! 저기군.”
자신에게 예를 차리는 문사를 외면하고 두리번거리던 소공자는 이내 적풍단, 아니 곧 적풍단원이 될 용병들을 보고는 매우 반가워했다.
척! 척! 척!
영문을 모르는 용병들이 멍하니 그들을 지켜보는 사이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소공자.
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적풍단 쪽 용병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과연, 과연 멋진 남자들이로다. 저들과 함께라면 그 어딘들 못 가리.”
기이했다. 용병들은 저 순수해 보이는 눈과 마주치자 저절로 소름이 올라옴을 깨닫는다.
“흠, 너는.”
소공자의 시선이 공천록에게서 멈췄다.
“그 답답하고 더러운 피풍은 뭐고, 이 더운 날 머리에 둘둘 말은 그 썩을 천 쪼가리는 또 뭐지?”
아주 짧게나마, 코앞의 소공자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찰나, 공천록의 표정이 굳었다가 펴졌다.
“추억이죠.”
공천록이 소공자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간 그가 타인에게 지어주었던 기분 좋은 미소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런.
“추억? 너희 같은 낭인들도 추억을 말할 줄 아나?”
소공자를 따라온 무인들이 낮게 껄껄거렸다.
“넌 내가 누군지 알겠어?”
“높으신 분 아니겠습니까요.”
“정답이네.”
촤악!
소공자는 들고 있던 철선(鐵扇)을 소리 나게 털어 펼쳤다.
“곧 보자고.”
소공자와 무인들은 곧바로 몸을 돌려 도관 밖으로 나가버린다.
정말 ‘바람[風]’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들이 나간 지 한참이나 돼서야 적풍단 쪽 용병들 사이사이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봐, 천록이.”
“예.”
“저 인간이야.”
“아하!”
공천록이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 손바닥을 탁 쳤다.
“저 치가 놀이삼아 용병대장 짓을 한다는 그거, 맞죠?”
“그렇다네. 듣자하니 하가장의 대공자 하검보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더만. 저자가 적풍단 부단주를 맡고 나서부터 적풍단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지, 아마.”
왜 용병들이 적풍단에 배속되기 싫어하는지 대충 그 윤곽이 드러났다.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지. 자네도 낭인 생활을 쭉 했다면 알 것 아닌가.”
“그러게요.”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공천록의 눈동자는 여전히 소공자가 나간 도관의 입구 방향을 향해 있었다.
“자자! 다들 시끄럽고! 흠흠, 이름이 뭐라 했지?”
중년 문사가 웅성거리는 용병들의 주의를 환기시킨 뒤, 다시 앞에 선 용병에게 이름을 묻는다.

도관과 공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그 정상 부근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툭. 툭.
흙과 잔디가 섞인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부진 자세로 선 한 명의 무인이 보인다.
툭. 툭.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두들기던 남자의 행동이 멈췄다.
“마음에 안 들어.”
“…….”
“아, 저 철없는 조카 놈 말고.”
남자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 어둡기만 하다.
“삼공자께선 원래부터 용병 무인들을 별로라 하셨지요.”
이 목소리는 그다. 적운단 수라대 팔조장 양계.
“지금은 아니잖아. 나에게도, 하가장에도 큰 힘이 되어주는걸.”
잠깐 몸을 움직이자 그의 하얀 이와 아래턱이 햇빛에 드러났다.
“그냥 저들을 내세워야 하는 상황이 싫을 뿐이야.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버지 쪽이지. 이렇게까지 하는 그 속을 모르겠다니까.”
피식. 중년 무인이 웃었다.
“저 녀석인가?”
“예.”
남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공천록이 있었다.
“자네가 내게 와서 말할 정도면 뭐, 살짝 관심을 가져도 되겠지.”
“순간적이지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다.”
“…….”
“분위기 탓일까요. 아무튼 삼공자의 행사에 큰 힘이 될 놈임은 확실합니다.”
“헛소리.”
남자는 중년 무인을 말에 강하게 반발한다.
“어쨌거나 지켜는 보겠어. 자네 뜻대로 명보 형님에게 저 낭인 녀석을 적풍단에 보내도록 부탁했지만 기대는 하지 않아.”
용병단 배속을 담당하는 중년의 문사 하명보를 형님이라 부르는 이 남자의 정체는 무얼까.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너 또한 조심하도록.”
“예, 삼공자.”
휘이잉∼
어쩐지 불어오는 바람이 축축하게 느껴진다.

***


악몽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검은 바람이 지나가면 그 궤적을 따라 피 안개가 허공을 덮었다.
펄럭.
또 한 번, 저 검은 피풍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동료가 들었던 활이 가운데부터 박살이 나며 그 파편을 사방으로 뿌렸다.
끊어진 시위가 뱀처럼 춤을 출 때, 그 주인의 머리통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며 몇 차례 회전한다.
꿈이 맞네.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팔방에서 쏟아지는 철시를 어찌 저토록 가벼운 걸음으로 피한단 말인가. 아, 움직이지도 않았지?
저런 무예(武藝)는 열두 명의 두령(頭領)들도, 아니… 각주(閣主)조차도 불가능 할 터.
저 나약해 보이는 몸으로, 저 무구(無垢)한 얼굴로. 저리도 잔인하게, 저처럼 냉혹하게 인간을 조각낼 수 있을까.
핑핑 귀를 스쳐 지나가는 강력한 살마궁전(殺馬弓箭)도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흘려보내는 괴물. 녹살(綠殺) 명(明) 두령의 모든 것을 전수받은, 그의 장자(長子) 명혼야 전주가 쏜 회심의 한 수조차 파리 한 마리 내몰 듯,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괴물이 명 전주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하며 해맑게 웃었다.
검은, 아! 자세히 보니 지독하게 푸른 바람이 명 전주의 신형을 감싸고 지나갔다.
두둥실.
고통으로 잔뜩 찡그린 명혼야의 얼굴이 회전하는 접시처럼 눈앞을 스쳤다.
안면을 잃고 가만히 서 있던 명혼야의 몸도 곧 그 육신을 떠나버린 혼을 따라가려는 듯, 앞으로 손을 뻗었다.
픽. 쓰러지는 그의 뒤로 푸른 바람은 계속 불었다.
온천수가 분출하는 것처럼 머리를 잃은 목의 단면에서 뿜어지는 피.
이제 몇 명이나 남았지? 하나, 둘, 셋....... 정확히 스물아홉이 쓰러졌다. 자신을 포함하여.
무언가가 위를 덮쳤다. 방금 목을 베인 마지막 용린각(龍鱗閣)의 강궁사(强弓師). 이제 서른.
그의 시신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끝인가. 어쩐지 목 아래가 시원하다 했더니.

탁탁탁탁.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뛰는 소리다.
그 걸음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운 것이 전문적인 경공을 약간이나마 수련한 이들이 틀림없었다.
입은 복장은 조금씩 달랐으나 오른쪽 어깨와 겨드랑이를 둘러 묶은 붉은색 천에 검은 실로 풍(風)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콰앙!
나무 문이 박살나고 입구를 거쳐 수십 명의 칼 든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멈칫.
잠시간의 침묵. 적풍단 불멸대 십사조의 무인들은 눈앞의 참상에 할 말을 잃었다.
복운이라는 북무림 출신의 용병은 머리통에 네 발의 철시가 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영남이 고향인 배진동은 하체가 아예 사라졌고, 남은 상체에도 여러 발의 철시가 관통한 상태.
목이 잘린 자들도 수두룩했고 둔기에 맞아 뇌를 줄줄 흘리는 남언, 가슴이 터져 심장이 반쯤 튀어나온 황포, 자신의 뜯겨진 팔, 다리를 안은 채 절명한 왕자개 등등.
불과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밥을 나눠먹던 동료들이었다.
적풍단 부단주의 명령으로 수색을 나섰던 불멸대 십칠조. 그들 중 태반이 이 버려진 객잔 바닥에서 차갑게 식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다.
으드득.
십사조원들이 이를 갈았다.
“이럴 줄 알았어. 니미럴.”
거친 음성으로 누군가가 욕을 뱉었다.
시신에 다가가 뽁! 철시를 뽑는 십사조 조장 위번창. 그가 이 검은 화살을 자세히 살폈다.
“용린각이다. 강궁사들이로군.”
용린각. 그리고 강궁사.
이 두 단어에 십사조원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갈수록 태산이네, 썩을 거. 재수 없게 용린각에다가 하필이면 강궁사 놈들이라니!”
육문 중 용린각의 악명은 용병단들뿐만 아니라, 하가장 본가의 정예고수들도 치를 떨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강궁사들은 잔인하기로도 유명했다.
“조장.”
“말해라.”
“여기 십칠조 녀석들… 세어보니 스물이 답니다.”
“스물? 나머지 넷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조원을 보며 위번창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흔적을 찾아. 어쩌면 살아 있을 수도 있다. 빌어먹을 용마(龍魔) 새끼들에게 쫒기고 있을 가능성이 커.”
“예!”
조장을 포함해 스물네 명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여기!”
여섯 명씩 묶어 여덟 방향으로 흔적을 찾던 중 한 조원이 뭔가를 발견했다.
“여기도!”
다른 쪽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긴 맥도에 심장이 꿰뚫린 검의 복장의 남자. 가슴과 등에 금색으로 용이 그려진, 용린각의 강궁사였다.
“막 조장이 세 명을 끌고 탈출했나보군.”
“위 조장님!”
위번창은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자신을 부른 조원을 돌아보았다.
뚝. 뚝.
조원의 손에 들린 머리. 십칠조장 막훈이었다.
“젠장할. 빌어먹을.”
무력으로는 불멸대 조장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였다. 그의 머리가 굴러다닐 정도라면 나머지 셋의 생사는 안 봐도 뻔하다.
“돌아갑니까.”
“아니. 보아하니 이곳엔 더 이상 적은 없는 듯하다. 남은 셋의 시신이라도 찾아 거두어야 해.”
다른 용병단보다 동료애가 유난히 끈끈한 적풍단이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부단주’라는 인간 때문이었지만.
“흩어져. 한 시진 안에 수색을 끝낸다. 날이 밝으면 놈들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자자! 뭐하나, 다들 움직여! 가! 가라고!”

턱. 턱.
여섯 명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발목을 스치는 풀이 미약한 소리를 만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턱.
조금 전, 두 명의 시신을 더 찾았다.
둘 모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역시 회남 사파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용린각다운 솜씨였다.
이제 남은 자는 한 명.
“자네들은 혹시 보았는가?”
무거운 분위가 가운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무얼.”
“죽은 십칠조 동지들 중에 그 녀석이 있었는지…….”
그 녀석이라는 말에 다들 내디디던 걸음을 멈췄다.
“몰라. 내가 확인했던 얼굴 멀쩡히 죽은 놈들 중에는 없었다. 아마 다른 시신들 속에 섞여 있을 게야.”
“그렇겠지?”
“없었어.”
“…….”
누군가의 한 마디에 또다시 기이한 침묵이 찾아왔다.
“혹시나 하고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봤었어. 얼굴이 쪼개진 녀석은 붙여서도 보고, 안면이 갈려나간 녀석은 남은 부분으로 확인했지. 그래도 몰라서 피를 닦아가며 최대한 확인해봤어. 막 조장 빼고 스물두 명 중에는 없었다.”
“확실해?”
“그래.”
동료의 확신에 찬 음성을 들은 십사조원 홍로대는 확 올라온 소름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설마…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