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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아닐 거야. 녀석이 아무리 저주받은 사신(死神)이라지만 이번 상대는 강궁사라고 강궁사. 용린십이두령 내에서도 잔혹하기로 이름난 녹살. 그의 친위대야. 놈들에게 걸려서 살아남은 용병은 아직까지 없었어.”
이들의 대화는 마지막 십칠조원이 마치 죽은 채 발견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린다.
쉬이잉∼
목까지 올라온 닭살에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른 십칠조원 문총은 불어온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해 뜨기 전에 대충 돌아보고 가세. 재수 없으면 우리도 철시의 먹이가 될지도 모르니.”
모두가 무언으로 동의했다.
턱. 턱.
“쉿!”
동시에 여섯이 엎드렸다.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려 옆의 동료를 쳐다보는 홍로대.
그가 눈빛으로 ‘들었어?’ 하고 묻자 동료는 눈을 두 번 깜박임으로 그렇다고 답한다.

스윽. 스윽. 턱. 턱.
부스럭. 퉁퉁퉁.

자연이 만들어낸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여섯 용병들의 이마에 삐질 땀이 솟았다.
설마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나. 일부러 자리를 비운 척, 다음 먹잇감을 유인했음이 분명했다.
이들 중에는 예전에 사파 쪽 녹(祿)을 먹었던 이도 있다. 그는 사파가 오히려 정파보다 단순했으면 단순했지 이토록 치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함을 쳐 다른 조원들에게 적들의 함정이라고 알려야 할까. 그렇게 하면 물론 자신들은 다 죽은 목숨이긴 하다. 어차피 순서의 차이겠지만.
허리에 걸린 칼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텅텅텅. 쓰윽, 쓰으윽.
터벅, 터벅.

더욱 가까워진 미지의 존재. 이 괴상한 소리가 여섯 용병의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했다.
턱.
문총은 입 밖으로 쌍욕이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놈이, 아니 놈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발각된 걸까.
스스스스스.
바람에 스친 풀들이 요동치며 신경을 분산시킨다.
부르르.
허벅다리 안쪽이 격하게 떨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심장이 터지고 몸이 제멋대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에라이!”
여종이라는 용병이 고함을 지르며 먼저 일어났다. 그는 기척이 멈춘 곳을 향해 제비처럼 날아가 뽑아든 칼을 가로로 그었다.
스으읏. 채애앵!
순간 불꽃이 확 일어났다. 상대가 맞받아친 단순한 수법에 여종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크윽.”
뒤로 쭉 밀리는 여종. 그의 칼에 발생한 엄청난 진동은 손을 타고 어깨까지 전해져 뼈 하나하나를 흔들어 댔다.
“썅! 모르겠다.”
나머지 다섯이 벌떡 일어섰다. 여종을 향한 후속 공격이 바로 이어지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상대는 한 명이다. 해볼 만한 싸움임을 깨달은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쩡― 쩡― 쩡― 쩡―
위이잉―
공기를 타고 상대의 병기에서 격한 음파가 퍼졌다. 방금 여종의 공격을 후려친 그 자세 그대로 미지의 적은 더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을 뒤로 두고 거멓게 그림자 진 ‘적’의 신형이 보였다.
십사조원들은 왠지 모를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혔다.
살짝 숙인 머리. 오른쪽으로 쭉 뻗은 팔. 그 손끝에 쥔 짧고 면이 넓은 도(刀).
그림자 속에서 하얀 빛 두 개가 천천히 커지며 이쪽을 바라본다.
꿀꺽.
누군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나마 이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반응.
“뭐야, 이런 환영은.”
환영(歡迎)? 누가, 누구를?
이 목소리는.......
“너, 넌?”
스윽.
그제야 상대가 몸을 풀고 이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어둡지만 달빛은 그의 면면을 확연하게 드러내 주었다.
더벅머리를 완전히 감추어 묶은 천.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피풍. 그 안에 받쳐 입은 푸른 호복. 그리고 아직도 선혈이 흘러내리는 괴상한 채도(菜刀).
“공…천록?”
“아, 그쪽은 어디지? 몇 조야?”
늘 그래왔듯 티 없이 맑고 청량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공천록이 맞다.
“정말로 그 녀석인가.”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리는 홍로대였다.
“에? 그런 눈은 또 왜.”
터벅, 터벅. 공천록이 이들을 향해 걸어왔다.
통, 통. 그의 발밑에서 뭔가가 땅에 튕기며 예의 그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너 진짜 사람이냐? 귀, 귀신인가? 젠장.”
“아, 시끄럽고. 보니까 십사조로구먼. 어이, 문총. 나 기억하지?”
공천록과 문총은 잠깐 같은 조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 얼마 안 가서 공천록이 다른 조로 가버리는 바람에 공천록의 별명인 ‘사신’의 저주에서 피해갈 수 있었지만.
문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다들 마찬가지.
퉁퉁거리던 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수급이었다. 그것도 무려 다섯. 줄로 묶어 맨땅에 질질 끌고 오느라 저들끼리 부딪치고 또 가끔씩 단단한 돌에 걸려 튕겨지면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 다른 줄에는, 머리는 붙어 있는데 얼굴 부위가 깨끗하게 떨어진 시신이 발목을 꿰인 채로 너덜거리고 있었다. 이 시신은 아직 피가 다 빠지지 않은 듯, 졸졸 빨갛고 작은 시내를 뒤로 흘린다.
“아, 이거?”
공천록이 씩 웃으며 줄을 잡아 당겨 흔들거리는 수급들을 여섯 앞으로 내밀었다.
피범벅이 되었지만 꽤 편안한 표정의 얼굴들.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나마 확인 가능한 걸로 잘라왔지.”
“이놈들이 설마 그 용린각의 강궁사들인가?”
문총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시체와 수급을 보아왔지만 지금처럼 우울하고 으스스한 감정을 처음 느껴본다. 분명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모르겠고. 조장의 명령에 따라 탈출하는 중에 나한테 걸린 놈들이야.”
공천록은 결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날 십칠조를 몰살시킨 강궁사들은 그들 또한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저 상판대기 없는 녀석은…….”
가만 보니 복장이 조금 특이했다. 일반적인 강궁사들의 무복과 달리 녹색 바탕의 무복 가슴 어름에 소일살(少一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다른 놈들보다 더 재수가 없길래 통째로 가져왔어. 칵! 그냥 토막을 쳐버리려고. 이봐, 좀 받아줘.”
턱.
손목에 걸었던 줄 몇 가닥을 풀어 여종에게 맡기는 공천록.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도 없고 그저 특이하기만 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쪽이지? 너희 조. 깜깜하니 이거야 원, 방향 잡기가 어려워서.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가.”
아니나 다를까. 공천록의 목 근처에 난 기다란 상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렀고 그의 손가락을 타고 뚝뚝뚝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이 ‘사신’ 또한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듯.
홍로대가 말없이 검지를 들어 처음 그들이 십칠조의 시신 무더기를 발견했던 폐객잔 쪽을 가리켰다.
그를 향해 밝게 웃어준 공천록이 비틀비틀 얼굴 없는 시체를 끌고 나아갔다.
잠시 후, 공천록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여섯 사이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사신이 씌었어, 사신이. 동지의 피를 빨아먹는 사신.”
누가 중얼거렸는지는 모르지만 나머지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저 유쾌한 녀석이 존재했던 공간에는.
그 자신을 제외하고 내일을 기약했던 자가 단 하나도 없었다. 적도. 아군도.

***


합비의 내성 동문 쪽으로 한참을 나가면 외성에 이르기 전에 큰 장원이 하나 있다.
반경이 대략 백여 장에 이르고 삼십 채의 건물에 총 백팔십 칸의 방이 들어선, 보기 드물 정도로 큰 규모다.
이 장원은 당연하게도 하가장의 소유였다.
오래 전에는 남룡천 북벌병단의 전진기지로 쓰였고, 더 이전에는 합비를 관할하는 번진의 병력이 주둔하는 군영지였다.
현재 이 장원은 하가장 적풍단 불멸대가 머무는 곳으로서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야심한 밤.
대부분의 건물들이 어둠에 잠겨 있는 동안, 가운데 위치한 삼층 전각 중앙의 밀실에만 붉은 등이 밝혀진 채 가만히 흔들린다.
삐걱, 삐걱.
누군가가 이 열기에 휩싸인 밀실 쪽으로 다가왔다.
그 기척을 느낀 방의 주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침상에 걸터앉는다.
삐걱, 삐걱. 뚝.
잠시간 침묵이 돌았다.
“들어와.”
주인이 입실을 허락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렴 밖에 섰던 남자가 슥 몸을 들이민다.
수염을 멋있게 기른 키 크고 마른 중년의 무인.
그의 눈에 서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이 시간에, 내 즐거움을 방해할 정도의 일인가?”
차분하고 젊은 목소리.
옷매무새를 아직 가다듬지 않아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청년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반질반질한 턱. 약간 사기(邪氣)마저 느껴지는 검은 눈.
적풍단의 부단주이자 불멸대의 대주, 또한 하가장 대공자의 차남이기도 한 하경진이다.
“소이(二)공자님을 뵙습니다.”
깊이 읍하며 하경진에게 예를 차리는 남자는 그의 심복인 방계 출신 하승양이란 자다.
“어서 말해. 조금 짜증나기 시작했으니까.”
“그 녀석이 또 살아 돌아왔습니다.”
순간 하경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오, 또?”
“예.”
“하하하하!”
짝짝짝!
박수를 치며 웃는 하경진. 그가 기뻐서 그러는지 기가 막혀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재미있어, 정말 재미있는 일이야. 안 그런가?”
“…….”
“벌써 몇 번째지? 한 아홉 번 정도 되었나?”
하경진은 기이한 열기를 뿜으며 신나했다.
“처음엔 그냥… 뭐라 말해야 할까. 음. 그 금화 년 친오래비처럼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었어. 다른 낭인 놈들 같이 좀 나긋나긋하게 고분거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고 꽤 오만한 면상으로 날 대하더군. 자네도 봤지?”
“…예.”
하승양은 방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도망치듯 방을 나간 기녀의 이름이 금화였음을 떠올리곤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놈이 내 머릿속에서 잊히려던 차에, 그날의 전투가 있었던 거야.”
“큰 싸움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지. 우리가 이겨서는 아니 되는 싸움이었는데… 그놈이 딱! 빌어먹을.”
갑자기 하경진이 이를 갈았다. 대체 이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경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더웠던 날의 전투를 떠올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하경진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승양의 인상이 살짝 구겨진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화아아악.
눈을 뜨자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머리통들이 우글우글거리는 광경이 들어왔다.
“후우, 후우.”
귀를 간질이는 어떤 이의 숨소리. 거칠다. 듣기만 해도 극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런.
하경진은 옆에 선 초로의 노인이 내뿜는 숨이 불쾌한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가 본 수많은 이들은 바로 적풍단(赤風團). 하가장 삼대 용병단의 하나인 적풍단 불멸대 용병들이었다.
충혈된 눈을 부릅뜬 삼백의 무인들. 그들 대다수는 벌게진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문 채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으나, 일부는 이를 딱딱거리며 식은땀마저 흘린다.
안 봐도 빤하다는 듯, 하경진은 자신들의 ‘충실한’ 수하들인 불멸대 무인들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멀리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하경진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불멸대원들 맨 앞줄 너머로 여러 필의 말들이 질주하는 광경이 보였다. 기수(騎手)들의 등에 꽂힌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다. 이들은 적호단과 하가장 본가의 무인들이 섞인 기마부대원들이다.
“쓸데없는 짓을.”
하경진은 그들이 무리해서 말을 달리는 이유를 잘 안다. 지금 소리치고 있는 ‘적’의 목소리가 이쪽 무인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눈을 좁혀 멀리 아지랑이 속 무리들을 쳐다보았다.
한결같이 붉은 말[馬]. 그 수는 거의 일백에 달했다. 당연하게도 말 위에는 전신갑주를 걸치고 긴 창을 꼬나 쥔, 마치 군문의 중장기병을 연상케 하는 무인들이 앉아 있다.
그들의 뒤로 또 일백이 넘는 자들이 칼과 둔기를 들고 서 있었는데, 그 복장이 모두 하얗다.
햇살에 번쩍거리는 날카로운 병기와 말들이 내뿜는 숨결이 그들의 존재를 더더욱 부각시켰다.
이쪽을 향해 외치는 자는 흰 옷 무리들의 수장인 듯했다. 그 또한 말에 올라 백설처럼 하얀 옷깃을 펄럭이며 마치 책을 읽는 말투로 고함을 쳐 댄다.
이곳은 합비에서 약 백 리 정도 거리의, 비교적 가깝다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가도 가도 요철(凹凸)이 없다는 회남 땅의 특성상 드넓은 평지만이 펼쳐진, 다시 말해 강호 무인들의 전투가 벌어지기에는 최적의 공간이다.
그 한쪽에는 붉은 띠를 두른 하가장 삼백 용병이 진을 치고 대기 중이었으며, 반대쪽에는 총 이백의 홍마군, 백천당 연합 세력이 자리했다.
근 한 달가량 육문과 하가장 사이에 대규모 접전은 없었다. 그러던 차, 어떤 이유로 다시금 전운이 감돌았고, 곧 두 방향에서 육문의 무사들이 합비를 향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 한 축의 적들과 적호, 적풍단의 용병들이 평원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