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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천명이로다! 의기로 뭉친 여섯 형제들은! 앞에선 정의를 내세워 안정을 도모코자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 아래, 뒤에선 강호의 도를 어지럽히고 제 살길을 위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추악한 하씨들의 악행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는바! 오늘에 이르러 진정한 정의를 이루기 위해 책을 버리고, 호미를 버리고, 가족마저 버리고 왔나니, 적도의 검에 고혼이 된다하여도 기쁘게 생을 끊을 것이요, 당당하게 가슴을 열 것이로다!”
상대의 말에 집중하자 그 내용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보라! 저들을! 하씨의 수괴와 그 주구들은 이 순간마저 주지육림에 빠져 밝음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도다. 저 불우한 이들이 무슨 잘못인가! 저들은 정의도 아니요, 그렇다고 악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파란 피가 흐르는 하씨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백천(白天)의 검이, 홍마(紅馬)의 창이 왜 불우한 낭인들의 피를 갈구해야만 하는가! 이 모든 것이 파렴치한 하씨들 때문이다.”
이쯤에서 하경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주지육림에 빠진 것은 맞지만 대낮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서라! 제 길을 찾지 못한 낭인들 뒤에 숨은 너! 인면수심의 하가 놈들아!”
백천당은 오(吳)나라 명신 주유(周瑜)의 고향이었던 서현(舒縣)에서 발원한 문파다.
그 역사는 매우 길었으나 무가(武家)로서의 위신이 약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하나, 지난 강호백년내전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외부 인사를 영입해 그 무력 또한 상당히 발전했다고 한다.
또한 뼛속까지 정파임을 자부했던 문파이기도 했다. 지금 전투에 앞서 연설을 행하는 이의 저 고리타분함은 아마도 거기서 연유했을 터.
붉은 말의 철갑군단 홍마군은 과거에 군문에서 나온 자들이 그 시초라 하였다. 더 깊은 사정은 따로 있지만 이 정도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바다.
백년내전 당시에는 그 존재감조차 없었으나, 현재는 상업과 물류 수송을 바탕으로 문파의 세력을 크게 불렸다고 한다. 홍마군 역시 정파를 표방하는 자들로서 홍마군 내부에는 현역 번진(藩鎭)의 장수들도 꽤 많이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나서라 비겁자들아!”
“와아아아아!”
“차아아아!”
이히히힝∼!
이백 명 육문 무사들의 웅혼(雄渾)한 함성이 대지를 울렸다.
하가장 용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쪽이 머릿수는 더 많았으나 이런 대규모 전투는, 특히 강호의 싸움은 숫자로 나는 승부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무력에서 분명 저들이 우위에 있다. 상대는 각 세력의 정통파들이었고 자신들은 고용된 낭인들. 강하다면 굳이 낭인이 될 필요가 없다.
이런 불안감은 새로이 적풍단에 배속된 이들이 더할 터였다.
“출(出)!”
펄럭!
적호단의 간부가 외치자 그의 키만큼 큰 깃발이 휘둘러졌다.
다그닥, 다그닥.
뒤쪽에 대기하던 말 탄 무사들이 먼저 달렸다. 그들은 각 스무 명씩 두 무리로 나뉘어 좌우로 크게 원을 그리며 나갔다. 아까 말을 거칠게 달리던 적호단과 하가의 고수들. 그나마 무림 문파인 하가장에서 전문적으로 근접 기마전술을 익힌 자들이다.
뿌우우웅―!
멀리 홍마군 측에서도 이에 답하듯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구오오오오오!
일백 홍마군 기병대가 내지르는 고함이 마치 산을 잘라먹고 올라온 붕조(鵬鳥)의 울음소리 같았다.
드드드드드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며 지축이 요동쳤다. 중무장한 철갑기마대의 위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꿀꺽.
하경진 옆의 노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왜, 걱정되오?”
하경진이 경멸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노인, 적호단 단주 대리인 총감 만석총이 땀을 닦는다.
펄럭, 펄럭.
깃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가진 신호였다.
“들어!”
적풍단 무인들이 땅바닥에서 뭔가를 집어 올렸다.
약 이 장 길이를 가진 뾰족한 말뚝이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말을 탄 강호의 고수를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단은 최선의 선택이다.
척척척척.
조장의 구령에 맞춰 적풍단의 각 조가 이동을 시작했다.
적호단은 제자리에 대기한 채 활에 살을 걸어 시위를 당긴다.
“대기해! 대기!”
적호단 조장들이 악을 질렀다.
드드드드.
땅의 울림이 점점 커졌다.
홍마군은 적호단 기마무사를 맞이하기 위해 좌우로 이십 기씩을 보냈다. 나머지 육십 기는 곧장 정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적풍단 용병들이 있었다.
챙, 채앵!
가가각! 퍼걱!
“으악!”
먼저 격돌한 우측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거침없이 달리던 적호단 무인의 가슴을 뚫고 홍마군의 창이 삐져나왔다.
말들이 부딪쳐 위의 기수들이 앞으로 튕겨져 날아가고 그 위를 다른 말들이 밟고 지나간다.
적의 둔기에 맞은 충격으로 몸의 절반이 터져 버린 적호단 기수의 시신이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긴 혈흔을 그렸고, 그 위로 목이 잘린 홍마군 중장기가 또 굴렀다.
“얍!”
하가장 본가의 고수가 휘두른 대검에 말의 목과 홍마군 무인의 허리가 동시에 끊어졌다. 실로 엄청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릴 시간 동안 적아(敵我) 통틀어 칠팔 명 정도가 시체로 변해 쓰러졌다.
히히히힝!
따그닥, 따그닥!
우측 전장은 순식간에 먼지에 휩싸였다.
졸졸졸졸.
하경진의 귀에는 어느 젊고 겁 많은 낭인 나부랭이가 오줌을 지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들 경험이 많다고, 또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던 낭인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어지간한 낭인들이 어디서 이런 전투를 겪어보았겠는가.
좌측 전장은 우측과 달리 곧바로 격돌하지 않고 서로 거리를 두고 빙빙 말을 달리며 공격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저러다 곧 맞붙어 서로에게 칼질을 해댈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적호단 궁수대를 지휘하는 대주의 손목을 타고 땀이 떨어졌다.
드드드드드드.
이제는 홍마군의 모습이 두 눈에 선명하게 들어올 정도의 거리다.
“됐어… 됐어… 좋아! 쏴!”
그가 발사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오십여 발의 화살이 홍마군을 향해 날아갔다.
슈우우우―
화살에 내력을 실어 날릴 수 있는 훈련을 소화한 적호단 궁수대였다.
일반적인 군문의 그것과는 당연하게도 비교불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들은 순간 소낙비처럼 홍마군 무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큭!”
“끄억!”
팅! 티잉!
대여섯 기가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하지만 대부분 갑주로 화살을 방어해 내며 질주를 계속했다.
“적풍단, 전진.”
하경진이 낮은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아직 궁수대에게 활을 쏠 여력이 있었음에도 하경진은 곧장 전투에 돌입하라 지시한 것이다.
휙! 휙!
깃발을 보고 각조의 지휘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친다.
“적풍단, 전지이인!”
척척척척.
“대기!”
약 십 보 정도 전진했을 때, 다시 적풍단 전체가 멈췄다.
두두두두두두두!
누런 흙먼지가 거대한 해일처럼 다가왔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적풍단 전열에 배치된 조 전원이 무릎 자세로 몸을 낮추었다.
이제는 홍마군들 하나하나의 표정까지 보일 거리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하경진은 언덕에 세워진 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신다.
“거기까진 좋았지. 육문 쪽 녀석들은 수는 적어도 이쪽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졌으니까.”
하경진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계획대로 잘 진행된다고 생각한 게 전혀 잘못된 건 아니잖아?”
“맞습니다. 공자.”
“제기랄.......”
하경진이 또 욕을 지껄였다.
드드드드드드드드!
강력한 말발굽과 긴 창, 철갑을 두른 말의 무게에 달려오는 힘까지 더한 충격이 적풍단을 육편으로 만드는 데까지 다섯 숨도 안 남았다.
다들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인해 그 숨마저 막혀버린 이 순간.
각 조장들이 그들의 병기를 뽑으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세워!”
파파팟!
말뚝이 말의 가슴 높이까지 비스듬하게 세워짐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과 비명, 지면이 뒤집어지는 듯한 진동과 함께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먼지가 적풍단을 덮쳤다.
쾅! 콰아앙!
푸욱! 빠가각!
이히히힝! 와드드득!
“커어억!”
“흐억!”
말뚝이 부러지고 말들이 넘어갔다. 손아귀가 찢어진 조원이 비명을 지르자 그의 위로 홍마군 기수가 낙마한다.
쭉 내뻗은 적의 창끝이 적풍단 무인의 이마를 뚫고 들어가며 아예 그 모가지마저 뽑아버리고, 꼬치처럼 말뚝에 꿰인 말의 주인은 붕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며 목이 부러진다.
이미 적풍단 전열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말들이 놀라 날뛰며 적풍단원들을 밟아댔고, 낙마한 홍마군 무인들은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한 듯 결사적으로 창칼을 휘둘렀다.
“삼십. 나머지는 먼지구름 뒤에 숨었군.”
하경진의 말대로였다.
기병 돌격을 실제로 감행한 적은 삼십 기였다. 남은 절반은 속도를 줄이고 또 반으로 나뉘어 좌우의 전장으로 돌입했다.
겨우 삼십 기로도 벌써 적풍단 삼십여 명이 죽고 십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삼십 홍마군 무인들은 열 명이 첫 격돌에서 즉사하고 나머지는 아직 살아 날뛰는 중이었다.
대비를 했음에도 이랬다. 아직 부족한 적풍단을 전열에 세운 이는 다름 아닌 하경진 부단주.
아마도 지금쯤 용병들은 하경진을 크게 원망하고 있을 터였다.
적풍단을 뒤집었던 홍마군 무인들은 조장급들이 투입되고 나서야 모조리 척살되었다.
이때까지 입은 피해는 무려 칠십여. 앞서 홍마군 중장기들과 붙었던 적호단 기수들이 전멸했다고 가정한다면 총 백이 넘는 아군들이 차 한 잔이 식을 만큼의 시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방에 펼쳐진 누런 먼지 바깥에서 말들이 달리는 소리와 무인들의 함성이 교차되어 이쪽으로 전해져 온다.
“정비! 대열을 정비하라!”
뜨거운 가슴을 담아 외치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차갑게 들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강호의 싸움이다. 각자 배운 바 무력을 총동원하여 단병접전을 펼쳐야 하는.
검기(劍氣)나 강기(剛氣)가 난무하는 초고수들의 대결이 아닌 바에야 근접하여 피를 뿌리는 전투는 강호무인들에겐 숙명이었다.
“다친 녀석들은 일단 뒤로 빠지고 멀쩡한 놈들은 알아서 벽을 세워라!”
하경진은 적풍단 근처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소리치는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에 경험 많은 무인들부터 먼저 나서서 앞 열을 가다듬었고, 난장판이 되었던 적풍단의 전열이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그가 바라보는 무인의 이름은 하소양. 불멸대 한 개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방계였다.
평소 하경진을 대하는 태도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 게다가 그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때문에 언젠가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죽이리라 마음먹은 지 오래다.
다그닥, 다그닥.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타난 광경은 처참했다.
몰살당한 적호단 기수들과 하가 고수들의 머리통들이 홍마군의 창에 꽂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들은 적호단의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이쪽을 도발했다.
아직 전력이 온전한 백천당의 일백 무사들은 그들 수장의 뒤에서 조용히 기를 발산한다.
“어쩌실 겁니까.”
어느새 언덕까지 올라온 하소양이 하경진에게 물었다.
“이대로 대치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긴 합니다만.”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몇 명의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경진을 바라보았다.
“곧 날이 저물겠지요. 우린 아직 적들의 진짜 전력을 파악하지도 못했습니다.”
“시끄럽소.”
하경진이 단박에 이들의 말을 끊는다.
“적호단의 생각은 어떠시오?”
총감 만석총은 잠시 생각하다 하소양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하소양 조장의 의견도 일리는 있습니다. 먼저 공세를 감행한 측에서 오히려 시간을 끄는 모양새가 아닙니까. 어쩌면 어두워지길 기다려 계략을 꾸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합비 쪽으로 빠지잔 말씀? 그러면 본가의 정예들이 달려와 줄 테니 말이오.”
하경진의 어투에는 상당한 불쾌감이 나타나있다.
“애초에 본가 무인들이 나섰더라면…….”
만석총이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만. 거기까지.”
하경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잘라 버린다.
“가주이신 할아버님의 큰 뜻이외다. 본가는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으니 이런 작은 전투 따위는 용병단의 일이오. 일종의 시험 같은 것이란 말이지. 어쨌거나 적호단 백, 적풍단 백, 도합 이백이 아직 생생하지 않소. 여전히 저 빌어먹을 육문 놈들보다 머릿수에서 앞서오.”
뿌득.
하소양이 이를 가는 소리에도 하경진은 그를 굳이 외면했다.
“적풍단이 앞을 막고 적호단이 뒤를 따른다. 화살이 닿을만한 거리까지 진군해서 놈들을 공격한다면 저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소?”
오히려 이쪽이 가만히 있거나 물러선다면 유리해지는 싸움이었다. 한데 하경진은 공격할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다.
“갑시다, 가. 천하의 하가장이 고작 졸자(拙者)들을 앞에 두고 물러났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보다 더한 망신이 어디 있을까, 쯧쯧.”
이제야 하경진의 눈이 하소양의 안면을 향했다.
너 정도 주제에? 라는 눈빛으로 하소양을 오시하는 하경진. 하소양도 지지 않고 하경진을 쏘아보았다.
“우우우우―!”
백천당 무인 백여 명이 내짖는 외침 하나, 하나가 모여 거대한 음파를 형성했다.
조금씩 전진하던 적풍단원들은 고막이 파르르 떨리는 아픔에 인상을 구겼지만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태양이 벌겋게 변해갈 무렵.
짧았던 대치가 끝나고 다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첫 싸움에서 도합 오십여 기를 잃은 홍마군은 더 이상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백천당 무인들 주변을 달리며 함께 기세를 올렸다.
휙! 휙!
백천당 무인들이 휘두르는 병기 주변으로 퍼런빛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일부러 검기를 보여줌으로써 낭인 용병들의 기를 죽이고자 하는 심산이 분명했다.
삐이익―!
호각(號角)이 비명을 질렀다.
“가! 가! 달리란 말이다!”
“할 수 있어! 모조리 숨구멍을 끊어버려!”
무리에 섞여 있던 조장들이 독전(督戰)하며 기운을 일으킨다.
“우와와와아!”
너 나 할 것 없이 병기를 높이 들고 소리쳤다.
뚜두두둑.
적호단 궁수들은 활이 부러져라 시위를 당겼다.
“돌겨어억!”
네댓 명의 조장들이 먼저 뛰었다. 이미 전장의 냄새에 취해 버린 자들이다. 그리고 그 냄새는 순식간에 적풍단에 퍼졌다.
구십여 명의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백천당 진영으로 달렸다.
“…천명이로다! 의기로 뭉친 여섯 형제들은! 앞에선 정의를 내세워 안정을 도모코자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 아래, 뒤에선 강호의 도를 어지럽히고 제 살길을 위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추악한 하씨들의 악행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는바! 오늘에 이르러 진정한 정의를 이루기 위해 책을 버리고, 호미를 버리고, 가족마저 버리고 왔나니, 적도의 검에 고혼이 된다하여도 기쁘게 생을 끊을 것이요, 당당하게 가슴을 열 것이로다!”
상대의 말에 집중하자 그 내용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보라! 저들을! 하씨의 수괴와 그 주구들은 이 순간마저 주지육림에 빠져 밝음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도다. 저 불우한 이들이 무슨 잘못인가! 저들은 정의도 아니요, 그렇다고 악도 아니건만 어찌하여 파란 피가 흐르는 하씨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백천(白天)의 검이, 홍마(紅馬)의 창이 왜 불우한 낭인들의 피를 갈구해야만 하는가! 이 모든 것이 파렴치한 하씨들 때문이다.”
이쯤에서 하경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주지육림에 빠진 것은 맞지만 대낮에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서라! 제 길을 찾지 못한 낭인들 뒤에 숨은 너! 인면수심의 하가 놈들아!”
백천당은 오(吳)나라 명신 주유(周瑜)의 고향이었던 서현(舒縣)에서 발원한 문파다.
그 역사는 매우 길었으나 무가(武家)로서의 위신이 약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하나, 지난 강호백년내전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외부 인사를 영입해 그 무력 또한 상당히 발전했다고 한다.
또한 뼛속까지 정파임을 자부했던 문파이기도 했다. 지금 전투에 앞서 연설을 행하는 이의 저 고리타분함은 아마도 거기서 연유했을 터.
붉은 말의 철갑군단 홍마군은 과거에 군문에서 나온 자들이 그 시초라 하였다. 더 깊은 사정은 따로 있지만 이 정도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바다.
백년내전 당시에는 그 존재감조차 없었으나, 현재는 상업과 물류 수송을 바탕으로 문파의 세력을 크게 불렸다고 한다. 홍마군 역시 정파를 표방하는 자들로서 홍마군 내부에는 현역 번진(藩鎭)의 장수들도 꽤 많이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나서라 비겁자들아!”
“와아아아아!”
“차아아아!”
이히히힝∼!
이백 명 육문 무사들의 웅혼(雄渾)한 함성이 대지를 울렸다.
하가장 용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쪽이 머릿수는 더 많았으나 이런 대규모 전투는, 특히 강호의 싸움은 숫자로 나는 승부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무력에서 분명 저들이 우위에 있다. 상대는 각 세력의 정통파들이었고 자신들은 고용된 낭인들. 강하다면 굳이 낭인이 될 필요가 없다.
이런 불안감은 새로이 적풍단에 배속된 이들이 더할 터였다.
“출(出)!”
펄럭!
적호단의 간부가 외치자 그의 키만큼 큰 깃발이 휘둘러졌다.
다그닥, 다그닥.
뒤쪽에 대기하던 말 탄 무사들이 먼저 달렸다. 그들은 각 스무 명씩 두 무리로 나뉘어 좌우로 크게 원을 그리며 나갔다. 아까 말을 거칠게 달리던 적호단과 하가의 고수들. 그나마 무림 문파인 하가장에서 전문적으로 근접 기마전술을 익힌 자들이다.
뿌우우웅―!
멀리 홍마군 측에서도 이에 답하듯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구오오오오오!
일백 홍마군 기병대가 내지르는 고함이 마치 산을 잘라먹고 올라온 붕조(鵬鳥)의 울음소리 같았다.
드드드드드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며 지축이 요동쳤다. 중무장한 철갑기마대의 위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꿀꺽.
하경진 옆의 노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왜, 걱정되오?”
하경진이 경멸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노인, 적호단 단주 대리인 총감 만석총이 땀을 닦는다.
펄럭, 펄럭.
깃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가진 신호였다.
“들어!”
적풍단 무인들이 땅바닥에서 뭔가를 집어 올렸다.
약 이 장 길이를 가진 뾰족한 말뚝이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말을 탄 강호의 고수를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일단은 최선의 선택이다.
척척척척.
조장의 구령에 맞춰 적풍단의 각 조가 이동을 시작했다.
적호단은 제자리에 대기한 채 활에 살을 걸어 시위를 당긴다.
“대기해! 대기!”
적호단 조장들이 악을 질렀다.
드드드드.
땅의 울림이 점점 커졌다.
홍마군은 적호단 기마무사를 맞이하기 위해 좌우로 이십 기씩을 보냈다. 나머지 육십 기는 곧장 정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적풍단 용병들이 있었다.
챙, 채앵!
가가각! 퍼걱!
“으악!”
먼저 격돌한 우측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거침없이 달리던 적호단 무인의 가슴을 뚫고 홍마군의 창이 삐져나왔다.
말들이 부딪쳐 위의 기수들이 앞으로 튕겨져 날아가고 그 위를 다른 말들이 밟고 지나간다.
적의 둔기에 맞은 충격으로 몸의 절반이 터져 버린 적호단 기수의 시신이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긴 혈흔을 그렸고, 그 위로 목이 잘린 홍마군 중장기가 또 굴렀다.
“얍!”
하가장 본가의 고수가 휘두른 대검에 말의 목과 홍마군 무인의 허리가 동시에 끊어졌다. 실로 엄청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릴 시간 동안 적아(敵我) 통틀어 칠팔 명 정도가 시체로 변해 쓰러졌다.
히히히힝!
따그닥, 따그닥!
우측 전장은 순식간에 먼지에 휩싸였다.
졸졸졸졸.
하경진의 귀에는 어느 젊고 겁 많은 낭인 나부랭이가 오줌을 지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들 경험이 많다고, 또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던 낭인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어지간한 낭인들이 어디서 이런 전투를 겪어보았겠는가.
좌측 전장은 우측과 달리 곧바로 격돌하지 않고 서로 거리를 두고 빙빙 말을 달리며 공격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저러다 곧 맞붙어 서로에게 칼질을 해댈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적호단 궁수대를 지휘하는 대주의 손목을 타고 땀이 떨어졌다.
드드드드드드.
이제는 홍마군의 모습이 두 눈에 선명하게 들어올 정도의 거리다.
“됐어… 됐어… 좋아! 쏴!”
그가 발사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오십여 발의 화살이 홍마군을 향해 날아갔다.
슈우우우―
화살에 내력을 실어 날릴 수 있는 훈련을 소화한 적호단 궁수대였다.
일반적인 군문의 그것과는 당연하게도 비교불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들은 순간 소낙비처럼 홍마군 무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큭!”
“끄억!”
팅! 티잉!
대여섯 기가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하지만 대부분 갑주로 화살을 방어해 내며 질주를 계속했다.
“적풍단, 전진.”
하경진이 낮은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아직 궁수대에게 활을 쏠 여력이 있었음에도 하경진은 곧장 전투에 돌입하라 지시한 것이다.
휙! 휙!
깃발을 보고 각조의 지휘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친다.
“적풍단, 전지이인!”
척척척척.
“대기!”
약 십 보 정도 전진했을 때, 다시 적풍단 전체가 멈췄다.
두두두두두두두!
누런 흙먼지가 거대한 해일처럼 다가왔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적풍단 전열에 배치된 조 전원이 무릎 자세로 몸을 낮추었다.
이제는 홍마군들 하나하나의 표정까지 보일 거리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하경진은 언덕에 세워진 단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신다.
“거기까진 좋았지. 육문 쪽 녀석들은 수는 적어도 이쪽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졌으니까.”
하경진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계획대로 잘 진행된다고 생각한 게 전혀 잘못된 건 아니잖아?”
“맞습니다. 공자.”
“제기랄.......”
하경진이 또 욕을 지껄였다.
드드드드드드드드!
강력한 말발굽과 긴 창, 철갑을 두른 말의 무게에 달려오는 힘까지 더한 충격이 적풍단을 육편으로 만드는 데까지 다섯 숨도 안 남았다.
다들 극도의 긴장과 공포로 인해 그 숨마저 막혀버린 이 순간.
각 조장들이 그들의 병기를 뽑으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세워!”
파파팟!
말뚝이 말의 가슴 높이까지 비스듬하게 세워짐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과 비명, 지면이 뒤집어지는 듯한 진동과 함께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먼지가 적풍단을 덮쳤다.
쾅! 콰아앙!
푸욱! 빠가각!
이히히힝! 와드드득!
“커어억!”
“흐억!”
말뚝이 부러지고 말들이 넘어갔다. 손아귀가 찢어진 조원이 비명을 지르자 그의 위로 홍마군 기수가 낙마한다.
쭉 내뻗은 적의 창끝이 적풍단 무인의 이마를 뚫고 들어가며 아예 그 모가지마저 뽑아버리고, 꼬치처럼 말뚝에 꿰인 말의 주인은 붕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며 목이 부러진다.
이미 적풍단 전열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말들이 놀라 날뛰며 적풍단원들을 밟아댔고, 낙마한 홍마군 무인들은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한 듯 결사적으로 창칼을 휘둘렀다.
“삼십. 나머지는 먼지구름 뒤에 숨었군.”
하경진의 말대로였다.
기병 돌격을 실제로 감행한 적은 삼십 기였다. 남은 절반은 속도를 줄이고 또 반으로 나뉘어 좌우의 전장으로 돌입했다.
겨우 삼십 기로도 벌써 적풍단 삼십여 명이 죽고 십여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 삼십 홍마군 무인들은 열 명이 첫 격돌에서 즉사하고 나머지는 아직 살아 날뛰는 중이었다.
대비를 했음에도 이랬다. 아직 부족한 적풍단을 전열에 세운 이는 다름 아닌 하경진 부단주.
아마도 지금쯤 용병들은 하경진을 크게 원망하고 있을 터였다.
적풍단을 뒤집었던 홍마군 무인들은 조장급들이 투입되고 나서야 모조리 척살되었다.
이때까지 입은 피해는 무려 칠십여. 앞서 홍마군 중장기들과 붙었던 적호단 기수들이 전멸했다고 가정한다면 총 백이 넘는 아군들이 차 한 잔이 식을 만큼의 시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방에 펼쳐진 누런 먼지 바깥에서 말들이 달리는 소리와 무인들의 함성이 교차되어 이쪽으로 전해져 온다.
“정비! 대열을 정비하라!”
뜨거운 가슴을 담아 외치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차갑게 들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강호의 싸움이다. 각자 배운 바 무력을 총동원하여 단병접전을 펼쳐야 하는.
검기(劍氣)나 강기(剛氣)가 난무하는 초고수들의 대결이 아닌 바에야 근접하여 피를 뿌리는 전투는 강호무인들에겐 숙명이었다.
“다친 녀석들은 일단 뒤로 빠지고 멀쩡한 놈들은 알아서 벽을 세워라!”
하경진은 적풍단 근처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소리치는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에 경험 많은 무인들부터 먼저 나서서 앞 열을 가다듬었고, 난장판이 되었던 적풍단의 전열이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그가 바라보는 무인의 이름은 하소양. 불멸대 한 개 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방계였다.
평소 하경진을 대하는 태도부터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 게다가 그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때문에 언젠가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죽이리라 마음먹은 지 오래다.
다그닥, 다그닥.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타난 광경은 처참했다.
몰살당한 적호단 기수들과 하가 고수들의 머리통들이 홍마군의 창에 꽂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들은 적호단의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이쪽을 도발했다.
아직 전력이 온전한 백천당의 일백 무사들은 그들 수장의 뒤에서 조용히 기를 발산한다.
“어쩌실 겁니까.”
어느새 언덕까지 올라온 하소양이 하경진에게 물었다.
“이대로 대치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긴 합니다만.”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몇 명의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경진을 바라보았다.
“곧 날이 저물겠지요. 우린 아직 적들의 진짜 전력을 파악하지도 못했습니다.”
“시끄럽소.”
하경진이 단박에 이들의 말을 끊는다.
“적호단의 생각은 어떠시오?”
총감 만석총은 잠시 생각하다 하소양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하소양 조장의 의견도 일리는 있습니다. 먼저 공세를 감행한 측에서 오히려 시간을 끄는 모양새가 아닙니까. 어쩌면 어두워지길 기다려 계략을 꾸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합비 쪽으로 빠지잔 말씀? 그러면 본가의 정예들이 달려와 줄 테니 말이오.”
하경진의 어투에는 상당한 불쾌감이 나타나있다.
“애초에 본가 무인들이 나섰더라면…….”
만석총이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만. 거기까지.”
하경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잘라 버린다.
“가주이신 할아버님의 큰 뜻이외다. 본가는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으니 이런 작은 전투 따위는 용병단의 일이오. 일종의 시험 같은 것이란 말이지. 어쨌거나 적호단 백, 적풍단 백, 도합 이백이 아직 생생하지 않소. 여전히 저 빌어먹을 육문 놈들보다 머릿수에서 앞서오.”
뿌득.
하소양이 이를 가는 소리에도 하경진은 그를 굳이 외면했다.
“적풍단이 앞을 막고 적호단이 뒤를 따른다. 화살이 닿을만한 거리까지 진군해서 놈들을 공격한다면 저들이 어찌 가만히 있겠소?”
오히려 이쪽이 가만히 있거나 물러선다면 유리해지는 싸움이었다. 한데 하경진은 공격할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다.
“갑시다, 가. 천하의 하가장이 고작 졸자(拙者)들을 앞에 두고 물러났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보다 더한 망신이 어디 있을까, 쯧쯧.”
이제야 하경진의 눈이 하소양의 안면을 향했다.
너 정도 주제에? 라는 눈빛으로 하소양을 오시하는 하경진. 하소양도 지지 않고 하경진을 쏘아보았다.
“우우우우―!”
백천당 무인 백여 명이 내짖는 외침 하나, 하나가 모여 거대한 음파를 형성했다.
조금씩 전진하던 적풍단원들은 고막이 파르르 떨리는 아픔에 인상을 구겼지만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태양이 벌겋게 변해갈 무렵.
짧았던 대치가 끝나고 다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첫 싸움에서 도합 오십여 기를 잃은 홍마군은 더 이상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백천당 무인들 주변을 달리며 함께 기세를 올렸다.
휙! 휙!
백천당 무인들이 휘두르는 병기 주변으로 퍼런빛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일부러 검기를 보여줌으로써 낭인 용병들의 기를 죽이고자 하는 심산이 분명했다.
삐이익―!
호각(號角)이 비명을 질렀다.
“가! 가! 달리란 말이다!”
“할 수 있어! 모조리 숨구멍을 끊어버려!”
무리에 섞여 있던 조장들이 독전(督戰)하며 기운을 일으킨다.
“우와와와아!”
너 나 할 것 없이 병기를 높이 들고 소리쳤다.
뚜두두둑.
적호단 궁수들은 활이 부러져라 시위를 당겼다.
“돌겨어억!”
네댓 명의 조장들이 먼저 뛰었다. 이미 전장의 냄새에 취해 버린 자들이다. 그리고 그 냄새는 순식간에 적풍단에 퍼졌다.
구십여 명의 용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백천당 진영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