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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진짜 다 된 밥 아니었나?”
“그랬지요.”
하승양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당시를 떠올리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적풍단의 전멸은 시간문제였고, 남은 적호단과 하가 고수들, 그리고 자신들만 적당한 시기에 뒤로 빠지면 되는 일이었다.
한데…….

탱! 태애앵! 슈우웃!
동시에 오십 적호단 궁수대가 화살을 날리며 전진했다.
타타타탓.
홍마군 잔여 병력이 반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사십여 기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주는 위압감은 천 명의 용병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핑! 피이잉―!
두 번째 화살군이 쏘아졌다. 거의 직사로 날아간 살들이 홍마군을 향했다.
서너 명 정도가 직격당해 말에서 떨어졌지만 그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하가장 진영에서 대기하던 십여 기의 기마 무사들이 맥도를 끌며 달려 나왔다.
파파파팟!
홍마군과 적풍단 전열이 부딪쳤다. 넓게 퍼져 달리는 적풍단 무인들 사이로 육중한 중장기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퍽! 스걱!
재수 더럽게 떨어진 적풍단 무인들이 창에 찍히고 칼에 썰린다. 개중에는 몸을 틀어 공격을 회피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바로 뒤에 들어오는 말과 충격하여 사방으로 육편을 날렸다.
대책도 없고 작전도 없는 공격이었다.
후열에서 적호단 궁수들을 호위하던 하소양이 이를 벅벅 갈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함께 늘어섰던 고수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헉! 헉!”
간신히 중장기의 공격을 벗어난 젊은 적풍단 무인이 숨을 골랐다.
그의 바로 옆에서 달리던 다른 조원은 순식간에 목이 날아갔고, 허우적대던 몸체는 뒤에서 달려온 말의 발굽에 찢겨졌다.
앞에 멀찍이 뛰어가던 조장들도 모조리 홍마군의 창칼에 작살났다.
홍마군이 쓸고 지나감으로 무너진 무인이 무려 삼십. 사지 멀쩡한 적풍단은 이제 육십 정도가 다다. 총원 사백 명의 대용병 집단인 적풍단 불멸대의 사분지일이 반나절 만에 사라졌다.
하경진의 눈에 백천당 무인들 절반이 쏟아지듯 이쪽으로 뛰는 광경이 보였다.
상대는 전통을 자랑하는 정파다. 홍마군과 같이 군문에 가까운 자들도 아니고, 하가장처럼 정사 구분이 모호한 세력도 아니었으며, 낭인들처럼 변칙적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가진 무력만을 발휘하여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는 자들. 그들에게도 만약 궁수들이 있어 살을 쏘아 날렸다면 이쪽의 남은 육십 중에 서서 달리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을 터.
어쨌거나 백천당은 오십 정도의 무인들만 내보내며 정파로서의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 하경진이었다.
“구오오오오!”
“이야아아앗!”
서로의 눈에 선 핏발이 보일 정도의 거리. 드디어 두 집단이 맞붙었다.
챙! 티이잉!
쉭! 퍼석.
적풍단원 두 명이 좌우로 쪼개졌다.
이류 이상의 무인이 단단히 준비한 한 수를 막아낼 재간이 용병들에게는 없었다.
적풍단 무인 하나가 병기를 요란하게 휘두르며 적의 옆구리를 파고들자 바로 옆에서 다른 적이 강하게 치고 들어와 그의 허리를 베었다.
후두두둑.
반 정도 잘린 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진 피가 바닥에 떨어지고 그 위에 다른 누군가의 내장이 퍼드득 쏟아졌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이의 입에 검이 박힌다. 그리고 곧 그의 머리 전체가 폭발하듯 사라졌다.
백천당의 오십 무사들은 질풍처럼 몰려와 순식간에 열이 넘는 적풍단을 요절냈다.
실로 무시무시한 전투력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썅! 씨아앙!”
채앵! 터어엉!
상당수의 적풍단원들은 끼리끼리 모여 작은 진(陣)을 형성한 채 고군분투했다.
“호! 이런, 이런. 상당히 위험한 걸?”
하경진은 놀랐다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주변의 동의를 구한다.
“그렇습니다.”
만석총이 땀을 훔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몇 명의 간부들도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찌 저리도 약할까. 내 적풍단을 너무 과대평가해왔던가? 쯧쯧.”
하경진이 안타까워하며 발을 굴렀다.
“적호단은 무얼 하고 있나? 어서 저들을 구하지 않고서.”
이미 적풍단을 뒤따르던 적호단 궁수대는 활을 버리고 단병기를 뽑아 홍마군 기마대와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뒤따라 나선 적호단 기수들도 거기에 더해 싸움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들도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부, 아니지. 공자.”
“총감은 뭐하시오? 대기 중인 나머지 적호단을 투입시키지 않고.”
“그것이… 이미 늦은 듯합니다. 우리의 남은 인원도 얼마 안 되는데다가 저쪽은 아직 절반을 본진에 그대로 두고 있어요.”
“허, 이런 일이. 이대로 물러서야 하는가?”
진짜 요즘 들어 일이 이렇게 착착 잘 진행된 적이 없었다.
하경진은 간만에 ‘그분’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래도…….”
만석총이 말을 하는 중이었다.
순간, 전장을 바라보던 간부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 반응들을 눈치 못 챌 하경진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 또한 다시금 전투의 현장으로 향했다.
핏!
피싯!
멀었지만 분명히 보였다.
백천당 무사들의 하얀 무복이 붉은 피로 물드는 모습들이.
피시시시시!
입에서 세차게 물을 뿜듯, 쓰러지는 백천당 무인들의 목에서 피 보라가 넘쳤다.
“…뭐지?”
하경진은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먼지에 휩싸인 적풍단 쪽을 뚫고 달려 나간다.
빠르다.
거리를 단숨에 좁힌다는 최상승의 경공은 아니었다.
그냥 누가 보더라도 전력을 다해 달리는 모습. 한데 그 빠름이 실로 엄청났다.
휙! 휘익!
마치 묘기를 부리듯 덤벼오는 백천당 무인들을 피하고, 또 뛰어넘고, 또 그들 앞에서 구르는 괴이한 남자.
색 바랜 피풍과 지저분한 두건. 짧게 쥔, 그 자체로도 짧은 도(刀). 하경진은 그가 누군지 이제야 생각났다.
“저… 저 녀석은…….”
촤악!
한 명의 백천당 무인이 피를 뿌렸다. 갈라진 그의 목젖은 꿀렁꿀렁 핏물을 쏟아냈고, 그는 왜 자신이 죽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하경진도 마찬가지였다. 빠르지만 막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저 멍청한 적은 애송이 낭인 용병 따위에게 목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왜! 뭐냐니까, 저 자식은?”
하경진의 음성이 조금 높아진다.
팽그르르.
휘익∼!
또 피했다. 그리곤 예외 없이 공격한 자의 목이 붉게 갈라졌다.
태애앵!
쳐냈다. 마찬가지로 검은 바람이 지나가고 하나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저! 저!”
하경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의외의 사태(?)에 백천당 쪽도 황망하긴 마찬가지였다.
만만하기 그지없는 이류 이하의 낭인들이라 쉽게 끝낼 줄 알았을 것이다. 또한 이쪽의 누군가와도 어느 정도 약조가 된 부분이 있기도 했고.
한데 난데없이 이상한 차림을 한 놈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놈이 가려 뽑은 무인들을 풀 베듯 찍어 넘기고 점점 다가온다.
백천당의 수장은 여전히 말에 탄 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곤 손을 까딱하여 대기 중이던 무리들에게 저 튀어나온 돌을 쳐내라 명했다.
휙! 휙!
두 백천당 무인이 바람처럼 뛰쳐나갔다. 그들이 뽑은 검에 하늘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팔(八)자와 을(乙)자 결을 허공에 그리며 채도(菜刀)의 낭인 용병에게 짓쳐가는 두 무인.
그들 또한 한참을 달려 곧 낭인 용병 앞에 이르렀다. 둘 중 앞섰던 자가 폭풍 같은 검초로 적풍단 용병을 베려는 찰나, 오히려 그자가 한 발을 더 들이민다.
쿵! 처엉!
흡사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백천당 무인이 밀려났다.
“저놈 이름이…….”
하경진이 묻자 뒤에 섰던 적풍단 간부가 서둘러 명부를 뒤적였다.
“음, 음. 아, 여기 있습니다. 괴상한 칼을 쓰는 녀석.”
“그래서 이름을 묻잖아!”
하경진은 버럭 성을 내며 뒤로 몸을 돌렸다.
“윽! 예, 예. 공, 공천록이란 작자이옵니다. 태생은 불명이고 특기가, 음. 저기…….”
이미 하경진의 귀에는 그 다음 말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정확하게 공천록에게 고정된 채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휘리릭.
충격에 물러나는 적의 허벅다리를 밟고 공중제비를 돌던 공천록은 그 다음 적이 휘두르는 검을 간발의 차로 피해내고 그의 뒤로 착지했다. 그리곤 또 전력을 다해 질주한다.
“하아! 하!”
백천당의 수장 옆에 섰던 홍마군 무장이 말의 배를 차며 고삐를 잡아 돌렸다.
그는 일말도 망설이지 않고 창을 앞으로 쭉 뻗은 채, 곧바로 공천록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린다.
다다다다다다!
탁탁탁탁탁탁!
무장의 창끝에서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뒤로 줄줄 흘렀다. 반면에 공천록은 여느 용병들과 다를 바 없이 아무런 내기의 발현이 드러나지 않았다.
“위험한데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만석총이 말했다. 하경진의 명령만 있으면 곧바로 다른 무인들을 진격시킬 요량이다. 하지만 하경진의 입은 굳게 닫혀 벌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다다다다다!
공천록은 적의 창날이 일장 앞까지 다가왔건만 좌우 어느 한 곳으로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모두가 예정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이 순간.
드디어 먼지를 흩날리고 무장과 공천록이 부딪쳤다.
치익―! 따다다닥!
“엉?”
하경진은 저도 모르게 감탄(?)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그런 걸 경험이라고 해야겠지?”
“범상한 무인들이라면 그 상황에서 쉽게 떠올릴 재간은 아니었습니다.”
하승양도 그때의 공천록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그냥 피한 것도 아니고, 뭐 화려하게 초식을 난무한 것도 아니었지. 바닥에 가득한 돌과 흙모래를 걷어찬 것뿐이었으니.”
“비겁하다면 비겁한 수였지요.”
“큭큭큭큭큭.”

돌과 모래가 공천록의 발끝에서 튀어나가 말과 그 주인의 눈을 강타했다. 그 때문에 아주 짧게나마 적의 시선이 돌아가고 말의 걸음이 느려졌다.
미세하게 틀어진 창의 방향. 공천록은 머리를 슬쩍 옆으로 눕히는 것으로 창을 피했다. 그리고 채도를 올려 창대에 붙여 긁으며 질주를 계속했다.
스거걱.
다그닥, 다그닥, 다닥, 닥, 닥. 챙강! 후두둑.
신경질이 난 무장이 고삐를 휙 당겨 말을 세웠다. 그는 빠르게 몸을 돌려 뛰어가는 공천록의 뒤통수를 쏘아본 뒤, 창을 던지기 위해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
갑자기 찾아온 고통에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리곤 곧 그 눈에 놀라움을 가득 담는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것이 없다. 그의 손부터 팔꿈치까지. 당연하게도 쥐었던 창도 땅에 떨어져 굴러간다.
스스로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무장은 입을 벙긋벙긋 할 뿐, 차마 뭐라 말을 못한다.
쉬이익! 딱!
날아온 화살이 그의 뒤통수를 관통해 이마 밖으로 절반가량 삐져나왔다.
화살을 날린 이는 하소양. 사망한 적호단 무인의 활과 화살을 주워 공천록을 조력한 것이다.
그와 다른 조장급 무인들, 그리고 적호단 측 고수들의 활약을 통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장이 대등해진 덕분이었다.
으득.
하경진이 이를 갈았다. 그 의미를 알 턱이 없는 다른 이들은 그저 급변한 사태를 반기며 그에게 대기조들의 투입을 재촉했다.
탁탁탁탁.
공천록은 여전히 쉬지 않고 뛰었다.
백천당 무인 다섯이 또 그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엔 더욱 가까워진 덕분에 곧장 공천록과 격돌할 수 있었다.
“이놈!”
휙.
“어딜!”
휘이익!
“거기냐!”
쉿―!
그물처럼 촘촘하게 공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공천록은 ‘비겁’하게 바닥을 마구 구르며 그 범위를 벗어났다.
“비루한 놈이 구르는 꼴을 보니 꼭 굼벵이 같구나!”
참 표현도 섬세하기도 하지. 역시 정파인이다.
슈웃! 콱!
누워있던 공천록의 사타구니를 찔러오던 검이 바닥에 박혔다.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에 탄력을 주어 몸을 들어 올린 공천록의 기지였다.
이 작은 전장은 어느덧 흙먼지로 둘러싸여 번쩍이는 검광과 기합 소리만이 내부의 상황을 짐작케 해주었다.
백천당 쪽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며 그들의 수장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던 수장이 손을 들었다가 빠르게 내렸다. 동시에 몇 명의 무인들이 훌쩍 몸을 날렸다. 그 순간.
핑―! 소리와 함께 먼지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사아악!
누군가가 그 물체를 절반으로 갈랐다. 피와 분홍빛 조각들을 날리며 떨어지는 그것은 한 사람의 머리였다. 먼저 공천록과 전투에 돌입했던 백천당 무인의.
찰나, 모두가 충격을 감추지 못한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그들의 수장조차.
그때, 한 차례 푸른 바람이 먼지를 가르고 순식간에 수장에게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