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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거기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경진이 두 손을 포개 뒷머리에 대고 벌러덩 눕는다.
“이놈이 앞으로 나의, 우리의 일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 놈인지를.”
“지금이라도 제거할까요.”
하승양은 자신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공천록이라는 낭인에 대해 스스로도 다소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탓이다.
“봤잖아. 상대는 백천당 지율삼로의 왕유였다고. 무려 백산검법을 팔성까지 익힌 검의 달인. 그런 자가 당했어.”
“정신이 분산되었을 겁니다. 정파 특유의 자만심도 한몫했겠지요.”
“그럴까?”
하경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코앞의 적이 자신을 덮쳐오는데도 왕유는 검파에 손을 댄 상태로 가만히 있었어. 그래. 그놈이 빠르긴 빨랐지. 하지만 눈이 못 따라갈, 몸이 반응하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냥 검을 쭉 뽑아서 한번 휘두르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지. 쉬운 일 아닌가? 좀 의외긴 했지만 그래봐야 겨우 낭인이라고. 잘 쳐봐야 이류 아래.”
“…….”
“그런데 왕유가 뒤를 내줬다. 놈이 말의 머리를 짚었을 때야 정신을 차렸는지 검을 뺐지만 이미 늦었지. 그 낭인 놈은 왕유의 뒤에 앉아 한 손으로 그 머리를 잡아 돌리면서 다른 손의 칼을 써서 반대 방향으로 목을 그었어. 우드드득! 놈이 왕유의 목을 비틀어 뽑을 때 난 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소름이 끼치더군. 크크크크. 이 내가. 하가장 대공자의 아들인 내가 말이다.”
하경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자, 흥분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내가 만약 그 백천당 무리에 속한 자였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들의 우상과도 같은 위대한 무인이 이름도 없는 핏덩어리 낭인 따위에게 모가지가 썰려 뽑히는 장면을 보았다면?”
“공자… 그들 백천당과 홍마군 누구도 그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기분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하승양은 불안한 음성으로 하경진의 기분을 가라앉히고자 애썼다.
“중요한 것은 없어. 아, 하나 있다면 내가 그분께 쓸모없는 새끼라는 욕을 들어먹은 것이 있겠군.”
순간적으로 실내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날 이후 아홉. 이번까지 아홉 번이야. 놈이 속한 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오, 대단하군, 대단해! 같이 나갔던 조원들 전부가 죽어도 놈은 끝까지 살아서 나타났어. 그래, 이번엔 또 놈이 뭘 가져왔던가?”
“…강궁사 몇 명의 수급과.”
“과? 또 있나.”
“소일살이 틀림없어 보이는 시신을 끌고 왔습니다.”
“푸하하하하하!”
하경진은 배가 터져라 웃어댔다.
“아, 웃겨. 정말 못 말리겠군. 죽으라고 함정에 처넣었더니, 함정을 판 장본인을 썰어버렸다, 이거지? 녹살 명가추가 뒤집어지다 이마 깨질 노릇이구먼. 그렇게 자랑하던 큰아들내미를 무명의 낭인에게 바쳤다?”
하승양의 표정으로 봐서는 도리어 큰 걱정을 해야 할 일이었다.
“빌어먹을 공천록. 강한 놈이야. 그리고 뭔가를 감추고 있고.”
방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뜨거워진다.
“육문 측에 연통을 넣어라. 조심스럽게. 지금쯤 용린각은 난리가 났을 테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비선이 무너질 수도 있어. 이쪽에도 한 건 준비시키고. 다시 한 번, 먹이를 던져주는 거야.”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가, 사료됩니다만.”
“뭐, 그럴 수도. 하지만 봐봐. 놈이 우리의 일을 망친 게 벌써 몇 번이지?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게 생겼어. 내 보았을 땐, 놈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 너도 이미 느끼고 있을 터.”
하승양은 무언으로 하경진의 말에 동의했다.
“그만 가. 세세한 계획은 네가 알아서 해.”
“예, 공자.”
하승양이 뒷걸음으로 주렴 밖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밀실에서는 다시 여인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야야야!”
공천록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거, 엄살도. 이리 와.”
적풍단 불멸대 내의 유일한 의원인 장보는 공천록의 저런 모습에 익숙했다.
이 싱싱한 청년은 어딘가를 나가고 또 돌아올 때마다 중한 상처를 꼭 한두 군데씩은 입는다.
이번 건은 좀 심각했다. 목이 시작되는 부위를 가르고 지나간 상처. 손톱 끝 부분 정도만큼만 더 깊이 베였다면 공천록은 코와 입 그리고 목의 상처, 이렇게 세 구멍을 통해 숨을 쉬었을 터였다. 다행히 상대의 병기가 쇄골에 한 번 걸렸다 튕기는 덕분에 이 정도에서 끝난 게 아닐까 짐작할 뿐.
“참 신기한 녀석일세.”
“아야! 왜요.”
장보는 약재에 침을 탁 뱉은 뒤 잘 이겨 공천록의 상처에 두껍게 바른다.
“보면 늘 베이고 찔려서 오는데, 어디 한 군데 잘려서 나한테 온 적은 없잖아.”
“하아… 제 팔다리가 붙어 있는 게 불만이신가.”
“내 너가 칼질 배우기 훨씬 전부터 하가장에서 침을 놓던 사람이야. 남룡과 북검이 치고받고 싸우던 시절엔 정말 무수히 많은 시신과 부상자들을 봤지. 손가락, 발가락 한두 개나 네 말처럼 팔다리가 없이 실려 온 놈들은 말도 못하고. 자, 내가 널 몇 번째 여기서 보는 걸까?”
공천록은 ‘멀쩡한’ 손가락을 들어 하나둘 세어보았다.
“아홉.”
“그래. 아홉 번이지. 다른 놈들 같았으면 서너 번 쯤에서 난자당한 시신이 되어 왔을 게다. 그것도 아니면 진짜로 손발 없는 불구가 되었거나.”
“흠흠,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之始也).”
“옳거니.”
공천록이 뜬금없이 효경(孝經)의 한 구절을 읊자 장보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 다음은 뭐…….”
“흐흐흐.”
장보는 공천록의 이런 점이 좋았다. 거칠고 무식한 낭인이라는 선입견은 이 청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항상 죽음을 어깨에 올려놓고 살면서도 유쾌함이 철철 넘친다.
“이 늙은이가 무(武)에서 지(止)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렴풋이 보고, 느낀 점은 있다. 오래 싸운 사람일수록 정상(正常)에서 멀어지지. 한 지역을 주무르던 최강의 무인들도 그 지겨웠던 남과 북의 다툼을 거치면서 괴물이 되거나 한줌 뼛가루로 변해 날렸었고. 이해가 가나?”
끄덕끄덕. 공천록이 건성으로 저러는 것을 알기에 장보도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넌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을 피 튀기는 강호에서 보냈을까. 네 생김을 본다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쨌거나 괴물이 되지도 않았거니와 백골로 화하지도 않았어. 넌 여전히 지극히도 정상이야. 모든 면에서. 이건 내 장담하지.”
“감사합니다.”
공천록이 장보를 향해 해맑게 씩 웃었다.
“칼과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을 진데도 넌 지금 이곳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데 너와 함께한 모두가 죽어도 넌 ‘멀쩡’해. 자잘한 상처는 입을지언정 네 정신과 신체는 늘 온전하지.”
“그랬던가요?”
“그래서 말인데…….”
덜컹.
갑자기 의방의 문이 열렸다.
***
“후욱! 후욱!”
거친 숨소리.
쉬이익!
그리고 뒤에서 귀를 간질이는 대기의 갈라짐.
챙! 푸욱. 써걱써걱.
“꺽! 크앗!”
공간을 비트는 누군가의 고함.
털썩.
“저기다! 살아 있는 놈이 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횃불 여러 개가 아른거렸다.
숨이 끊어진 자의 발끝이 아직도 푸들거리는 끔찍한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검은 그림자.
그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이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놈!”
가장 먼저 나타난 자가 횃불을 땅에 던지며 호통을 쳤다.
노랗고 또 붉은 빛이 그의 병기에 닿아 주위를 어지럽혔다.
파바바바밧.
매우 규칙적인, 그러나 그 안에 강한 살기를 담은 검법이 검은 그림자를 향해 쏟아졌다.
탱!
일수. 단 한 번의 움직임이 살초를 깼다.
호통을 치며 검을 휘둘렀던 자의 눈이 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의 배를 관통한 무언가가 내장을 크게 휘저은 뒤 다시 빠져나간다.
울컥.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내렸고 아래로는 창자가 뱀처럼 튀어나와 허공에서 춤춘다.
“그르륵.”
눈을 뒤집으며 절명하는 그의 뒤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횃불을 던지며 달려온다.
검은 그림자는 그런 그들을 가만히 선 채 바라보기만 했다.
달빛이 매만지고 지나는 그의 병기가 유난히도 짧다.
챵! 챠앙! 휘리릭.
결국 병기가 부러졌다. 수차례의 접전으로 피로가 누적된 이 칼은 주인의 바람과 달리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젠장!”
욕을 끝까지 뱉기도 전에 두 개의 빛이 세로로 떨어졌다.
“웃!”
하소양은 삼분의 이만 남은 검을 올려쳐 두 명의 적이 내려친 공격을 막아냈다.
퍽! 와그작!
빠르게 올려친 발에 한 놈의 턱이 박살났다. 너덜거리는 하관으로 치아가 우수수 떨어진다.
동시에 쓰러지는 적이 흘린 검을 공중에서 낚아채 다른 적의 배를 순식간에 그어버렸다.
허리의 절반이 썰린 적은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자신의 상체를 황당한 눈으로 보다 그대로 죽어버린다.
“빌어먹을. 니미럴. 썅!”
생각나는 욕을 차례로 씹으며 하소양은 전진했다.
턱. 등에 뭔가가 닿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전력을 다해 뒤에 붙은 것을 베어내려 했다.
팅!
병기가 튕겨지며 강한 진동이 손아귀 전체를 휘감는다.
“…….”
얼굴을 마주한 자가 왠지 낯익다.
“조장! 미쳤소? 나요!”
“등천, 살아 있었냐.”
등천이라 불린 무인의 상태는 가관이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붉은색 무복도 너덜너덜해져 살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물론 열이 넘는 자상은 덤이다.
“다들 어디 갔지?”
“어디 가긴요. 저 세상 구경하러 갔소. 남은 인원이 별로 없어요.”
“별로? 살아 있는 자식들이 있단 말이군.”
“갑시다. 일단 숨을만한 곳이 있어요.”
“끙.”
둘은 몸을 최대한 낮추고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허억.”
차가운 공간에 누군가의 힘겨워하는 신음과 허연 입김이 퍼졌다.
“제발… 제발 조용히 좀 하게, 이 사람아.”
피직!
안타까워하며 말하는 이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퍽퍽 튀겨 올라왔다.
중상을 입은 동료의 상처를 애써 누르며 지혈을 시도해보지만 여의치가 않은 듯했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 가늘게 지껄이고 있지만 사방에 깔린 적들에게는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크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급해진다.
“날… 죽여줘.”
배를 비집고 나왔던 창자를 도로 집어넣고 넘치는 피를 막기 위해 안달하는 동료를 향해 죽여 달라 애원하는 심정을 누가 알까. 모두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터.
뚝뚝 떨어지는 눈물. 그리고 잠시 후, 중상을 입은 이의 심장에 한 자루 단도가 깊이 박힌다.
“개자식들.”
죽은 이의 피를 털어내며 뒤로 털썩 주저앉은 자가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모를 욕을 뱉었다.
그의 곁에서 같은 편의 심장에 단도를 박은 자는 하소양. 방금 죽은 사람은 그의 조원 중 하나였다.
온몸의 솜털을 곤두세울 만큼 냉기가 가득한 이곳은 동굴이다.
서로 묻고 답하지는 않았지만 살아남은 어떤 조원이 이곳을 발견하여 생존자들을 이끌어 숨도록 했을 것이고.
“몇 남았지?”
하소양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 안에 일곱이 있습니다. 조장 빼고요.”
등천이 답했다.
“후우…….”
하소양은 한숨부터 나왔다.
스물넷. 적풍단 불멸대 삼십칠조의 총 인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작 여덟.
툭. 툭툭. 툭.
이때 입구 근처에 있던 조원이 신호를 보냈다. 동굴 내부에 찰나 간 정적이 내려앉는다.
꿀꺽. 서로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찻물이 끓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입구 쪽에서 다시 신호가 왔다.
“휴.”
이쪽 편이니 안심하라는 신호를 확인한 삼십칠조원들이 각각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조원들을 향해 다가왔다. 인기척은 있으나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상당히 날렵한 자로 보인다.
가늘게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나타난 검은 그림자.
그는 누군가를 어깨에 메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울퉁불퉁한 동굴 내부를 거침없이 뛰어 달린다.
척!
조원들 앞에까지 온 검은 그림자가 어깨에 멘 사람을 내려놓았다. 왼쪽 팔이 팔꿈치부터 떨어져 나간 부상을 입은 또 한 명의 조원이었다.
남아 있던 자들 모두가 다가가 부상당한 이를 살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동료를 데리고 돌아온 검은 그림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허, 다행이다. 지혈이 완벽하게 되었어.”
“이런 상처라면 쉽지가 않았을 텐데.”
조원들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검은 그림자를 돌아보려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눈총을 받은 이는 뜨끔한 표정으로 다시 부상자를 향해 눈을 깔았다.
그 모습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하소양.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일어나 검은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너였구나.”
“…….”
“공천록. 이 동굴도 네가 발견한 게냐?”
“예. 처음 수색하면서 미리 봐둔 곳입니다.”
공천록이 힛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의 모두가 너에게 목숨을 빚졌구나. 내 대표로 네게 감사의 인사를 하마.”
하소양이 몸을 숙이며 읍했다. 그의 감사를 공천록은 살짝 목례하며 받는다.
“저들의 태도에 서운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서운이요? 그게 뭔데요.”
공천록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런 그를 하소양은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다.
“거기서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경진이 두 손을 포개 뒷머리에 대고 벌러덩 눕는다.
“이놈이 앞으로 나의, 우리의 일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 놈인지를.”
“지금이라도 제거할까요.”
하승양은 자신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공천록이라는 낭인에 대해 스스로도 다소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탓이다.
“봤잖아. 상대는 백천당 지율삼로의 왕유였다고. 무려 백산검법을 팔성까지 익힌 검의 달인. 그런 자가 당했어.”
“정신이 분산되었을 겁니다. 정파 특유의 자만심도 한몫했겠지요.”
“그럴까?”
하경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코앞의 적이 자신을 덮쳐오는데도 왕유는 검파에 손을 댄 상태로 가만히 있었어. 그래. 그놈이 빠르긴 빨랐지. 하지만 눈이 못 따라갈, 몸이 반응하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냥 검을 쭉 뽑아서 한번 휘두르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지. 쉬운 일 아닌가? 좀 의외긴 했지만 그래봐야 겨우 낭인이라고. 잘 쳐봐야 이류 아래.”
“…….”
“그런데 왕유가 뒤를 내줬다. 놈이 말의 머리를 짚었을 때야 정신을 차렸는지 검을 뺐지만 이미 늦었지. 그 낭인 놈은 왕유의 뒤에 앉아 한 손으로 그 머리를 잡아 돌리면서 다른 손의 칼을 써서 반대 방향으로 목을 그었어. 우드드득! 놈이 왕유의 목을 비틀어 뽑을 때 난 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소름이 끼치더군. 크크크크. 이 내가. 하가장 대공자의 아들인 내가 말이다.”
하경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자, 흥분하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내가 만약 그 백천당 무리에 속한 자였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들의 우상과도 같은 위대한 무인이 이름도 없는 핏덩어리 낭인 따위에게 모가지가 썰려 뽑히는 장면을 보았다면?”
“공자… 그들 백천당과 홍마군 누구도 그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기분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하승양은 불안한 음성으로 하경진의 기분을 가라앉히고자 애썼다.
“중요한 것은 없어. 아, 하나 있다면 내가 그분께 쓸모없는 새끼라는 욕을 들어먹은 것이 있겠군.”
순간적으로 실내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날 이후 아홉. 이번까지 아홉 번이야. 놈이 속한 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오, 대단하군, 대단해! 같이 나갔던 조원들 전부가 죽어도 놈은 끝까지 살아서 나타났어. 그래, 이번엔 또 놈이 뭘 가져왔던가?”
“…강궁사 몇 명의 수급과.”
“과? 또 있나.”
“소일살이 틀림없어 보이는 시신을 끌고 왔습니다.”
“푸하하하하하!”
하경진은 배가 터져라 웃어댔다.
“아, 웃겨. 정말 못 말리겠군. 죽으라고 함정에 처넣었더니, 함정을 판 장본인을 썰어버렸다, 이거지? 녹살 명가추가 뒤집어지다 이마 깨질 노릇이구먼. 그렇게 자랑하던 큰아들내미를 무명의 낭인에게 바쳤다?”
하승양의 표정으로 봐서는 도리어 큰 걱정을 해야 할 일이었다.
“빌어먹을 공천록. 강한 놈이야. 그리고 뭔가를 감추고 있고.”
방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뜨거워진다.
“육문 측에 연통을 넣어라. 조심스럽게. 지금쯤 용린각은 난리가 났을 테니 잘못 건드렸다가는 비선이 무너질 수도 있어. 이쪽에도 한 건 준비시키고. 다시 한 번, 먹이를 던져주는 거야.”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가, 사료됩니다만.”
“뭐, 그럴 수도. 하지만 봐봐. 놈이 우리의 일을 망친 게 벌써 몇 번이지?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게 생겼어. 내 보았을 땐, 놈이 죽어야 우리가 산다. 너도 이미 느끼고 있을 터.”
하승양은 무언으로 하경진의 말에 동의했다.
“그만 가. 세세한 계획은 네가 알아서 해.”
“예, 공자.”
하승양이 뒷걸음으로 주렴 밖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밀실에서는 다시 여인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야야야!”
공천록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거, 엄살도. 이리 와.”
적풍단 불멸대 내의 유일한 의원인 장보는 공천록의 저런 모습에 익숙했다.
이 싱싱한 청년은 어딘가를 나가고 또 돌아올 때마다 중한 상처를 꼭 한두 군데씩은 입는다.
이번 건은 좀 심각했다. 목이 시작되는 부위를 가르고 지나간 상처. 손톱 끝 부분 정도만큼만 더 깊이 베였다면 공천록은 코와 입 그리고 목의 상처, 이렇게 세 구멍을 통해 숨을 쉬었을 터였다. 다행히 상대의 병기가 쇄골에 한 번 걸렸다 튕기는 덕분에 이 정도에서 끝난 게 아닐까 짐작할 뿐.
“참 신기한 녀석일세.”
“아야! 왜요.”
장보는 약재에 침을 탁 뱉은 뒤 잘 이겨 공천록의 상처에 두껍게 바른다.
“보면 늘 베이고 찔려서 오는데, 어디 한 군데 잘려서 나한테 온 적은 없잖아.”
“하아… 제 팔다리가 붙어 있는 게 불만이신가.”
“내 너가 칼질 배우기 훨씬 전부터 하가장에서 침을 놓던 사람이야. 남룡과 북검이 치고받고 싸우던 시절엔 정말 무수히 많은 시신과 부상자들을 봤지. 손가락, 발가락 한두 개나 네 말처럼 팔다리가 없이 실려 온 놈들은 말도 못하고. 자, 내가 널 몇 번째 여기서 보는 걸까?”
공천록은 ‘멀쩡한’ 손가락을 들어 하나둘 세어보았다.
“아홉.”
“그래. 아홉 번이지. 다른 놈들 같았으면 서너 번 쯤에서 난자당한 시신이 되어 왔을 게다. 그것도 아니면 진짜로 손발 없는 불구가 되었거나.”
“흠흠,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之始也).”
“옳거니.”
공천록이 뜬금없이 효경(孝經)의 한 구절을 읊자 장보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 다음은 뭐…….”
“흐흐흐.”
장보는 공천록의 이런 점이 좋았다. 거칠고 무식한 낭인이라는 선입견은 이 청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항상 죽음을 어깨에 올려놓고 살면서도 유쾌함이 철철 넘친다.
“이 늙은이가 무(武)에서 지(止)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렴풋이 보고, 느낀 점은 있다. 오래 싸운 사람일수록 정상(正常)에서 멀어지지. 한 지역을 주무르던 최강의 무인들도 그 지겨웠던 남과 북의 다툼을 거치면서 괴물이 되거나 한줌 뼛가루로 변해 날렸었고. 이해가 가나?”
끄덕끄덕. 공천록이 건성으로 저러는 것을 알기에 장보도 조금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넌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을 피 튀기는 강호에서 보냈을까. 네 생김을 본다면 그리 길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쨌거나 괴물이 되지도 않았거니와 백골로 화하지도 않았어. 넌 여전히 지극히도 정상이야. 모든 면에서. 이건 내 장담하지.”
“감사합니다.”
공천록이 장보를 향해 해맑게 씩 웃었다.
“칼과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을 진데도 넌 지금 이곳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데 너와 함께한 모두가 죽어도 넌 ‘멀쩡’해. 자잘한 상처는 입을지언정 네 정신과 신체는 늘 온전하지.”
“그랬던가요?”
“그래서 말인데…….”
덜컹.
갑자기 의방의 문이 열렸다.
“후욱! 후욱!”
거친 숨소리.
쉬이익!
그리고 뒤에서 귀를 간질이는 대기의 갈라짐.
챙! 푸욱. 써걱써걱.
“꺽! 크앗!”
공간을 비트는 누군가의 고함.
털썩.
“저기다! 살아 있는 놈이 있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횃불 여러 개가 아른거렸다.
숨이 끊어진 자의 발끝이 아직도 푸들거리는 끔찍한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검은 그림자.
그는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이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놈!”
가장 먼저 나타난 자가 횃불을 땅에 던지며 호통을 쳤다.
노랗고 또 붉은 빛이 그의 병기에 닿아 주위를 어지럽혔다.
파바바바밧.
매우 규칙적인, 그러나 그 안에 강한 살기를 담은 검법이 검은 그림자를 향해 쏟아졌다.
탱!
일수. 단 한 번의 움직임이 살초를 깼다.
호통을 치며 검을 휘둘렀던 자의 눈이 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의 배를 관통한 무언가가 내장을 크게 휘저은 뒤 다시 빠져나간다.
울컥.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내렸고 아래로는 창자가 뱀처럼 튀어나와 허공에서 춤춘다.
“그르륵.”
눈을 뒤집으며 절명하는 그의 뒤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횃불을 던지며 달려온다.
검은 그림자는 그런 그들을 가만히 선 채 바라보기만 했다.
달빛이 매만지고 지나는 그의 병기가 유난히도 짧다.
챵! 챠앙! 휘리릭.
결국 병기가 부러졌다. 수차례의 접전으로 피로가 누적된 이 칼은 주인의 바람과 달리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젠장!”
욕을 끝까지 뱉기도 전에 두 개의 빛이 세로로 떨어졌다.
“웃!”
하소양은 삼분의 이만 남은 검을 올려쳐 두 명의 적이 내려친 공격을 막아냈다.
퍽! 와그작!
빠르게 올려친 발에 한 놈의 턱이 박살났다. 너덜거리는 하관으로 치아가 우수수 떨어진다.
동시에 쓰러지는 적이 흘린 검을 공중에서 낚아채 다른 적의 배를 순식간에 그어버렸다.
허리의 절반이 썰린 적은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자신의 상체를 황당한 눈으로 보다 그대로 죽어버린다.
“빌어먹을. 니미럴. 썅!”
생각나는 욕을 차례로 씹으며 하소양은 전진했다.
턱. 등에 뭔가가 닿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전력을 다해 뒤에 붙은 것을 베어내려 했다.
팅!
병기가 튕겨지며 강한 진동이 손아귀 전체를 휘감는다.
“…….”
얼굴을 마주한 자가 왠지 낯익다.
“조장! 미쳤소? 나요!”
“등천, 살아 있었냐.”
등천이라 불린 무인의 상태는 가관이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붉은색 무복도 너덜너덜해져 살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물론 열이 넘는 자상은 덤이다.
“다들 어디 갔지?”
“어디 가긴요. 저 세상 구경하러 갔소. 남은 인원이 별로 없어요.”
“별로? 살아 있는 자식들이 있단 말이군.”
“갑시다. 일단 숨을만한 곳이 있어요.”
“끙.”
둘은 몸을 최대한 낮추고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허억.”
차가운 공간에 누군가의 힘겨워하는 신음과 허연 입김이 퍼졌다.
“제발… 제발 조용히 좀 하게, 이 사람아.”
피직!
안타까워하며 말하는 이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퍽퍽 튀겨 올라왔다.
중상을 입은 동료의 상처를 애써 누르며 지혈을 시도해보지만 여의치가 않은 듯했다.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 가늘게 지껄이고 있지만 사방에 깔린 적들에게는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크게 들릴 것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급해진다.
“날… 죽여줘.”
배를 비집고 나왔던 창자를 도로 집어넣고 넘치는 피를 막기 위해 안달하는 동료를 향해 죽여 달라 애원하는 심정을 누가 알까. 모두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터.
뚝뚝 떨어지는 눈물. 그리고 잠시 후, 중상을 입은 이의 심장에 한 자루 단도가 깊이 박힌다.
“개자식들.”
죽은 이의 피를 털어내며 뒤로 털썩 주저앉은 자가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모를 욕을 뱉었다.
그의 곁에서 같은 편의 심장에 단도를 박은 자는 하소양. 방금 죽은 사람은 그의 조원 중 하나였다.
온몸의 솜털을 곤두세울 만큼 냉기가 가득한 이곳은 동굴이다.
서로 묻고 답하지는 않았지만 살아남은 어떤 조원이 이곳을 발견하여 생존자들을 이끌어 숨도록 했을 것이고.
“몇 남았지?”
하소양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이 안에 일곱이 있습니다. 조장 빼고요.”
등천이 답했다.
“후우…….”
하소양은 한숨부터 나왔다.
스물넷. 적풍단 불멸대 삼십칠조의 총 인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작 여덟.
툭. 툭툭. 툭.
이때 입구 근처에 있던 조원이 신호를 보냈다. 동굴 내부에 찰나 간 정적이 내려앉는다.
꿀꺽. 서로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찻물이 끓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입구 쪽에서 다시 신호가 왔다.
“휴.”
이쪽 편이니 안심하라는 신호를 확인한 삼십칠조원들이 각각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조원들을 향해 다가왔다. 인기척은 있으나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상당히 날렵한 자로 보인다.
가늘게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나타난 검은 그림자.
그는 누군가를 어깨에 메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울퉁불퉁한 동굴 내부를 거침없이 뛰어 달린다.
척!
조원들 앞에까지 온 검은 그림자가 어깨에 멘 사람을 내려놓았다. 왼쪽 팔이 팔꿈치부터 떨어져 나간 부상을 입은 또 한 명의 조원이었다.
남아 있던 자들 모두가 다가가 부상당한 이를 살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동료를 데리고 돌아온 검은 그림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허, 다행이다. 지혈이 완벽하게 되었어.”
“이런 상처라면 쉽지가 않았을 텐데.”
조원들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검은 그림자를 돌아보려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눈총을 받은 이는 뜨끔한 표정으로 다시 부상자를 향해 눈을 깔았다.
그 모습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하소양.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일어나 검은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너였구나.”
“…….”
“공천록. 이 동굴도 네가 발견한 게냐?”
“예. 처음 수색하면서 미리 봐둔 곳입니다.”
공천록이 힛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의 모두가 너에게 목숨을 빚졌구나. 내 대표로 네게 감사의 인사를 하마.”
하소양이 몸을 숙이며 읍했다. 그의 감사를 공천록은 살짝 목례하며 받는다.
“저들의 태도에 서운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서운이요? 그게 뭔데요.”
공천록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런 그를 하소양은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