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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이곳에 오래 있을 순 없다. 날이 밝기 전에 움직여야 해.”
하소양이 남은 조원들 모두에게 말했다.
“하지만 조장. 다들 지친데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본신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등천의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여기 있어도 죽긴 마찬가지다. 해가 뜨면 이런 곳들이 오히려 노출되지. 안에 갇힌 채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지금 수를 쓰는 것이 유리해.”
하소양의 판단이 현재로선 최선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지금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로군. 안 그런가? 공천록.”
“…….”
조원들이 은근슬쩍 공천록을 흘겼다. 그러나 곧 눈길을 거두고 불만 가득한 표정들을 지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천록을 배척하는 상황에서 하소양은 끝까지 공천록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이들에겐 불만인 걸까.
“현재 총원 열. 아직 정신이 없는 양선을 제외하면 나머진 거동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 명씩 나누어 움직일 것이다. 양선은 내가 챙길 테니 너, 너, 너희 둘은 나와 함께, 너, 너, 너, 너희 셋이 함께, 나머지 셋이 또 같이 간다. 이상.”
“조장.”
백평이란 자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전 싫습니다. 저 불길한 녀석과는 절대 같이 못갑니다.”
그의 손가락이 공천록을 가리킨다.
“저놈이에요. 우릴 죽음으로 몰아간 원흉이. 이번이 벌써…….”
“그만!”
하소양의 음성에는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따위 미신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또 너희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누구 덕분이지? 공천록이 이곳으로 한 명, 한 명, 이끌었기 때문이 아닌가. 부끄러운 줄 알아.”
“그래도 안 됩니다. 차라리 여기서 버티다 죽겠습니다.”
백평의 눈을 하소양이 빤히 들여다보았다. 결연한 그의 진심을 확인한 하소양이 조금은 힘이 빠진 음성으로 다시 말한다.
“유손. 너도인가?”
아까 공천록이 양선을 들쳐 업고 복귀했을 때, 그에게 시선을 주려다 눈총을 받았던 이다.
그리고 공천록과 꽤 안면이 있는 자이기도 하다.
“전… 공천록과 함께 가겠습니다.”
“미친!”
주변에서 몇 명이 유손에게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 이상 불만의 폭주는 하소양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 공천록과 유손, 너희 둘이 함께한다. 백평,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이 이상 딴 말은 듣지 않겠다. 확인했나?”
다들 크게 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하소양의 말에 동의했다.
공천록과 유손의 시작은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다른 조원들이 먼저 동굴을 떠나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지 한 시진 정도가 경과한 후였다.
불안해하는 유손과 달리 공천록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었다.
멀리서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러 여기까지 들렸다.
탈출을 개시한 두 무리 중 하나가 육문이 남기고 간 살수들과 마주친 것이 분명하다.
“이봐, 천록이.”
그제야 공천록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한쪽 눈을 뜬다.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싶네그려.”
“형님. 저 믿으시죠?”
“그거야… 당연하지.”
유손은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공천록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그때였다. 유손의 시야에 바닥부터 타고 오르는 무언가가 잡혔다.
“이것은?”
안개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짙은.
“설마, 자네 이걸 기다렸나?”
공천록은 아무런 말없이 유손에게서 떨어진 뒤, 고개를 까딱하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베었다.
잘려진 적의 팔이 핑그르르 회전하면서 눈을 스쳐갔다. 그 뒤로 날아가는 놈의 모가지에는 ‘이건 뭐지?’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혈무(血霧) 사이로 다음 적이 나타났다.
역시나 놈의 얼굴도 황당함 그 자체였다. 놈은 손목과 발목에서 세차게 피를 내뿜으며 엎어지듯 다가왔다.
쉬이잇!
유손의 검이 다가온 적의 안면을 훑고 지나갔다.
사선으로 얼굴이 베인 적이 고통의 상징 같은 주름을 만들며 입을 벌렸다. 검의 끝이 놈의 눈 위 뼈에 걸려 삐끗했으나 그 뼈까지 갈라 버린 덕에 다행히 검을 회수할 수 있었다.
유손은 놈이 비명을 지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목 가운데를 예리하게 자르고 지나간 한 줄기 상처.
이미 울대를 끊어버린 솜씨에 적은 왜 자신이 소리를 지를 수 없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챙! 사사삿!
유손의 앞에는 공천록이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정면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적의 공격은 단 일수로 쳐낸다.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신기하게도 적들은 중심을 잃고 오른쪽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그러고 나면 쉭, 쉭, 쉭. 공천록이 세 번 채도를 휘두르고 지나간다.
다음은 유손의 몫이다. 목줄기와 손목, 발목이 베여 어지러이 흔들리는 적의 숨을 확실하게 끊는 것은.
대신 뒤와 옆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하나 이상하게도 공격의 기미는 없었다.
이렇게 열 명이 넘는 적의 생목숨이 사라졌다.
유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도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 속에서 공천록은 정확히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만약 유손이 지나친 긴장으로 헛기침을 하지 않았다면 아예 적들을 만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왼손을 앞으로 뻗은 채 조심스럽게 걷던 공천록은 유손이 기침함과 동시에 허리에 찬 채도를 뽑았다. 아니나 다를까. 적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둘을 공격해 들어왔다.
막고, 세 번 베고, 넘긴다.
처음에는 공천록이 그냥 적을 떠넘기는 걸로 알았다. 온힘을 짜내어, 비틀거리며 다가온 적의 머리통을 반으로 쳐내자마자 다음 적이 불쑥 나타났다.
얼떨결에 놈의 입에 병기를 쑤셔 박고서야 적의 다리와 팔이 힘없이 쳐져 있음을 알았다.
손목의 동맥에서 쏟아지는 피가 유손의 섶을 적셨고 힘줄이 끊어진 놈의 다리는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공천록은 자신의 힘을 최대한 아끼면서 유손의 검을 통해 적들을 제거해 나가고자 한다.
군더더기 전혀 없는 공천록의 동작.
저 짧고 면이 넓기만 한 채도로 어찌 저런 고명한 수가 나오는 것일까.
분명 주변엔 적들이 더 있을 테지만 어찌하여 공천록과 유손의 사각을 노리고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
몇 가지 의문이 들었음에도 유손은 일단 공천록을 믿고 가보기로 했다.
대략 스물 정도의 적을 베었을까.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졌다.
앞서 걷던 공천록이 한 발 내디딘 상태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뭔가를 느끼기 위해 애쓰는 듯 보였다.
웅∼
공천록의 귀가 살짝 흔들렸다.
우웅∼ 웅웅웅∼ 웅쉬이이잇!
처음은 가느다란 모기소리. 그러다 갑자기 공간을 찢어발기는, 소름끼치는 소리로 바뀐다.
***
슈우우웃! 따다다당! 따다당!
강렬한 바람 소리와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우악스럽게 날아온 철시.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는 채도.
공천록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린다.
예상 못했던 적의 공격이었다. 공천록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푹. 푹.
단단한 지면에 화살의 삼분의 일 정도가 파고 들어갔다. 저격 거리가 꽤 멀었음을 감안할 때 상대의 공력이 일류에 이르렀음이 분명했다.
“형님.”
공천록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에 유손 쪽을 돌아보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공천록의 눈동자가 길 바깥쪽을 향했다.
아직 안개가 가득한 공간. 그 사이로 희미하게 거무스름한 형체가 잡힌다.
푹. 푹. 푹. 따닥.
유손의 관자놀이를 관통한 철시가 그 무거운 덩치를 끌고 길가 나무에 박혔다.
그리고 대여섯 발이 더 날아와 즉사한 유손의 몸에 퍽퍽 들어맞는다.
슈우웃!
차갑게 굳은 공천록의 얼굴. 그 가운데를 노리고 또 한 발의 철시가 세차게 날아왔다.
텅!
공천록은 철시를 보지도 않고 그 방향으로 채도를 휘둘렀다. 두 쪽이 되어 부서지는 철시에서 미세한 조각들이 튀어 공천록의 몸에 부딪친다.
공천록이 몸을 숙여 유손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화살 비는 쉬지 않고 날아와 주변의 나무와 바위, 땅에 박혀 들어갔다.
훅.
공천록이 유손 가까이에 이르러 입김을 불었다.
관자놀이를 강타한 강한 충격에 두 눈알이 다 빠져나왔고 목은 뼈가 부러져 하체의 무게를 살과 근육이 지탱하느라 축 늘어져 있다.
퍽. 퍽!
철시가 유손의 몸에 꽂힐 때마다 시신이 요동쳤다.
“형님도 참…….”
탱!
채도에 맞아 철시 하나가 튕겨져 날아간다.
“믿어주셨는데 이 일을 어째요. 제가 너무 자만했나요.”
강호에 나와서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느낀다.
인간에 대한 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공천록이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마음을 통하는 유일한 ‘인간’은 한 사람뿐이다. 그 외의 인간에게는 관심은 줄지언정 마음속에 자리를 내준 적은 없다. 유손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사신’이라 부르며 배척했던 같은 편 무인들과 달리,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친근함을 보여준 그에 대해 조금은 ‘인간’적인 느낌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뀐다.
“이런 식이란 말이지.”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
공천록은 잠시 유손을 둔 채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상의를 풀어 내렸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근육이 탄탄한 몸이다. 그의 비상식적인 무공의 근원은 아직 밝혀진바 없지만 놀라운 육체적 능력은 바로 잘 발달한 이 근육에서 기인했을 터이다.
공천록은 팔을 교차해 양쪽 어깨부근을 더듬었다. 잠시 후, 어른 가운뎃손가락 길이만 한 쇠침이 뽑혀져 나온다.
한데 공천록은 보았을까. 자신의 양 손에서 하얗고 또 푸른빛이 잠깐 일었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퓽∼
곡사로 쏘아진 철시가 까마득한 점으로 변했다.
“셋째야, 그만.”
용린각의 소이살 명혼청은 소삼살 명혼수에게 철시를 그만 쏘라 명했다.
“둘째 형님. 아직 멀었습니다. 놈에게 당한 큰형님을 생각하면 천 발, 만 발이라도 쏘아주고 싶습니다.”
사살 명혼벽과 오살 명혼백도 고개를 끄덕이며 명혼청을 쳐다본다.
“이만하면 되었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미 고슴도치가 되었을 것이다.”
먼 곳의 기척까지 감지할 정도로 명혼청은 고수였다. 물론 그의 형이자 녹살 명가추의 장남이었던 명혼야는 그보다 더 뛰어난 기재였고.
“아버지께서도 만족하실까요.”
명혼벽의 물음에 명혼청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을 어이없이 잃고 실의에 빠지셨던 분이다. 이제 원수를 갚았으니 다시 일어서실 게다.”
“참… 그 하가장의 흑접(黑蝶)이라는 놈. 진짜로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습니다.”
“어딜 가나 쓰레기 같은 자들은 있는 법. 그가 어떤 자인지, 어느 위치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가문 내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자란 자는 아니겠지. 그러니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또 협조하는 것일 터. 하지만 언젠가 그 정체가 드러나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자이다. 배신자는 어딜 가나 배신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명혼청의 동생들과 주변에 늘어선 십여 명의 강궁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준다.
“가서 원수의 시체를 가져와. 놈들이 형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도려내고 천 개의 조각으로 토막 내어 성벽에 걸어버릴 것이다.”
세 명의 강궁사가 나는 듯 절벽 아래로 뛰었다. 안개가 넘실거리는 속으로 빨려 들어간 그들의 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름처럼 흘러가는 안개와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 아득한 하늘에 비치는 엷은 태양빛까지.
모든 것들이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킨 듯했다.
“응?”
“형님, 왜요.”
명혼청은 세 강궁사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는다.
“집중해! 뭔가 이상하다!”
척! 척척!
이곳에서 명혼청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외침 뒤에 즉각적으로 모두가 각자의 병기를 꺼내 잡는다.
쉬잇―
퍽!
강궁사 한 명이 사라졌다.
텅! 덜렁덜렁.
명혼청 이하 전원의 눈이 한쪽으로 쏠렸다.
피싯! 줄줄줄줄.
몇몇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 개의 철시에 나란히 꽂힌 세 두의 머리통.
마지막으로 방금 그 화살에 직격당한 강궁사까지 도합 네 개의 머리가 같은 화살에 꿰어 바위에 박혔다.
“이곳에 오래 있을 순 없다. 날이 밝기 전에 움직여야 해.”
하소양이 남은 조원들 모두에게 말했다.
“하지만 조장. 다들 지친데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본신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등천의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여기 있어도 죽긴 마찬가지다. 해가 뜨면 이런 곳들이 오히려 노출되지. 안에 갇힌 채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지금 수를 쓰는 것이 유리해.”
하소양의 판단이 현재로선 최선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지금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로군. 안 그런가? 공천록.”
“…….”
조원들이 은근슬쩍 공천록을 흘겼다. 그러나 곧 눈길을 거두고 불만 가득한 표정들을 지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천록을 배척하는 상황에서 하소양은 끝까지 공천록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이들에겐 불만인 걸까.
“현재 총원 열. 아직 정신이 없는 양선을 제외하면 나머진 거동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 명씩 나누어 움직일 것이다. 양선은 내가 챙길 테니 너, 너, 너희 둘은 나와 함께, 너, 너, 너, 너희 셋이 함께, 나머지 셋이 또 같이 간다. 이상.”
“조장.”
백평이란 자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전 싫습니다. 저 불길한 녀석과는 절대 같이 못갑니다.”
그의 손가락이 공천록을 가리킨다.
“저놈이에요. 우릴 죽음으로 몰아간 원흉이. 이번이 벌써…….”
“그만!”
하소양의 음성에는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따위 미신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또 너희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누구 덕분이지? 공천록이 이곳으로 한 명, 한 명, 이끌었기 때문이 아닌가. 부끄러운 줄 알아.”
“그래도 안 됩니다. 차라리 여기서 버티다 죽겠습니다.”
백평의 눈을 하소양이 빤히 들여다보았다. 결연한 그의 진심을 확인한 하소양이 조금은 힘이 빠진 음성으로 다시 말한다.
“유손. 너도인가?”
아까 공천록이 양선을 들쳐 업고 복귀했을 때, 그에게 시선을 주려다 눈총을 받았던 이다.
그리고 공천록과 꽤 안면이 있는 자이기도 하다.
“전… 공천록과 함께 가겠습니다.”
“미친!”
주변에서 몇 명이 유손에게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 더 이상 불만의 폭주는 하소양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 공천록과 유손, 너희 둘이 함께한다. 백평,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이 이상 딴 말은 듣지 않겠다. 확인했나?”
다들 크게 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하소양의 말에 동의했다.
공천록과 유손의 시작은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다른 조원들이 먼저 동굴을 떠나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지 한 시진 정도가 경과한 후였다.
불안해하는 유손과 달리 공천록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었다.
멀리서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러 여기까지 들렸다.
탈출을 개시한 두 무리 중 하나가 육문이 남기고 간 살수들과 마주친 것이 분명하다.
“이봐, 천록이.”
그제야 공천록이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한쪽 눈을 뜬다.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싶네그려.”
“형님. 저 믿으시죠?”
“그거야… 당연하지.”
유손은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공천록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그때였다. 유손의 시야에 바닥부터 타고 오르는 무언가가 잡혔다.
“이것은?”
안개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짙은.
“설마, 자네 이걸 기다렸나?”
공천록은 아무런 말없이 유손에게서 떨어진 뒤, 고개를 까딱하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베었다.
잘려진 적의 팔이 핑그르르 회전하면서 눈을 스쳐갔다. 그 뒤로 날아가는 놈의 모가지에는 ‘이건 뭐지?’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혈무(血霧) 사이로 다음 적이 나타났다.
역시나 놈의 얼굴도 황당함 그 자체였다. 놈은 손목과 발목에서 세차게 피를 내뿜으며 엎어지듯 다가왔다.
쉬이잇!
유손의 검이 다가온 적의 안면을 훑고 지나갔다.
사선으로 얼굴이 베인 적이 고통의 상징 같은 주름을 만들며 입을 벌렸다. 검의 끝이 놈의 눈 위 뼈에 걸려 삐끗했으나 그 뼈까지 갈라 버린 덕에 다행히 검을 회수할 수 있었다.
유손은 놈이 비명을 지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목 가운데를 예리하게 자르고 지나간 한 줄기 상처.
이미 울대를 끊어버린 솜씨에 적은 왜 자신이 소리를 지를 수 없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챙! 사사삿!
유손의 앞에는 공천록이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정면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적의 공격은 단 일수로 쳐낸다.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신기하게도 적들은 중심을 잃고 오른쪽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그러고 나면 쉭, 쉭, 쉭. 공천록이 세 번 채도를 휘두르고 지나간다.
다음은 유손의 몫이다. 목줄기와 손목, 발목이 베여 어지러이 흔들리는 적의 숨을 확실하게 끊는 것은.
대신 뒤와 옆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었다. 하나 이상하게도 공격의 기미는 없었다.
이렇게 열 명이 넘는 적의 생목숨이 사라졌다.
유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도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 속에서 공천록은 정확히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만약 유손이 지나친 긴장으로 헛기침을 하지 않았다면 아예 적들을 만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왼손을 앞으로 뻗은 채 조심스럽게 걷던 공천록은 유손이 기침함과 동시에 허리에 찬 채도를 뽑았다. 아니나 다를까. 적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둘을 공격해 들어왔다.
막고, 세 번 베고, 넘긴다.
처음에는 공천록이 그냥 적을 떠넘기는 걸로 알았다. 온힘을 짜내어, 비틀거리며 다가온 적의 머리통을 반으로 쳐내자마자 다음 적이 불쑥 나타났다.
얼떨결에 놈의 입에 병기를 쑤셔 박고서야 적의 다리와 팔이 힘없이 쳐져 있음을 알았다.
손목의 동맥에서 쏟아지는 피가 유손의 섶을 적셨고 힘줄이 끊어진 놈의 다리는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공천록은 자신의 힘을 최대한 아끼면서 유손의 검을 통해 적들을 제거해 나가고자 한다.
군더더기 전혀 없는 공천록의 동작.
저 짧고 면이 넓기만 한 채도로 어찌 저런 고명한 수가 나오는 것일까.
분명 주변엔 적들이 더 있을 테지만 어찌하여 공천록과 유손의 사각을 노리고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
몇 가지 의문이 들었음에도 유손은 일단 공천록을 믿고 가보기로 했다.
대략 스물 정도의 적을 베었을까.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졌다.
앞서 걷던 공천록이 한 발 내디딘 상태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뭔가를 느끼기 위해 애쓰는 듯 보였다.
웅∼
공천록의 귀가 살짝 흔들렸다.
우웅∼ 웅웅웅∼ 웅쉬이이잇!
처음은 가느다란 모기소리. 그러다 갑자기 공간을 찢어발기는, 소름끼치는 소리로 바뀐다.
슈우우웃! 따다다당! 따다당!
강렬한 바람 소리와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우악스럽게 날아온 철시.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는 채도.
공천록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린다.
예상 못했던 적의 공격이었다. 공천록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푹. 푹.
단단한 지면에 화살의 삼분의 일 정도가 파고 들어갔다. 저격 거리가 꽤 멀었음을 감안할 때 상대의 공력이 일류에 이르렀음이 분명했다.
“형님.”
공천록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에 유손 쪽을 돌아보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공천록의 눈동자가 길 바깥쪽을 향했다.
아직 안개가 가득한 공간. 그 사이로 희미하게 거무스름한 형체가 잡힌다.
푹. 푹. 푹. 따닥.
유손의 관자놀이를 관통한 철시가 그 무거운 덩치를 끌고 길가 나무에 박혔다.
그리고 대여섯 발이 더 날아와 즉사한 유손의 몸에 퍽퍽 들어맞는다.
슈우웃!
차갑게 굳은 공천록의 얼굴. 그 가운데를 노리고 또 한 발의 철시가 세차게 날아왔다.
텅!
공천록은 철시를 보지도 않고 그 방향으로 채도를 휘둘렀다. 두 쪽이 되어 부서지는 철시에서 미세한 조각들이 튀어 공천록의 몸에 부딪친다.
공천록이 몸을 숙여 유손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화살 비는 쉬지 않고 날아와 주변의 나무와 바위, 땅에 박혀 들어갔다.
훅.
공천록이 유손 가까이에 이르러 입김을 불었다.
관자놀이를 강타한 강한 충격에 두 눈알이 다 빠져나왔고 목은 뼈가 부러져 하체의 무게를 살과 근육이 지탱하느라 축 늘어져 있다.
퍽. 퍽!
철시가 유손의 몸에 꽂힐 때마다 시신이 요동쳤다.
“형님도 참…….”
탱!
채도에 맞아 철시 하나가 튕겨져 날아간다.
“믿어주셨는데 이 일을 어째요. 제가 너무 자만했나요.”
강호에 나와서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느낀다.
인간에 대한 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공천록이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마음을 통하는 유일한 ‘인간’은 한 사람뿐이다. 그 외의 인간에게는 관심은 줄지언정 마음속에 자리를 내준 적은 없다. 유손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사신’이라 부르며 배척했던 같은 편 무인들과 달리,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친근함을 보여준 그에 대해 조금은 ‘인간’적인 느낌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뀐다.
“이런 식이란 말이지.”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
공천록은 잠시 유손을 둔 채 나무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상의를 풀어 내렸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근육이 탄탄한 몸이다. 그의 비상식적인 무공의 근원은 아직 밝혀진바 없지만 놀라운 육체적 능력은 바로 잘 발달한 이 근육에서 기인했을 터이다.
공천록은 팔을 교차해 양쪽 어깨부근을 더듬었다. 잠시 후, 어른 가운뎃손가락 길이만 한 쇠침이 뽑혀져 나온다.
한데 공천록은 보았을까. 자신의 양 손에서 하얗고 또 푸른빛이 잠깐 일었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퓽∼
곡사로 쏘아진 철시가 까마득한 점으로 변했다.
“셋째야, 그만.”
용린각의 소이살 명혼청은 소삼살 명혼수에게 철시를 그만 쏘라 명했다.
“둘째 형님. 아직 멀었습니다. 놈에게 당한 큰형님을 생각하면 천 발, 만 발이라도 쏘아주고 싶습니다.”
사살 명혼벽과 오살 명혼백도 고개를 끄덕이며 명혼청을 쳐다본다.
“이만하면 되었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미 고슴도치가 되었을 것이다.”
먼 곳의 기척까지 감지할 정도로 명혼청은 고수였다. 물론 그의 형이자 녹살 명가추의 장남이었던 명혼야는 그보다 더 뛰어난 기재였고.
“아버지께서도 만족하실까요.”
명혼벽의 물음에 명혼청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을 어이없이 잃고 실의에 빠지셨던 분이다. 이제 원수를 갚았으니 다시 일어서실 게다.”
“참… 그 하가장의 흑접(黑蝶)이라는 놈. 진짜로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습니다.”
“어딜 가나 쓰레기 같은 자들은 있는 법. 그가 어떤 자인지, 어느 위치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가문 내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자란 자는 아니겠지. 그러니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또 협조하는 것일 터. 하지만 언젠가 그 정체가 드러나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자이다. 배신자는 어딜 가나 배신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명혼청의 동생들과 주변에 늘어선 십여 명의 강궁사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준다.
“가서 원수의 시체를 가져와. 놈들이 형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도려내고 천 개의 조각으로 토막 내어 성벽에 걸어버릴 것이다.”
세 명의 강궁사가 나는 듯 절벽 아래로 뛰었다. 안개가 넘실거리는 속으로 빨려 들어간 그들의 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름처럼 흘러가는 안개와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울음, 아득한 하늘에 비치는 엷은 태양빛까지.
모든 것들이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킨 듯했다.
“응?”
“형님, 왜요.”
명혼청은 세 강궁사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는다.
“집중해! 뭔가 이상하다!”
척! 척척!
이곳에서 명혼청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외침 뒤에 즉각적으로 모두가 각자의 병기를 꺼내 잡는다.
쉬잇―
퍽!
강궁사 한 명이 사라졌다.
텅! 덜렁덜렁.
명혼청 이하 전원의 눈이 한쪽으로 쏠렸다.
피싯! 줄줄줄줄.
몇몇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한 개의 철시에 나란히 꽂힌 세 두의 머리통.
마지막으로 방금 그 화살에 직격당한 강궁사까지 도합 네 개의 머리가 같은 화살에 꿰어 바위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