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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이들은 잔인한 짓을 평소에 숨 쉬듯 저지르는 사파인들이다. 웬만큼 역겨운 광경을 보더라도 눈썹 한 번 일그러지지 않을 정도의 강심장들이란 말이다.
한데 지금 이들의 그 강심장은 미친 듯 박동했다. 상상 이상의 잔혹한 수법에 침이 넘어가고 이마에 땀이 솟는다.
터벅. 터벅.
어느덧 이곳 절벽 위까지 안개가 차지했다. 바닥에 물결처럼 깔리기 시작한 안개는 빠르게 공간을 잠식해 나간다.
터벅, 터벅.
팽!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강궁사들이 철시를 날렸다.
슈우웃.
“…….”
파파파파팟!
퍽, 퍼걱, 퍽퍽!
철시들이 쏘아졌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되돌아와 그 주인들의 머리를 비산시켰다.
풀썩. 털썩.
으드득.
명혼청이 이를 갈았다. 상대는 분명 자신들의 원수인 그놈이다. 놈은 수백이 넘는 살마궁전에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올라왔다. 그것도 무척 빠른 시간에.
“노오옴! 형님의 원수! 모습을 드러내라!”
터벅, 터벅.
안개를 헤치고 사람의 형상이 그 자리에 비쳤다.
핑―!
누군가가 또 살을 날렸다.
턱, 쒜에엑!
터어엉!
삼살 명혼수의 이마가 움푹 들어갔다. 그의 뒤통수 절반이 날아가고 그곳엔 철시의 끝이 뇌수를 머금고 파르르 떨린다.
“셋째 형님!”
“그만. 움직이지 마.”
안개 속에서 마귀의 음성이 울렸다.
터벅, 터벅.
느릿하게 걸어 나온 마귀의 정체는 공천록. 죽인 적의 활을 들고 선 그의 형상은 마치 명계의 나찰(羅刹)을 연상케 했다.
“원수여! 복수의 검을 받아라!”
오살 명혼백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여엄∼병. 미친 거 아냐? 너나 나나 전쟁 중인데 어디서 복수를 운운해.”
스스스스.
공천록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입과 눈에서 붉은 연기가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서로 죽자고 합의해서 뒤지는 건데. 그럴 땐 그냥 짜증나고 화난다고 하는 거 아닌가?”
투둑. 우두둑.
공천록이 다시 걸었다.
“이 새끼가아아아!”
그를 향해 녹살의 남은 자식들과 강궁사들이 거세게 공격을 개시한다.
하가장 본가는 크다. 아니, 단순히 크다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장(莊)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한 개 성(成)급 규모이며 상주인구는 팔백여 호(戶)에 이른다.
하가장 외곽은 이중의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성까지 이르는 길은 대단위 인원이 한꺼번에 진입하기 불가능한 구조로 이루어져 강호무림의 적대적 방파뿐 아니라, 공성 병기를 사용하는 군(軍)도 쉬이 공략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패자로서의 여유와 부유한 재정을 바탕으로, 하가장은 늘 시끌벅적한 시장을 연상케 할 만큼 활기찬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곳은 대낮에도 어둠이 드리웠다 여겨질 정도로 기이한 침묵과 우울함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다.
그런 우중충한 무언가가 지독히 내려앉은 하가장 내성의 어느 드넓은 연무장.
오늘따라 간만에 많은 이들이 모인 채 중앙에 위치한 단상을 지켜보고 있다.
단상 위에는 세 명의 남자가 몸을 결박당한 상태로 무릎을 꿇린 채 있었다. 그들의 뒤로 대검을 든 남자 셋이 서 있었고.
“죄인 하명보, 진융산, 하소양! 할 말이 있는가?”
“억울하오!”
반백의 사내 하명보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 호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단상 아래에서 뒷짐을 지고 선, 문사복 차림의 중년인이 호통을 친다.
“본인의 잘못이 무엇이오? 명백하게 반대했던 작전을 강행하라 지시한 이는 대공자였소. 어려운 일을 가능케 하라는 부당한 지시 또한 대공자의 입에서 나왔소. 그게 내 죽을죄라면 하가의 높은 분들 중에 살아남을 목숨이 몇이나 있겠소이까!”
그제야 운집한 군중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사라진다.
“틀렸다. 너의 죄는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으로 거짓된 정보에 현혹되어 신중을 기하자는 이들을 오히려 불의한 자들로 음해하고, 충성스러운 하가장의 용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죽도록 방치한 것이다. 이번에도 너의 위선과 교만, 이기심으로 귀한 목숨들 수십을 잃었으며 하가장 전체의 사기가 바닥까지 내려앉았노라.”
“이익!”
하명보는 뭐라 더 얘기하려다 결국 이를 악물고 포기한다.
“죄인 진융산. 너는 적풍단 이십구조의 조장으로서 동료를 시기하여 그를 제거코자 거짓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로 인해 삼십칠조의 용사들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게 되었도다. 이를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인즉, 인정하느냐?”
얼굴 가득 문신을 새긴 장년인 진융산이 힘없이 입을 연다.
“시기한 적도, 제거하고자 했던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윗분들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순간 군중들 대부분이 ‘우―’하는 비난을 퍼붓는다. 절반은 진융산을, 절반은 그에게 동조해 하가장 수뇌들을 향한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죄인 하소양. 너는 홀로 생을 도모코자 너를 따르고 믿었던 조원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쳤다. 하가의 법은 전장에서 동료를 버린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음을 잘 알 터이니 달게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홀로? 생을 도모해? 도망?”
하소양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문사복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네 명의 신선 같은 노인이 봉황이 조각된 의자에 앉아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노인 중 하나가 문사복 중년인을 향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사복 중년인의 손이 번쩍 들린 뒤 강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부웅―!
세 개의 대검이 동시에 휘둘러졌다.
턱! 턱! 턱!
뒷목에 날이 부딪치는 소리.
피가 하늘 높이 용솟음치고 세 두의 머리통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곧 추락한다.
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진 하소양의 머리는 잘린 단면에서 걸쭉한 핏물을 줄줄 뽑으며 한참을 굴러갔다. 그의 머리가 구름을 멈췄을 때, 아직 감지 못한 눈이 파르르 떨리는 광경을 본 몇몇이 이를 악물고 얼굴을 돌렸다.
끔찍한 처형을 지켜본 군중들은 한동안 단상 위의 시신과 잘린 머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위치에서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몰던 이와 그 전장에서 함께 싸우던 이들이 아니던가.
“해산!”
단상에 막 올라간 장대한 체구의 무인이 크게 소리쳤다. 적풍단의 단주 하태보였다.
그의 해산 명령에 따라 처형식에 참석했던 적풍단 전체 인원은 힘이 잔뜩 빠진 걸음으로 각자의 장소로 이동한다.
쉬이이잉∼
처형식이 끝나고 죄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적풍단은 모두 빠져나갔지만 그 외 여러 인물들이 남아 자기들끼리 수군대길 주저하지 않는다.
“억울하겠어.”
“나라면 목이 날아가기 전에 침이라도 뱉었을 걸.”
“어쩌겠나. 가법(家法)이 지엄한 것을.”
“쯧쯧, 어쩌다가 우리 하가장이…….”
남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처형당한 세 명을 동정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분위기였다. 본가 수뇌의 결정과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에 반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 육문연합과의 패권 전쟁은 하가장의 단결력을 상당히 희석시켰다. 이제는 하가장 내부에서조차 간간히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일층의 절반이 지하로 들어간, 전형적인 형옥(刑獄) 형태의 독방. 외부로 난 유일한 창문의 쇠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사람.
그는 공천록이었다.
***
여느 때와는 달리 조금은 우울한 얼굴로 연무장에서 벌어진 공개 처형을 쭉 지켜보았던 공천록은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평소 머리 감을 때만 빼고 한시도 머리에서 풀어놓지 않았던 더러운 천과 흑색 피풍, 마찬가지로 늘 그의 허리에 걸려있던 채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더부룩하게 난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고, 푸른색 무복과 요대 등 무인의 상징이 아닌 하얀 수의를 입은 채,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군데군데 피 묻은 천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단상이 치워지고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창가에서 떨어져 축축한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는다.
하소양은 닷새 전, 결국 모든 수하를 잃고 간신히 본가로 복귀했다. 그 하루 뒤 공천록이 나타났고.
결과는 보다시피 공천록은 형옥에 갇히고 하소양은 처형되는 것으로 끝났다.
무엇을 위해 싸웠고 누구를 위해 죽어야만 했는가. 당장 파리보다 못한 목숨으로 취급받는 용병들과 하씨의 방계 출신들이지만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 억울함은 인간인 이상 똑같이 느낄 것이다.
하지만 공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하소양의 머리가 날아갈 때 잠깐 가라앉았던 표정은 아마도 인간 하소양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똑, 똑.
굳게 닫혀 있던 독방의 문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나 공천록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봐, 사신(死神). 자나?”
형옥을 관리하는 늙은 하씨는 하소양과 같은 방계 집안이다.
공천록이 톡톡 바닥을 두드려 깨어 있음을 알렸다.
“자넬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시네. 나올 준비를… 아이쿠, 공자(公子)님 이 안까지 오시다니요. 더럽고 냄새나는 곳입니다. 아고.”
공천록을 데려가려 한 모양인 하씨 노인은 방문자라는 이가 직접 형옥 안까지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듯했다.
잠시 후, 하씨 노인이 독방의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먼지를 흘리며 삐그덕, 삐그덕 열렸다.
공천록은 여전히 앉은 상태로 독방에 들어오는 이를 비스듬하게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열린 문 뒤로 한 명의 중년인과 초로의 노인이 보였다. 노인 하씨는 안절부절못하고 공천록과 중년인을 번갈아 보며 머리만 긁을 뿐이다.
“제가 청할 때까지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중년인의 입에서 의외로 경어가 튀어나온다. 형옥을 지키는 방계 노인에게 공대할 만한 선량한 ‘공자’가 하가에 있기는 있던가?
“볼일 다 보시거든 불러 주십시오. 셋째 공자님.”
하씨 노인이 공손히 몸을 낮추고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문이 다시 삐거덕거리며 닫혔다.
공천록을 마주하고 있는 중년인.
정갈한 옷매무새에 멋진 콧수염을 기르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꽤 고귀해 보이는 남자다.
이 하가장 본가에서 셋째 공자라 불릴 수 있는 남자라면 딱 한 사람, 장주 하중검의 삼남(三男) 하용보(何龍寶)뿐.
그가 왜 이곳을?
잠시 둘 사이엔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를 처음 보겠군.”
“…….”
“사신이라지?”
사신(死神). 듣기에 따라선 너무나도 불길한 별명이다.
“그게 참… 적이 아닌 같은 편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신이라.”
하용보가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공천록.”
자신을 부르자 공천록이 눈을 들어 하용보와 시선을 맞추었다.
“무엇하나 알 수 없는 놈.”
공천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용보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우리 하가장에 낭인(浪人)의 신분으로 용병 모집에 자원한 게 벌써 넉 달 전. 그 이후, 세 번의 작은 전투와 두 번의 큰 전투, 여러 차례의 수색 작전 및 섬멸전에 참가했고. 흠… 보자. 내로라하는 무인들도 그 정도 출전이면 어디 제대로 다쳐 뻗었을 텐데, 넌 항상 회복 가능한 상처만 입고 돌아왔어. 그리고 같이 출전했던 동료 무인들은 모두 사망. 홀로 돌아왔거나 같이 돌아온 동료가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지. 아, 이번엔 좀 다르네. 먼저 복귀한 조장이 참수되었으니.”
공천록의 눈을 들여다보자면 ‘아, 그런가요?’ 라는 듯한 무심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네게 붙은 별명이 사신. 함께한 아군까지 모조리 죽여 버린다나? 지금까지는 그대로 이루어졌고… 훗.”
공천록의 입가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아주 미세하게 살짝 흔들리는 것이 언뜻 웃음을 참는 것만 같다.
“말 할 줄 모르나?”
“할 줄은 아는데 알아먹을 인간들이 없어서요.”
드디어 공천록의 입이 열렸다.
“왜 없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다 죽었으니까. 그런데 급료는 언제 나옵니까?”
뜬금없이 급료 타령이다.
“이곳에 왜 갇혔다고 생각하나.”
“죽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명분이 없어서겠죠.”
“왜 죽어야 하지?”
하용보의 되물음에 공천록이 머리를 긁는다.
“거기까지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요. 당장 달려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발가락이라도 핥아야 안 되겠습니까.”
“크크크크. 마음에 드는 대답이로군.”
하용보가 자신의 머리를 콩콩 치며 웃는다.
이들은 잔인한 짓을 평소에 숨 쉬듯 저지르는 사파인들이다. 웬만큼 역겨운 광경을 보더라도 눈썹 한 번 일그러지지 않을 정도의 강심장들이란 말이다.
한데 지금 이들의 그 강심장은 미친 듯 박동했다. 상상 이상의 잔혹한 수법에 침이 넘어가고 이마에 땀이 솟는다.
터벅. 터벅.
어느덧 이곳 절벽 위까지 안개가 차지했다. 바닥에 물결처럼 깔리기 시작한 안개는 빠르게 공간을 잠식해 나간다.
터벅, 터벅.
팽!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강궁사들이 철시를 날렸다.
슈우웃.
“…….”
파파파파팟!
퍽, 퍼걱, 퍽퍽!
철시들이 쏘아졌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되돌아와 그 주인들의 머리를 비산시켰다.
풀썩. 털썩.
으드득.
명혼청이 이를 갈았다. 상대는 분명 자신들의 원수인 그놈이다. 놈은 수백이 넘는 살마궁전에도 죽지 않고 이곳으로 올라왔다. 그것도 무척 빠른 시간에.
“노오옴! 형님의 원수! 모습을 드러내라!”
터벅, 터벅.
안개를 헤치고 사람의 형상이 그 자리에 비쳤다.
핑―!
누군가가 또 살을 날렸다.
턱, 쒜에엑!
터어엉!
삼살 명혼수의 이마가 움푹 들어갔다. 그의 뒤통수 절반이 날아가고 그곳엔 철시의 끝이 뇌수를 머금고 파르르 떨린다.
“셋째 형님!”
“그만. 움직이지 마.”
안개 속에서 마귀의 음성이 울렸다.
터벅, 터벅.
느릿하게 걸어 나온 마귀의 정체는 공천록. 죽인 적의 활을 들고 선 그의 형상은 마치 명계의 나찰(羅刹)을 연상케 했다.
“원수여! 복수의 검을 받아라!”
오살 명혼백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여엄∼병. 미친 거 아냐? 너나 나나 전쟁 중인데 어디서 복수를 운운해.”
스스스스.
공천록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입과 눈에서 붉은 연기가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서로 죽자고 합의해서 뒤지는 건데. 그럴 땐 그냥 짜증나고 화난다고 하는 거 아닌가?”
투둑. 우두둑.
공천록이 다시 걸었다.
“이 새끼가아아아!”
그를 향해 녹살의 남은 자식들과 강궁사들이 거세게 공격을 개시한다.
하가장 본가는 크다. 아니, 단순히 크다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장(莊)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한 개 성(成)급 규모이며 상주인구는 팔백여 호(戶)에 이른다.
하가장 외곽은 이중의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성까지 이르는 길은 대단위 인원이 한꺼번에 진입하기 불가능한 구조로 이루어져 강호무림의 적대적 방파뿐 아니라, 공성 병기를 사용하는 군(軍)도 쉬이 공략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패자로서의 여유와 부유한 재정을 바탕으로, 하가장은 늘 시끌벅적한 시장을 연상케 할 만큼 활기찬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곳은 대낮에도 어둠이 드리웠다 여겨질 정도로 기이한 침묵과 우울함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다.
그런 우중충한 무언가가 지독히 내려앉은 하가장 내성의 어느 드넓은 연무장.
오늘따라 간만에 많은 이들이 모인 채 중앙에 위치한 단상을 지켜보고 있다.
단상 위에는 세 명의 남자가 몸을 결박당한 상태로 무릎을 꿇린 채 있었다. 그들의 뒤로 대검을 든 남자 셋이 서 있었고.
“죄인 하명보, 진융산, 하소양! 할 말이 있는가?”
“억울하오!”
반백의 사내 하명보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 호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단상 아래에서 뒷짐을 지고 선, 문사복 차림의 중년인이 호통을 친다.
“본인의 잘못이 무엇이오? 명백하게 반대했던 작전을 강행하라 지시한 이는 대공자였소. 어려운 일을 가능케 하라는 부당한 지시 또한 대공자의 입에서 나왔소. 그게 내 죽을죄라면 하가의 높은 분들 중에 살아남을 목숨이 몇이나 있겠소이까!”
그제야 운집한 군중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사라진다.
“틀렸다. 너의 죄는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으로 거짓된 정보에 현혹되어 신중을 기하자는 이들을 오히려 불의한 자들로 음해하고, 충성스러운 하가장의 용사들을 사지로 내몰아 죽도록 방치한 것이다. 이번에도 너의 위선과 교만, 이기심으로 귀한 목숨들 수십을 잃었으며 하가장 전체의 사기가 바닥까지 내려앉았노라.”
“이익!”
하명보는 뭐라 더 얘기하려다 결국 이를 악물고 포기한다.
“죄인 진융산. 너는 적풍단 이십구조의 조장으로서 동료를 시기하여 그를 제거코자 거짓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로 인해 삼십칠조의 용사들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게 되었도다. 이를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인즉, 인정하느냐?”
얼굴 가득 문신을 새긴 장년인 진융산이 힘없이 입을 연다.
“시기한 적도, 제거하고자 했던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윗분들께서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순간 군중들 대부분이 ‘우―’하는 비난을 퍼붓는다. 절반은 진융산을, 절반은 그에게 동조해 하가장 수뇌들을 향한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죄인 하소양. 너는 홀로 생을 도모코자 너를 따르고 믿었던 조원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도망쳤다. 하가의 법은 전장에서 동료를 버린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음을 잘 알 터이니 달게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홀로? 생을 도모해? 도망?”
하소양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문사복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네 명의 신선 같은 노인이 봉황이 조각된 의자에 앉아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노인 중 하나가 문사복 중년인을 향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사복 중년인의 손이 번쩍 들린 뒤 강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부웅―!
세 개의 대검이 동시에 휘둘러졌다.
턱! 턱! 턱!
뒷목에 날이 부딪치는 소리.
피가 하늘 높이 용솟음치고 세 두의 머리통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가 곧 추락한다.
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진 하소양의 머리는 잘린 단면에서 걸쭉한 핏물을 줄줄 뽑으며 한참을 굴러갔다. 그의 머리가 구름을 멈췄을 때, 아직 감지 못한 눈이 파르르 떨리는 광경을 본 몇몇이 이를 악물고 얼굴을 돌렸다.
끔찍한 처형을 지켜본 군중들은 한동안 단상 위의 시신과 잘린 머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위치에서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몰던 이와 그 전장에서 함께 싸우던 이들이 아니던가.
“해산!”
단상에 막 올라간 장대한 체구의 무인이 크게 소리쳤다. 적풍단의 단주 하태보였다.
그의 해산 명령에 따라 처형식에 참석했던 적풍단 전체 인원은 힘이 잔뜩 빠진 걸음으로 각자의 장소로 이동한다.
쉬이이잉∼
처형식이 끝나고 죄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적풍단은 모두 빠져나갔지만 그 외 여러 인물들이 남아 자기들끼리 수군대길 주저하지 않는다.
“억울하겠어.”
“나라면 목이 날아가기 전에 침이라도 뱉었을 걸.”
“어쩌겠나. 가법(家法)이 지엄한 것을.”
“쯧쯧, 어쩌다가 우리 하가장이…….”
남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처형당한 세 명을 동정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분위기였다. 본가 수뇌의 결정과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에 반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근년, 육문연합과의 패권 전쟁은 하가장의 단결력을 상당히 희석시켰다. 이제는 하가장 내부에서조차 간간히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일층의 절반이 지하로 들어간, 전형적인 형옥(刑獄) 형태의 독방. 외부로 난 유일한 창문의 쇠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사람.
그는 공천록이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조금은 우울한 얼굴로 연무장에서 벌어진 공개 처형을 쭉 지켜보았던 공천록은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평소 머리 감을 때만 빼고 한시도 머리에서 풀어놓지 않았던 더러운 천과 흑색 피풍, 마찬가지로 늘 그의 허리에 걸려있던 채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더부룩하게 난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고, 푸른색 무복과 요대 등 무인의 상징이 아닌 하얀 수의를 입은 채,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군데군데 피 묻은 천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단상이 치워지고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창가에서 떨어져 축축한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는다.
하소양은 닷새 전, 결국 모든 수하를 잃고 간신히 본가로 복귀했다. 그 하루 뒤 공천록이 나타났고.
결과는 보다시피 공천록은 형옥에 갇히고 하소양은 처형되는 것으로 끝났다.
무엇을 위해 싸웠고 누구를 위해 죽어야만 했는가. 당장 파리보다 못한 목숨으로 취급받는 용병들과 하씨의 방계 출신들이지만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 억울함은 인간인 이상 똑같이 느낄 것이다.
하지만 공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하소양의 머리가 날아갈 때 잠깐 가라앉았던 표정은 아마도 인간 하소양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똑, 똑.
굳게 닫혀 있던 독방의 문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나 공천록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봐, 사신(死神). 자나?”
형옥을 관리하는 늙은 하씨는 하소양과 같은 방계 집안이다.
공천록이 톡톡 바닥을 두드려 깨어 있음을 알렸다.
“자넬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시네. 나올 준비를… 아이쿠, 공자(公子)님 이 안까지 오시다니요. 더럽고 냄새나는 곳입니다. 아고.”
공천록을 데려가려 한 모양인 하씨 노인은 방문자라는 이가 직접 형옥 안까지 들어오자 화들짝 놀란 듯했다.
잠시 후, 하씨 노인이 독방의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먼지를 흘리며 삐그덕, 삐그덕 열렸다.
공천록은 여전히 앉은 상태로 독방에 들어오는 이를 비스듬하게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열린 문 뒤로 한 명의 중년인과 초로의 노인이 보였다. 노인 하씨는 안절부절못하고 공천록과 중년인을 번갈아 보며 머리만 긁을 뿐이다.
“제가 청할 때까지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중년인의 입에서 의외로 경어가 튀어나온다. 형옥을 지키는 방계 노인에게 공대할 만한 선량한 ‘공자’가 하가에 있기는 있던가?
“볼일 다 보시거든 불러 주십시오. 셋째 공자님.”
하씨 노인이 공손히 몸을 낮추고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문이 다시 삐거덕거리며 닫혔다.
공천록을 마주하고 있는 중년인.
정갈한 옷매무새에 멋진 콧수염을 기르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꽤 고귀해 보이는 남자다.
이 하가장 본가에서 셋째 공자라 불릴 수 있는 남자라면 딱 한 사람, 장주 하중검의 삼남(三男) 하용보(何龍寶)뿐.
그가 왜 이곳을?
잠시 둘 사이엔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를 처음 보겠군.”
“…….”
“사신이라지?”
사신(死神). 듣기에 따라선 너무나도 불길한 별명이다.
“그게 참… 적이 아닌 같은 편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신이라.”
하용보가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공천록.”
자신을 부르자 공천록이 눈을 들어 하용보와 시선을 맞추었다.
“무엇하나 알 수 없는 놈.”
공천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용보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우리 하가장에 낭인(浪人)의 신분으로 용병 모집에 자원한 게 벌써 넉 달 전. 그 이후, 세 번의 작은 전투와 두 번의 큰 전투, 여러 차례의 수색 작전 및 섬멸전에 참가했고. 흠… 보자. 내로라하는 무인들도 그 정도 출전이면 어디 제대로 다쳐 뻗었을 텐데, 넌 항상 회복 가능한 상처만 입고 돌아왔어. 그리고 같이 출전했던 동료 무인들은 모두 사망. 홀로 돌아왔거나 같이 돌아온 동료가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지. 아, 이번엔 좀 다르네. 먼저 복귀한 조장이 참수되었으니.”
공천록의 눈을 들여다보자면 ‘아, 그런가요?’ 라는 듯한 무심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네게 붙은 별명이 사신. 함께한 아군까지 모조리 죽여 버린다나? 지금까지는 그대로 이루어졌고… 훗.”
공천록의 입가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아주 미세하게 살짝 흔들리는 것이 언뜻 웃음을 참는 것만 같다.
“말 할 줄 모르나?”
“할 줄은 아는데 알아먹을 인간들이 없어서요.”
드디어 공천록의 입이 열렸다.
“왜 없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다 죽었으니까. 그런데 급료는 언제 나옵니까?”
뜬금없이 급료 타령이다.
“이곳에 왜 갇혔다고 생각하나.”
“죽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명분이 없어서겠죠.”
“왜 죽어야 하지?”
하용보의 되물음에 공천록이 머리를 긁는다.
“거기까지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요. 당장 달려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발가락이라도 핥아야 안 되겠습니까.”
“크크크크. 마음에 드는 대답이로군.”
하용보가 자신의 머리를 콩콩 치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