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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처음에.”
“…….”
“널 주의 깊게 보라던 이가 둘 있었다. 하나는 지난달 소호 근처에서 죽었고 하나는 오늘 여기서 죽었지.”
아마도 적운단의 양계와 적풍단의 하소양을 말하는 듯했다.
“둘 다 예전부터 나와 함께 전장을 거닐던 녀석들이었어. 한 위대한 무인의 그림자를 좇으면서.”
“뭐, 하 조장의 억울한 죽음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웃기지 마. 그런 눈을 하고서 무슨.”
하용보가 짜증난다는 투로 말했다.
“어쨌거나 난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너에게 살짝 관심을 두었다. 아주 살짝. 그래서 결과가 이 모양이지. 젠장할.”
고귀한 신분인 하용보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오자 공천록이 가볍게 휘파람을 분다.
“넌 강해. 그냥 낭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니 기분 나빠 하지 마라. 어떤 개 같은 놈의 아들내미가 너의 강함을 꼭꼭 숨겨두며 주변인들의 입단속을 시켰다. 알고는 있나?”
“그러니까 그분의 발가락이라도.......”
하용보는 느긋한 공천록의 태도에 화가 난 듯했다.
“이번 건도 그래. 어떻게 한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팔을 다 자르고 너도 처리할 묘안을 꾸몄어. 절반은 성공했구먼. 나만 반병신이 되었으니까.”
“아프신 분 치고는 상당히 멀쩡해 보이십니다.”
“아, 니미럴. 말로는 못 당하겠군.”
하용보가 공천록의 정면에 섰다.
“난 늘 그랬듯 외성의 성벽 위를 걷고 있었어. 해가 지기 직전, 끝없어 보이는 대지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걸으면 뭐랄까… 막막한 뭔가가 해소되는 느낌이거든. 그때 봤지.”
공천록이 본가로 복귀한 그날을 말함이다.
“붉게 일그러지던 태양과 땅이 만났을 때, 그 가운데에서 태어난 검은 그림자. 뭐였을까? 맞아. 너, 공천록이었지.”
하용보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 점 하나에 불과했던 너였지만 내겐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석양을 등지고, 식어버린 동료를 어깨에 걸친 채, 여러 발의 화살을 그대로 몸에 꽂고, 두 손에 주렁주렁 적의 머리통을 들고 돌아오는 너.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었지.”
그랬다. 공천록은, 죽은 유손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몸에 묶어 양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그 또한 허벅지와 어깨, 등에 화살이 박힌 상태로 단 한 번의 멈춤 없이 하가장의 성문을 통과했다.
그를 본 모든 인간들이 전율했다.
하소양을 빼고 남김없이 죽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로 목욕을 하고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공천록의 인내에 탄복해서도 아니었다.
충격적인 복귀. 말이 없기에 더욱 형용하기 힘든 무게감.
마지막 순간까지 생사를 같이한 동료의 시신을 지킨 의리.
검은 피딱지로 가득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두 눈.
그리고 그 검붉은 손으로 쥐고 들어온 네 두의 모가지.
“녹살 명가추가 자랑하던 아들들. 지난 번 끌고 온 첫째 놈까지 다섯이로군. 모두 활의 고수야. 육문연합과 전쟁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전리품이었지, 아마?”
하용보의 말에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공천록은 녹살이라는 이름이 지닌 엄청난 파급력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한데 넌! 왜 여기 있나. 당장 용병단 하나를 맡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왜 이 눅눅한 형옥에서 꿇어앉아 있느냔 말이다!”
갑자기 하용보가 분에 넘치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공천록은 그냥 ‘글쎄요’ 란 뜻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
“멍청한 인간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뭔 줄 알아? 한 놈의 바보가 ‘이건 이렇다!’라고 하면 전부 그렇다고 생각해 버리는 거야. 지금 딱 네 상황이지. 네가 불길해서 너와 함께 싸운 이들 모두가 죽은 게 아니라,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네가 얼마나 대단하고 강한 놈이란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도, 고려하지도 않아.”
하용보는 진정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이 하가장은 지금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지. 일족이 멸망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섰는데도 가문의 수뇌란 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만 지키려고 하고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려는 의지가 없어. 너, 혹시 소의 귀에 경을 읊어 봤나? 아무튼 그런 상황이란 말이야. 나 같은 놈들이 아무리 짖어도 소용이 없어. 가문의 정예란 녀석들을 당장 투입해도 모자랄 판에 방계와 용병들만 내보내 끝없이 죽어나가도록 방치하고 있다. 나중에 설혹, 우리가 회남의 패권을 회복한다 하여도 누가 하가장을 믿고 따를까?”
가문의 비정상적 행태를 외부인인 공천록에게 까발려 버리는 하용보였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육문연합의 이번 침공이 그저 반복되어온 단순한 도발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로서의 오만. 그게 하가장을 썩게 만들지. 너를 여기서 썩어가도록 하는 것도 같아. 아버님과 형님들이 이 전쟁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면 넌 정말로 하가장의 영웅으로 벌써부터 회남에 이름이 자자할 터. 이 상태로 간다면 우린 진다. 확실한 멸족. 안 그런가?”
공천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쓸데없는 말은 그만 하도록 하지. 넌 무엇을 위해 하가장에 투신했나. 너 같은 뛰어난 무인이 아무런 목적 없이 움직일 리는 없을 테니.”
“흠, 말씀드리면 도와주시렵니까?”
“말하라.”
공천록은 잠시 외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이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떠올리는 듯했다.
“꿈이요.”
“꿈이라…….”
하용보은 공천록의 뒤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좁혔다.
“다섯 마리 검은 호랑이가 천하를 집어삼키는 꿈.”
하용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자신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구나.”
“그렇게 들으셨나요? 그럼 뭐.”
“날 도와라. 네 꿈이 어디서 멈출지, 네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조하마.”
끄덕.
“내 소개를 정식으로 하지. 회남 하가의 못난 이름 용보라 하네. 아비는 하씨 일족의 수장 하중검 대협이고. 잘난 아비를 자기소개에 붙이는 짓은 못생긴 놈들이나 하는 거라지만 어쩌겠나. 내가 못났기에 아비를 팔아먹는 것을.”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며 두 손을 모아들고 읍하는 하용보.
그러나 공천록은 살짝 고개를 내려 인사를 ‘받는’다.
“허, 이럴 땐, 그쪽도 같이 손을 포개 인사를 ‘주고받는’ 거야.”
하용보가 몸을 낮춰 공천록과 얼굴을 마주했다.
뭔가 의기에 가득 찬 하용보의 눈동자. 그에 반해 세상을 달관한 듯 속을 알 수 없이 잔잔한 공천록의 눈동자. 네 개의 검은 구슬이 한참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공천록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바로 하용보의 제안에 응했다.
하용보가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공천록도 일어섰고.
“응?”
하용보는 난데없이 자신에게 내민 공천록의 손을 보았다. 잠시 그의 손바닥과 무표정한 얼굴을 번갈아 보던 하용보가 이내 껄껄거린다.
“좋아,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칠숙(七叔)! 칠수욱!”
하용보가 바깥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칠숙이란 말은 곧 하용보 자신의 일곱 번째 숙부, 또는 그에 준하는 이에 대한 호칭이었다.
잠시 후, 저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 노인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이들 앞에 나타난다.
그의 오른손에는 깨끗하게 각을 잡은 푸른 호복과 병기를 패용할 수 있는 요대와 어깨끈 등의 장비가 들려있었다.
공천록의 시선이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곧 그의 입술이 가늘어지며 무언가 만족스러운 빛을 띤다.
하 노인이 왼손에 든 그것. 바로 공천록의 채도와 얼룩진 천, 색 바랜 피풍이었다.
하용보는 처음부터 공천록의 승낙을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준비했다. 이 하가장의 셋째 공자가 생각보다 더 심계가 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는 사이겠지만 제대로 인사해. 여기 좀 늙으신 이분께선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나와 함께 북검패(北劍覇)의 세력에 맞서 싸우던 용사시다. 한때 남룡천(南龍天)의 높은 자리까지 가셨던 대단한 고수기도 했고. 뭐, 하가의 방계라는 점 때문에 스스로 버린 것들이 많아 안타깝긴 하지만.”
“이름도 버렸다네. 그냥 하 늙은이라 부르시게.”
“한 가지 더 말해줄까?”
“알아야 할 게 더 있습니까?”
하용보는 무복을 두고 얼룩진 천을 먼저 머리에 두르고 묶는 공천록을 보며 말했다.
“윗분들은 널 여기에 처넣고 난 뒤로 너에 대해 까맣게 잊었단 사실. 즉, 내가 널 데려가도 그게 뭘? 하면서 더 이상 신경도 안 쓸 거라는 뜻이지. 한 놈만 빼고. 그 새끼는 지금 몇 명을 제물로 삼고 부단주에서 물러났어. 당분간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게야. 아, 그리고 내가 죽도록 패줬으니까 따로 가서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마라.”
공천록은 하용보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자신의 채도를 들고 이러 저리 살펴보기 바쁘다.
“준비가 다 되면 알아서 찾아와. 어디서 만날 지는 칠숙께서 알려주실 거야. 앞으로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하용보가 몸을 돌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하 노인은 공천록에게 한참 뭔가를 말한 뒤 빠르게 형옥을 빠져나갔다.
스윽. 스윽.
공천록은 거무튀튀한 채도의 면을 쓰다듬었다. 지금 순간, 그의 얼굴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을 찾아낸 모험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해서 말이지. 참 이놈의 상황이 웃기게 되어버렸다는 거야.”
듣기만 해도 나른해지는 남자의 음성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대응할 시간도, 능력도 사실 충분했거든. 이 하가장의 저력은 말이지. 쯧쯧, 후우…….”
뭔가를 깊게 빨아들인 다음, 다시 길게 내뱉는 남자의 눈은 약간 풀린 상태다.
“생각해봐, 응? 응? 싸움 좀 한다는 최정예 무인들의 수가 이천. 그것도 합비의 본가만. 절정에 달하는 고수의 숫자만 해도 도저히 저 육문 따위는 비교가 안 돼.”
앞섶을 절반쯤 풀어 놓은 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젊은 남자.
짧고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과 대충 묶어 올린 머리를 보자면 거지 중의 상거지를 연상케 한다.
“왜일까. 왜 육문이 날뛰도록 내버려 두어서 회남을 생지옥으로 만든 걸까. 응? 응?”
젊은 남자는 홀로 백석(白石)으로 만든 탁자 앞에 앉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큰 건물의 일 층.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가 삼 장이고 이 층부터는 바닥이 없어 아래가 훤히 보이는 재미난 구조다.
오백 명의 장정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이곳에서 혼자(?) 지껄이는 이 남자의 정체는 무얼까.
“어쩌면 말이야… 이런 상황을 바랐고 또 즐기고 있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닐까? 허허, 허허허허. 쑤으으읍, 푸아아아∼”
그는 잘게 조각낸 무언가를 모아 태워서 그 연기를 들이마신 뒤 다시 내뱉는 행동을 반복했다. 마치 이것이 고상한 취미 생활이라도 된다는 듯이.
젊은 남자의 위치는 일 층 맨 앞 오른쪽. 그의 뒤로 같은 백석 탁자가 줄을 지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대각선 방향으로 완전 끝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빛이 닿지 않아 어두운 구석에서 벽에 기댄 체, 팔짱을 끼고 있는 큰 키의 사내.
혹, 젊은 남자가 지금까지 말을 붙였던 사람이 바로 이 사내였을까.
키 큰 사내는 방립(方笠)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어 그 진면목을 알 수 없었지만, 살짝 드러난 각진 턱선만을 놓고 보면 꽤 강인한 인상을 준다.
자신의 말에 별 반응이 없어서인지 젊은 남자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몸을 더욱 늘어뜨리고 탁자에 발을 올린 채 연기만 뿜어 댔다.
졸졸졸졸.
그의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 건물이 작은 개울 위에 지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다. 보통의 흔한 개울에서는 결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진한 피의 비린내가.
탁자 밑에 어지러이 널린 뭔가가 보인다. 그것은 마치 잘라놓은 고깃덩어리와 같았다.
사이사이로 삐져나온 가느다란 손가락들. 반쯤 드러난 갈비뼈와 바닥에 흩어져있는 치아들, 찢어진 옷가지가 너덜너덜 걸쳐진 팔과 다리는 몸통을 잃고 불규칙하게 쌓여 있다.
설마 여기 끔찍한 사체들은 이 젊은 남자의 작품(?)인가.
“후우욱.”
아래에서 올라오는 역겨운 냄새를 지우기라도 하듯, 남자는 더욱 강하게 연기를 뱉었다.
그때였다. 덜컹 소리를 내며 건물 입구가 열렸다.
긴 그림자가 입구를 지나 반대쪽 끝, 시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던 젊은 남자에게까지 드리워졌다.
“이런, 이런. 늦으셨어요. 기다리다 지루해 결국 마지막 한 놈까지 썰어버렸지 뭐람.”
남자가 목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려주는 그림자의 주인을 반긴다.
그림자의 주인은 하용보.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안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