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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남자가 하용보를 향해 보지도 않고 뭔가를 휙 던졌다.
턱 하니 그것을 받아든 하용보는 물체가 뭔지 알아차리고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귀면(鬼面). 뿔은 날카로이 하늘로 솟구쳐 있고 양끝에서 위로 찢어진 입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자아낸다.
이 귀면은 황산 귀굴의 상징이다. 그것도 귀굴오십살(鬼窟五十殺)이라 불리는 황산 최강 살귀들의.
뚜벅, 뚜벅.
하용보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가득한 자리에 선다.
그제야 젊은 남자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았다. 바닥에 흥건한 피를 밟기 싫어서인지 의자에 가부좌를 튼 채로.
하용보가 어둠 속에 있는 방립의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팔짱을 풀고 양손을 뒤로 뻗어 뭔가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뽑는다.
퓨학!
느닷없이 그의 양 옆에서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우르르 여섯 명의 사람이 쓰러진다.
방립 사내는 거꾸로 쥔 두 개의 환수도를 바닥에 털어 피를 떨궈냈다.
지금껏 그는 자신의 양쪽에 각각 세 명씩을 장도로 꿰뚫어 벽에 박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쓰러진 자들의 얼굴에는 모두 귀면이 씌워져 있다.
스릉, 스르릉.
등 뒤로 걸어놓은 두 개의 도실(刀室)에 장도를 밀어 넣은 방립 사내가 하용보에게로 다가와 차분히 예를 표했다.
“목여충(木戾蟲).”
하용보가 방립 사내의 이름을 부르며 답례했다.
“역시 낭인곡(浪人谷) 남자들은 과묵하군. 낭혼(浪魂)께서 그러하시니, 뭐.”
낭혼이란 말을 듣자 목여충이라 불린 방립 사내가 입가에 슬쩍 웃음을 걸었다.
“저는요. 저는 뭐 놀러왔답디까?”
젊은 남자가 불만 섞인 말투로 물었다.
“넌 돈 많이 줬잖아. 곽능파(霍能破). 나한테 대접 받으려면 아직 멀었어.”
곽능파라고 불린 젊은 남자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연기를 이 사이로 스스스 뱉는다.
위세 등등한 하가장 직계 중의 직계인 하용보에게 이토록 버릇없이 굴 정도로 곽능파라는 인간이 대단한 사람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영 별 볼일 없어 보인다.
“어디 있어?”
“에?”
“하나 더 있을 텐데.”
“아하∼!”
손뼉을 친 곽능파가 고개를 들어 눈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하용보가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하용보는 그가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건물의 제일 높은 층인 삼 층 난간 안쪽에 앉아 무언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공천록을.
“어―이!”
하용보가 공천록을 큰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공천록은 여전히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참나. 이놈도 저놈도 예의범절을 어디 팔아 처먹고 왔나 이거.”
여전히 거친 입을 과시한다.
“저 녀석은 언제 왔나?”
“제가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목여충이 답했다.
“허, 그런데 여길 미리 청소도 안 해놓고?”
먼저 왔으면서 귀굴 무사들을 왜 가만 놔뒀냐는 뜻이다.
“몰라요. 저도 나중에 알았으니. 한참 이놈들을 작살내다 보니까 저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데요?”
귀를 후비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곽능파의 모습은 정말로 불만 따위는 없는 듯했다.
하용보는 공천록이 무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천록의 앞에 귀굴 무사 하나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놈은 목이 절반가량 베여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다.
“뭘 보는 거지?”
눈매를 더욱 좁히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공천록의 손에 들린 물건은 바로 귀면이었다. 그는 왜 적의 상징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까.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뭔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일까.
“이봐! 그만 내려와!”
하용보가 조금은 짜증을 담아서 소리쳤다. 그제야 공천록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 보았다.
풀쩍, 풀쩍.
공천록이 삼 층에서 이 층으로, 이 층에서 일 층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툴툴 털고 들고 있던 귀면을 품속에 넣으며 하용보에게로 다가와 손을 모아 읍한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허!”
공천록의 말에 하용보가 탄식(?)한다.
그런 공천록을 목여충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여기 이놈들이 다야?”
하용보가 곽능파에게 물었다.
“제가 서른을 골로 보냈고 저기 과묵하신 분께서 열셋을 조각낸 다음에 또 여섯을 꿰어 벽에 박아두었으니, 음… 정확히 오십이 맞아요, 맞아.”
나머지 하나는 공천록이 조용히 목줄을 끊었다.
하용보는 가까이에 있는 석탁 하나에 걸터앉는다. 그리고는 조각나 흩어진 시신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잊는다.
저들은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하가장의 원수, 귀굴 무인들이다.
“휴우.”
그는 크게 한숨을 쉰 뒤에야 왠지 모를 우울함을 버리고 다시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이 몸값 귀하신 하가장의 셋째 공자께서 목숨을 담보로 적들을 유인했건만 대어는 안 걸리고 잔챙이들만 낚였구먼. 젠장.”
“풉!”
곽능파가 하용보의 투덜거림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다 입으로 막는다.
그때 입구가 다시 열렸다.
열린 문을 강하게 밀고 덩치 큰 남자가 터벅거리며 들어왔다.
“호오.”
곽능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막 등장한 자를 보며 탄성을 뱉는다.
피로 목욕을 한 걸까.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 칠을 한 채 하용보를 향해 다가온다.
척!
손에 든 대도를 거꾸로 쥐고 하용보에게 읍하는 남자.
“남김없이 쓸었습니다. 하 대영감(大令監).”
“대영감? 그거 셋째 공자가 남룡천 구십삼반(九十三班)의 영주일 때 불리던 호칭 아닌가?”
“넌 시끄럽고. 정팔(程八), 뭐 건진 건 없나?”
덩치 큰 남자, 정팔이 고개를 저었다.
“곽능파. 너와 내가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지?”
하용보가 뜬금없이 곽능파에게 물었다.
“꽤 오래요. 그걸 기억하라 하시면… 아무튼 절 많이 도와주셨죠. 이젠 제가 보답할 차롄가요?”
“다른 뜻이 있어 말하는 게 아니다. 네 능력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곽능파는 이에 대답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하용보가 지켜보았다는 곽능파. 그의 강함이나 다른 놀라운 능력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하용보였기에 이런 위험한 일에 그를 끌어들인 것일 터. 거절하지 않고 이 자리에 나온 곽능파도 상당히 심장이 뜨거운 남자다.
“목여충. 난 너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한다. 하나,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은 뚜렷해. 정말로 오래 전이지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에 하용보가 까마득했던 인연인 목여충을 이곳까지 오도록 만든 걸까. 또 분명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임을 알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온 목여충이란 사내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스윽.
하용보가 공천록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었다.
“잘해 봐.”
“할 말이 그게 답니까?”
“어휴! 진짜.”
하용보는 공천록의 저런 태도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손을 저으며 일어섰다.
“가자, 가.”
하용보가 먼저 움직였다. 그 뒤를 정팔이, 다음으로 목여충이 따랐다.
곽능파가 갑자기 공천록에게 얼굴을 돌렸다.
“어이, 어린 친구. 아까 내가 했던 말들 잘 새겨들어. 결론은 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거지.”
하용보가 오기 전까지 곽능파가 지껄였던 말들이 누구에게 했던 것인지 이제 밝혀졌다.
목여충도, 식어가는 시체들도 아닌, 바로 공천록에게.
훗, 웃으며 손바닥 위에 쌓인,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재를 털어버리며 나가는 곽능파.
공천록은 그의 뒷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다가 머리를 묶고 내려온 천의 끝자락을 잠시 매만졌다.
공천록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진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단단했던 땅은 마치 비온 뒤의 진흙탕처럼 변해 버렸고, 그 위에 온갖 모양으로 베이고 찢어진 시신들이 널려있다. 축축한 땅에 흥건한 저것은 분명 핏물이었다. 귀면만 안 썼을 뿐이지 건물 안에서 학살당한 귀굴 오십살과 복장이 동일했다.
한쪽에선 그 시체들을 한데 모으는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존재하는 자체로 위압적인 자들이 도합 스물이었다.
하나같이 정팔과 마찬가지로 피를 뒤집어쓴 상태인 이 무인들은 거멓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얼굴을 가려 그 진면목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들은 하용보가 나타나자 하던 일을 멈추고 하용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해산된 구십삼반을 여기로 다 끌고 왔군요.”
곽능파가 턱을 긁으며 눈을 빛냈다. 반응이 없는 목여충과 달리 그는 저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흥미를 가진 듯했다.
“공천록.”
하용보가 공천록을 불렀다.
정팔과 스무 명의 전(前) 남룡천 구십삼반 무인들이 일제히 공천록에게 눈길을 주었다.
“앞으로 너와 함께 황산에 피바람을 불게 할 녀석들이다. 어이! 다들 인사해! 이놈이 소문의 그 사신(死神)이다.”
몇 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신이라니. 어디 가당치도 않은 별칭이란 말인가. 저렇게 어려보이는 녀석이 감히? 라는 눈빛들이었다. 그들은 공천록에게 붙은 그 사신의 의미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공천록, 나를 믿는가?”
믿음이라. 조금 전, 곽능파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공천록이 하용보의 진지한 얼굴을 깊게 응시했다.
***
“죽여어어어어어!”
이히히힝∼!
먹구름 낀 하늘 아래 괴성이 울려 퍼졌다.
다그닥! 다그닥!
수십 마리의 말들이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달렸다.
슝―! 퓨슝!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암기(暗器)들의 기운에 공간이 달궈졌다.
챵! 챵! 챵챵!
“죽어! 죽어어! 죽으라고!”
소리치는 자가 대부(大斧)를 사정없이 아래로 내려쳤다.
마치 장익덕이 환생한 듯, 험상궂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낭아봉(狼牙棒)을 들어 그것을 막는 이의 얼굴에 극심한 공포가 서려 있다.
빠직. 탱!
낭아봉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그 순간 이가 듬성듬성 빠진 대부의 날이 그의 얼굴 가운데에 세로로 콱 박힌다.
“망할 새끼!”
욕질을 하며 즉사한 적의 얼굴에서 대부를 뽑아내려 하지만 너무 깊이 파고들었는지 단번에 빠지지 않는다. 죽은 적의 어깨를 밟고 대부를 거칠게 흔들어보아도 놈의 축 늘어진 머리통만 함께 흔들릴 뿐.
그때 대부의 주인 뒤편에서 말 탄 무인이 창을 죽 내밀고 달려왔다. 이대로 가다간 꼬치처럼 꿰일 것은 자명한 일.
“이따 보자, 썅!”
그는 순순히 대부의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말 위에서 창을 힘껏 지르던 자의 목 근처 공간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펴진다.
파아아아!
간헐천(間歇川)이 급작스럽게 분출하듯 머리통을 밀어내고 피가 솟구쳤다.
찰나, 목 없는 시체가 되어버린 자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그의 말은 돌아섰던 자의 몸을 스치고 그대로 달려 나간다.
주먹을 부르르 떠는 그의 눈에 호리호리한 신형이 언뜻 비쳤다.
원래는 푸른색이었을 호복이 검붉게 물들었고, 흑색 피풍은 피와 살 조각이 달라붙어 역겹기까지 하다. 머리에 두른 천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린 자. 그가 든 채도에서 허연 김이 올라온다.
“공천로옥!”
대부의 주인이 소리 질렀다.
끄덕.
공천록은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곧바로 다음 적을 찾아 움직였다.
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붉은 색 말을 탄, 마찬가지로 온통 빨간 칠을 한 갑주를 착용한 자들이 무리지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한쪽에선 다양한 색으로 물들인 마의(麻衣)를 입은, 요사스러운 기운의 무사들이 방울 달린 곡도(曲刀)를 휘두르며 귀곡성(鬼哭聲)을 질러 댔다.
흙먼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이 전장에 떨어진 모든 무인들의 시야를 가린 지는 이미 오래다.
가까이 접근해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정도로 이곳은 아수라장이었다.
대부의 주인, 과거 남룡천 구십삼반의 무인이었던 조훤(趙昍)은 대부로 찍은 머리통을 터트려 박살내고 나서야 병기를 회수할 수 있었다.
챙! 채앵! 찌르르르.
그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 다음에 들려온 방울 소리의 원점을 향해 신속히 움직였다.
남자가 하용보를 향해 보지도 않고 뭔가를 휙 던졌다.
턱 하니 그것을 받아든 하용보는 물체가 뭔지 알아차리고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귀면(鬼面). 뿔은 날카로이 하늘로 솟구쳐 있고 양끝에서 위로 찢어진 입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를 자아낸다.
이 귀면은 황산 귀굴의 상징이다. 그것도 귀굴오십살(鬼窟五十殺)이라 불리는 황산 최강 살귀들의.
뚜벅, 뚜벅.
하용보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가득한 자리에 선다.
그제야 젊은 남자는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았다. 바닥에 흥건한 피를 밟기 싫어서인지 의자에 가부좌를 튼 채로.
하용보가 어둠 속에 있는 방립의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팔짱을 풀고 양손을 뒤로 뻗어 뭔가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뽑는다.
퓨학!
느닷없이 그의 양 옆에서 핏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우르르 여섯 명의 사람이 쓰러진다.
방립 사내는 거꾸로 쥔 두 개의 환수도를 바닥에 털어 피를 떨궈냈다.
지금껏 그는 자신의 양쪽에 각각 세 명씩을 장도로 꿰뚫어 벽에 박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쓰러진 자들의 얼굴에는 모두 귀면이 씌워져 있다.
스릉, 스르릉.
등 뒤로 걸어놓은 두 개의 도실(刀室)에 장도를 밀어 넣은 방립 사내가 하용보에게로 다가와 차분히 예를 표했다.
“목여충(木戾蟲).”
하용보가 방립 사내의 이름을 부르며 답례했다.
“역시 낭인곡(浪人谷) 남자들은 과묵하군. 낭혼(浪魂)께서 그러하시니, 뭐.”
낭혼이란 말을 듣자 목여충이라 불린 방립 사내가 입가에 슬쩍 웃음을 걸었다.
“저는요. 저는 뭐 놀러왔답디까?”
젊은 남자가 불만 섞인 말투로 물었다.
“넌 돈 많이 줬잖아. 곽능파(霍能破). 나한테 대접 받으려면 아직 멀었어.”
곽능파라고 불린 젊은 남자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연기를 이 사이로 스스스 뱉는다.
위세 등등한 하가장 직계 중의 직계인 하용보에게 이토록 버릇없이 굴 정도로 곽능파라는 인간이 대단한 사람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영 별 볼일 없어 보인다.
“어디 있어?”
“에?”
“하나 더 있을 텐데.”
“아하∼!”
손뼉을 친 곽능파가 고개를 들어 눈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하용보가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하용보는 그가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건물의 제일 높은 층인 삼 층 난간 안쪽에 앉아 무언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공천록을.
“어―이!”
하용보가 공천록을 큰 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공천록은 여전히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참나. 이놈도 저놈도 예의범절을 어디 팔아 처먹고 왔나 이거.”
여전히 거친 입을 과시한다.
“저 녀석은 언제 왔나?”
“제가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목여충이 답했다.
“허, 그런데 여길 미리 청소도 안 해놓고?”
먼저 왔으면서 귀굴 무사들을 왜 가만 놔뒀냐는 뜻이다.
“몰라요. 저도 나중에 알았으니. 한참 이놈들을 작살내다 보니까 저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데요?”
귀를 후비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곽능파의 모습은 정말로 불만 따위는 없는 듯했다.
하용보는 공천록이 무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천록의 앞에 귀굴 무사 하나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놈은 목이 절반가량 베여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다.
“뭘 보는 거지?”
눈매를 더욱 좁히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공천록의 손에 들린 물건은 바로 귀면이었다. 그는 왜 적의 상징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까.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뭔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일까.
“이봐! 그만 내려와!”
하용보가 조금은 짜증을 담아서 소리쳤다. 그제야 공천록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 보았다.
풀쩍, 풀쩍.
공천록이 삼 층에서 이 층으로, 이 층에서 일 층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툴툴 털고 들고 있던 귀면을 품속에 넣으며 하용보에게로 다가와 손을 모아 읍한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허!”
공천록의 말에 하용보가 탄식(?)한다.
그런 공천록을 목여충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여기 이놈들이 다야?”
하용보가 곽능파에게 물었다.
“제가 서른을 골로 보냈고 저기 과묵하신 분께서 열셋을 조각낸 다음에 또 여섯을 꿰어 벽에 박아두었으니, 음… 정확히 오십이 맞아요, 맞아.”
나머지 하나는 공천록이 조용히 목줄을 끊었다.
하용보는 가까이에 있는 석탁 하나에 걸터앉는다. 그리고는 조각나 흩어진 시신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잊는다.
저들은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하가장의 원수, 귀굴 무인들이다.
“휴우.”
그는 크게 한숨을 쉰 뒤에야 왠지 모를 우울함을 버리고 다시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이 몸값 귀하신 하가장의 셋째 공자께서 목숨을 담보로 적들을 유인했건만 대어는 안 걸리고 잔챙이들만 낚였구먼. 젠장.”
“풉!”
곽능파가 하용보의 투덜거림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다 입으로 막는다.
그때 입구가 다시 열렸다.
열린 문을 강하게 밀고 덩치 큰 남자가 터벅거리며 들어왔다.
“호오.”
곽능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막 등장한 자를 보며 탄성을 뱉는다.
피로 목욕을 한 걸까.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 칠을 한 채 하용보를 향해 다가온다.
척!
손에 든 대도를 거꾸로 쥐고 하용보에게 읍하는 남자.
“남김없이 쓸었습니다. 하 대영감(大令監).”
“대영감? 그거 셋째 공자가 남룡천 구십삼반(九十三班)의 영주일 때 불리던 호칭 아닌가?”
“넌 시끄럽고. 정팔(程八), 뭐 건진 건 없나?”
덩치 큰 남자, 정팔이 고개를 저었다.
“곽능파. 너와 내가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지?”
하용보가 뜬금없이 곽능파에게 물었다.
“꽤 오래요. 그걸 기억하라 하시면… 아무튼 절 많이 도와주셨죠. 이젠 제가 보답할 차롄가요?”
“다른 뜻이 있어 말하는 게 아니다. 네 능력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곽능파는 이에 대답하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하용보가 지켜보았다는 곽능파. 그의 강함이나 다른 놀라운 능력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하용보였기에 이런 위험한 일에 그를 끌어들인 것일 터. 거절하지 않고 이 자리에 나온 곽능파도 상당히 심장이 뜨거운 남자다.
“목여충. 난 너에 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한다. 하나,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은 뚜렷해. 정말로 오래 전이지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에 하용보가 까마득했던 인연인 목여충을 이곳까지 오도록 만든 걸까. 또 분명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임을 알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온 목여충이란 사내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스윽.
하용보가 공천록에게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었다.
“잘해 봐.”
“할 말이 그게 답니까?”
“어휴! 진짜.”
하용보는 공천록의 저런 태도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손을 저으며 일어섰다.
“가자, 가.”
하용보가 먼저 움직였다. 그 뒤를 정팔이, 다음으로 목여충이 따랐다.
곽능파가 갑자기 공천록에게 얼굴을 돌렸다.
“어이, 어린 친구. 아까 내가 했던 말들 잘 새겨들어. 결론은 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거지.”
하용보가 오기 전까지 곽능파가 지껄였던 말들이 누구에게 했던 것인지 이제 밝혀졌다.
목여충도, 식어가는 시체들도 아닌, 바로 공천록에게.
훗, 웃으며 손바닥 위에 쌓인,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재를 털어버리며 나가는 곽능파.
공천록은 그의 뒷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다가 머리를 묶고 내려온 천의 끝자락을 잠시 매만졌다.
공천록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진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단단했던 땅은 마치 비온 뒤의 진흙탕처럼 변해 버렸고, 그 위에 온갖 모양으로 베이고 찢어진 시신들이 널려있다. 축축한 땅에 흥건한 저것은 분명 핏물이었다. 귀면만 안 썼을 뿐이지 건물 안에서 학살당한 귀굴 오십살과 복장이 동일했다.
한쪽에선 그 시체들을 한데 모으는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존재하는 자체로 위압적인 자들이 도합 스물이었다.
하나같이 정팔과 마찬가지로 피를 뒤집어쓴 상태인 이 무인들은 거멓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얼굴을 가려 그 진면목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들은 하용보가 나타나자 하던 일을 멈추고 하용보를 향해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해산된 구십삼반을 여기로 다 끌고 왔군요.”
곽능파가 턱을 긁으며 눈을 빛냈다. 반응이 없는 목여충과 달리 그는 저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흥미를 가진 듯했다.
“공천록.”
하용보가 공천록을 불렀다.
정팔과 스무 명의 전(前) 남룡천 구십삼반 무인들이 일제히 공천록에게 눈길을 주었다.
“앞으로 너와 함께 황산에 피바람을 불게 할 녀석들이다. 어이! 다들 인사해! 이놈이 소문의 그 사신(死神)이다.”
몇 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신이라니. 어디 가당치도 않은 별칭이란 말인가. 저렇게 어려보이는 녀석이 감히? 라는 눈빛들이었다. 그들은 공천록에게 붙은 그 사신의 의미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공천록, 나를 믿는가?”
믿음이라. 조금 전, 곽능파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공천록이 하용보의 진지한 얼굴을 깊게 응시했다.
“죽여어어어어어!”
이히히힝∼!
먹구름 낀 하늘 아래 괴성이 울려 퍼졌다.
다그닥! 다그닥!
수십 마리의 말들이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달렸다.
슝―! 퓨슝!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암기(暗器)들의 기운에 공간이 달궈졌다.
챵! 챵! 챵챵!
“죽어! 죽어어! 죽으라고!”
소리치는 자가 대부(大斧)를 사정없이 아래로 내려쳤다.
마치 장익덕이 환생한 듯, 험상궂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낭아봉(狼牙棒)을 들어 그것을 막는 이의 얼굴에 극심한 공포가 서려 있다.
빠직. 탱!
낭아봉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그 순간 이가 듬성듬성 빠진 대부의 날이 그의 얼굴 가운데에 세로로 콱 박힌다.
“망할 새끼!”
욕질을 하며 즉사한 적의 얼굴에서 대부를 뽑아내려 하지만 너무 깊이 파고들었는지 단번에 빠지지 않는다. 죽은 적의 어깨를 밟고 대부를 거칠게 흔들어보아도 놈의 축 늘어진 머리통만 함께 흔들릴 뿐.
그때 대부의 주인 뒤편에서 말 탄 무인이 창을 죽 내밀고 달려왔다. 이대로 가다간 꼬치처럼 꿰일 것은 자명한 일.
“이따 보자, 썅!”
그는 순순히 대부의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말 위에서 창을 힘껏 지르던 자의 목 근처 공간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펴진다.
파아아아!
간헐천(間歇川)이 급작스럽게 분출하듯 머리통을 밀어내고 피가 솟구쳤다.
찰나, 목 없는 시체가 되어버린 자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그의 말은 돌아섰던 자의 몸을 스치고 그대로 달려 나간다.
주먹을 부르르 떠는 그의 눈에 호리호리한 신형이 언뜻 비쳤다.
원래는 푸른색이었을 호복이 검붉게 물들었고, 흑색 피풍은 피와 살 조각이 달라붙어 역겹기까지 하다. 머리에 두른 천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린 자. 그가 든 채도에서 허연 김이 올라온다.
“공천로옥!”
대부의 주인이 소리 질렀다.
끄덕.
공천록은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곧바로 다음 적을 찾아 움직였다.
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붉은 색 말을 탄, 마찬가지로 온통 빨간 칠을 한 갑주를 착용한 자들이 무리지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한쪽에선 다양한 색으로 물들인 마의(麻衣)를 입은, 요사스러운 기운의 무사들이 방울 달린 곡도(曲刀)를 휘두르며 귀곡성(鬼哭聲)을 질러 댔다.
흙먼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이 전장에 떨어진 모든 무인들의 시야를 가린 지는 이미 오래다.
가까이 접근해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볼 정도로 이곳은 아수라장이었다.
대부의 주인, 과거 남룡천 구십삼반의 무인이었던 조훤(趙昍)은 대부로 찍은 머리통을 터트려 박살내고 나서야 병기를 회수할 수 있었다.
챙! 채앵! 찌르르르.
그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 다음에 들려온 방울 소리의 원점을 향해 신속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