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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시야가 불투명한 것은 공천록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용케도 적들을 찾아내 예의 그 쾌도(快刀)로 숨구멍을 가른다.
팅!
날아온 암기를 채도의 넓은 면으로 튕겨냈다. 이 매화형 암기는 한번 살을 파고들면 주변을 전부 도려내지 않으면 제거가 불가능하다.
휙―!
방향을 알았으니 망설이지 않는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빠르게 이동하는 공천록 앞에 붉은 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말이 무슨 죈가. 공천록은 늘어진 고삐를 잡고 땅을 박차 위로 올라간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적의 얼굴이 보였다. 말 위에서 한 바퀴 빙 돌며 적의 모가지를 도려냈다.
쉭, 쉬익!
또 매화형 암기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자의 몸을 틀어 암기를 막았다.
퍽, 퍽 파고드는 충격에 몸이 흔들렸지만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공천록은 시신을 방패삼고 말을 몰아 달렸다.
콱, 쿠쿵!
“으헉!”
거칠게 내달리는 말에 부딪히고 밟히는 적의 비명이 짧게, 짧게 지나갔다.
휙, 슈우웃! 휙휙!
암기가 날아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 수도 늘었다. 중간 중간 재수 없게 암기의 희생양이 된 자들을 감안하더라도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콰직.
말의 두 눈 사이에 강한 공력이 실린 암기가 박혔다. 말 머리가 터짐과 동시에 그 긴 목이 꺾이며 뼈가 부러졌다.
공천록은 무너지는 말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했다. 순간 그 자리로 묵직한 병기들이 떨어진다.
쿵! 쿠쿠쿵!
“어디?”
짙은 눈썹을 한 무인이 찍었던 낭아봉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와 비슷하게 금빛 무복을 입은 세 명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중 하나가 서늘한 뭔가를 느끼고 뒤쪽으로 낭아봉을 강하게 휘둘렀다.
태애앵!
엄청난 충격음이 퍼졌다. 낭아봉을 막고 그 힘에 밀려 훌쩍 날아간 공천록은 순식간에 흙먼지 사이로 사라졌다.
“찾아라!”
짙은 눈썹이 명을 내리자 나머지가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들리는 파열음과 함성, 죽는 자의 비명이 전장을 덮었다.

“막상막하(莫上莫下).”
여인의 음성에는 분명 짜증이 섞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용후(龍侯)님.”
금빛 무복을 걸친 노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된 거지? 분명 우리의 전력이 압도적이라 하지 않았나?”
티 하나 없는 백색의 궁장을 입은 여인 용후. 대당제국 귀부인들이 즐겨하는 높은 계발을 하였고 그에 걸맞게 용모 또한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용후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옆에 매화형 암기가 가득 든 상자를 노인이 들고 있었다.
용후는 암기를 한주먹 쥐어들고 공력을 실어 전투가 한창인 언덕 아래로 뿌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던진 것처럼 반원을 그리며 날아가던 암기들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를 내며 직선으로 흙먼지 속을 파고들었다.
암기가 지나간 공간으로 몇 명의 홍마군(紅馬軍)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말을 달린다. 그들의 창에 하가(何家) 측 무인 하나가 관통당해 흔들거리며 끌려가고 있다.
“기습도 우리가 먼저 했고, 숫자도 더 많아. 무엇보다 여긴 본후가 있다. 저들 중에 하문십걸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하문십걸은 하가장 장주를 제외하고 무력이 제일 강하다는 열 명을 칭하는 말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이 전장에 나타날 일은 없었다.
“왠지 걸리는 녀석이 하나 있었지만 그 기운도 조금 전에 사라졌다. 한데, 왜! 아직도!”
보통의 경우라면 지금쯤 전장을 청소하는 홍마군과 귀굴 무인들만이 저 안에서 숨 쉬고 있을 터였다.
저항이 거세도 너무 거세다. 지금 상대하는 자들은 하가장 본가도 아닌 분가와 외가, 용병들로 이루어진 예비대에 불과한 자들이 아닌가. 그런 이류들에게 정예 홍마군 철기(鐵騎)와 귀신(鬼臣)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간에 투입한 용린수호대까지 감안한다면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양상이었다.
용후는 또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암기를 한 움큼 쥐어 던졌다.
용후, 비효림. 용린각 십이두령 중 아홉 번째에 위치한 암기의 달인이다. 본신 무공 자체는 다른 두령들에 비해 떨어진다고 평가되나, 그녀의 진가는 전장 바깥에서 발휘된다.
스스로가 지정한 특정한 인물을 어지러운 전투 중에도 놓치지 않고 추적하는 놀라운 기감. 그런 비효림의 능력은 육문에겐 보배와 같았다. 비효림이 참전하는 전투에선 반드시 상대의 우두머리나 그에 준하는 강자들이 매화에 의해 살해당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녀는 다섯 명의 용린각과 홍마군 호위들 속에서 적을 향해 간간히 암기를 날린다.
스스스스.
갑자기 언덕 아래에서부터 진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용후까지도.
촤아아!
열 번째 암기의 파도가 전장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비효림은 상당한 공력을 소모한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금색 의자에 앉는다.
한 번 쏘아내는 데에 일류고수가 일각 넘게 싸울 수 있는 내력이 방출된다. 지금 비효림은 답답한 전장의 상황에 짜증이 나버려 무려 열 번이나 암기를 날렸다. 그것도 무척이나 짧은 간격으로. 내력이 고갈되었음은 당연했다.
“후우, 후우.”
그녀는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통해 서서히 단전을 채웠다. 지금 순간이 비효림에게는 가장 위험한 때다.
스스스스스.
안개는 소리가 없다. 만약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느새 땅을 덮은 안개는 스멀스멀 무인들의 정강이 높이까지 올라왔다.
그제야 다섯 호위들은 물결치듯 흐늘거리는 하얀 안개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자연의 조화라 여기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쿨럭, 쿨럭!”
비효림이 기침을 했다. 순수한 대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깊이 들이마셨기 때문이다.
무리들 뒤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은 엄청난 안개를 이들 주변에 뿌리고 지나간다.
“이건 뭐지…….”
용후의 호위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기분이 나쁘긴 했으나 이로 인해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뭔가가 올 것이라는 상상은 아직까진 하지 못한다.
가운데 그녀를 두고 둥글게 포진한 호위들의 거리는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그것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바로 그때.
맨 뒤에 선 호위의 어깨 너머에서, 두 개의 붉은 빛을 뿜는 무언가가 조용히 나타났다.
눈에서 적광(赤光)을 뿌리는 정체불명의 남자. 그가 검은 연기(?)에 휩싸인 손을 들어 앞에 있는 호위의 입을 틀어막았다.
‘흡!’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목을 깊게 가르고 지나간 검은색 채도로 인해서.
눈을 감고 운기(運氣)에 집중하던 비효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방금 심령을 흔드는 흉악한 기운을 느꼈다.
털썩.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뭐냐!”
금빛 무복의 노인이 외쳤다. 앞쪽만 바라보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오직 흐릿한 안개만이 가득한 세상을 보았다.
퓨슈슛―
경동맥이 끊어져 대량의 피가 혈관 밖으로 분출되는 소리.
노인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등 뒤에서 뽑은 수부(手斧)를 던졌다.
파악!
움직이려던 뭔가에 수부가 직격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이어진다.
노인이 그쪽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갑자기 노인을 향해 수부가 날아왔다.
그가 던진 힘보다 더 세고, 더 빠르게 날아온 수부가 노인의 머리통을 부수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의 ‘컥!’ 하는 짧은 비명도 들렸다.
삐이이익―!
잘 보이진 않지만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최후의 일인이 호각을 길게 불었다.
전장에 나가있는 용린수호대원 네 명을 불러들이는 신호다.
호각 소리가 ‘쀽!’ 하며 끊어졌다. 잠시 후, 땅으로 떨어진 것은 입에 호각을 물고 있는 홍마군 무인의 모가지였다.
“쿠러럭!”
비효림이 다시 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그 소리가 달랐다.
그녀의 입안에서 빨간 액체가 꿀렁댄다.
“우욱! 케엑!”
비효림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와락 쏟아졌다.
운기가 실패하며, 빠르게 쌓이던 내력이 오히려 그녀의 내장을 한바탕 뒤집어 버린 것이다.
“후욱, 후우욱.”
숨을 몰아쉬는 비효림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땅바닥을 쳐다보던 비효림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 이 사태를 벌인 흉적을 노려보았다.
둘 사이를 맴돌던 안개가 빠르게 걷혔다.
삐이이익―!
전투의 복판에서 조금 전과 똑같은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낭아봉을 휘두르던 네 고수들이 곧 이곳으로 바람처럼 들이닥칠 거라는 의미다.
비효림은 비 오듯 땀을 흘리는 와중에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를 눈에 담았다.
몸 구석구석 다른 이들의 피가 안 묻은 곳이 없지만 유난히도 빛나는 천을 머리와 얼굴에 두른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너… 도대체가…….”
비효림은 상대의 드러난 두 눈이 묘하게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우, 웃어?”
그녀의 고왔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리따운 아가씨. 소인이 웃는 건 웃는 게 아니라오.”
맑고 높은 음색을 지닌 사내의 말. 아마 이런 전장에서가 아니었다면 한번쯤 호감을 가질만한 그런 목소리였다.
“더러운 하씨의 개. 너 같은 놈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넌 누구지?”
시간을 끌 생각인가. 비효림은 불필요한 대화를 굳이 이어가려 한다.
“공천록.”
공천록이 순순히 그녀의 의도에 따라준다.
“네 괴상한 차림을 보아하니 순수 하씨 혈통은 아닌 듯하구나. 놈들의 재물에 영혼을 빼앗겼다면 우리가 더 큰 보상을 약속하겠다.”
“그대들은 내게 무엇을 약속해줄 수 있소?”
“무엇이든지. 원한다면 본후를 안을 수도 있다.”
“에이,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비효림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살갗을 비집고 땀이 몽글몽글 솟는 모습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터벅, 터벅.
공천록이 채도 자루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휙휙 돌렸다. 도면을 따라 흐르던 핏물이 바깥으로 튀며 비효림의 얼굴에 닿는다.
“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하라. 내 아는 모든 것을 답할 테니.”
“한 남자의 죽음에 대해 혹시 알지 모르겠네.”
“누, 누구를 말함인가.”
“…….”
공천록의 입이 몇 번 벙긋거렸다. 그리고 순간 비효림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해지며 무한한 공포로 물들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찌잉―
용후의 목을 하얀 빛줄기가 가르고 지나갔다.

***


붉은 노을이 가득한 하늘.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드넓은 들판.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풀들을 쓰다듬는 광경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들판 너머에는 노을과 하나인 듯, 적색 흙모래가 가득하고 그 뒤로 검고 또 푸른 산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원 가운데 하나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뒤로 뭉게뭉게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리는 말들과 기수(騎手)들.
말들의 몸과 각종 장구들은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으며 그것은 기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무복은 검고 누렇게 변했고, 적건(赤巾)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안면 전체에도 때가 꼈을 것이다.
또한 땅에 어지러이 찍히는 말발굽 자국은 그들이 얼마나 이 길을 급하게 달려오는지 대변해 주었다.

한참을 더 달려 이른 곳은 지금껏 그들이 거쳐 온 그 어떤 방어선보다 더 거대하고 단단한, 그야말로 철옹(鐵甕)을 연상케 하는 요새였다.
기수 한 명이 말 위에서 대궁(大弓)을 쏘았다. 필릴릴리∼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은 십 장 높이의 석벽을 넘어 그 뒤의 기둥에 박혔다.
요새 위에서 누군가 그 화살을 뽑아 살대에 묶인 전갈을 빠르게 살핀 뒤 소리쳤다.
“열어! 본가(本家) 금룡전대(金龍戰隊)의 형제들이다!”
뜨드드드드.
외벽의 철문이 힘겹게 열리며 해자(垓子) 위로 튼튼한 나무다리가 내려왔다.
다리가 지면에 닿자마자 한 차례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과 기수들이 요새 안으로 진입한다.
이히힝∼!
요새의 내부 또한 그 외면과 걸맞게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방대한 대지 중앙에 대전각(大殿閣)이 있고 그 주위로 소규모 시설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있었다.
나무와 벽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을 제외하고 임시로 올린 천막들만 해도 수백을 헤아리니 처음 요새에 방문한 이들의 입이 떡 벌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워! 워어∼!”
기수들 중 맨 앞에서 이들을 이끈 자가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살펴본다.
그동안 전해 듣기만 해왔던, 이 요새의 위용을 직접 눈으로 접하고 무척 놀라는 눈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요새 내에 따로 마동(馬童)이 없는지 등 쪽에 긴 맥도(陌刀)를 걸고 온 무인이 이들을 맞이했다. 길쭉한 얼굴에 팔다리도 몸에 비해 긴 것이 사마귀를 연상케 하는 자였다.
“그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몇 명의 요새 무인들이 더 다가와 기수들이 내린 말의 고삐를 잡는다.
지휘자의 눈이 그들 중 누군가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 뒤, 곧바로 맥도의 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본가 금룡삼전대 부대주 하호산이라 하오.”
하호산이 적건을 턱 밑으로 내린 뒤 읍했다.
“맹포입니다.”
맥도의 무인도 손을 모아 답례하며 말했다.
고개를 든 하호산은 경이로운 눈으로 다시 요새 내부를 죽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본 맹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떻습니까. 본가와는 또 다른 기상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마도 구화산(九華山) 맑은 정기가 이곳에 만연하기 때문일 테지요.”
곳곳에 병기를 패용한 무인들이 대열을 맞춰 이동하는 모습에서부터 숫돌에 검과 도를 가는 자들, 대련 중이거나 각자가 무예를 연마하는 모습까지 어느 하나 부족해 보이는 것이 없다.
“과연 하가의 검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어 뵈오. 한데, 저건…….”
하호산이 가리킨 곳을 향해 모두가 일제히 눈길을 주었다.
요새의 성벽 높이를 훌쩍 넘는 기다란 장대가 두 개. 그리고 그 각각의 끝에 걸려 있는 작은 수박 같은 물체들. 그것들은 요새 밖, 먼 곳을 향해 보란 듯 세워진 것 같았다.
맹포의 입술이 더욱 짙게 웃음기를 띠었다.
“들어오시면서 못 보셨나 보군요.”
맹포가 조금 나아가며 하호산에게 등을 보였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저 왼쪽에 낮게 걸린 저것이 귀제갈(鬼諸葛) 묵묵염수의 대가리고 오른쪽에 높이 매달린 저것은 용마녀(龍魔女) 비효림의 대가리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