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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우오오!”
기수들 몇몇이 저도 모르게 묵직한 감탄사를 뱉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에 반해 하호산은 굳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두 개의 수급을 노려볼 뿐이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구려.”
하호산의 입에서 나온 말 속에는 칭찬이나 축하를 느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오히려 ‘이건 아닌데.’라는 느낌이 강하다.
“어느 영웅께서 저들의 목을 베셨소?”
하호산의 물음에 맹포가 눈썹을 살짝 올리고 입을 삐쭉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즉,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다.
“일단 쉬지 않고 달려오셨을 테니,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지요. 여장을 풀고 난 뒤에 총사령(總司令)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맹포가 다른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동료에게 하호산의 말을 넘겨주며 또 다른 이에게 안내를 지시했다.
왠지 힘이 빠진 모습의 하호산과 기수들은 그를 따라 중앙 대전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호산 부대주님!”
갑자기 맹포가 하호산을 불렀다.
하호산과 기수들이 고개를 절반 정도 돌려 맹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옥의 입구, 치열하다 못해 뼈가 갈려나간다는 최악의 격전지, 사망의 땅 지주(池州)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맹포가 머리를 숙이자 그의 동료들도 함께 조아린다.
언뜻 들으면 이것들이 놀리나 싶을 정도로 무례한 환영사였다.
하지만 맹포의 음성에는 그 어떤 장난기도 없었기에 하호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자신의 길을 다시 갔다.
금룡전대원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맹포와 무리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이, 너보고 영웅이란다.”
맹포로부터 말고삐를 넘겨받은 조훤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귀찮다는 듯 말고삐들을 놓아버린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또 웃으며 눈을 돌려 누군가를 쳐다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에 공천록이 있었다. 대충 빨아 아직 피 얼룩이 다 가시지 않은 청색 호복도 여전했고, 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저분한 천도 늘 그랬듯, 그의 머리에 감겨있다.
공천록은 다른 이들은 다 던져 버린 말고삐를 그대로 잡은 채 두 눈동자를 하호산과 금룡전대원들이 사라진 대전각에 맞추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익숙한 양 맹포 무리들은 각자 떠들기 시작했다.
“저것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금룡전대면 보자… 하씨네 큰아들내미 직속이로구먼.”
“아, 그 머리는 나쁜데 야심은 하늘을 찌른다는 그치?”
“우리 대영감하고는 배가 달라서 사이도 좋지 않다더만.”
이들은 모두 하용보가 부른 구십삼반 출신들이다.
“저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는 마라. 우리는 그저 대영감님과의 인연과 의리로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만 마치면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거 아닌가?”
맹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오후, 대전각 이 층 총사령의 방.
또르르르.
오래 되어 반질반질한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찻잔에 뜨거운 찻물이 부어졌다.
풍성한 옷소매를 잡고 전통 방식으로 차를 따르는 장년의 인물.
그리고 묵묵히 장년인의 다도를 감상하는 이는 하호산이었다.
“거칠기만 한 전장의 복판이라 멋스러움이 부족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부어준 차를 권하는 장년인에게 하호산이 왼손으로 잔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와 엄지 사이의 살로 잔을 들어 예를 표한다.
“상관진 총사령께서 풍미(風味)가 넘친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직접 뵈니 역시 명불허전이 아닐 수 없군요.”
“과찬의 말씀.”
지극히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총사령 상관진. 그는 하가의 수없이 많은 외척 중 한 명으로서 지주와 동릉(銅陵) 땅의 토호(土豪) 상관씨 일족의 수장이었다.
회남에서 본가를 제외하고 분가, 외가, 거점들을 통틀어 하씨가 아니면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외가 인사인 상관진이 총사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맡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한동안 본가의 지원이 없어 지주 방어를 포기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상관진이 먼저 운을 뗀다.
“그럴 리가요. 지주는 곧 합비의 목줄과 같은 곳입니다.”
하호산의 말은 본가가 지주를 포기할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간 합비의 행사가 너무 없었던지라…….”
본가의 막강한 고수들을 왜 각지에 출정시키지 않느냐는 물음.
“가문의 웃어른들께서도 생각이 많으십니다. 흠, 총사령님의 정성이 들어 있어 그런지 맛 또한 일품이군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하호산.
“지주 무인들의 죽음으로 지켜낸 땅에서 자란 놈이올습니다. 저의 정성보다는 그들의 피 맛이 더 강할 테지요.”
상관진은 다시 대화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렇군요. 피라…….”
하호산도 이때만큼은 상관진의 말을 인정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데 추포(秋浦)에는 어쩐 일로?”
요새가 위치한 추포는 현재 회남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 중 하나였다. 본가에서 행동을 개시했다면 이처럼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을 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상관진이 묻는 것이다.
“최근 놀라운 소식들을 접해서 말입니다.”
“…….”
“믿기 힘든 죽음들이 있었다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다 여깁니다만.”
상관진의 음성이 살짝 낮아진다.
“아, 물론입니다. 죽고 사는 것에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당사자들에게도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무(武)를 숭상하는 자들은 대개 우직하다. 다시 말해 번지르르한 화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하호산과 상관진은 마치 혀에 기름을 바른 문사(文士)들처럼, 직설적 화법을 피하고 있다.
“본가의 높으신 분들께서 언제부터 삶과 죽음에 불편한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려.”
“때가 때이고 상대가 상대라서 말이죠.”
하호산이 의자를 조금 당겨 앉으며 상관진과 눈을 맞추었다.
“누굽니까.”
“…….”
“묵묵염수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육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무공의 깊이가 부족한 곳이 귀굴이니까요. 아, 물론 귀존(鬼尊) 홍면귀 서산과 그의 직속 무력 단체들은 강하지요. 아주 강해요. 아무튼 귀제갈 그 자신은 머리가 앞서는 자라 제 꾀에 넘어갈 수도 있으니 거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상관진은 하호산의 마지막 말에 섞인 묘한 어감을 읽었다.
“그런데 두 번째가 용후 비효림이라면 얘기가 또 달라지지요. 용린각주 비사구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절세의 고수가 그녀란 말입니다. 죽음은 공평하나 의미는 달라요. 아시겠습니까?”
“후우…….”
상관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제갈의 목을 베던 날, 본 구황단(九黃團) 형제들 삼십칠 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용후 때는 더했지요. 저는 팔십일 인 본단 무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명부(冥府―저승)의 신께 그들을 잘 부탁드린다는 제를 올렸습니다. 본 사령과 구황단은 형제들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뿐입니다만.”
“묵묵염수를 포함해 적들은 일백이, 용후는 무려 삼백 명과 함께 목이 잘렸다지요? 그것도 각각 상대와의 전력 차가 절반 이하였다는데 말입니다.”
하호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엄청난 대승이다. 구황단은 적의 절반도 안 되는 무인들로 배 이상의 적을 살상하고 심지어 그들의 최고 지휘자마저 목을 베어 돌아왔다.
“회남대전이 일어나고 지금까지 이런 비상식적인 전투는 없었습니다.”
“상식이라면 무얼 말하는 겁니까. 본단이 전멸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지요. 제 말뜻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세상이 보는 평범한 시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측 전력이 더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십걸과 같은 고수가 참전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데 이겼습니다. 대승에다가 수괴의 수급까지. 세상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상관진은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시 내력을 돌려 신색을 회복했다.
“얼마 전, 구황단에 새로이 편입된 이들이 있다 들었습니다.”
상관진은 드디어 하호산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음을 깨달았다.
“본 구황단에는 늘 정의로운 무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간악한 육문연합 놈들을 물리치는 데 힘을 보태고자 오는 이들입니다.”
“아뇨. 저는 딱 한 부류의 인물들을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삼공자의 사람들이 맞습니까?”
상관진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계속 말을 아꼈다.
“어찌하여 그들을 구황단에 받아들이신 겁니까.”
“…….”
“삼공자가 지금 본가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모르실 리는 없을 테고.”
“적과 싸우는 데도 ‘정치’가 필요한 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상관진의 음성이 아까보다 더 낮아졌다.
하호산이 빙그레 웃는다.
“이런, 차가 식었습니다. 애써 우려주신 귀한 차이거늘,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하호산은 상관진이 말릴 새도 없이 식어버린 찻물을 후루룩 입에 털어 넣는다. 다도에 있어 큰 무례임을 알면서도.
이들은 이후로도 꽤 긴 시간 동안 독대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들이 알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공천록이 오후의 긴 그림자 속에 숨어 모든 것을 보고 들었음을.

***


쉬이잉∼
바람이 따뜻했다. 햇살은 이 형체 없는 대기의 움직임조차 덥히는 신비로움의 원천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한 줄의 선(線)인 듯, 굴곡 없는 대지 위에 이름 모를 들풀들만이 있어 바람에 흔들린다.
펄럭.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몇 개의 얼룩. 자세히 보면 중원 땅 어딘가를 하늘에서 보고 그린 것 같기도 한 그것은 이제 이 남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추억의 상징이 되었다.
바람에 의해 깃발처럼 나부끼는 천은 마치 누군가에게 어서 오라 손짓하는 듯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평원 가운데 선 채, 바람과 햇살을 즐기는 듯한 이 남자, 공천록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두두두두두.
여러 마리의 말들이 질주함으로 지축이 진동한다.
두두두두두두.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마 이 거리라면 그들은 공천록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따그닥, 따그닥!
어느새 지축의 흔들림이 잦아들었고 전력으로 달려오던 말들도 그 주인들의 명에 따라 질주를 멈추고 천천히 다가왔다.
도합 일곱.
처음 구황단의 절대(絕對)요새에 도착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당당함과 화려함을 갖춘 금룡전대 본연의 모습이다.
또각, 또각.
비스듬히 말을 세운 하호산. 그리고 그 뒤에 늘어선 여섯. 그들 중 하나가 하호산의 눈짓을 받고 앞으로 나왔다.
“뭔가!”
휘잉∼
바람이 공천록의 대답을 대신해 준다.
“너는 지난 번, 구황진에서 내 말의 고삐를 잡아주던 용병 무인이 아니더냐.”
그랬다. 지금 말하는 금룡전대의 기수는 공천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다고 칭찬해 드리지.”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재수 없는 말투다.
하호산이 말을 배를 툭 쳐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공천록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섰다.
“돌아가면 그뿐이다.”
“한번 그래 보시든가.”
팅! 팅!
공천록이 채도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슬슬 도발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