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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 앞에 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전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건가?”
“그러게. 내가 너희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씨익 웃는 공천록을 보며 기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공천록....... 본가에 있을 때, 널 본 적이 있었지. 아주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날 봤다고? 아하, 그때 그 자∼알생긴 부단주님 근처에서 손바닥 비비던 치가 당신이로군.”
하호산은 예전에 하경진을 수행하던 자들 중 하나였다. 공천록의 말을 들은 하호산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한동안 잊고 있었더니 어느새 여기로 와 있더구나.”
“다행이네. 잊고 있었다니.”
“네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관심 따위는 없다.”
“가져야 할 걸. 아직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선 곤란하니까.”
“낭인 놈 주제에 건방을 떠는구나.”
하호산은 그대로 말을 돌려 뒤로 가버린다.
“치워라.”
기수들이 일제히 말의 배를 강하게 찼다.
“이럇!”
탁, 탁!
“…….”
탁, 타탁!
말의 배를 차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러나 말들은 나아가지 않았다.
“응? 왜 이러지.”
말들이 오히려 조금씩 뒤로 가려 애쓴다.
터벅.
공천록이 한 걸음을 디뎠다.
사삭.
이히히히힝∼!
“왜, 뭐하자는 거야!”
기수 하나가 고삐를 이리저리 흔들며 외쳤다. 그는 알았다. 말들 모두가 기이한 공포에 질려 있음을.
말들이 어지럽게 날뛰었다. 그 순간, 유일하게 하호산만이 말을 강한 힘으로 진정시키고 놀란 눈을 부릅뜬다. 그때였다.
촤악!
사람 무릎 높이까지 자란 풀잎에 붉은 점들이 날아와 박혔다.
“끄윽.”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하호산. 그의 양 눈동자는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무언가를 보기 위해 애쓰는 것만 같다.
피시시시―
그의 입보다 더 길게 갈라진 목의 상처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튀어나왔다.
풀썩.
하호산이 말에서 떨어져 쓰러지고, 그의 주변에 널린 풀잎은 완전히 붉게 변한다.
“미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칭! 칭칭!
기수들이 말에서 내려 동시에 병기를 뽑는다.
번쩍! 뎅겅.
검을 채 뽑지도 못하고 한 명의 머리가 허공으로 폴짝 솟았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야 이!”
어느새 목이 없어져버린 기수의 뒤에 착지하듯 나타난 공천록을 향해 다섯 명이 순식간에 짓쳐왔다.
챠앙! 가가각.
공천록은 채도의 면으로 한 명의 검을 받자마자 그것을 기울여 옆으로 흘려버린다.
싸아앗.
채도 끝이 그자의 뱃가죽을 얇게 쓸고 지나갔다.
“윽!”
순간적인 쓰라림에 배를 베인 자가 힘주어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들어간 힘 때문에 내부의 압력이 상처를 터트려 그 사이로 창자가 퍽 하며 쏟아졌다.
챙챙챙챙!
두 명의 거센 공격을 튕겨내며 공천록이 뒷걸음쳤다.
느낌. 그 다음은 소리다.
수세였던 공천록이 갑자기 몸을 한 바퀴 크게 돌려 강공을 펼쳤다.
그의 공격을 막은 두 기수는 강한 진동으로 인해 손아귀에 충격을 받아 잠시 멈칫거렸다.
그때 공천록이 땅을 박차고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림과 동시에 채도를 가로로 빠르게 휘두른다.
팅!
몰래 다가와 공천록을 베려 했던 자의 검이 반으로 부러지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 그의 머리통 코 윗부분에 붉은 선이 생겼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옆으로 내려가는 머리의 상부. 남은 하부에 달린 입은 영문도 모른 채 벙긋벙긋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움직인다.
“노오오옴!”
남은 셋 중 하나가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절초를 펼쳤다.
흉(凶)자를 그리며 쏟아지는 검기. 약하지만 일류 이상의 검사가 펼칠 수 있는 수준은 된다.
짧은 시간, 공천록은 자신의 몸을 조각낼 듯 들어오는 검기와 그것을 펼치며 들어오는 상대의 모습을 눈동자에 깊이 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채도를 주욱 밀어 넣는다.
퍼석!
어울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검기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어?”
자신만만하게 들어오던 기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검기를 뚫고 들어오는 검은 선을 보았다. 그리고 시야가 둘로 갈라지는 가 싶더니 곧 껌껌한 어둠 속으로 정신을 날려 보냈다.
“히이익!”
머리가 양쪽으로 갈라져 죽은 동료를 보며 기수 한 명이 기겁했다..
사앗!
허공에 작은 핏방울이 튀었다가 점점이 흩어졌다.
주륵.
공천록의 뺨에 보일 듯 말 듯한 줄이 그어졌다. 그리고 곧 선을 따라 벌건 피가 흘러내렸다.
“죽어라!”
공천록에게 일격을 먹인 기수가 몸을 틀며 검을 사선으로 쳐올렸다.
티잉―!
공격을 막아낸 공천록이 허공으로 높이 도약했다.
잠시 후 그가 땅으로 내려왔을 때, 공천록의 앞에는 동료의 죽음에 놀라 혼이 빠져 버린 자가 멍하니 서 있었다.
공천록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푸슈슈!
피가 부챗살처럼 날렸다. 그것을 본 마지막 일 인은 슬쩍 한 발을 뒤로 뺐다.
그는 눈앞의 저 괴물을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후퇴를 결정했다.
펑!
그리고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공을 발휘해 이 혈향 가득한 장소를 박차고 나갔다.
거기까지였다. 아니 이미 끝이었다.
기수는 경공을 펼침과 동시에 베어진 자신의 머리만이 한참동안 앞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목 없는 시신이 힘을 잃고 풀 위로 쓰러졌다.
시신은 몇 차례 큰 경련을 일으키더니 퍽퍽 피를 뿜어내고는 곧 잠잠해졌다.
공천록은 변했다.
처음 합비의 문을 두드렸을 때의 그가 아니었다.
겉보기에 낙천적이고 농담을 즐겨하며 타인의 기분을 헤아려주던 공천록이 아니다.
훨씬 냉정해지고 가라앉은 얼굴. 거침없는 폭력성과 잔혹한 손속.
말수는 줄었고 어떤 목적을 향해 차분히 칼을 가는 것 같은 무거움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혹, 유손의 죽음이 있던 그날, 그의 어깨에 꽂혀 있던 쇠침을 제거했기 때문인가.
그것이 공천록에게 그간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지금의 상태로 변하는데 일조했음이 틀림없다.
“아, 이놈의 성격.”
공천록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멋대로인 것은 두 분을 다 닮았네요.”
이제는 흙이 되고 없는 공천록만의 두 영웅.
이전 공천록의 유쾌함은 그들 중 하나와 같고, 지금 공천록의 무거움은 다른 하나와 흡사했다.
상관진과 하호산의 독대가 끝나고 하루가 지난 시점. 그 사이 하호산과 금룡전대는 구황 요새를 떠났다.
낮 시간이지만 모든 창을 닫아두어 껌껌하기만 한 방 안에 상관진이 있었다.
그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지금 상관진은 머릿속으로 하호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상관 총사령님. 당신께서도 오래전 본가를 대표하여 남룡천의 무력 단체를 지휘했던 분이십니다. 한쪽으로 쏠리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한쪽이라니요?”
“총사령님과 삼공자님, 두 분 모두 남룡천주께 충성을 맹세했던 분들. 그것은 모든 남부무림인들에게 동일했겠지만 남룡천 총본에 적을 두었던 이들에겐 특히 더하지요. 늘 함께 삶과 죽음 앞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신 분들 아닙니까.”
“…….”
“지금 남룡천은 더 이상 존재치 않고, 천주께서도 이 세상 분이 아닙니다. 총사령님의 충성이 향할 곳은 오로지 본가의 주인이신 장주뿐이란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상관진이 크게 한숨을 쉰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 하가장의 일원일 뿐입니다. 대체 금룡삼전대 부대주께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삼공자는 현재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본가에서 추락한 위상 때문에, 차기 장주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불필요한 행동을 하고 있어요.”
“불필요?”
“거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그 이상은… 일단 총사령께서 선택하셔야 할 겝니다.”
“선택? 대공자냐 삼공자냐 이걸 말하는 겁니까. 지금 외적의 공격으로 가문 전체가 흔들릴 지경인데 내부의 권력 다툼에 참여하란 말입니까? 어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분들이군요.”
“삼공자가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본가의 결정입니다.”
상관진은 지금 이 순간, 쓴물을 들이킨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요. 전 과거에도, 지금도, 먼 훗날에도 하가장의 무인 상관진입니다. 전 하가장의 장주께 모든 충성을 바칠 뿐이며 그 대상이 누구든 중요하지 않다는 점,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그러하시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 정도 선에서 하호산은 크게 만족한 눈치였다.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자리를 물렸으면 합니다.”
“잠깐.”
“또 뭘 요구하시려 함입니까.”
“공천록.”
“……?”
“그가 이곳에 왜 있는지 모르지만 조심하시길.”
“당최…….”
상관진은 뜬금없는 하호산의 충고에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는 죽음을 부르는 자입니다. 적이건, 아군이건. 피가 흐르는 강 끝에는 항상 그가 있었지요.”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 부대주님.”
이로써 확실한 축객령을 내리는 상관진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럼 좋은 대접 받고 돌아갑니다. 아, 본가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 따위는 전하지 않을 겁니다. 장주님과 대공자를 포함한 본가의 모든 수뇌들은 상관 총사령의 하가를 향한 충심만을 기억할 겁니다. 다만, 공천록에 대한 건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사실 대공자께서도 그에게 관심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휴우…….”
상관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함에 치를 떨었다.
분명 육문과 하가장의 전쟁은 격화되고 있건만 저 합비의 하씨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전쟁의 양상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곳에서 엉뚱한 것을 찾고 있다.
지주에서만 하가를 위해 일천에 가까운 무인들과 식솔들이 죽었다. 회남 전체를 따져본다면 그 수를 세는 것조차 버겁다. 이는 그저 강호의 일로만 치부하기 힘들 정도의 사건이었다.
현재 대당제국이 혼란기가 아니었다면 당장 절도사의 군대가 출병했을 지도 모른다.
상관진은 처음부터 중립이었다. 차기 장주를 향한 하씨 형제들의 경주 따위는 애초에 그의 관심 밖이었다는 말이다.
이 전쟁을 빨리 끝내자는 셋째 공자의 말에 동의했을 뿐이지 그의 추후 행보에 밥그릇을 얹을 생각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하용보가 주고 간 무인들은 그냥 중요한 전력 외에 어떤 가치도 없었다. 예전 남룡천 무력 부대의 장이었을 때, 정팔 같은 구십삼반 간부급 무인과 안면이 있었던 것이 전부다.
그런데 대공자는 기가 찬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 점이 더 답답하고 화가 나는 상관진이었다.
“총사령님.”
바깥에서 구황단의 부사령 하신이 상관진을 찾았다.
“들어와도 좋다.”
그의 허락에 방문이 열리고 빛과 함께 하신이 들어왔다.
순간 상관진은 하신의 표정을 보고 크게 잘못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
장내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어떤 무인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고, 다른 무인은 땅을 치며 통곡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던 하가의 방계 한 명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몇 명의 용병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이…럴 수가.”
상관진의 입에서 허탈한, 그리고 충격과 고통이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말 한 마리가 끌고 온 수레.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있는 상자 하나.
상자 속에는 사람의 엄지손가락 수백 개가 들어 있었다.
“결국 이리될 수밖에 없었나.”
상관진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들었다.
엄지손가락들의 크기는 다양했다. 투박하고 주름진 성인 남성의 것에서부터 가늘고 고운 여인의 것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의 것까지.
총 삼백이 넘는 이들의 세상 살았던 흔적이 이 상자에 담겨 구황단의 요새로 들어왔다.
“용마(龍魔) 비사구. 이노옴…….”
죽인 상대의 엄지를 잘라 보낸다고 알려진 용린각의 마왕 비사구. 스스로를 용왕(龍王)이라 칭하며 강력한 무(武)를 바탕으로 근방에 적수가 없다는 초고수.
그가 지배하는 수주(隨州)는 회남대전 이전부터 이 무지막지한 철인(鐵人)의 폭정에 신음해야 했다. 관(官)이 지켜주지 못하는 곳에서 용린각과 비사구는 강호무림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공포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어찌하여… 이토록 잔인하단 말인가.”
지난 달, 지주 일대에 몇 안 남은 하씨의 분가 격인 명진당, 명화당의 식솔 전체가 구황단 요새로 피난을 왔었다. 한동안 그들을 수용하다가 더 이상 여력이 없어 합비의 본가로 전서를 보내 이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했고 본가는 이를 허락, 구황단 무천조(武天組) 오십으로 그들을 호위케 하여 며칠 전 비밀리에 요새를 떠나게 했다.
한데 어떻게 알았을까. 세상에 비밀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
“대전 초부터 계속 있어왔던 일입니다. 육문의 개새끼들은 하씨의 핏줄은 갓난아이까지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신이 상관진을 오히려 위로했다. 그 또한 일가 전체가 귀굴의 살귀들에게 학살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하나, 이처럼 상자에 담아 보낸 적은 없다.”
분노하는 상관진은 이런 추악한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꽤 순수한 무인이다.
“총사령님… 주위의 무인들이 보고 있습니다.”
하신이 상관진의 귀에 속삭였다. 그는 육문이 원하는 게 무언지 잘 알았다.
난공불락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구황 요새 무인들의 사기를 꺾는 데 이만한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흥분하고 좌절하는 총사령의 모습은 더더욱 전력 약화를 부채질할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 앞에 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전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건가?”
“그러게. 내가 너희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씨익 웃는 공천록을 보며 기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공천록....... 본가에 있을 때, 널 본 적이 있었지. 아주 인상적인 녀석이었다.”
“날 봤다고? 아하, 그때 그 자∼알생긴 부단주님 근처에서 손바닥 비비던 치가 당신이로군.”
하호산은 예전에 하경진을 수행하던 자들 중 하나였다. 공천록의 말을 들은 하호산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한동안 잊고 있었더니 어느새 여기로 와 있더구나.”
“다행이네. 잊고 있었다니.”
“네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관심 따위는 없다.”
“가져야 할 걸. 아직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선 곤란하니까.”
“낭인 놈 주제에 건방을 떠는구나.”
하호산은 그대로 말을 돌려 뒤로 가버린다.
“치워라.”
기수들이 일제히 말의 배를 강하게 찼다.
“이럇!”
탁, 탁!
“…….”
탁, 타탁!
말의 배를 차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러나 말들은 나아가지 않았다.
“응? 왜 이러지.”
말들이 오히려 조금씩 뒤로 가려 애쓴다.
터벅.
공천록이 한 걸음을 디뎠다.
사삭.
이히히히힝∼!
“왜, 뭐하자는 거야!”
기수 하나가 고삐를 이리저리 흔들며 외쳤다. 그는 알았다. 말들 모두가 기이한 공포에 질려 있음을.
말들이 어지럽게 날뛰었다. 그 순간, 유일하게 하호산만이 말을 강한 힘으로 진정시키고 놀란 눈을 부릅뜬다. 그때였다.
촤악!
사람 무릎 높이까지 자란 풀잎에 붉은 점들이 날아와 박혔다.
“끄윽.”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하호산. 그의 양 눈동자는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무언가를 보기 위해 애쓰는 것만 같다.
피시시시―
그의 입보다 더 길게 갈라진 목의 상처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튀어나왔다.
풀썩.
하호산이 말에서 떨어져 쓰러지고, 그의 주변에 널린 풀잎은 완전히 붉게 변한다.
“미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칭! 칭칭!
기수들이 말에서 내려 동시에 병기를 뽑는다.
번쩍! 뎅겅.
검을 채 뽑지도 못하고 한 명의 머리가 허공으로 폴짝 솟았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야 이!”
어느새 목이 없어져버린 기수의 뒤에 착지하듯 나타난 공천록을 향해 다섯 명이 순식간에 짓쳐왔다.
챠앙! 가가각.
공천록은 채도의 면으로 한 명의 검을 받자마자 그것을 기울여 옆으로 흘려버린다.
싸아앗.
채도 끝이 그자의 뱃가죽을 얇게 쓸고 지나갔다.
“윽!”
순간적인 쓰라림에 배를 베인 자가 힘주어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들어간 힘 때문에 내부의 압력이 상처를 터트려 그 사이로 창자가 퍽 하며 쏟아졌다.
챙챙챙챙!
두 명의 거센 공격을 튕겨내며 공천록이 뒷걸음쳤다.
느낌. 그 다음은 소리다.
수세였던 공천록이 갑자기 몸을 한 바퀴 크게 돌려 강공을 펼쳤다.
그의 공격을 막은 두 기수는 강한 진동으로 인해 손아귀에 충격을 받아 잠시 멈칫거렸다.
그때 공천록이 땅을 박차고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림과 동시에 채도를 가로로 빠르게 휘두른다.
팅!
몰래 다가와 공천록을 베려 했던 자의 검이 반으로 부러지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 그의 머리통 코 윗부분에 붉은 선이 생겼다.
스르륵 미끄러지듯 옆으로 내려가는 머리의 상부. 남은 하부에 달린 입은 영문도 모른 채 벙긋벙긋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움직인다.
“노오오옴!”
남은 셋 중 하나가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절초를 펼쳤다.
흉(凶)자를 그리며 쏟아지는 검기. 약하지만 일류 이상의 검사가 펼칠 수 있는 수준은 된다.
짧은 시간, 공천록은 자신의 몸을 조각낼 듯 들어오는 검기와 그것을 펼치며 들어오는 상대의 모습을 눈동자에 깊이 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채도를 주욱 밀어 넣는다.
퍼석!
어울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검기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어?”
자신만만하게 들어오던 기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검기를 뚫고 들어오는 검은 선을 보았다. 그리고 시야가 둘로 갈라지는 가 싶더니 곧 껌껌한 어둠 속으로 정신을 날려 보냈다.
“히이익!”
머리가 양쪽으로 갈라져 죽은 동료를 보며 기수 한 명이 기겁했다..
사앗!
허공에 작은 핏방울이 튀었다가 점점이 흩어졌다.
주륵.
공천록의 뺨에 보일 듯 말 듯한 줄이 그어졌다. 그리고 곧 선을 따라 벌건 피가 흘러내렸다.
“죽어라!”
공천록에게 일격을 먹인 기수가 몸을 틀며 검을 사선으로 쳐올렸다.
티잉―!
공격을 막아낸 공천록이 허공으로 높이 도약했다.
잠시 후 그가 땅으로 내려왔을 때, 공천록의 앞에는 동료의 죽음에 놀라 혼이 빠져 버린 자가 멍하니 서 있었다.
공천록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그어버렸다.
푸슈슈!
피가 부챗살처럼 날렸다. 그것을 본 마지막 일 인은 슬쩍 한 발을 뒤로 뺐다.
그는 눈앞의 저 괴물을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후퇴를 결정했다.
펑!
그리고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공을 발휘해 이 혈향 가득한 장소를 박차고 나갔다.
거기까지였다. 아니 이미 끝이었다.
기수는 경공을 펼침과 동시에 베어진 자신의 머리만이 한참동안 앞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다음으로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목 없는 시신이 힘을 잃고 풀 위로 쓰러졌다.
시신은 몇 차례 큰 경련을 일으키더니 퍽퍽 피를 뿜어내고는 곧 잠잠해졌다.
공천록은 변했다.
처음 합비의 문을 두드렸을 때의 그가 아니었다.
겉보기에 낙천적이고 농담을 즐겨하며 타인의 기분을 헤아려주던 공천록이 아니다.
훨씬 냉정해지고 가라앉은 얼굴. 거침없는 폭력성과 잔혹한 손속.
말수는 줄었고 어떤 목적을 향해 차분히 칼을 가는 것 같은 무거움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혹, 유손의 죽음이 있던 그날, 그의 어깨에 꽂혀 있던 쇠침을 제거했기 때문인가.
그것이 공천록에게 그간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지금의 상태로 변하는데 일조했음이 틀림없다.
“아, 이놈의 성격.”
공천록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멋대로인 것은 두 분을 다 닮았네요.”
이제는 흙이 되고 없는 공천록만의 두 영웅.
이전 공천록의 유쾌함은 그들 중 하나와 같고, 지금 공천록의 무거움은 다른 하나와 흡사했다.
상관진과 하호산의 독대가 끝나고 하루가 지난 시점. 그 사이 하호산과 금룡전대는 구황 요새를 떠났다.
낮 시간이지만 모든 창을 닫아두어 껌껌하기만 한 방 안에 상관진이 있었다.
그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지금 상관진은 머릿속으로 하호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상관 총사령님. 당신께서도 오래전 본가를 대표하여 남룡천의 무력 단체를 지휘했던 분이십니다. 한쪽으로 쏠리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한쪽이라니요?”
“총사령님과 삼공자님, 두 분 모두 남룡천주께 충성을 맹세했던 분들. 그것은 모든 남부무림인들에게 동일했겠지만 남룡천 총본에 적을 두었던 이들에겐 특히 더하지요. 늘 함께 삶과 죽음 앞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신 분들 아닙니까.”
“…….”
“지금 남룡천은 더 이상 존재치 않고, 천주께서도 이 세상 분이 아닙니다. 총사령님의 충성이 향할 곳은 오로지 본가의 주인이신 장주뿐이란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상관진이 크게 한숨을 쉰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 하가장의 일원일 뿐입니다. 대체 금룡삼전대 부대주께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삼공자는 현재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본가에서 추락한 위상 때문에, 차기 장주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불필요한 행동을 하고 있어요.”
“불필요?”
“거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그 이상은… 일단 총사령께서 선택하셔야 할 겝니다.”
“선택? 대공자냐 삼공자냐 이걸 말하는 겁니까. 지금 외적의 공격으로 가문 전체가 흔들릴 지경인데 내부의 권력 다툼에 참여하란 말입니까? 어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분들이군요.”
“삼공자가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본가의 결정입니다.”
상관진은 지금 이 순간, 쓴물을 들이킨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요. 전 과거에도, 지금도, 먼 훗날에도 하가장의 무인 상관진입니다. 전 하가장의 장주께 모든 충성을 바칠 뿐이며 그 대상이 누구든 중요하지 않다는 점,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그러하시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 정도 선에서 하호산은 크게 만족한 눈치였다.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자리를 물렸으면 합니다.”
“잠깐.”
“또 뭘 요구하시려 함입니까.”
“공천록.”
“……?”
“그가 이곳에 왜 있는지 모르지만 조심하시길.”
“당최…….”
상관진은 뜬금없는 하호산의 충고에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는 죽음을 부르는 자입니다. 적이건, 아군이건. 피가 흐르는 강 끝에는 항상 그가 있었지요.”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 부대주님.”
이로써 확실한 축객령을 내리는 상관진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그럼 좋은 대접 받고 돌아갑니다. 아, 본가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 따위는 전하지 않을 겁니다. 장주님과 대공자를 포함한 본가의 모든 수뇌들은 상관 총사령의 하가를 향한 충심만을 기억할 겁니다. 다만, 공천록에 대한 건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사실 대공자께서도 그에게 관심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휴우…….”
상관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함에 치를 떨었다.
분명 육문과 하가장의 전쟁은 격화되고 있건만 저 합비의 하씨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전쟁의 양상에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곳에서 엉뚱한 것을 찾고 있다.
지주에서만 하가를 위해 일천에 가까운 무인들과 식솔들이 죽었다. 회남 전체를 따져본다면 그 수를 세는 것조차 버겁다. 이는 그저 강호의 일로만 치부하기 힘들 정도의 사건이었다.
현재 대당제국이 혼란기가 아니었다면 당장 절도사의 군대가 출병했을 지도 모른다.
상관진은 처음부터 중립이었다. 차기 장주를 향한 하씨 형제들의 경주 따위는 애초에 그의 관심 밖이었다는 말이다.
이 전쟁을 빨리 끝내자는 셋째 공자의 말에 동의했을 뿐이지 그의 추후 행보에 밥그릇을 얹을 생각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하용보가 주고 간 무인들은 그냥 중요한 전력 외에 어떤 가치도 없었다. 예전 남룡천 무력 부대의 장이었을 때, 정팔 같은 구십삼반 간부급 무인과 안면이 있었던 것이 전부다.
그런데 대공자는 기가 찬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 점이 더 답답하고 화가 나는 상관진이었다.
“총사령님.”
바깥에서 구황단의 부사령 하신이 상관진을 찾았다.
“들어와도 좋다.”
그의 허락에 방문이 열리고 빛과 함께 하신이 들어왔다.
순간 상관진은 하신의 표정을 보고 크게 잘못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장내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어떤 무인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고, 다른 무인은 땅을 치며 통곡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던 하가의 방계 한 명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몇 명의 용병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이…럴 수가.”
상관진의 입에서 허탈한, 그리고 충격과 고통이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말 한 마리가 끌고 온 수레.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있는 상자 하나.
상자 속에는 사람의 엄지손가락 수백 개가 들어 있었다.
“결국 이리될 수밖에 없었나.”
상관진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들었다.
엄지손가락들의 크기는 다양했다. 투박하고 주름진 성인 남성의 것에서부터 가늘고 고운 여인의 것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의 것까지.
총 삼백이 넘는 이들의 세상 살았던 흔적이 이 상자에 담겨 구황단의 요새로 들어왔다.
“용마(龍魔) 비사구. 이노옴…….”
죽인 상대의 엄지를 잘라 보낸다고 알려진 용린각의 마왕 비사구. 스스로를 용왕(龍王)이라 칭하며 강력한 무(武)를 바탕으로 근방에 적수가 없다는 초고수.
그가 지배하는 수주(隨州)는 회남대전 이전부터 이 무지막지한 철인(鐵人)의 폭정에 신음해야 했다. 관(官)이 지켜주지 못하는 곳에서 용린각과 비사구는 강호무림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공포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어찌하여… 이토록 잔인하단 말인가.”
지난 달, 지주 일대에 몇 안 남은 하씨의 분가 격인 명진당, 명화당의 식솔 전체가 구황단 요새로 피난을 왔었다. 한동안 그들을 수용하다가 더 이상 여력이 없어 합비의 본가로 전서를 보내 이들을 받아달라고 요청했고 본가는 이를 허락, 구황단 무천조(武天組) 오십으로 그들을 호위케 하여 며칠 전 비밀리에 요새를 떠나게 했다.
한데 어떻게 알았을까. 세상에 비밀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
“대전 초부터 계속 있어왔던 일입니다. 육문의 개새끼들은 하씨의 핏줄은 갓난아이까지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신이 상관진을 오히려 위로했다. 그 또한 일가 전체가 귀굴의 살귀들에게 학살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하나, 이처럼 상자에 담아 보낸 적은 없다.”
분노하는 상관진은 이런 추악한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꽤 순수한 무인이다.
“총사령님… 주위의 무인들이 보고 있습니다.”
하신이 상관진의 귀에 속삭였다. 그는 육문이 원하는 게 무언지 잘 알았다.
난공불락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구황 요새 무인들의 사기를 꺾는 데 이만한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흥분하고 좌절하는 총사령의 모습은 더더욱 전력 약화를 부채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