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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흠, 복수치고는 참…….”
연무장 구석에서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던 조훤이 말했다.
“비사군가 그 새끼, 예전에 천주(天主)께서 재수 없다고 패 죽이려 했던 놈 맞지?”
“어. 몇 놈 더 있었는데 그놈들은 진짜 맞아 죽었고 비사구 금마는 뒤지기 전에 쨌지.”
한쪽 눈동자가 허옇게 먼 단유가 대답한다.
“그때 제대로 사지를 절단했어야 했는데. 쩝.”
“그래서, 네놈이 가서 붙으면 이길 자신은 있고?”
“아, 썅! 언제 내가 간다고 했나?”
“킬킬킬킬.”
이들은 다른 구황단 무인들의 침울한 분위기와 다르게 무인이 아닌 이들의 처참한 죽음들 앞에서 농담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근처에 있던 하씨 방계들과 외척 출신들이 이들을 노려보았다.
“미안. 이게 우리가 애도하는 방식이라서.”
기존 구황단원들이 구십삼반 출신들을 쭉 지켜본 바로는 진짜 삶 자체가 저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저들은 그랬다. 스물한 명이 와서 하나가 죽었는데도 죽은 동료를 욕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자들이다.
스윽.
갑자기 이들 사이로 누군가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왔나.”
정팔이 묻는다.
“아, 똥 좀 치우느라고요.”
어디를 다녀왔는지 한참이나 보이지 않던 공천록이었다.
특유의 유쾌함은 줄었지만 그래도 구십삼반 무인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기에 서로에게 불편함 따위는 없었다.
“킁, 킁. 이게 무슨 냄새야.”
조훤이 코를 벌름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어오, 젠장. 이거 고향 냄새잖아?”
“그렇구먼. 껄껄. 조훤이 네 고향 도살장의 향기네. 커허허허!”
공천록에게서 나는 진한 혈향을 맡으며 구십삼반 무인들이 웃기 시작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음에도 이들은 공천록에게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이들은 공천록을 그냥 믿는다. 아마도 하용보가 공천록을 신뢰하는 만큼은 될 것이다.
공천록은 계속 농담과 욕을 섞어 뱉는 이들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용보도 그렇고, 구십삼반도 그렇고, 또 그가 알았던 누군가도 그렇고…….
남룡천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활했던 이들에겐 참 비슷한 면이 많았다.
아마도 그 남룡천주라는 이의 성격이 이래서였을까. 흔히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공천록이란 인간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들에게 ‘정’이란 걸 느끼나 보다. 공천록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머리의 천을 슥슥 문질렀다.
“대영감한테서 뭐 들어온 소식 같은 건 없나?”
맹포가 정팔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없다. 하지만 대영감의 계획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황산을 치러 가겠지. 대영감도 필사적일 거야. 수로맹이란 놈들,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듯 보여도 악착같은 면이 있거든.”
하용보는 결국 장주 하중검의 허가를 얻어 합비 외부의 적을 치러 나왔다.
다른 용병단과 비교해 인원이 훨씬 부족한 적운단(赤雲團)과 목여충, 곽능파를 데리고 장강을 따라 수로맹을 공격하러 간 것이다.
장주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하용보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하중검은 장주의 권위로 주위의 참견을 눌러 버렸다.
“아무튼 여기는 이 일로 인해 한동안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상관 단주는 강한 무인이지만 또 여린 면도 있어. 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방향이 엉뚱한 데로 쏠린다면…….”
구십삼반 무인들 중에서도 상관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가 정팔이었다. 그는 이 요새의 총사령이 가끔 신중하지 못하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육문에도 천(天)의 동지였던 잡것들이 있을 테니, 뭐.”
뻣뻣한 머리를 대충 묶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차하동이 중얼거린다.
그의 말은 적이 이쪽을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였다.
진혼제는 저녁 내내 계속되었다.
싸움터에서 죽기를 맹세한 강호인 삼백이 아니었다. 무천조 오십을 빼면 이백오십이 넘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이들이었다.
어쩌면 이 억울한 죽음에 극도의 원한을 품고 갔을 수도 있다. 수백의 원한이 모이면 수렁이 된다. 원념으로 이루어진 수렁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백 년간의 강호내전과 최근 십년 동안 있어왔던 새로운 내전. 그 끝에서 활약했던 상관진과 그의 경험 많은 수하들은 이 진혼제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알았다.
실제로 원귀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남아 있는 인간들의 마음속 수렁. 그것을 달래고 얼러 풀어주어야 한다.
진혼제는 죽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닌, 산 자들을 위한 것이다.
화르륵.
수백 장의 지전(紙錢)이 동시에 불붙어 허공에서 산화했다.
화르르륵.
또 수백 장이 불타며 밤하늘로 날아간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잘 가시오.”
내공을 이용해 손바닥 위에 올린 지전 뭉치를 단번에 불살라 뿌리는 상관진.
그의 옆과 뒤로 수많은 구황단 무인들이 모여 함께 지전을 불사른다.
요새 외곽을 순찰하는 이들을 제외한 전원이 대전각 앞에 모여 진혼제의 끝을 장식했다. 물론 구십삼반 열아홉 명과 공천록도 함께였고.
“가시오, 가. 이참에 내한테 들러붙은 칼 든 귀신들도 다 같이 가시오, 가.”
구십삼반 무인들 중, 가장 어린 덕선이 중얼거렸다.
언뜻 들으면 웃음이 나올 말이었지만 그의 음성은 왠지 모를 허탈감과 진지함, 아쉬움과 시름이 섞여 묘한 느낌을 주었다.
역시나 이들도 진혼제를 통해 스스로의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어떤 고통과 외로움을 푸는 것일 터이다.
이 많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공천록만이 뒷짐을 지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그럴까. 아니면 마음 한 구석에 티끌만큼이라도 수렁을 품고 있지 않아서일까.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먼 하늘로 솟다가 점점이 사라져 가는 불똥들을 바라볼 뿐이다.
“해산.”
나직하지만 모두의 귀에 확실하게 들리는 상관진의 말을 마지막으로 진혼제가 파했다.
무인들은 하나둘 넓게 만든 제상의 위패들을 향해 손을 모아 고개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맨 뒷줄에 있던 공천록 무리들은 마지막으로 위패들에 절한 뒤 걸음을 돌렸다.
[공천록.]
전음이다. 초일류를 넘어선 자만이 할 수 있다는.
[복장을 갖추고 자시(子時)의 정중(正中)에 요새 밖 우물 앞으로 나오너라.]
공천록이 요대를 덮은 상의를 젖히고 채도를 살짝 움직였다.
채도에서 반사된 불빛이 누군가의 눈가를 두어 번 스치고 지나갔다.
공천록의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악―! 가아악―!
만물이 잠든 밤. 아니, 잠들었어야 하는 깊고도 깊은 밤.
풀벌레조차 숨을 죽이는 이 시각에 어둠과 닮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울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푸드덕!
달을 향해 날아오른 까마귀가 깃털을 떨어뜨렸다. 깃털은 좌우로 움직이며 천천히 하강한다.
깃털을 잡으려는 손이 나타났다. 그러나 깃털에 생명이 있어 그 손길을 거부하듯 손으로부터 멀어져 근처의 우물 안으로 떨어진다.
우물 속에는 달이 있었다. 깃털은 하늘에 떠 있는 달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까마귀 대신, 우물에 비친 달에 닿았다.
번져가는 파문으로 인해 달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깃털을 놓친 자의 얼굴도 함께 파문에 비틀린다.
터벅. 터벅.
우물 속을 빤히 쳐다보던 공천록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었다.
컴컴한 공간을 뚫고 누군가가 등장했다.
상관진. 전음으로 공천록을 이곳까지 오게 한 이가 바로 그였다.
공천록이 상관진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밤이지만 무(武)에 능한 자들은 어둠을 극복하는 법을 안다. 즉, 서로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상관진은 평소 입던 당장(唐裝)이 아닌 전투단의 흑색 무복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공천록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지금이?”
감히 요새의 주인 앞에서 말이 짧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아차린 상관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자정에 보자고 해놓고 늦었으니.”
공천록은 상관진의 허리에 걸린 엽도(獵刀)에 눈길을 주었다.
장년에 다다른 강호의 고수가 들고 다닐만한 병기로서는 영 볼품이 없어 보인다.
“걷지.”
상관진이 짧게 말하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공천록은 잠시 요새 쪽을 바라본 뒤, 상관진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두 사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것만 같던 상관진이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말을 시작했다.
“네 탓이 아니다.”
“에? 뭐가요.”
“넌 너의 소임을 다했을 뿐, 무고한 이백오십의 목숨에 책임이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공천록이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뭔가 그 얼굴은. 꼭 남 걱정하지 말고 댁이나 진정하라는 표정이군.”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어루만져 주고 지나간다.
“난 또 네가 이름 높았던 두 원수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그들 불쌍한 이들이 죽었다고 여길까봐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나 보다. 허허.”
공천록은 또 다시 느꼈다. 역시 남룡천을 한 번이라도 거쳐 간 인간들은 남들과 다른 괴상한 사고방식을 선물받는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묵묵염수도 비효림도 난전 중에 당한 것이 아니라 너 혼자 가서 발라 버리고 왔지 않은가.”
으쓱.
“제가 언제 아니라고 말했습니까? 총사령님도 그렇고 다들 신나서 이게 다 너희 ‘모두’의 공이다! 라고 하셨으면서.”
“껄껄껄껄!”
상관진은 간만에 크게 웃어보았다.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참. 나였어도 고전했을 상대를 가벼운 부상만 입고 썰어버리다니. 너 같은 사람을 두고 장강의 뒷 물이라 하는 거겠지?”
상관진이 무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앞 물이었던 녀석인가?”
그의 말에 공천록은 묘한 미소를 보였다.
“네가 누구고 어디서 왔으며 무얼 하던 자인지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나와 하가장에는… 응? 하가장은 빼라고? 그래. 나와 우리 구황단에게는 소중한 전력이니까. 원래 용병의 과거는 묻는 게 아니라잖아?”
어딘가 끝없이 근엄하고 진지할 것만 같던 상관진도 공천록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말이 많다. 왜일까.
“금룡삼전대 부대주와 그 대원들은 잘 전송해 주고 왔나?”
팅!
공천록은 대답대신 채도를 가볍게 튕겨주었다.
***
“쓸데없는 입놀림이 사람의 명을 재촉하는군…….”
그들의 최후에 대해서도 상관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느새 이들은 꽤 멀리까지 왔다. 무림인들의 빠른 걸음으로 반 시진을 걸어왔으니.
“공천록.”
상관진이 우뚝 섰다.
“내가 왜 이 시간에 너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이라도 하겠나?”
팅.
공천록이 허리에 걸린 채도의 면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어딘가의 놈들이랑 한판 뜨자는 거죠?”
“더없이 멋진 대답이로군.”
이들이 멈춰선 곳.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진 대평원의 어느 한 점.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불빛들이 아른거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속이 너무 상해서 말이야.”
상관진이 엽도의 도파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홍마군의 다섯 마군장 중 하나가 저기 있다. 하호산이 가져다 준 정보이니 틀림이 없을 테지. 아직 오마장(五馬將)이란 녀석과 붙어 본 적이 없어 얼마나 센 놈인지 모르겠지만 너와 함께라면 왠지 그놈의 목을 딸 수 있을 것 같구나. 주변에 널린 오십 친위군들의 생명도 함께.”
공천록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팅. 팅.
채도의 울림이 또 다시 심장까지 전해왔다.
“흠, 복수치고는 참…….”
연무장 구석에서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던 조훤이 말했다.
“비사군가 그 새끼, 예전에 천주(天主)께서 재수 없다고 패 죽이려 했던 놈 맞지?”
“어. 몇 놈 더 있었는데 그놈들은 진짜 맞아 죽었고 비사구 금마는 뒤지기 전에 쨌지.”
한쪽 눈동자가 허옇게 먼 단유가 대답한다.
“그때 제대로 사지를 절단했어야 했는데. 쩝.”
“그래서, 네놈이 가서 붙으면 이길 자신은 있고?”
“아, 썅! 언제 내가 간다고 했나?”
“킬킬킬킬.”
이들은 다른 구황단 무인들의 침울한 분위기와 다르게 무인이 아닌 이들의 처참한 죽음들 앞에서 농담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근처에 있던 하씨 방계들과 외척 출신들이 이들을 노려보았다.
“미안. 이게 우리가 애도하는 방식이라서.”
기존 구황단원들이 구십삼반 출신들을 쭉 지켜본 바로는 진짜 삶 자체가 저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저들은 그랬다. 스물한 명이 와서 하나가 죽었는데도 죽은 동료를 욕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자들이다.
스윽.
갑자기 이들 사이로 누군가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왔나.”
정팔이 묻는다.
“아, 똥 좀 치우느라고요.”
어디를 다녀왔는지 한참이나 보이지 않던 공천록이었다.
특유의 유쾌함은 줄었지만 그래도 구십삼반 무인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기에 서로에게 불편함 따위는 없었다.
“킁, 킁. 이게 무슨 냄새야.”
조훤이 코를 벌름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어오, 젠장. 이거 고향 냄새잖아?”
“그렇구먼. 껄껄. 조훤이 네 고향 도살장의 향기네. 커허허허!”
공천록에게서 나는 진한 혈향을 맡으며 구십삼반 무인들이 웃기 시작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음에도 이들은 공천록에게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이들은 공천록을 그냥 믿는다. 아마도 하용보가 공천록을 신뢰하는 만큼은 될 것이다.
공천록은 계속 농담과 욕을 섞어 뱉는 이들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용보도 그렇고, 구십삼반도 그렇고, 또 그가 알았던 누군가도 그렇고…….
남룡천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활했던 이들에겐 참 비슷한 면이 많았다.
아마도 그 남룡천주라는 이의 성격이 이래서였을까. 흔히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공천록이란 인간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들에게 ‘정’이란 걸 느끼나 보다. 공천록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머리의 천을 슥슥 문질렀다.
“대영감한테서 뭐 들어온 소식 같은 건 없나?”
맹포가 정팔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없다. 하지만 대영감의 계획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황산을 치러 가겠지. 대영감도 필사적일 거야. 수로맹이란 놈들,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듯 보여도 악착같은 면이 있거든.”
하용보는 결국 장주 하중검의 허가를 얻어 합비 외부의 적을 치러 나왔다.
다른 용병단과 비교해 인원이 훨씬 부족한 적운단(赤雲團)과 목여충, 곽능파를 데리고 장강을 따라 수로맹을 공격하러 간 것이다.
장주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하용보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하중검은 장주의 권위로 주위의 참견을 눌러 버렸다.
“아무튼 여기는 이 일로 인해 한동안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상관 단주는 강한 무인이지만 또 여린 면도 있어. 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방향이 엉뚱한 데로 쏠린다면…….”
구십삼반 무인들 중에서도 상관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가 정팔이었다. 그는 이 요새의 총사령이 가끔 신중하지 못하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육문에도 천(天)의 동지였던 잡것들이 있을 테니, 뭐.”
뻣뻣한 머리를 대충 묶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차하동이 중얼거린다.
그의 말은 적이 이쪽을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였다.
진혼제는 저녁 내내 계속되었다.
싸움터에서 죽기를 맹세한 강호인 삼백이 아니었다. 무천조 오십을 빼면 이백오십이 넘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이들이었다.
어쩌면 이 억울한 죽음에 극도의 원한을 품고 갔을 수도 있다. 수백의 원한이 모이면 수렁이 된다. 원념으로 이루어진 수렁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백 년간의 강호내전과 최근 십년 동안 있어왔던 새로운 내전. 그 끝에서 활약했던 상관진과 그의 경험 많은 수하들은 이 진혼제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 알았다.
실제로 원귀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남아 있는 인간들의 마음속 수렁. 그것을 달래고 얼러 풀어주어야 한다.
진혼제는 죽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닌, 산 자들을 위한 것이다.
화르륵.
수백 장의 지전(紙錢)이 동시에 불붙어 허공에서 산화했다.
화르르륵.
또 수백 장이 불타며 밤하늘로 날아간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잘 가시오.”
내공을 이용해 손바닥 위에 올린 지전 뭉치를 단번에 불살라 뿌리는 상관진.
그의 옆과 뒤로 수많은 구황단 무인들이 모여 함께 지전을 불사른다.
요새 외곽을 순찰하는 이들을 제외한 전원이 대전각 앞에 모여 진혼제의 끝을 장식했다. 물론 구십삼반 열아홉 명과 공천록도 함께였고.
“가시오, 가. 이참에 내한테 들러붙은 칼 든 귀신들도 다 같이 가시오, 가.”
구십삼반 무인들 중, 가장 어린 덕선이 중얼거렸다.
언뜻 들으면 웃음이 나올 말이었지만 그의 음성은 왠지 모를 허탈감과 진지함, 아쉬움과 시름이 섞여 묘한 느낌을 주었다.
역시나 이들도 진혼제를 통해 스스로의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어떤 고통과 외로움을 푸는 것일 터이다.
이 많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공천록만이 뒷짐을 지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그럴까. 아니면 마음 한 구석에 티끌만큼이라도 수렁을 품고 있지 않아서일까.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먼 하늘로 솟다가 점점이 사라져 가는 불똥들을 바라볼 뿐이다.
“해산.”
나직하지만 모두의 귀에 확실하게 들리는 상관진의 말을 마지막으로 진혼제가 파했다.
무인들은 하나둘 넓게 만든 제상의 위패들을 향해 손을 모아 고개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맨 뒷줄에 있던 공천록 무리들은 마지막으로 위패들에 절한 뒤 걸음을 돌렸다.
[공천록.]
전음이다. 초일류를 넘어선 자만이 할 수 있다는.
[복장을 갖추고 자시(子時)의 정중(正中)에 요새 밖 우물 앞으로 나오너라.]
공천록이 요대를 덮은 상의를 젖히고 채도를 살짝 움직였다.
채도에서 반사된 불빛이 누군가의 눈가를 두어 번 스치고 지나갔다.
공천록의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악―! 가아악―!
만물이 잠든 밤. 아니, 잠들었어야 하는 깊고도 깊은 밤.
풀벌레조차 숨을 죽이는 이 시각에 어둠과 닮은 까마귀 한 마리가 울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푸드덕!
달을 향해 날아오른 까마귀가 깃털을 떨어뜨렸다. 깃털은 좌우로 움직이며 천천히 하강한다.
깃털을 잡으려는 손이 나타났다. 그러나 깃털에 생명이 있어 그 손길을 거부하듯 손으로부터 멀어져 근처의 우물 안으로 떨어진다.
우물 속에는 달이 있었다. 깃털은 하늘에 떠 있는 달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까마귀 대신, 우물에 비친 달에 닿았다.
번져가는 파문으로 인해 달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깃털을 놓친 자의 얼굴도 함께 파문에 비틀린다.
터벅. 터벅.
우물 속을 빤히 쳐다보던 공천록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머리를 들었다.
컴컴한 공간을 뚫고 누군가가 등장했다.
상관진. 전음으로 공천록을 이곳까지 오게 한 이가 바로 그였다.
공천록이 상관진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밤이지만 무(武)에 능한 자들은 어둠을 극복하는 법을 안다. 즉, 서로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상관진은 평소 입던 당장(唐裝)이 아닌 전투단의 흑색 무복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공천록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지금이?”
감히 요새의 주인 앞에서 말이 짧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아차린 상관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자정에 보자고 해놓고 늦었으니.”
공천록은 상관진의 허리에 걸린 엽도(獵刀)에 눈길을 주었다.
장년에 다다른 강호의 고수가 들고 다닐만한 병기로서는 영 볼품이 없어 보인다.
“걷지.”
상관진이 짧게 말하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공천록은 잠시 요새 쪽을 바라본 뒤, 상관진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두 사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것만 같던 상관진이 길게 숨을 내쉰 다음 말을 시작했다.
“네 탓이 아니다.”
“에? 뭐가요.”
“넌 너의 소임을 다했을 뿐, 무고한 이백오십의 목숨에 책임이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공천록이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뭔가 그 얼굴은. 꼭 남 걱정하지 말고 댁이나 진정하라는 표정이군.”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을 어루만져 주고 지나간다.
“난 또 네가 이름 높았던 두 원수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그들 불쌍한 이들이 죽었다고 여길까봐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나 보다. 허허.”
공천록은 또 다시 느꼈다. 역시 남룡천을 한 번이라도 거쳐 간 인간들은 남들과 다른 괴상한 사고방식을 선물받는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나? 묵묵염수도 비효림도 난전 중에 당한 것이 아니라 너 혼자 가서 발라 버리고 왔지 않은가.”
으쓱.
“제가 언제 아니라고 말했습니까? 총사령님도 그렇고 다들 신나서 이게 다 너희 ‘모두’의 공이다! 라고 하셨으면서.”
“껄껄껄껄!”
상관진은 간만에 크게 웃어보았다.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참. 나였어도 고전했을 상대를 가벼운 부상만 입고 썰어버리다니. 너 같은 사람을 두고 장강의 뒷 물이라 하는 거겠지?”
상관진이 무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앞 물이었던 녀석인가?”
그의 말에 공천록은 묘한 미소를 보였다.
“네가 누구고 어디서 왔으며 무얼 하던 자인지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나와 하가장에는… 응? 하가장은 빼라고? 그래. 나와 우리 구황단에게는 소중한 전력이니까. 원래 용병의 과거는 묻는 게 아니라잖아?”
어딘가 끝없이 근엄하고 진지할 것만 같던 상관진도 공천록 앞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말이 많다. 왜일까.
“금룡삼전대 부대주와 그 대원들은 잘 전송해 주고 왔나?”
팅!
공천록은 대답대신 채도를 가볍게 튕겨주었다.
“쓸데없는 입놀림이 사람의 명을 재촉하는군…….”
그들의 최후에 대해서도 상관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느새 이들은 꽤 멀리까지 왔다. 무림인들의 빠른 걸음으로 반 시진을 걸어왔으니.
“공천록.”
상관진이 우뚝 섰다.
“내가 왜 이 시간에 너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이라도 하겠나?”
팅.
공천록이 허리에 걸린 채도의 면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어딘가의 놈들이랑 한판 뜨자는 거죠?”
“더없이 멋진 대답이로군.”
이들이 멈춰선 곳.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진 대평원의 어느 한 점.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불빛들이 아른거린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속이 너무 상해서 말이야.”
상관진이 엽도의 도파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홍마군의 다섯 마군장 중 하나가 저기 있다. 하호산이 가져다 준 정보이니 틀림이 없을 테지. 아직 오마장(五馬將)이란 녀석과 붙어 본 적이 없어 얼마나 센 놈인지 모르겠지만 너와 함께라면 왠지 그놈의 목을 딸 수 있을 것 같구나. 주변에 널린 오십 친위군들의 생명도 함께.”
공천록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팅. 팅.
채도의 울림이 또 다시 심장까지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