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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밤하늘을 가르는 대은한(大銀漢) 아래로 펼쳐진 평원은 고요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뒤로 두고 자리한 수십 개의 붉은 천막들 또한 조용하기만 하다.
군데군데 불을 피워 이곳에 사람들이 있음을 알릴뿐.
푸릉∼
“이놈아. 자라 좀.”
적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말 등을 쓰다듬었다.
“왜 이러지, 자꾸.”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불가에 앉아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낮부터 똥을 못 싸서 그래. 그러고 있지 말고 일루 와서 불이나 쬐지 그래.”
“이놈 눈 보여? 눈알이 제자리를 못 찾고 흔들리고 있어. 내가 이놈하고 같이 달린 게 두 해야. 힝! 하면 억! 하고 알아듣는단 말씀이시지.”
그는 헝겊에 따뜻한 물을 묻혀 말의 몸을 닦아준다.
“이그, 이 녀석아. 뭐가 그리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는 게냐.”
척, 척, 척, 척!
갑옷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내는 소리다.
“수고가 많네그려.”
주둔지를 순찰하는 다섯 명의 갑주 무인들에게 불가에 앉은 이가 손짓을 했다. 와서 물이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뜻이다.
“뭐하시오, 형님은. 지금이면 곯아떨어질 시간 아니오?”
웃으며 다가온 순찰자 하나가 국자로 따뜻한 물을 떠 마셨다.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서 잠이 줄어드는 건지, 뭔지, 몸도 쑤시고 오늘은 자기 글렀어.”
“클클클.”
다섯 순찰자들이 불가에 모여 평원의 추위를 잠시 잊는다.
“그나저나 자네 다섯째가 태어나고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구먼.”
“다음 달이 딱 그때라오. 우리 강아지들 못 본 지도 세 달이 넘었소. 젠장.”
후루룩, 후루룩.
잠시 동안 이들이 물을 마시는 소리만이 울렸다.
“말똥 좋아하시는 우리 형님께선 어째 아까부터 거서 말 몸만 닦고 계시오. 형님도 와서 한 모금 하시구랴.”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순찰자들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말을 돌보는 남자를 불렀다.
“끌끌, 그러니 형님이 장가를 못 가오. 하루 종일 말에만 붙어서 안절부절못하시니, 원.”
모두가 껄껄거리며 남자를 장난스럽게 놀렸다.
“너거들은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해라.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아, 걱정 마시오. 우리가 누구요. 천하제일마군(天下第一馬軍) 홍마군이 아니오. 누가 감히 홍마군이 머무는 곳을 침범하리오. 길 잃은 똥개라면 모를까.”
“크크크크.”
“아, 됐고. 오마장께서 너거들 여기서 노닥거리는 거 아시면 경을 칠 테니, 어여어여 갈 길 가 이것들아.”
남자가 귀찮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순찰자들이 낄낄거리며 일어나 따뜻한 자리와 물을 제공한 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주둔지 외곽을 걸으며 천천히 멀어졌다.
“아∼함.”
잠깐의 소란스러움이 졸음을 재촉했는가. 잠이 잘 안 온다던 무인이 하품을 했다.
“난 자러 들어갈 건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푸릉∼ 히힝∼
“아무리 봐도 이상해.”
“아, 진짜 뭐가.”
말을 목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쓰다듬은 남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왜? 벌써 향수병이라도 걸렸어?”
“이 녀석… 털이 다 곤두섰어.”
“그게 왜.”
“내가 지금까지 이런 반응을 본 게 딱 두 번이었어. 한 번은 전투에 투입되기 전, 다른 한 번은… 전 주인이 이놈 앞에서 두 동강이 났을 때.”
휙.
그가 갑자기 뒤로 돌아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어두울 뿐인 하늘과 평원만을 보았다.
“…….”
“사람 참, 분위기 잡긴. 난 들어갈 테니 밤새 말이나 붙잡고 놀아 그럼. 에잉!”
과민반응을 보이는 동료 때문에 소름이 돋았던 무인은 어깨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 순간. 그는 그 동료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벌건 불빛을 받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은 착각일까.
툭.
잠이 확 달아났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분명 있는데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건, 분명 본능이었다.
후우∼
옆에서 누군가가 길게 숨을 내쉰다.
굳은 얼굴의 동료는 계속 그 상태로 이쪽을 바라만 본다. 천막으로 들어가려던 무인은 결국 자신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우∼
하얀 입김. 표정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 빛바랜 두건.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엉덩이를 걸치고 불을 쬐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귀신? 사람?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다.
스슥.
놈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무인을 바라보았다.
움직여야 하는데, 소리쳐야 하는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슴부터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축축해지더니 금방 아랫도리까지 벌겋게 젖는다.
“꺼, 끄르륵.”
갈라진 목에서 검은 피가, 끓는 냄비에서 튀어나오는 물처럼 쿨럭쿨럭 쏟아졌다.
숨구멍마저 끊어져 허파가 공기를 찾을 때마다 피와 거품이 스읍스읍 목 안으로 들락날락 거린다.
턱.
무너지는 그의 시신을 공천록이 받아 안았다. 그리곤 말 앞에 서있는 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동료의 비참한 죽음에도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일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공천록은 죽은 자를 천천히 눕히고 모닥불에 흙을 뿌렸다.
풀썩.
불이 완전히 꺼져 갈 무렵, 서 있던 자가 쓰러졌다.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그의 뒷면은 정수리에서부터 회음부까지 일자로 깊고 길게 갈라진 상태였다.
공천록이 자리를 잡는 순간, 아마도 절명했으리라.
생긴 모양답지 않게 상관진, 이 남자도 암습에 능한 무인이었다. 게다가 빠르기는 번개가 따로 없었다. 공천록조차 그가 엽도를 휘두르는 장면을 못 보았으니까.
후우∼!
공천록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상관진은 이미 이 장소에 없다. 공천록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다른 먹잇감들을 사냥하러 간 것이다. 졸지에 청소부가 되어버린 공천록은 잠깐 인상을 쓰다가 곧 시체들을 끌어 천막 안에 넣는다.
푸릉! 푸르릉!
말이 코에서 콧물과 김을 내뿜으며 흥분했다. 이대로 두면 ‘비명’을 지르며 날뛸 것이 자명했다. 공천록이 말에게 다가갔다.
말이 뒷걸음을 쳤지만 공천록은 개의치 않고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아래로 당겨 말과 얼굴을 맞대었다.
흥분하던 말이 차분해졌다. 비 오는 날 물 위에 뜬 연잎처럼 흔들리던 눈동자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화르륵!
주둔지 외곽에서 불길이 솟았다. 쌓아놓았던 건초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순찰 중이던 무인들이 황급히 달려왔으나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삐이이익―!
“불이다!”
호각 소리와 무인들의 외침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천막에서 곤히 잠자던 홍마군 무인들은 이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깨어나 무장도 갖추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다른 쪽 건초 더미에서도 불이 일어난다. 십여 명이 달려와 물을 뿌려 대었지만 이 또한 소용없는 짓이었다. 무공만 강하면 무엇 하랴. 마른 건초는 마치 천하의 고수처럼 이들을 농락하며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쿵.
사방이 고요해졌다.
홍마군 무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 보이지 않았던 자가 거세게 타는 불덩어리 옆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막 지옥 불에서 뛰쳐나온 화마(火魔)의 화신(化身)을 연상시켰다.
화르륵, 화르륵.
그를 낚아채고 싶어 하는 듯, 무명의 존재를 향해 불이 손을 뻗어보지만 형태 없는 벽에 막혀 흩어진다.
“귀신인가…….”
잠에서 덜 깬 자가 중얼거렸다.
귀신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가 들고 있는 짧고 네모난 칼에 불이 닿았다.
치이이익.
지글거리며 증발하는 저것은 누군가의 피.
귀신의 칼이 벌겋게 달궈졌다. 저 정도면 거의 자루를 잡은 손조차 익어버릴 만도 한데 아무런 내색이 없는 걸 보니 귀신이 맞나보다.
“으…….”
홍마군 무인 하나가 저도 모르게 허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그곳에 그의 병기는 없었다.
이곳 모두가 급히 나오느라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했다.
팟!
귀신이 뛰었다. 인지하지도 못한 순간에 이 불쾌한 침입자는 무리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세 명의 머리가 두둥실 몸과 분리되어 공중을 돌았다.
그제야 남은 자들은 상황 파악을 했다. 이자는 귀신이 아니라 죽여야 할 적, 즉 인간임을.
“적이다!”
소리친 자가 먼저 죽었다. 허리를 깊게 베고 지나간 자리가 까맣게 타면서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긴다.
펑! 퍼펑!
장법(掌法)을 익힌 자가 공천록에게 장력을 퍼부었다.
핏. 펄럭.
얼굴과 어깨 부위에 실처럼 가는 상처가 생겨 핏물이 날렸다. 그 사이 몇 명이 적의 습격을 외치며 각자의 천막으로 뛰어갔다.
부우웅―
공간이 갈리며 강한 기운을 머금은 주먹이 공천록의 미간을 노리고 들어왔다.
까딱.
공천록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적의 주먹이 귓불을 스쳤다. 찡한 고통이 공천록의 콧등에 주름을 만든다.
퍼걱!
장법의 고수인 이 무인의 안면에 공천록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코가 부서지고 그 주변이 살짝 함몰되면서 그가 몸을 크게 숙이며 아파한다.
사앗―
길게 내뺀 목을 공천록이 쳐버렸다. 홍마군 내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가 있던 이 고수는 너무나 허망하게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삐이익―! 삑! 삐익!
호각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제 곧 이곳으로 수십의 적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공천록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약간 얼얼해진 얼굴을 매만지며,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는 화염을 감상할 뿐이다.
공천록이 눈을 돌려 언덕에 세워진 큰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이미 불이 환히 밝혀진 채, 몇 명의 무인들이 모여든 상태다.
저 천막은 또한 상관진이 목표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홍마군단장 직속 오마군장 번원위의 천막.
쓰읍,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인간에게 한숨의 의미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아는 자가 드물 뿐이지.
“잡아 쳐라!”
적들이 몰려왔다. 예상했던 그대로 전체의 절반이 넘는 서른.
치이이익.
공천록이 다시금 채도를 불에 달구었다.
깃발이 바람에 흐느적거렸다.
말이 정교하게 수놓인 깃발은 이미 피로 물들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조차 없다.
부러진 깃대 아래에서 두 다리가 잘린 무인이 안타까운 숨을 토한다.
“하아… 하아…….”
어딘가를 원망스럽게 보던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푹 꺾이는 고개 뒤편으로, 바람결을 따라 길게 핏물이 날린다.
그리 길지 않은 엽도의 면을 따라 흐르던 피가 서서히 굳어갔다.
방금 생을 다한 무인 바로 옆에 있는 큰 천막의 조각조각 찢어진 모양이 흉물스럽다. 그 주변으로 대여섯 명의 홍마군 무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
“처음 뵙소.”
가래가 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장대한 체구의 중년 남성. 붉은 갑옷을 입고 그에 어울리는 투구까지 썼다.
“그대가 말로만 들었던 냉엽도 상관진 총사령이구려.”
피 흐르는 엽도를 든 상관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아셨소?”
“총사령께 안부를 전해달라는 이들이 육문에 하도 많아서…….”
뭔가 의미가 담긴 말 같은데 상관진은 길게 생각지 않는다.
“그쪽은 오마장 번원위이겠고.”
“별 볼일 없는 이름이지만 알아주시니 영광이외다. 한데 이곳엔 왜 오셨소?”
“그러는 그대들은 왜 남의 땅에 발을 들였는지.”
“크헛, 언제부터 이 땅이 그대들 하가의 것이었소? 대당(大唐)천하는 오로지 지고(至高)하신 황제 폐하의 것이거늘.”
실제로 홍마군의 전신은 ‘안사(安史)의 난’ 때 살아남은 사사명(史思明) 부대 정예병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억지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긴 말은 되었고, 기왕 왔으니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소?”
상관진이 한 발을 걸었다. 그러자 번원위도 상관진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그 머리, 이리 주시오. 아프지 않게 끊어드리지.”
“크크크크크.”
번원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상에 자신의 머리를 내놓으라 하는데 기가 막히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퍼펑. 펑.
으아아아! 끄억!
언덕 아래에서 비명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번원위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고수를 데리고 오셨군.”
상관진이 말로 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는다.
밤하늘을 가르는 대은한(大銀漢) 아래로 펼쳐진 평원은 고요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뒤로 두고 자리한 수십 개의 붉은 천막들 또한 조용하기만 하다.
군데군데 불을 피워 이곳에 사람들이 있음을 알릴뿐.
푸릉∼
“이놈아. 자라 좀.”
적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말 등을 쓰다듬었다.
“왜 이러지, 자꾸.”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불가에 앉아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낮부터 똥을 못 싸서 그래. 그러고 있지 말고 일루 와서 불이나 쬐지 그래.”
“이놈 눈 보여? 눈알이 제자리를 못 찾고 흔들리고 있어. 내가 이놈하고 같이 달린 게 두 해야. 힝! 하면 억! 하고 알아듣는단 말씀이시지.”
그는 헝겊에 따뜻한 물을 묻혀 말의 몸을 닦아준다.
“이그, 이 녀석아. 뭐가 그리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는 게냐.”
척, 척, 척, 척!
갑옷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내는 소리다.
“수고가 많네그려.”
주둔지를 순찰하는 다섯 명의 갑주 무인들에게 불가에 앉은 이가 손짓을 했다. 와서 물이라도 한잔하고 가라는 뜻이다.
“뭐하시오, 형님은. 지금이면 곯아떨어질 시간 아니오?”
웃으며 다가온 순찰자 하나가 국자로 따뜻한 물을 떠 마셨다.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서 잠이 줄어드는 건지, 뭔지, 몸도 쑤시고 오늘은 자기 글렀어.”
“클클클.”
다섯 순찰자들이 불가에 모여 평원의 추위를 잠시 잊는다.
“그나저나 자네 다섯째가 태어나고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구먼.”
“다음 달이 딱 그때라오. 우리 강아지들 못 본 지도 세 달이 넘었소. 젠장.”
후루룩, 후루룩.
잠시 동안 이들이 물을 마시는 소리만이 울렸다.
“말똥 좋아하시는 우리 형님께선 어째 아까부터 거서 말 몸만 닦고 계시오. 형님도 와서 한 모금 하시구랴.”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순찰자들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말을 돌보는 남자를 불렀다.
“끌끌, 그러니 형님이 장가를 못 가오. 하루 종일 말에만 붙어서 안절부절못하시니, 원.”
모두가 껄껄거리며 남자를 장난스럽게 놀렸다.
“너거들은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해라.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아, 걱정 마시오. 우리가 누구요. 천하제일마군(天下第一馬軍) 홍마군이 아니오. 누가 감히 홍마군이 머무는 곳을 침범하리오. 길 잃은 똥개라면 모를까.”
“크크크크.”
“아, 됐고. 오마장께서 너거들 여기서 노닥거리는 거 아시면 경을 칠 테니, 어여어여 갈 길 가 이것들아.”
남자가 귀찮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순찰자들이 낄낄거리며 일어나 따뜻한 자리와 물을 제공한 이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주둔지 외곽을 걸으며 천천히 멀어졌다.
“아∼함.”
잠깐의 소란스러움이 졸음을 재촉했는가. 잠이 잘 안 온다던 무인이 하품을 했다.
“난 자러 들어갈 건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푸릉∼ 히힝∼
“아무리 봐도 이상해.”
“아, 진짜 뭐가.”
말을 목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주욱 쓰다듬은 남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왜? 벌써 향수병이라도 걸렸어?”
“이 녀석… 털이 다 곤두섰어.”
“그게 왜.”
“내가 지금까지 이런 반응을 본 게 딱 두 번이었어. 한 번은 전투에 투입되기 전, 다른 한 번은… 전 주인이 이놈 앞에서 두 동강이 났을 때.”
휙.
그가 갑자기 뒤로 돌아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어두울 뿐인 하늘과 평원만을 보았다.
“…….”
“사람 참, 분위기 잡긴. 난 들어갈 테니 밤새 말이나 붙잡고 놀아 그럼. 에잉!”
과민반응을 보이는 동료 때문에 소름이 돋았던 무인은 어깨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 순간. 그는 그 동료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벌건 불빛을 받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은 착각일까.
툭.
잠이 확 달아났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분명 있는데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건, 분명 본능이었다.
후우∼
옆에서 누군가가 길게 숨을 내쉰다.
굳은 얼굴의 동료는 계속 그 상태로 이쪽을 바라만 본다. 천막으로 들어가려던 무인은 결국 자신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우∼
하얀 입김. 표정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 빛바랜 두건.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엉덩이를 걸치고 불을 쬐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귀신? 사람?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다.
스슥.
놈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무인을 바라보았다.
움직여야 하는데, 소리쳐야 하는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슴부터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축축해지더니 금방 아랫도리까지 벌겋게 젖는다.
“꺼, 끄르륵.”
갈라진 목에서 검은 피가, 끓는 냄비에서 튀어나오는 물처럼 쿨럭쿨럭 쏟아졌다.
숨구멍마저 끊어져 허파가 공기를 찾을 때마다 피와 거품이 스읍스읍 목 안으로 들락날락 거린다.
턱.
무너지는 그의 시신을 공천록이 받아 안았다. 그리곤 말 앞에 서있는 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동료의 비참한 죽음에도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일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공천록은 죽은 자를 천천히 눕히고 모닥불에 흙을 뿌렸다.
풀썩.
불이 완전히 꺼져 갈 무렵, 서 있던 자가 쓰러졌다.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그의 뒷면은 정수리에서부터 회음부까지 일자로 깊고 길게 갈라진 상태였다.
공천록이 자리를 잡는 순간, 아마도 절명했으리라.
생긴 모양답지 않게 상관진, 이 남자도 암습에 능한 무인이었다. 게다가 빠르기는 번개가 따로 없었다. 공천록조차 그가 엽도를 휘두르는 장면을 못 보았으니까.
후우∼!
공천록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상관진은 이미 이 장소에 없다. 공천록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다른 먹잇감들을 사냥하러 간 것이다. 졸지에 청소부가 되어버린 공천록은 잠깐 인상을 쓰다가 곧 시체들을 끌어 천막 안에 넣는다.
푸릉! 푸르릉!
말이 코에서 콧물과 김을 내뿜으며 흥분했다. 이대로 두면 ‘비명’을 지르며 날뛸 것이 자명했다. 공천록이 말에게 다가갔다.
말이 뒷걸음을 쳤지만 공천록은 개의치 않고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아래로 당겨 말과 얼굴을 맞대었다.
흥분하던 말이 차분해졌다. 비 오는 날 물 위에 뜬 연잎처럼 흔들리던 눈동자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화르륵!
주둔지 외곽에서 불길이 솟았다. 쌓아놓았던 건초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순찰 중이던 무인들이 황급히 달려왔으나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삐이이익―!
“불이다!”
호각 소리와 무인들의 외침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천막에서 곤히 잠자던 홍마군 무인들은 이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깨어나 무장도 갖추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다른 쪽 건초 더미에서도 불이 일어난다. 십여 명이 달려와 물을 뿌려 대었지만 이 또한 소용없는 짓이었다. 무공만 강하면 무엇 하랴. 마른 건초는 마치 천하의 고수처럼 이들을 농락하며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쿵.
사방이 고요해졌다.
홍마군 무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 보이지 않았던 자가 거세게 타는 불덩어리 옆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막 지옥 불에서 뛰쳐나온 화마(火魔)의 화신(化身)을 연상시켰다.
화르륵, 화르륵.
그를 낚아채고 싶어 하는 듯, 무명의 존재를 향해 불이 손을 뻗어보지만 형태 없는 벽에 막혀 흩어진다.
“귀신인가…….”
잠에서 덜 깬 자가 중얼거렸다.
귀신이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가 들고 있는 짧고 네모난 칼에 불이 닿았다.
치이이익.
지글거리며 증발하는 저것은 누군가의 피.
귀신의 칼이 벌겋게 달궈졌다. 저 정도면 거의 자루를 잡은 손조차 익어버릴 만도 한데 아무런 내색이 없는 걸 보니 귀신이 맞나보다.
“으…….”
홍마군 무인 하나가 저도 모르게 허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그곳에 그의 병기는 없었다.
이곳 모두가 급히 나오느라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했다.
팟!
귀신이 뛰었다. 인지하지도 못한 순간에 이 불쾌한 침입자는 무리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세 명의 머리가 두둥실 몸과 분리되어 공중을 돌았다.
그제야 남은 자들은 상황 파악을 했다. 이자는 귀신이 아니라 죽여야 할 적, 즉 인간임을.
“적이다!”
소리친 자가 먼저 죽었다. 허리를 깊게 베고 지나간 자리가 까맣게 타면서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긴다.
펑! 퍼펑!
장법(掌法)을 익힌 자가 공천록에게 장력을 퍼부었다.
핏. 펄럭.
얼굴과 어깨 부위에 실처럼 가는 상처가 생겨 핏물이 날렸다. 그 사이 몇 명이 적의 습격을 외치며 각자의 천막으로 뛰어갔다.
부우웅―
공간이 갈리며 강한 기운을 머금은 주먹이 공천록의 미간을 노리고 들어왔다.
까딱.
공천록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적의 주먹이 귓불을 스쳤다. 찡한 고통이 공천록의 콧등에 주름을 만든다.
퍼걱!
장법의 고수인 이 무인의 안면에 공천록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코가 부서지고 그 주변이 살짝 함몰되면서 그가 몸을 크게 숙이며 아파한다.
사앗―
길게 내뺀 목을 공천록이 쳐버렸다. 홍마군 내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가 있던 이 고수는 너무나 허망하게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삐이익―! 삑! 삐익!
호각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제 곧 이곳으로 수십의 적들이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공천록은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약간 얼얼해진 얼굴을 매만지며,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는 화염을 감상할 뿐이다.
공천록이 눈을 돌려 언덕에 세워진 큰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이미 불이 환히 밝혀진 채, 몇 명의 무인들이 모여든 상태다.
저 천막은 또한 상관진이 목표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홍마군단장 직속 오마군장 번원위의 천막.
쓰읍,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인간에게 한숨의 의미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아는 자가 드물 뿐이지.
“잡아 쳐라!”
적들이 몰려왔다. 예상했던 그대로 전체의 절반이 넘는 서른.
치이이익.
공천록이 다시금 채도를 불에 달구었다.
깃발이 바람에 흐느적거렸다.
말이 정교하게 수놓인 깃발은 이미 피로 물들어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조차 없다.
부러진 깃대 아래에서 두 다리가 잘린 무인이 안타까운 숨을 토한다.
“하아… 하아…….”
어딘가를 원망스럽게 보던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푹 꺾이는 고개 뒤편으로, 바람결을 따라 길게 핏물이 날린다.
그리 길지 않은 엽도의 면을 따라 흐르던 피가 서서히 굳어갔다.
방금 생을 다한 무인 바로 옆에 있는 큰 천막의 조각조각 찢어진 모양이 흉물스럽다. 그 주변으로 대여섯 명의 홍마군 무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
“처음 뵙소.”
가래가 낀 것 같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장대한 체구의 중년 남성. 붉은 갑옷을 입고 그에 어울리는 투구까지 썼다.
“그대가 말로만 들었던 냉엽도 상관진 총사령이구려.”
피 흐르는 엽도를 든 상관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아셨소?”
“총사령께 안부를 전해달라는 이들이 육문에 하도 많아서…….”
뭔가 의미가 담긴 말 같은데 상관진은 길게 생각지 않는다.
“그쪽은 오마장 번원위이겠고.”
“별 볼일 없는 이름이지만 알아주시니 영광이외다. 한데 이곳엔 왜 오셨소?”
“그러는 그대들은 왜 남의 땅에 발을 들였는지.”
“크헛, 언제부터 이 땅이 그대들 하가의 것이었소? 대당(大唐)천하는 오로지 지고(至高)하신 황제 폐하의 것이거늘.”
실제로 홍마군의 전신은 ‘안사(安史)의 난’ 때 살아남은 사사명(史思明) 부대 정예병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억지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긴 말은 되었고, 기왕 왔으니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소?”
상관진이 한 발을 걸었다. 그러자 번원위도 상관진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그 머리, 이리 주시오. 아프지 않게 끊어드리지.”
“크크크크크.”
번원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상에 자신의 머리를 내놓으라 하는데 기가 막히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퍼펑. 펑.
으아아아! 끄억!
언덕 아래에서 비명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번원위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고수를 데리고 오셨군.”
상관진이 말로 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