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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팅―! 휘리릭.
창 하나를 걷어낸 채도가 손바닥 위에서 휙휙 회전했다.
“윽!”
팽이처럼 돌던 채도의 날에 적의 안면이 사선으로 베였다.
얼굴을 감싸 쥐고 물러나는 그를 대신해 다른 무인이 창을 질러온다.
옆구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창기(槍氣)에 옷이 찢어지고 살이 벌겋게 부었다. 조금만 살갗에 닿았다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을 터.
공천록이 옆구리에 창대를 꽉 끼고 반대쪽 주먹으로 내리쳐 부러뜨렸다. 힘주어 잡고 있던 적이 뜻밖의 상황에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공천록은 부러져 뾰족해진 부분을 세워 그대로 적의 안면으로 돌진했다.
푹 소리를 내며 창대가 그 주인의 눈을 뚫고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쓰러지는 적이 들고 있던 창대의 절반을 놓았다. 공천록은 순식간에 그것을 낚아채 앞으로 펄쩍 뛰며 몸을 틀었다.
“컥!”
공중에서 강하게 던진 부러진 창대가 안면을 감싸고 비틀거리던 다른 적의 목을 관통했다.
쿵.
뚝. 뚝. 뚝. 뚝.
채도 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 속도를 더한다.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 건초 더미 주변에 십여 명의 홍마군 무인들이 죽어 있다. 또 대여섯 명의 부상당한 자들이 신음하며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남은 자들은 부상당한 동료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조금만 전진해도 저 괴물 같은 적이 뜨겁게 달궈진 병기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툭.
공천록의 발끝이 쓰러져 울고 있는 적의 옆구리에 닿았다. 아직 어려 보이는 자이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콰직.
창이 어린 홍마군 무인의 머리뼈를 관통하고 땅 깊숙이 박혔다.
“저, 저런! 썅!”
동료를 구하지 못한 홍마군 무인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식으로 죽은 동료가 벌써 여덟이다. 그럴 때마다 흥분한 무인들이 하나 둘 공천록을 공격하다 똑같은 운명을 맞았고.
공천록이 자신에게 욕한 자를 휙 쳐다보았다.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나는 그는 아까 다섯 아이의 아비이며 막내가 세상에 나오고 곧 일 년이 된다던 자다.
공천록은 그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 까딱거렸다.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는 도발이다.
그가 주변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곤 공천록을 진하게 노려본 뒤 둥글게 진을 형성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적은 열둘. 아마도 이들이 주둔지 전체에서 마지막일 것이다.
열두 명이 열두 개의 방위를 잡고 가운데 공천록을 노렸다.
공천록은 방금 죽인 자의 머리에서 창을 뽑았다. 창날에 뇌의 조각이 딸려 나와 주륵 흘러 떨어진다.
파앗!
다섯 명이 일제히 공천록을 향해 움직였다.
두 개의 창은 위에서 아래로, 두 개의 창은 좌에서 우로, 나머지 한 개는 일직선으로 들어온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어 자세는 많지 않았다. 내공이 정순한 고수라면 기합으로 병기의 방향을 돌릴 것이고, 외공이 극에 이른 고수라면 아예 통으로 상대의 병기를 박살낼 것이다. 하지만 공천록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비겁한(?) 방식을 택했다. 바닥에 그냥 누워 데굴데굴 굴러 버린다.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 구르기. 시골의 삼류무인도 이런 식의 회피는 꺼려한다. 따라서 이를 생각지도 못한 적들이 다음 공격의 방향을 찾지 못했다. 뒤쪽에 있던 다섯은 그나마 나았다. 그들 중 둘이 빠르게 공천록을 향해 창을 박는다.
푹, 푹!
공천록이 굴러간 자리마다 창이 떨어졌다.
푹!
“억!”
괴로워하는 소리. 그러나 이는 공천록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구르며, 부상당한 홍마군 무인의 몸을 잡아 자신의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창끝이 이 불행한 몸을 통과한 뒤 멈췄다. 피가 공천록의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
갑자기 창 박힌 몸뚱이가 확 틀어졌다. 그 난리에 두 무인이 창을 놓친다.
“에라이! 개 같은 놈!”
창을 잃은 자들이 주먹에 강기를 실어 날렸다.
펑! 퍼엉!
주먹이 닿은 허공에서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졌다. 몸을 살짝살짝 비틀어 그 파괴의 공간에서 벗어나는 공천록. 위기 상황이지만 그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쉬이익!
두 명의 주먹이 또 다시 공기를 빨아들이며 다가왔다. 그 순간 공천록의 눈이 번쩍한다.
퍼억! 콰아앙!
조금 전보다 몇 배는 더 큰 소리와 함께 엄청난 풍압이 사방으로 뻗친다.
보이지 않는 파문이 주변 무인들을 뒤로 밀어냈다. 잠시 후, 파동이 가라앉고 모두의 눈이 한곳으로 쏠렸다.
세 사람이, 세 주먹을 한 점에 맞대고 정지해 있다. 당연하게도 두 명은 홍마군 무인, 한 명은 공천록이다.
비틀.
먼저 미동한 자는 홍마군 무인이었다. 한데 그의 몸 상태가 이상했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부들부들 떨리고 그 떨림이 점점 격해진다.
“끄으으윽.”
파삭!
갑자기 그의 몸 전체에서 괴이한 소리가 퍼지며 그가 균형을 잃었다. 마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대며 비틀거린다.
다른 동료의 상황도 비슷했다. 놀라 치켜뜬 눈에서 눈알이 빠질 것처럼 튀어나오며 턱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에 반해 공천록은 처음과 똑같았다. 단지 주먹 끝이 부르르 흔들리고 있을 뿐.
와그작. 풀썩.
두 무인의 몸이 무너지며 동시에 쓰러졌다. 무너졌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쌓아 놓은 흙더미가 부서져 내리듯 온몸의 뼈가 잘게 조각난 채, 정상적인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렸단 뜻이다.
강한 공격을 더 강한 공격으로 깨버린 공천록. 그의 무력의 근원은 대체 어디일까.
강호의 일반적인 병기와 그 궤를 달리하는 괴상한 채도를 쓰면서도 막강한 실력을 자랑하는데다가 박투에도 고수들에 밀리지 않는다.
상상 이상의 끔찍한 광경에도 홍마군 무인들은 침착함을 버리지 않았다.
눈앞의 미친 침입자는 강하다. 그 외에 어떤 표현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포기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아야 했다. 그런다고 죽음이 피하가지 않기에. 따라서 이들은 최선을 다해 싸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야 했다.
“죽여어어어!”
고함을 지르며 남은 자들이 일제히 창을 찔러온다.
캉! 가가가각!
철로 된 창대를 타고 불똥이 튀었다.
엽도가 창을 잡은 손을 베기 직전, 창의 주인이 잠깐 손을 놓았다가 떨어지는 창을 발로 차올렸다.
“이여어업!”
어마어마한 강공이 날아온다.
상관진은 상대의 자라 등껍질만큼 큰 주먹이 위협적이라 판단, 순간적으로 엽도를 회수해 가슴 앞에 세웠다.
펑!
정확히 엽도의 날 한 치 앞에서 공기가 터졌다. 그 충격에 상관진은 훌쩍 뒤로 날아간다.
턱.
하늘에서 떨어진 창을 번원위가 다시 잡았다.
“후우. 위험했소.”
“나야말로.”
이미 서로 삼십여 초(招)를 교환했다. 하나하나가 절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한 명은 하가장의 지주 방어 총사령이요, 한 명은 홍마군 군단장의 최측근이다.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수많은 싸움 중, 가장 상위 고수들끼리 붙은 싸움이다. 구경하는 이가 있다면 눈요기 한 번 단단히 하고 갈 초유의 대결.
이는 하가장이 지금껏 얼마나 이 전쟁에 소극적이었는지, 또 육문도 얼마나 작은 전투에만 집중해 왔었는지를 대변해 주었다. 대전이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흘러서야 이름 모를 평원에서 양 세력의 알아주는 강자들이 대결을 펼치다니.
“조심하시오. 이번에는 척산비천(刺山飛泉)이오.”
자신이 사용할 수법을 미리 밝히는 예법은 보통 정파 무인들이 애용해 왔다. 가끔 사도(邪道)의 멋쟁이나 마교의 애송이들이 이를 흉내 내긴 했지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번원위가 이렇듯 정파의 예를 고수하는 이유는 홍마군이 정파를 자처하는 문파였기 때문.
그에 반해 상관진은 고개를 까딱거릴 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지난 십여 년의 내전은 남부무림 전체를 정사(正邪)의 구분 없는 아귀지옥처럼 만들었다. 이제는 예전에 정파로 불렸던 문파들조차 이런 예법을 헌신짝처럼 버린 지 오래다.
콰아아아―!
자세를 낮추고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것 같이 몸에 탄력을 담은 번원위. 그의 두 손 안에서 철창이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몸을 곧게 핀 상관진은 엽도를 잡은 손을 앞으로 뻗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번원위를 노려본다.
“우오옷!”
차아아앗!
보이지만 막을 수 없는 속도로 창이 돌진했다. 바람마저 삼켜버릴 회전력을 달고서.
누가 보더라도 상관진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일절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공간이 철창을 따라 움직이는 착각마저 드는 가운데, 한 방울의 물이 오 척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시간이 흘렀다. 창끝이 어느새 상관진의 엽도가 닿는 범위까지 도달했다. 상관진이 놀랐는지 도를 쥐지 않은 반대쪽 손을 움찔했다.
번쩍!
존재하지도 않는 ‘빛’이 샘물처럼 터졌다.
끼이이이잉―!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날카로운 쇳소리.
회전하는 창과 엽도의 도면이 만나, 허공에 빛을 그렸다.
파앙! 퍽! 스윽!
때리고, 터지고, 베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린다.
슈우우우∼
창의 회전이 멈췄다.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달궜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땡그렁.
바닥에 떨어진 창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보다 조금 뒤에 상관진도 반으로 부러진 엽도를 떨어뜨렸다.
“후후…….”
번원위가 웃었다.
상관진의 입가에서 흐르는 가는 핏줄기를 보아서일까.
하지만 그의 웃음에는 왠지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멋진 한 수였소.”
상관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간만에 만났지만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강적에게.
“그대 역시.”
울컥!
번원위가 입으로 단번에 한 바가지의 피를 토했다.
그의 가슴에서 쿨럭쿨럭 피가 거품져 흘렀다. 목 옆에는 부러진 엽도가 박혀 있고.
번원위가 척산비천을 펼쳐 회전하는 창을 날리는 순간, 그는 완벽한 무방비였다.
상관진은 그보다 더 빠르게,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먹에 강환을 담아 허공을 격하며 쏘았다. 창이 엽도를 갈며 나아갈 때도 창의 회전력을 이용해 엽도의 부러진 날이 정확히 번원위를 향해 쏘아지도록 조절했다.
결국 실력은 비등하나 실전 경험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쿨럭.”
번원위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숨도 곧 언덕 아래 수하들처럼 밤하늘을 지나는 유성마냥 어디론가 사라질 터였다.
“…조심하시오. 그대를 잘 아는 이들이 육문에 많소.”
“알고 있다오.”
“클클… 분명 조심하라 했소. 지금 당장부터…….”
쿵.
거대한 덩치가 쓰러졌다.
상관진이 입가의 피를 닦았다. 그 또한 완전히 피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장이 크게 흔들려 제자리를 벗어났고, 근육들이 속에서 끊어져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남룡천 무력 부대의 대장으로서 오랜 기간 무시무시한 북검패의 강자들과 싸워온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당장 서 있을 정신력과 체력도 존재치 않았을 테고.
터벅, 터벅.
그의 귀에 누군가의 느릿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충분할 거라 여겼다.”
터벅, 터벅, 턱!
가까이 다가온 이는 공천록이었다.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신체 여러 군데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생겨있다. 하지만 얼굴은 늘 그랬듯 무심함 그 자체인 참 신기한 남자.
“쓸데없는 일을 벌였지만 그래도 수고가 많았습니다그려.”
“망할 놈. 한참 아래인 녀석이 네놈을 부려먹는 가장 높으신 분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더냐.”
“아, 본래 성격이랑 말투가 그렇습니까? 그동안 근엄한 척하느라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서른을 훌쩍 넘는 적들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처리하고 왔다는 것은 공천록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상당함을 드러내 주지만, 상관진은 굳이 물어서 캘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좀 도와주겠나. 약속한 데로 머리는 가져가야지. 네가 가서 베어다오.”
“그러죠.”
공천록이 바닥에 떨어진 절단 난 엽도를 들어 번원위의 시체로 다가간다. 그도 상관진의 무기로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는 강호의 예법 정도는 안다.
그가 번원위의 시신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슬쩍 칼을 대려는 순간. 공천록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우웅∼
공천록이 급히 고개를 돌려 상관진을 보았다.
웅웅웅∼
상관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공천록을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상관진도 어마어마한 거리를 좁히며 날아오는 뭔가를 느끼고 창백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다.
웅쉬이이잇!
공천록이 땅을 박차고 상관진을 향해 날았다.
처음은 가느다란 모기소리.
그러다 갑자기 공간을 찢어발기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공천록은 이곳에서 또 다시 들었다.
그 빌어먹을 살마궁전. 용린각의 오살들이 쏘아대던 무시무시했던 화살의 비.
팅―! 휘리릭.
창 하나를 걷어낸 채도가 손바닥 위에서 휙휙 회전했다.
“윽!”
팽이처럼 돌던 채도의 날에 적의 안면이 사선으로 베였다.
얼굴을 감싸 쥐고 물러나는 그를 대신해 다른 무인이 창을 질러온다.
옆구리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창기(槍氣)에 옷이 찢어지고 살이 벌겋게 부었다. 조금만 살갗에 닿았다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을 터.
공천록이 옆구리에 창대를 꽉 끼고 반대쪽 주먹으로 내리쳐 부러뜨렸다. 힘주어 잡고 있던 적이 뜻밖의 상황에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공천록은 부러져 뾰족해진 부분을 세워 그대로 적의 안면으로 돌진했다.
푹 소리를 내며 창대가 그 주인의 눈을 뚫고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쓰러지는 적이 들고 있던 창대의 절반을 놓았다. 공천록은 순식간에 그것을 낚아채 앞으로 펄쩍 뛰며 몸을 틀었다.
“컥!”
공중에서 강하게 던진 부러진 창대가 안면을 감싸고 비틀거리던 다른 적의 목을 관통했다.
쿵.
뚝. 뚝. 뚝. 뚝.
채도 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 속도를 더한다.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 건초 더미 주변에 십여 명의 홍마군 무인들이 죽어 있다. 또 대여섯 명의 부상당한 자들이 신음하며 고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남은 자들은 부상당한 동료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조금만 전진해도 저 괴물 같은 적이 뜨겁게 달궈진 병기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툭.
공천록의 발끝이 쓰러져 울고 있는 적의 옆구리에 닿았다. 아직 어려 보이는 자이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콰직.
창이 어린 홍마군 무인의 머리뼈를 관통하고 땅 깊숙이 박혔다.
“저, 저런! 썅!”
동료를 구하지 못한 홍마군 무인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식으로 죽은 동료가 벌써 여덟이다. 그럴 때마다 흥분한 무인들이 하나 둘 공천록을 공격하다 똑같은 운명을 맞았고.
공천록이 자신에게 욕한 자를 휙 쳐다보았다.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나는 그는 아까 다섯 아이의 아비이며 막내가 세상에 나오고 곧 일 년이 된다던 자다.
공천록은 그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 까딱거렸다.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는 도발이다.
그가 주변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곤 공천록을 진하게 노려본 뒤 둥글게 진을 형성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적은 열둘. 아마도 이들이 주둔지 전체에서 마지막일 것이다.
열두 명이 열두 개의 방위를 잡고 가운데 공천록을 노렸다.
공천록은 방금 죽인 자의 머리에서 창을 뽑았다. 창날에 뇌의 조각이 딸려 나와 주륵 흘러 떨어진다.
파앗!
다섯 명이 일제히 공천록을 향해 움직였다.
두 개의 창은 위에서 아래로, 두 개의 창은 좌에서 우로, 나머지 한 개는 일직선으로 들어온다.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어 자세는 많지 않았다. 내공이 정순한 고수라면 기합으로 병기의 방향을 돌릴 것이고, 외공이 극에 이른 고수라면 아예 통으로 상대의 병기를 박살낼 것이다. 하지만 공천록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비겁한(?) 방식을 택했다. 바닥에 그냥 누워 데굴데굴 굴러 버린다.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 구르기. 시골의 삼류무인도 이런 식의 회피는 꺼려한다. 따라서 이를 생각지도 못한 적들이 다음 공격의 방향을 찾지 못했다. 뒤쪽에 있던 다섯은 그나마 나았다. 그들 중 둘이 빠르게 공천록을 향해 창을 박는다.
푹, 푹!
공천록이 굴러간 자리마다 창이 떨어졌다.
푹!
“억!”
괴로워하는 소리. 그러나 이는 공천록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구르며, 부상당한 홍마군 무인의 몸을 잡아 자신의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창끝이 이 불행한 몸을 통과한 뒤 멈췄다. 피가 공천록의 얼굴에 뚝뚝 떨어진다.
갑자기 창 박힌 몸뚱이가 확 틀어졌다. 그 난리에 두 무인이 창을 놓친다.
“에라이! 개 같은 놈!”
창을 잃은 자들이 주먹에 강기를 실어 날렸다.
펑! 퍼엉!
주먹이 닿은 허공에서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터졌다. 몸을 살짝살짝 비틀어 그 파괴의 공간에서 벗어나는 공천록. 위기 상황이지만 그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쉬이익!
두 명의 주먹이 또 다시 공기를 빨아들이며 다가왔다. 그 순간 공천록의 눈이 번쩍한다.
퍼억! 콰아앙!
조금 전보다 몇 배는 더 큰 소리와 함께 엄청난 풍압이 사방으로 뻗친다.
보이지 않는 파문이 주변 무인들을 뒤로 밀어냈다. 잠시 후, 파동이 가라앉고 모두의 눈이 한곳으로 쏠렸다.
세 사람이, 세 주먹을 한 점에 맞대고 정지해 있다. 당연하게도 두 명은 홍마군 무인, 한 명은 공천록이다.
비틀.
먼저 미동한 자는 홍마군 무인이었다. 한데 그의 몸 상태가 이상했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부들부들 떨리고 그 떨림이 점점 격해진다.
“끄으으윽.”
파삭!
갑자기 그의 몸 전체에서 괴이한 소리가 퍼지며 그가 균형을 잃었다. 마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대며 비틀거린다.
다른 동료의 상황도 비슷했다. 놀라 치켜뜬 눈에서 눈알이 빠질 것처럼 튀어나오며 턱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에 반해 공천록은 처음과 똑같았다. 단지 주먹 끝이 부르르 흔들리고 있을 뿐.
와그작. 풀썩.
두 무인의 몸이 무너지며 동시에 쓰러졌다. 무너졌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쌓아 놓은 흙더미가 부서져 내리듯 온몸의 뼈가 잘게 조각난 채, 정상적인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렸단 뜻이다.
강한 공격을 더 강한 공격으로 깨버린 공천록. 그의 무력의 근원은 대체 어디일까.
강호의 일반적인 병기와 그 궤를 달리하는 괴상한 채도를 쓰면서도 막강한 실력을 자랑하는데다가 박투에도 고수들에 밀리지 않는다.
상상 이상의 끔찍한 광경에도 홍마군 무인들은 침착함을 버리지 않았다.
눈앞의 미친 침입자는 강하다. 그 외에 어떤 표현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포기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아야 했다. 그런다고 죽음이 피하가지 않기에. 따라서 이들은 최선을 다해 싸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야 했다.
“죽여어어어!”
고함을 지르며 남은 자들이 일제히 창을 찔러온다.
캉! 가가가각!
철로 된 창대를 타고 불똥이 튀었다.
엽도가 창을 잡은 손을 베기 직전, 창의 주인이 잠깐 손을 놓았다가 떨어지는 창을 발로 차올렸다.
“이여어업!”
어마어마한 강공이 날아온다.
상관진은 상대의 자라 등껍질만큼 큰 주먹이 위협적이라 판단, 순간적으로 엽도를 회수해 가슴 앞에 세웠다.
펑!
정확히 엽도의 날 한 치 앞에서 공기가 터졌다. 그 충격에 상관진은 훌쩍 뒤로 날아간다.
턱.
하늘에서 떨어진 창을 번원위가 다시 잡았다.
“후우. 위험했소.”
“나야말로.”
이미 서로 삼십여 초(招)를 교환했다. 하나하나가 절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한 명은 하가장의 지주 방어 총사령이요, 한 명은 홍마군 군단장의 최측근이다.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수많은 싸움 중, 가장 상위 고수들끼리 붙은 싸움이다. 구경하는 이가 있다면 눈요기 한 번 단단히 하고 갈 초유의 대결.
이는 하가장이 지금껏 얼마나 이 전쟁에 소극적이었는지, 또 육문도 얼마나 작은 전투에만 집중해 왔었는지를 대변해 주었다. 대전이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흘러서야 이름 모를 평원에서 양 세력의 알아주는 강자들이 대결을 펼치다니.
“조심하시오. 이번에는 척산비천(刺山飛泉)이오.”
자신이 사용할 수법을 미리 밝히는 예법은 보통 정파 무인들이 애용해 왔다. 가끔 사도(邪道)의 멋쟁이나 마교의 애송이들이 이를 흉내 내긴 했지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번원위가 이렇듯 정파의 예를 고수하는 이유는 홍마군이 정파를 자처하는 문파였기 때문.
그에 반해 상관진은 고개를 까딱거릴 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지난 십여 년의 내전은 남부무림 전체를 정사(正邪)의 구분 없는 아귀지옥처럼 만들었다. 이제는 예전에 정파로 불렸던 문파들조차 이런 예법을 헌신짝처럼 버린 지 오래다.
콰아아아―!
자세를 낮추고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것 같이 몸에 탄력을 담은 번원위. 그의 두 손 안에서 철창이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몸을 곧게 핀 상관진은 엽도를 잡은 손을 앞으로 뻗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번원위를 노려본다.
“우오옷!”
차아아앗!
보이지만 막을 수 없는 속도로 창이 돌진했다. 바람마저 삼켜버릴 회전력을 달고서.
누가 보더라도 상관진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일절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공간이 철창을 따라 움직이는 착각마저 드는 가운데, 한 방울의 물이 오 척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시간이 흘렀다. 창끝이 어느새 상관진의 엽도가 닿는 범위까지 도달했다. 상관진이 놀랐는지 도를 쥐지 않은 반대쪽 손을 움찔했다.
번쩍!
존재하지도 않는 ‘빛’이 샘물처럼 터졌다.
끼이이이잉―!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날카로운 쇳소리.
회전하는 창과 엽도의 도면이 만나, 허공에 빛을 그렸다.
파앙! 퍽! 스윽!
때리고, 터지고, 베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린다.
슈우우우∼
창의 회전이 멈췄다.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달궜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땡그렁.
바닥에 떨어진 창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보다 조금 뒤에 상관진도 반으로 부러진 엽도를 떨어뜨렸다.
“후후…….”
번원위가 웃었다.
상관진의 입가에서 흐르는 가는 핏줄기를 보아서일까.
하지만 그의 웃음에는 왠지 힘이 들어 있지 않았다.
“멋진 한 수였소.”
상관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간만에 만났지만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강적에게.
“그대 역시.”
울컥!
번원위가 입으로 단번에 한 바가지의 피를 토했다.
그의 가슴에서 쿨럭쿨럭 피가 거품져 흘렀다. 목 옆에는 부러진 엽도가 박혀 있고.
번원위가 척산비천을 펼쳐 회전하는 창을 날리는 순간, 그는 완벽한 무방비였다.
상관진은 그보다 더 빠르게,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먹에 강환을 담아 허공을 격하며 쏘았다. 창이 엽도를 갈며 나아갈 때도 창의 회전력을 이용해 엽도의 부러진 날이 정확히 번원위를 향해 쏘아지도록 조절했다.
결국 실력은 비등하나 실전 경험의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
“쿨럭.”
번원위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숨도 곧 언덕 아래 수하들처럼 밤하늘을 지나는 유성마냥 어디론가 사라질 터였다.
“…조심하시오. 그대를 잘 아는 이들이 육문에 많소.”
“알고 있다오.”
“클클… 분명 조심하라 했소. 지금 당장부터…….”
쿵.
거대한 덩치가 쓰러졌다.
상관진이 입가의 피를 닦았다. 그 또한 완전히 피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장이 크게 흔들려 제자리를 벗어났고, 근육들이 속에서 끊어져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남룡천 무력 부대의 대장으로서 오랜 기간 무시무시한 북검패의 강자들과 싸워온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당장 서 있을 정신력과 체력도 존재치 않았을 테고.
터벅, 터벅.
그의 귀에 누군가의 느릿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충분할 거라 여겼다.”
터벅, 터벅, 턱!
가까이 다가온 이는 공천록이었다. 옷 여기저기가 찢기고, 신체 여러 군데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생겨있다. 하지만 얼굴은 늘 그랬듯 무심함 그 자체인 참 신기한 남자.
“쓸데없는 일을 벌였지만 그래도 수고가 많았습니다그려.”
“망할 놈. 한참 아래인 녀석이 네놈을 부려먹는 가장 높으신 분한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더냐.”
“아, 본래 성격이랑 말투가 그렇습니까? 그동안 근엄한 척하느라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서른을 훌쩍 넘는 적들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처리하고 왔다는 것은 공천록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상당함을 드러내 주지만, 상관진은 굳이 물어서 캘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좀 도와주겠나. 약속한 데로 머리는 가져가야지. 네가 가서 베어다오.”
“그러죠.”
공천록이 바닥에 떨어진 절단 난 엽도를 들어 번원위의 시체로 다가간다. 그도 상관진의 무기로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는 강호의 예법 정도는 안다.
그가 번원위의 시신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슬쩍 칼을 대려는 순간. 공천록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우웅∼
공천록이 급히 고개를 돌려 상관진을 보았다.
웅웅웅∼
상관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공천록을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상관진도 어마어마한 거리를 좁히며 날아오는 뭔가를 느끼고 창백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다.
웅쉬이이잇!
공천록이 땅을 박차고 상관진을 향해 날았다.
처음은 가느다란 모기소리.
그러다 갑자기 공간을 찢어발기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공천록은 이곳에서 또 다시 들었다.
그 빌어먹을 살마궁전. 용린각의 오살들이 쏘아대던 무시무시했던 화살의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