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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팍! 파파파팍!
열 개가 넘는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일부는 땅바닥에, 일부는 상관진의 몸에.
쉬이잇!
곧바로 또 같은 수의 철시가 쏟아졌다.
팅! 티티티티팅!
이번 것은 확실히 공천록을 노렸다. 게다가 두어 개 정도는 상관진을 파고들었다.
공천록의 어깨, 허벅다리에 화살이 하나씩 꽂혔다. 그러나 그는 극심할 것이 분명할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상관진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몸 곳곳에 화살이 박혀 멍하니 서 있던 상관진을 잡아 끌어내린다.
위잉― 쒜에에엑!
텅! 팅팅티팅!
상관진을 자신의 뒤로 눕히고, 또 본인의 몸을 최대한 웅크린 다음 채도와 엽도를 이용해 날아온 화살을 막는다.
터어엉!
강력한 한 방에 공천록의 몸이 밀리며 휘청거렸다.
상대는 여럿이 아니었다. 단 한 명이다.
촉 끝부분이 전갈의 다리처럼 갈라진 화살만 사용하며, 살에 실어 보내는 공력의 깊이가 동일하다.
진짜 한 사람의 솜씨라면 엄청난 속사(速射)였다.
뼈가 시리고 이가 갈렸지만 공천록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상관진은 일단 요새의 장이다. 그를 두고 간다는 것은 지주 방어 전체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상관진의 생사에 관계없이 그를 적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픽! 픽!
몇 개의 화살이 공천록의 뺨과 허리, 정강이를 스쳤다.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침착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슈아아아! 퍽!
공천록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훅 넘어가는 그의 머리에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탁! 탁!
두 개의 화살이 더 날아와 쓰러진 공천록의 옆구리와 넓적다리에 박혔다. 그러나 공천록은 죽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아직은 새벽. 해가 뜨기 전의 어둠은 그 깊이를 형용할 수 없다.
새벽의 어둠 안에는 더 축축하고, 더 음산하고, 더 사람을 숨죽이게 만드는 분위기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눅눅한 공기가 아래로 깔리며 물기를 만들었다. 눕혀진 풀 위에는 어느새 보일 듯 말 듯한 물방울이 맺힌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풀을 밟고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 수는 못해도 서른은 넘는다.
척.
상관진과 열 걸음 정도 거리에서 멈춘 발소리. 다가온 이들은 잠시 동안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았다.
“…왜.”
상관진이 힘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은 엄중한 상처라면 벌써 죽었어야 함에도 상관진의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불안한가? 정확히 십보(十步) 앞에서 멈췄구먼.”
“상관진의 십보 내로 들어가면 야수를 만난다… 우리가 늘 농담처럼 지껄이던 말 아니던가. 게다가 다친 짐승이 더욱 위험하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네.”
가늘지만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쿨럭, 쿨럭.
상관진이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화살은 그의 심장 근처에는 닿지도 않았다. 폐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내었을 뿐.
가는 음성의 주인 옆에서 화륵 횃불이 켜졌다. 그리고 이제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비늘무늬의 장포를 입은 마르고 늙은 남자. 왠지 초췌해 보이지만 눈빛만은 강렬하다.
그가 오른손으로 꽉 쥔 맥궁(貊弓)으로 보아 지금까지 화살을 쏘아 보낸 이가 바로 이 남자인 듯했다.
“그놈의 성격 참. 어째 예상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가 않나. 빤히 함정일 거 알면서.”
그가 상관진을 오히려 나무라듯 말했다.
“속이 터져서 말이야. 참다가는 병 걸려 죽을 것 같더군.”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큰 집단의 장으로서 상관진의 행위는 너무나도 경솔했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릴 것이라는 생각은 왜 안했을까.
“있었으면 도와주지 그랬나.”
번원위가 죽을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냐는 말이다.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사이야. 적의 손을 빌려 처리하는 게 우리에겐 이득이지.”
즉, 육문끼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
“뭐 일단은 내가 다 놀랐지 뭔가. 왔으니 환영인사 안할 수도 없고. 어땠나, 마음에 드나?”
“시끄럽다. 명가추. 간만에 보니 더 재수 없어졌군. 그냥 끝내. 숨 쉬는 것도 힘드니까.”
명가추. 녹살 명가추. 용린각 서열 삼위의 고수다. 궁술(弓術)이 하회제일(河淮第一)이라 불리는 그는 한때 남룡천의 궁술 교관에 임명되었을 정도로 활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인물이다.
그리고 전에 공천록에게 목을 내놓았던 오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명가추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공천록을 슬쩍 보았다. 그와 함께 온 무인들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약한 불빛에 잠깐잠깐 보이는 정도였지만 숨을 쉰다거나 움직인다거나 하는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공천록이 죽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저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을 것이었다. 머리에 화살을 박은 인간이 말이다.
“용왕께서 크게 분노하셨다네. 상심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비효림의 죽음을 접한 비사구의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네놈들에게 아무 위협이 안 되는 이들을 학살했나? 아, 너희는 원래 그런 놈들이었지. 강자 앞에서 쪼그라들고 약자 앞에서 호랑이로 변하는.”
“처음부터 그런 행동들을 찬성했던 적은 없네. 하지만 내가 모시는 분의 성향이 그러하니 따를 수밖에. 어차피 하씨 일족이 회남에서 사라져야 할 운명이라면 말일세. 노인의 지혜와 아이의 잠재력, 여성의 생산력이란 것은 장래의 큰 위협이 아닌가?”
무인이 아닌 이들을 대전 초부터 살해해 온 변명치고는 기가 막히게 말이 된다. 이는 사실 중원 천하 강호무림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다.
“자네는 아닐 테고… 누군가? 용후의 목을 벤 자가.”
“크크크크.”
명가추의 물음에 상관진은 낮게 웃기만 했다.
“난전 중이라는 개소리는 말게. 용후는 절대 난전에 참여하지도, 그럴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사람이니까.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하가의 방계들 따위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강자들이 있었어. 자네나 자네 이상의 고수는 되어야 용후에게 가까이 다가갈 정도지.”
생각해 보면 공천록은 상당히 쉽게(?) 비효림 주변의 호위들을 처단하고 그녀의 목을 취해오지 않았던가, 명가추의 말이 진실이라면 공천록을 다시 평가해야만 할 일이다.
“알려 줘. 그 고수가 누군지. 용왕께서 심히 궁금해 하시네. 지금 말해준다면 편하게 천주를 만나게 해주겠네.”
죽고 없는 남룡천주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은 곧 너도 죽이겠다는 뜻과 같다.
“크크크. 크하하하! 헛, 쿨럭! 제기랄, 쿨럭쿨럭.”
상관진이 웃다가 말고 또 기침을 한다. 이대로 놔둬도 오래 살기는 틀렸다.
“알려주면… 네가 가서 죽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비사구 그놈이? 차라리 그냥 합비로 진격해서 하가장주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해보지 그러나.”
명가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 전에 회남의 하씨들 모두의 피가 강을 이룰 걸세. 그자의 이름만 알려준다면 흘릴 피의 양을 줄일 수는 있겠지.”
“공천록.”
상관진이 머뭇거림 없이 그 이름을 말한다.
“공…천록?”
확실히 이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겐가? 하가장에 그런 이름을 가진 고수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만.”
“공천록…….”
“장난하지 말게. 내 손이 독하다고 원망하지도 말고.”
명가추가 맥궁에 살을 걸었다. 여차하면 상관진의 팔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리겠다는 표현이다.
“야 이! 공천로오옥!”
상관진이 고함을 질렀다. 이 황당한 모습에 명가추를 포함한 용린각 무인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 진짜로 죽겠다! 썅!”
부스럭.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에 명가추가 그 방향으로 활을 겨누었다. 동시에 무인들도 일제히 병기를 뽑아 세운다.
두근.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 귀에 분명히 들린 이 소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두근.
“횃불을 던져.”
명가추가 명령했다. 그가 화살을 겨눈 방향으로 무인들 몇 명이 횃불을 던졌다.
두근. 두근.
명가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 심장 소리가 어디서 울리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들 심장의 고동이었다.
화륵.
바닥에 떨어져 있는 횃불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그림자가 있었다.
허리가 뒤로 확 젖혀진 채, 떠오르듯 일어나는 그것은 시체였다. 조금 전, 죽었을 거라 여겼던 바로 그자. 아른거리는 붉은 빛으로 인해 더욱 짙게 그림자가 져 그 괴기스러움을 더한다.
스스스스.
가슴이 올라오고 이어서 뒤로 넘어갔던 머리가 서서히 들렸다.
“귀신이다.”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이곳에 와서 벌써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귀신이라.
어깨와 허벅다리, 옆구리와 반대편 넓적다리에 화살을 하나씩 꽂고, 머리에도 한 방 직격 당했다. 한데 눈을 뜨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저자는 살아 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공천록이라 했나…….”
여전히 맥궁을 당긴 상태인 명가추가 중얼거린다.
공천록이 흘끗 자신의 머리에 박힌(?) 화살의 괄(筈) 부위를 흘겼다. 그리고 바로 손을 들어 화살을 잡아 당겼다.
쑥 뽑히는 화살을 보고 용린각 무인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한다.
“천 주름 사이에 끼워놓았었군.”
몇몇이 더욱 놀란 눈으로 명가추와 공천록을 번갈아 보았다.
화살이 머리통에 박힐 그 찰나에 공천록은 목을 틀어 촉이 천을 파고들도록 조절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가장 그럴듯한 추리였다. 그리고 죽은 척 자신들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저놈은 보통을 까마득히 넘어선 자다.
뽁, 뽁.
공천록이 몸에 박힌 화살들을 하나하나 뽑았다. 이것들은 진짜였다. 박히면 빼기 힘들게 만든 촉의 작은 갈고리에 그의 찢어진 살이 붙어서 나온다.
뿌드득, 뿌득.
화살을 다 뽑아내고 목을 돌리는 그를 이제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용린각 무인들이었다.
“나 죽겠다. 쿨럭! 빌어먹을.”
상관진이 또 기침하며 공천록을 원망했다. 그런 그에게 그것도 못 참아서 일을 이따위로 만드느냐는 눈빛을 주는 공천록이었다.
“에휴. 참나. 인내심이 그리도 없소. 어린 나도 힘들게 참았는데.”
명가추가 팽팽하게 당겼던 시위를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무인들에게 턱짓을 보냈다.
휙!
가늘고 긴 조간(釣竿)을 휘두르며 공천록을 향해 한 명이 나는 듯 달려 들어왔다.
이 대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낚싯대는 용린각에서도 수준급 무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살상병기였다. 변화가 예측불허하며 그 활용이 무궁무진해 강호의 노련한 고수들도 상대하기 어렵다.
챠아앗!
조간이 한껏 휘어지며 공천록의 정수리를 갈라버릴 것처럼 세차게 들어왔다.
팅! 싸악!
“흡!”
막는 소리. 베는 소리. 숨넘어가는 소리.
가슴이 일자로 갈라진 용린각 무인이 무릎을 꿇고 그대로 얼굴을 땅에 처박는다.
콸콸 쏟아지는 피가 마치 엎어진 동이의 술과 같았다.
이렇게 보면 조간이란 병기가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휙! 휘익!
두 명이 날았다.
팅, 팅! 사각, 스걱.
“끄르륵.”
하나는 복부가, 하나는 목이 베여 쓰러진다.
공천록의 발밑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시신들을 보는 명가추.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가 다시 무인들을 보냈다. 그리고는 맥궁의 시위에 화살을 먹인다.
명가추는 공천록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가장 먼저 당도한 무인의 낭아봉이 공천록의 이마로 떨어졌다. 급박한 순간, 공천록이 왼손의 부러진 엽도로 낭아봉의 한 점을 툭 쳐서 옆으로 흘린다. 어느새 오른손의 채도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크게 원을 그린다. 두 가지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후에 허공에 피가 쫘악 퍼진다.
단순히 보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쉽고 편안한 수법이었다. 서당의 학동이 보고 나도 할 수 있다고 지껄일 정도로.
두 번째 무인도 이 간결한 수법에 당했다. 그는 명치에서부터 크게 베어져 왼팔마저 잘려 날아가 버린다.
세 번째는 조금 달랐다. 동료들이 당한 방식을 예측하여 아예 바닥에서부터 위로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 또한 앞의 무인들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공천록의 자세가 약간 틀어졌을 뿐. 그 순간, 명가추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핑―! 쒜에엑!
쏘아진 화살의 엄청난 힘과 속도에 주변 공기조차 급속도로 식어 하얀 가루를 날린다.
슈잇! 쾅!
귀청을 울리는 폭음이었다. 공중에 조각조각난 화살의 잔해들이 부웅 올라갔다 우수수 떨어졌다.
세 번째 무인을 벤 자세를 바로잡지 않고 한 바퀴 몸을 회전해 그 힘으로 강력한 화살을 그대로 쳐버린 것이다. 명가추의 안면이 살짝 씰룩거렸다. 그의 화살은 보통의 병기로는 저처럼 쉽게 파괴할 수 없다고 여겨왔기에. 저 검은빛의 채도는 과연 무엇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초고수를 끌고 왔군.”
“크, 크크클. 그으.......”
“둘이서, 함정임을 알면서도 왔다는 건 자신이 그만큼 있었다는 거겠지. 너는 그렇다 치고 저놈은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녀석이다. 정말, 정말이야… 저놈이 진짜 용후의 목을 잘랐어. 그렇지?”
상관진은 힘이 많이 드는지 누운 자세 그대로 흐흐 웃기만 했다. 그러다 툭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너, 너. 둘은 총사령을 맡아라. 그리고 나머진 저 용병 녀석을 친다.”
“옛!”
무인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공격을 준비했다.
팍! 파파파팍!
열 개가 넘는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일부는 땅바닥에, 일부는 상관진의 몸에.
쉬이잇!
곧바로 또 같은 수의 철시가 쏟아졌다.
팅! 티티티티팅!
이번 것은 확실히 공천록을 노렸다. 게다가 두어 개 정도는 상관진을 파고들었다.
공천록의 어깨, 허벅다리에 화살이 하나씩 꽂혔다. 그러나 그는 극심할 것이 분명할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상관진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몸 곳곳에 화살이 박혀 멍하니 서 있던 상관진을 잡아 끌어내린다.
위잉― 쒜에에엑!
텅! 팅팅티팅!
상관진을 자신의 뒤로 눕히고, 또 본인의 몸을 최대한 웅크린 다음 채도와 엽도를 이용해 날아온 화살을 막는다.
터어엉!
강력한 한 방에 공천록의 몸이 밀리며 휘청거렸다.
상대는 여럿이 아니었다. 단 한 명이다.
촉 끝부분이 전갈의 다리처럼 갈라진 화살만 사용하며, 살에 실어 보내는 공력의 깊이가 동일하다.
진짜 한 사람의 솜씨라면 엄청난 속사(速射)였다.
뼈가 시리고 이가 갈렸지만 공천록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상관진은 일단 요새의 장이다. 그를 두고 간다는 것은 지주 방어 전체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상관진의 생사에 관계없이 그를 적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픽! 픽!
몇 개의 화살이 공천록의 뺨과 허리, 정강이를 스쳤다.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침착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슈아아아! 퍽!
공천록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훅 넘어가는 그의 머리에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탁! 탁!
두 개의 화살이 더 날아와 쓰러진 공천록의 옆구리와 넓적다리에 박혔다. 그러나 공천록은 죽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아직은 새벽. 해가 뜨기 전의 어둠은 그 깊이를 형용할 수 없다.
새벽의 어둠 안에는 더 축축하고, 더 음산하고, 더 사람을 숨죽이게 만드는 분위기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눅눅한 공기가 아래로 깔리며 물기를 만들었다. 눕혀진 풀 위에는 어느새 보일 듯 말 듯한 물방울이 맺힌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풀을 밟고 다가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 수는 못해도 서른은 넘는다.
척.
상관진과 열 걸음 정도 거리에서 멈춘 발소리. 다가온 이들은 잠시 동안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았다.
“…왜.”
상관진이 힘없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은 엄중한 상처라면 벌써 죽었어야 함에도 상관진의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불안한가? 정확히 십보(十步) 앞에서 멈췄구먼.”
“상관진의 십보 내로 들어가면 야수를 만난다… 우리가 늘 농담처럼 지껄이던 말 아니던가. 게다가 다친 짐승이 더욱 위험하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라네.”
가늘지만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쿨럭, 쿨럭.
상관진이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화살은 그의 심장 근처에는 닿지도 않았다. 폐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내었을 뿐.
가는 음성의 주인 옆에서 화륵 횃불이 켜졌다. 그리고 이제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비늘무늬의 장포를 입은 마르고 늙은 남자. 왠지 초췌해 보이지만 눈빛만은 강렬하다.
그가 오른손으로 꽉 쥔 맥궁(貊弓)으로 보아 지금까지 화살을 쏘아 보낸 이가 바로 이 남자인 듯했다.
“그놈의 성격 참. 어째 예상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가 않나. 빤히 함정일 거 알면서.”
그가 상관진을 오히려 나무라듯 말했다.
“속이 터져서 말이야. 참다가는 병 걸려 죽을 것 같더군.”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큰 집단의 장으로서 상관진의 행위는 너무나도 경솔했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릴 것이라는 생각은 왜 안했을까.
“있었으면 도와주지 그랬나.”
번원위가 죽을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냐는 말이다.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사이야. 적의 손을 빌려 처리하는 게 우리에겐 이득이지.”
즉, 육문끼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
“뭐 일단은 내가 다 놀랐지 뭔가. 왔으니 환영인사 안할 수도 없고. 어땠나, 마음에 드나?”
“시끄럽다. 명가추. 간만에 보니 더 재수 없어졌군. 그냥 끝내. 숨 쉬는 것도 힘드니까.”
명가추. 녹살 명가추. 용린각 서열 삼위의 고수다. 궁술(弓術)이 하회제일(河淮第一)이라 불리는 그는 한때 남룡천의 궁술 교관에 임명되었을 정도로 활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인물이다.
그리고 전에 공천록에게 목을 내놓았던 오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명가추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공천록을 슬쩍 보았다. 그와 함께 온 무인들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약한 불빛에 잠깐잠깐 보이는 정도였지만 숨을 쉰다거나 움직인다거나 하는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공천록이 죽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저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을 것이었다. 머리에 화살을 박은 인간이 말이다.
“용왕께서 크게 분노하셨다네. 상심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비효림의 죽음을 접한 비사구의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네놈들에게 아무 위협이 안 되는 이들을 학살했나? 아, 너희는 원래 그런 놈들이었지. 강자 앞에서 쪼그라들고 약자 앞에서 호랑이로 변하는.”
“처음부터 그런 행동들을 찬성했던 적은 없네. 하지만 내가 모시는 분의 성향이 그러하니 따를 수밖에. 어차피 하씨 일족이 회남에서 사라져야 할 운명이라면 말일세. 노인의 지혜와 아이의 잠재력, 여성의 생산력이란 것은 장래의 큰 위협이 아닌가?”
무인이 아닌 이들을 대전 초부터 살해해 온 변명치고는 기가 막히게 말이 된다. 이는 사실 중원 천하 강호무림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다.
“자네는 아닐 테고… 누군가? 용후의 목을 벤 자가.”
“크크크크.”
명가추의 물음에 상관진은 낮게 웃기만 했다.
“난전 중이라는 개소리는 말게. 용후는 절대 난전에 참여하지도, 그럴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사람이니까.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하가의 방계들 따위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강자들이 있었어. 자네나 자네 이상의 고수는 되어야 용후에게 가까이 다가갈 정도지.”
생각해 보면 공천록은 상당히 쉽게(?) 비효림 주변의 호위들을 처단하고 그녀의 목을 취해오지 않았던가, 명가추의 말이 진실이라면 공천록을 다시 평가해야만 할 일이다.
“알려 줘. 그 고수가 누군지. 용왕께서 심히 궁금해 하시네. 지금 말해준다면 편하게 천주를 만나게 해주겠네.”
죽고 없는 남룡천주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은 곧 너도 죽이겠다는 뜻과 같다.
“크크크. 크하하하! 헛, 쿨럭! 제기랄, 쿨럭쿨럭.”
상관진이 웃다가 말고 또 기침을 한다. 이대로 놔둬도 오래 살기는 틀렸다.
“알려주면… 네가 가서 죽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비사구 그놈이? 차라리 그냥 합비로 진격해서 하가장주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해보지 그러나.”
명가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 전에 회남의 하씨들 모두의 피가 강을 이룰 걸세. 그자의 이름만 알려준다면 흘릴 피의 양을 줄일 수는 있겠지.”
“공천록.”
상관진이 머뭇거림 없이 그 이름을 말한다.
“공…천록?”
확실히 이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겐가? 하가장에 그런 이름을 가진 고수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만.”
“공천록…….”
“장난하지 말게. 내 손이 독하다고 원망하지도 말고.”
명가추가 맥궁에 살을 걸었다. 여차하면 상관진의 팔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리겠다는 표현이다.
“야 이! 공천로오옥!”
상관진이 고함을 질렀다. 이 황당한 모습에 명가추를 포함한 용린각 무인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 진짜로 죽겠다! 썅!”
부스럭.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에 명가추가 그 방향으로 활을 겨누었다. 동시에 무인들도 일제히 병기를 뽑아 세운다.
두근.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 귀에 분명히 들린 이 소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두근.
“횃불을 던져.”
명가추가 명령했다. 그가 화살을 겨눈 방향으로 무인들 몇 명이 횃불을 던졌다.
두근. 두근.
명가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 심장 소리가 어디서 울리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들 심장의 고동이었다.
화륵.
바닥에 떨어져 있는 횃불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그림자가 있었다.
허리가 뒤로 확 젖혀진 채, 떠오르듯 일어나는 그것은 시체였다. 조금 전, 죽었을 거라 여겼던 바로 그자. 아른거리는 붉은 빛으로 인해 더욱 짙게 그림자가 져 그 괴기스러움을 더한다.
스스스스.
가슴이 올라오고 이어서 뒤로 넘어갔던 머리가 서서히 들렸다.
“귀신이다.”
누군가가 낮게 말했다. 이곳에 와서 벌써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귀신이라.
어깨와 허벅다리, 옆구리와 반대편 넓적다리에 화살을 하나씩 꽂고, 머리에도 한 방 직격 당했다. 한데 눈을 뜨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저자는 살아 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공천록이라 했나…….”
여전히 맥궁을 당긴 상태인 명가추가 중얼거린다.
공천록이 흘끗 자신의 머리에 박힌(?) 화살의 괄(筈) 부위를 흘겼다. 그리고 바로 손을 들어 화살을 잡아 당겼다.
쑥 뽑히는 화살을 보고 용린각 무인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한다.
“천 주름 사이에 끼워놓았었군.”
몇몇이 더욱 놀란 눈으로 명가추와 공천록을 번갈아 보았다.
화살이 머리통에 박힐 그 찰나에 공천록은 목을 틀어 촉이 천을 파고들도록 조절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가장 그럴듯한 추리였다. 그리고 죽은 척 자신들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었다.
저놈은 보통을 까마득히 넘어선 자다.
뽁, 뽁.
공천록이 몸에 박힌 화살들을 하나하나 뽑았다. 이것들은 진짜였다. 박히면 빼기 힘들게 만든 촉의 작은 갈고리에 그의 찢어진 살이 붙어서 나온다.
뿌드득, 뿌득.
화살을 다 뽑아내고 목을 돌리는 그를 이제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용린각 무인들이었다.
“나 죽겠다. 쿨럭! 빌어먹을.”
상관진이 또 기침하며 공천록을 원망했다. 그런 그에게 그것도 못 참아서 일을 이따위로 만드느냐는 눈빛을 주는 공천록이었다.
“에휴. 참나. 인내심이 그리도 없소. 어린 나도 힘들게 참았는데.”
명가추가 팽팽하게 당겼던 시위를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무인들에게 턱짓을 보냈다.
휙!
가늘고 긴 조간(釣竿)을 휘두르며 공천록을 향해 한 명이 나는 듯 달려 들어왔다.
이 대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낚싯대는 용린각에서도 수준급 무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살상병기였다. 변화가 예측불허하며 그 활용이 무궁무진해 강호의 노련한 고수들도 상대하기 어렵다.
챠아앗!
조간이 한껏 휘어지며 공천록의 정수리를 갈라버릴 것처럼 세차게 들어왔다.
팅! 싸악!
“흡!”
막는 소리. 베는 소리. 숨넘어가는 소리.
가슴이 일자로 갈라진 용린각 무인이 무릎을 꿇고 그대로 얼굴을 땅에 처박는다.
콸콸 쏟아지는 피가 마치 엎어진 동이의 술과 같았다.
이렇게 보면 조간이란 병기가 썩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휙! 휘익!
두 명이 날았다.
팅, 팅! 사각, 스걱.
“끄르륵.”
하나는 복부가, 하나는 목이 베여 쓰러진다.
공천록의 발밑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시신들을 보는 명가추.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가 다시 무인들을 보냈다. 그리고는 맥궁의 시위에 화살을 먹인다.
명가추는 공천록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가장 먼저 당도한 무인의 낭아봉이 공천록의 이마로 떨어졌다. 급박한 순간, 공천록이 왼손의 부러진 엽도로 낭아봉의 한 점을 툭 쳐서 옆으로 흘린다. 어느새 오른손의 채도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크게 원을 그린다. 두 가지 동작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후에 허공에 피가 쫘악 퍼진다.
단순히 보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쉽고 편안한 수법이었다. 서당의 학동이 보고 나도 할 수 있다고 지껄일 정도로.
두 번째 무인도 이 간결한 수법에 당했다. 그는 명치에서부터 크게 베어져 왼팔마저 잘려 날아가 버린다.
세 번째는 조금 달랐다. 동료들이 당한 방식을 예측하여 아예 바닥에서부터 위로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 또한 앞의 무인들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공천록의 자세가 약간 틀어졌을 뿐. 그 순간, 명가추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핑―! 쒜에엑!
쏘아진 화살의 엄청난 힘과 속도에 주변 공기조차 급속도로 식어 하얀 가루를 날린다.
슈잇! 쾅!
귀청을 울리는 폭음이었다. 공중에 조각조각난 화살의 잔해들이 부웅 올라갔다 우수수 떨어졌다.
세 번째 무인을 벤 자세를 바로잡지 않고 한 바퀴 몸을 회전해 그 힘으로 강력한 화살을 그대로 쳐버린 것이다. 명가추의 안면이 살짝 씰룩거렸다. 그의 화살은 보통의 병기로는 저처럼 쉽게 파괴할 수 없다고 여겨왔기에. 저 검은빛의 채도는 과연 무엇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초고수를 끌고 왔군.”
“크, 크크클. 그으.......”
“둘이서, 함정임을 알면서도 왔다는 건 자신이 그만큼 있었다는 거겠지. 너는 그렇다 치고 저놈은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녀석이다. 정말, 정말이야… 저놈이 진짜 용후의 목을 잘랐어. 그렇지?”
상관진은 힘이 많이 드는지 누운 자세 그대로 흐흐 웃기만 했다. 그러다 툭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너, 너. 둘은 총사령을 맡아라. 그리고 나머진 저 용병 녀석을 친다.”
“옛!”
무인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공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