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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그대가 녹살이요?”
멈칫.
공천록이 입을 열자 명가추가 손을 들어 공격을 제지했다.
“어린놈의 입이 꽤 짧구나. 그렇다. 내가 바로 녹살 어르신이니라.”
“비효림이 그러더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당신이 알 거라고.”
“호오, 그래? 무엇이 궁금하더냐.”
녹살은 뭔가 여유가 있는지 웃으며 공천록의 말을 받아주었다.
“이릉진(夷陵陣).”
“뭣?”
명가추는 경악했다. 저 어린놈이 어찌 이릉진을 언급하는가.
“검은 호면구(虎面具)를 쓴 다섯 명의 정체를 혹시 아오?”
“이익!”
명가추가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 총 열두 개의 화살을 끼운다. 그가 보여준 무시무시한 속사가 재현되기 직전이다.
“네가 무엇을 알고 지껄이는지 모르겠다만, 이것으로 네놈이 죽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느니라.”
명가추의 창백해졌던 얼굴이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 네놈의 솜씨가 기특하여 하나만 알려주겠노라. 황산의 서백(徐魄)에게 물어보아라. 물론 죽어 귀신이 되어 말이다. 한데 검은 호면구?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그때, 공천록이 묘한 행동을 시작했다.
명가추를 가리키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 다섯 개를 만든 후에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명가추는 눈을 좁히고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낄낄낄낄.”
재수가 없다 못해 바닥을 치고 떨어질 만큼 기분 나쁜 웃음.
가리키고, 펼치고, 긋는다. 이 동작을 무려 다섯 번 반복했을 때, 명가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노오오옴! 네놈이었구나아! 내 아들들을 죽인…….”
썩!
끓어오르려던 뭔가가 순식간에 식었다.
누군가는 입을 꽉 다물었고, 다른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아래턱이 축 처지며 입을 벌렸다.
수십 쌍의 눈들이 쉴 새 없이 떨렸다. 모두가 차마 나오지 않는 신음을 쥐어짜야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푸…푸웁!”
두 개의 구멍에서 동시에 시뻘건 액체가 터져 나왔다.
허공에 한 차례 뿌려진 피 보라는 명가추의 입에서, 먹물에 담았던 붓을 털 듯 왼쪽으로 뿜어나간 핏줄기는 명가추의 갈라진 목젖에서.
너무 빨라서 아무도 못 본 것일까.
소리치던 명가추 앞에 일정한 공간이 잠시 일렁거리더니 거기에 있지 말아야 할 인간이 턱 나타나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채도를 처억 그어버렸다.
명가추가 목을 부여잡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공천록을 보았다. 눈동자의 방향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뒷걸음을 친다.
뚝. 뚝.
채도의 날 끝에서 드디어 핏물이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용린각 무인들은 멍하니 공천록과 명가추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틀거리던 명가추가 쓰러졌다. 정말로 어이없는 최후였다.
“큽!”
갑자기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남은 자들의 고정되었던 시선이 풀리며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한다.
“크흣, 크하하! 카하하하! 쿨럭! 니미럴…….”
상관진. 그가 짧지 않았던 침묵의 시간을 깼다. 역시 고수는 고수인가. 짧은 시간 기절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린 듯하다.
“하아, 하아. 뭘 멍청하게 보고 있나, 이 개쌍놈의 잡것들아.”
상관진이 소리쳤다. 찰나, 당황한 무인 하나가 십보 밖에서 조간으로 상관진의 미간을 찍으려 들었다.
슈우웃―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뒤통수를 뚫었다. 놈은 그 화살의 운동 방향을 따라 앞쪽으로 주욱 끌려갔다.
티이이잉―
공천록이 빈 시위를 한 번 튕겼다. 이로 인해 아무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미동한다면 이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괴물이 진짜 화살을 날릴 것이기에.
공천록이 상관진을 쳐다보았다. 상관진도 고개를 돌려 공천록과 눈을 맞춘다.
어떻게 할까요? 하는 눈빛에 상관진이 턱을 좌우로 흔들었다.
“살고 싶으면 당장 튀어. 열을 셀 테니.”
상관진의 이 말을 못들은 자들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섣불리 발을 놀리지 않았다.
“하나… 둘…….”
정말로 숫자를 세기 시작한 상관진이었다. 하나, 서로 눈치만 볼 뿐 이 자리를 벗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열.”
퍽!
한 무인의 진흙처럼 무너진 뒤통수로 화살이 삐져나왔다. 공천록이 가차 없이 화살을 쏘아버린 것이다.
“다시. 하나… 둘……..”
“으아아!”
겁에 질린 용린각 무인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본래 죽음을 겁내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수장이 너무나도 쉽게 목이 베이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리라.
공천록과 상관진을 제외한, 살아 있는 이들 모두가 사라지고 죽은 자들만 남았다.
새벽이 가고 태양이 머리끝을 지평선 위로 살짝 올렸다.
빛이 비치는 곳곳마다 죽어 차갑게 식은 이들이 드러났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정말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같은 세상을 살아가던 ‘인간’이지 않은가. 괜히 마음이 축 가라앉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공천록이 상관진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크윽.”
화살을 가슴에 여섯 개, 팔과 다리에 각각 서너 개 씩을 맞은 상관진.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참는 법은 알죠?”
“시끄… 으윽!”
공천록은 상관진에게 박힌 화살들을 뽑지 않고 대신 잘라냈다. 대량의 출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편이 더 나았다. 자신에게 박혔던 화살들을 그냥 뽑아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후후,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진짜 싸움을 위해 태어난 놈 같구나. 모든 상황에서 말이다. 쿨럭!”
더 말하지 말란 뜻으로 공천록이 상관진의 입을 살짝 쳤다. 무례하게도.
“모든 경우의 수… 상대의 허점, 심리, 그리고… 가장 최선의 공격 시기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살성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크크큿, 죽은 녹살의 자식 놈들을 이용해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한 수였다.”
공천록은 주변에 널린 시체들에게 다가가 옷을 죽죽 찢는다.
“녹살 정도의 무인이라면 순식간에 침착해졌을 것이나 넌 그 틈을 주지 않았지. 놈의 분노가 최고조로 올랐을 바로 그때, 이성이 잠시 머릿속을 떠난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어.”
공천록은 상관진에게로 와서 그의 팔, 다리에 화살이 박힌 자리 주변을 찢은 옷으로 칭칭 감았다. 그리고 다시 그 위를 넓은 천으로 감싸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동 중에 화살촉이 상처를 헤집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약간의 지혈 효과도 얻기 위해서였다.
“내가 왜 굳이 이 상황에서 네게 이런 말들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안 궁금합니다.”
“오래전, 내가 알았던 어떤 분이 떠올라서이다.”
멈칫. 공천록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분명 너와는 달라. 살았던 곳도, 시기도 달랐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분께선 너처럼 말이 짧은 분은 아니었지.”
공천록이 척을 확 잡아당겨 꽉 묶어버렸다.
“윽! 이놈! 살살해라.”
상관진이 불만을 표했지만 공천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몸을 돌려 엄지와 검지를 입에 넣고 휙! 휘파람을 불었다.
“평소에는 그저 잘 웃고, 농담하기 좋아하고, 요리가 취미인 분이셨지만 전투에 돌입하면 최강의 야수로 돌변하셨지. 빠르고, 확실하고, 군더더기 따위는 전혀 없는 그런.”
공천록은 상관진을 잠시 내려 보다가 그의 백회혈(百會穴)을 툭 건드렸다.
“널 보면… 그런 느낌이 와. 확실히 다른데… 다른데… 이상하게도 같…….”
상관진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언덕 아래에서 한 마리 말이 이들을 향해 달려온다.

화르륵―
불이 붙은 전선(戰船)에서 사람들이 떨어졌다.
전선은 천천히 움직이다 곧 다른 전선에 부딪혔고, 그 배에서도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물로 뛰어들었다.
화르르륵!
불길이 더욱 거세지며 순식간에 화염이 전선들을 삼켰다.
파파파팟!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 물에 빠진 자들에게로 비처럼 내렸다.
붉은 무복 가운데 ‘하(何)’라는 글자를 수놓은 무인들 수십 명이 다시 살을 메긴다.
날아간 화살들이 또 그 숫자와 일치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궁수들 옆으로 같은 복장을 한 무인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적들의 전선으로 날아올랐다.
병기가 맞붙는 소리와 죽는 자의 외마디 비명이 순식간에 전선을 덮었다.
“커어어억.”
목 가운데를 꿰뚫린 자의 입에서 가래를 끌어 모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촤악!
그자의 목에서 섬전도(閃電刀)라 불리는 자신의 병기를 뽑아낸 자는 목여충.
목여충은 섬전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전진했다.
그의 앞에 열 명이 넘는 수로맹의 수적들이 짓쳐들어왔다. 목여충은 한 쌍의 섬점도를 앞에 세우고 그들을 향해 뛰었다.
부웅― 쾅!
허공에서 모았던 섬전도를 좌우로 크게 휘두르자 강한 풍압과 함께 날카로운 도기가 수적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써억! 파아아―
동시에 허리가 잘려 상체가 뒤로 넘어가버리는 열 명의 수적들. 이들의 하체는 달려오던 힘 그대로 뛰어오다 하나씩 넘어진다.
떨어지는 혈우(血雨)를 뒤집어쓰고 목여충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야!”
텅―!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틀어진 수적 하나가 부웅 날아와 목여충의 앞에 고꾸라졌다.
목여충은 수적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곽능파가 손가락을 뿌드득, 뿌드득 꺾으며 서 있다.
곽능파는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며 다시 소리친다.
“거기가 아니다! 그쪽은 끝났어!”
아니나 다를까. 목여충이 목표하던 전각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여기저기서 폭음이 계속 울리고 사람들의 고함이 끊임없이 귀를 찌르는 와중. 다 쓰러진 전각 입구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는 하 노인이었다.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였지만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그가 막강한 고수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목여충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곽능파의 말대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용보가 직접 이끄는 적운단이 수로맹을 공격한 지 여섯 달째인 오늘.
이들은 파죽지세로 장강과 주변 근거지를 휩쓸며 약 삼백에 달하는 수채(水砦)를 폐허로 만들어왔다. 악착같이 저항하는 수적들은 베어 죽였고, 항복하는 자들은 오른손을 자르고 왼쪽 눈알을 파내어가며 전진, 또 전진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수로맹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대장강수왕채(大長江水王砦)를 치러 적운단이 왔다.
장강을 누비던 대선단이 대부분 화염에 휩싸였다. 결사항전을 외치며 수왕채를 사수하던 오백 수적들은 절반도 안 되는 적운단의 공격에 수십 명 단위로 나가떨어졌다.
용병이 대부분인 적운단이지만 하용보라는 인간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이미 그의 완벽한 수족으로 탈바꿈했다. 따라서 목숨을 걸어버린 이들의 전투력은 몇 배로 상승했다.
또한 곽능파와 목여충이라는, 드러나지 않았던 초고수들의 활약과 그동안 모든 일에 물러나 있었던 하 노인의 본격적인 힘자랑(?)으로 목이 잘릴 때까지 싸운다던 수로맹의 무인들은 씨도 남기지 못하고 핏덩어리로 화했다.
무엇보다 대단한 힘을 보여준 이는 바로 하용보 자신이었다.
그는 보란 듯 최강의 절기들을 펼치며 자신을 막아서는 모든 적들을 조각내었다. 그 인상적인 모습과 투지는 결국 적운단 모두에게 전염되어 육 개월 간의 긴 혈전에 종막을 가져왔다.
“크아아악!”
가슴을 깊게 베인 수적이 괴로워하며 망루 아래로 떨어졌다.
망루 위에는 화살을 날리던 수적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 가운데 장검을 든 혈인이 검에 묻은 피를 닦는다.
“뭐하냐! 염병할 놈들아! 빨리빨리 안 뛰어?”
혈인은 하용보였다. 그가 내공을 담아 소리치자 적운단은 더욱 거세게 수적들을 밀고 올라간다.
우익은 곽능파가 덤벼오는 수적들을 부드럽게 꺾고 돌리고 부러뜨리며 길을 텄다. 좌익은 목여충이 빠르고 거칠게 적을 베어가며 이들에게 적대적인 모든 생명체를 청소한다. 둘을 따라 적운단이 순식간에 전각들을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남은 수적들을 처리했다.

쿵!
수왕채의 중심, 수왕전이 떨어졌다.
“꿇어 이 새끼들아!”
적운단주 하진양이 사로잡은 수로맹 수뇌들을 윽박질렀다. 스물아홉 수로맹 고수들이 여기서 붙잡혔다.
터벅, 터벅.
곽능파, 목여충의 수행을 받으며 하용보가 수왕전에 입성했다.
그의 눈동자가 수왕전 내부를 한 번 훑었다.
중앙에 덩치 큰 노인이 양 팔이 잘린 채 꿇어앉아 있고 좌우로 수로맹 수뇌들이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 죽은 수적들뿐이었다.
하진양이 하용보에게 이들의 처리를 눈으로 구했다. 얼굴만 대충 닦고 들어온 하용보가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개자식들! 딴 세상 가서도 수적질해 봐라! 나중에 똑같이 썰어줄 테니!”
하진양이 소리치며 꿇어앉아 목을 빼고 있는 자의 뒷목을 대도로 내리쳐 버린다. 그것을 신호로 적운단 무인들이 나머지 스물여덟 명의 목을 잘랐다.
“이보오, 수왕(水王).”
하용보가 수왕이라 불린 노인 앞에 서서 그를 불렀다.
수왕 노규. 이제는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노인이 입을 연다.
“할 말 없으니 그냥 베어주시오.”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일을 벌였소. 참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결국 당신도 이 꼴이 나지 않았소.”
하용보가 혀를 차며 노규를 탓한다.
그때 노규의 눈빛이 조금 이상해진다. 물론 그것을 놓칠 리 없는 하용보였다.
“왜 그런 눈을?”
“정말 모르시오?”
곽능파와 목여충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뭔가 있는 걸까.
“뭔 소리요 그게.”
“허, 허허허. 허허허허! 어쩐지…….”
노규가 허망하게 웃었다.
“난 또 이게 다 그들의 뜻인 줄 알고 엄한 사람들을 욕해왔건만. 하 삼공자 당신이 그냥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었구려.”
“이해를 못하는 내가 병신인가?”
하용보가 곽능파를 향해 오히려 물었다.
“그래봤자, 그대나 나나 장기판의 졸(卒)이올시다.”
노규가 혼잣말처럼 계속 지껄이자 하용보의 미간이 조금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