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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냥 벨까.”
하용보가 이번에는 목여충에게 묻는다.
“그래도 유언은 듣고 가시죠. 큰 세력의 우두머리였으니 그 정도 예의는 앞으로의 활동에도 좋은 선례가 됩니다.”
목여충의 바른 말에 하용보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 말 하시오. 길게 들어줄 시간은 없을 것 같소만.”
뚝.
노규가 중얼거림을 멈췄다. 그리고 하용보를 진하게 노려보았다.
“좋아할 날도 얼마 안 남았을 게요. 그러니…….”
노규가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가서 당신 자리 잘 정리해 놓겠소이다. 크하하하하하!”
싹둑.
곽능파가 손날로 노규의 목을 가볍게 날려버렸다. 더 이상 말하게 놔두었다가는 이곳에 있는 적운단 무인들의 입을 통해 이상한 말이 퍼질 수도 있기에.
“곧 죽을 노인네의 헛소리가 좀 심하네요. 그렇죠?”
하용보에게 눈을 찡긋하는 곽능파.
하나 하용보는 노규의 유언(?)을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삼공자님!”
그때 갑자기 수왕전으로 적운단 무인 하나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무슨 일인가.”
“헉, 헉… 이것을!”
그가 하용보에게 건네는 작은 전서는 하가장이 애용하는 매를 통해 이곳까지 왔다.
피가 묻었지만 이는 확실히 장주가 직접 보냈다는 금인이 찍혀 있었다.
공손히 그것을 받아 펼쳐보는 하용보.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뭡니까?”
“…….”
곽능파가 물었지만 하용보는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주변 적운단 무인들과 적운단주의 표정에도 어떤 불안감이 생겨난다.
“미쳤구먼. 이 개자식들이.”
“에? 뭔데요. 보아하니 장주가 직접 보낸 듯한데.”
“철수하란다.”
“헐.”
곽능파가 신음했다. 이때만큼은 목여충의 눈에도 짜증과 살기가 올라온다.
“아버지의 금인이지만 글씨체는 큰형님 꺼야. 그래도 장주의 명이나 마찬가지인 금인이 있으니…….”
하용보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그는 지금 극도로 분노하고 있다.
“정말로 돌아갈 겁니까.”
목여충이 아니길 바란다는 투로 물었다.
“가야지. 안 가면 나 척살당해.”
하용보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나중에. 아직 잡아야 할 인간이 남았잖아?”
귀존 홍면귀 서산.
영예로운 귀굴의 지존이며 황산을 지배하는 절대의 무인.
그 무력은 가히 하중검과 비견될 정도이며 오천에 이르는, 귀신을 섬기는 자들의 아버지이다.
또한.
하용보의 장인(丈人)이었던 자이기도 하다.

***


쏴아아―
엄청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아예 하늘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번쩍! 쿠콰쾅!
벼락이 떨어졌다. 요새 주변에 몇 없는 나무의 가지가 허연빛을 뿌리며 추락한다.
분명 지금은 밤이 아니었다. 한데 하늘도 어둡고 땅도 어두웠다.
여인의 머리칼보다 더 검은 구름이 세상을 이불처럼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은 오열하듯 세상의 모든 비를 이곳에 버린다.
쏴아― 콰앙!
빗소리를 압도하는 뇌성(雷聲)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듣기 불가능하다.
번쩍! 콰콰콰콰!
몇 가닥의 빛줄기가 땅에 꽂히며 주변을 한 차례 쓸었다.
짧은, 그 짧은 순간 대낮처럼 환해졌던 세상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에는 기름 먹인 우모(雨帽)를 쓰고, 마찬가지로 기름을 잔뜩 바른 사의(蓑衣)를 몸에 걸친 남자다.
가던 길을 방해한 번개가 야속했는가. 그의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가 다시 앞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수레를 끄는 소의 고삐를 당겨 길을 재촉했다.
잠시 후, 남자는 그의 목적지에 도달했다.
하가장 지주 방어의 보루. 구황단의 절대 요새.
한동안 그는 말없이 요새의 높은 벽 위쪽을 지켜본다.

뚜드드드드.
물먹은 나무 기둥이 돌벽과 마찰하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다리가 다 올라가자 기관이 작동했고, 철문이 서서히 닫혔다.
쿠웅∼!
요새 내부에도 비는 여전했다. 다만 입구 근처는 비를 막아주는 큰 차양이 있어 비교적 시끄럽지 않았다.
모든 천막들이 거둬지고 상주 인원들 거의 전부가 건물들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주변을 느긋하게 돌아보다가 곧 구름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장대 네 개를 보고 눈을 빛냈다.
툭.
남자는 자신의 어깨를 건드리는 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씩 웃어준다.
“오랜만이오?”
맥도를 등에 건 사마귀를 닮은 무인. 맹포였다. 그는 남자가 조금 전 관심을 가진 장대들을 흘끗거린 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아, 이렇게 멋진 곳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이 목소리는… 곽능파다. 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요새에 감탄한다.
“저게 다 그 녀석 작품?”
곽능파가 장대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거기에 걸린, 썩어가는 수급들을 향해서다.
맹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는 총사령 꺼요. 그 마군장 어쩌고 하는. 나머지가 천록이가 주워온 대가리들이지. 근데 저건 뭐요?”
그는 곽능파가 끌고 온 수레를 가리키며 물었다.
“상관 총사령에게 줄 선물인데 흠… 저걸 보니 괜히 초라해지는군.”
곽능파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맹포가 수레로 다가가 뭔가 수북이 쌓인 위에 덮어놓은 거적을 휙 젖혔다.
“호오!”
불어오는 바람도, 눅눅한 비의 냄새도 악취를 막아주지 못했다.
시취(屍臭).
늘 전장에서 맡아온 냄새였지만 역시나 적응하기 힘든가보다. 맹포의 이맛살이 크게 구겨진 것을 보면.
“무슨 선물이 이렇소.”
수레를 가득 채운 고깃덩어리들. 그것은 전투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차려온 식육(食肉)이 아니었다. 인간이다. 아니, 인간이었던 덩어리고 조각이다.
분리된 팔과 다리, 목과 몸통이 이리저리 뒤섞인 채, 본래의 모습 따위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빗물로 인해 아래쪽부터 심하게 부패되어 가는 이 끔찍한 선물(?)은 원래 어떤 이들이었을까.
“그냥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맹포가 몸을 돌려 멀리 있는 전각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곳에서 창을 통해 곽능파와 맹포를 보고 있던 구황단 소속 무인 몇 명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곧 건물을 나서서 이쪽으로 뛰어온다.
“윽!”
채 가까이 오기도 전에 역겨운 시취를 맡은 무인들이 코를 감싸 쥐었다.
“부탁 좀 합시다.”
곽능파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무인들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무인들이 맹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요새 무인들 사이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 구십삼반이기에 맹포의 뜻을 먼저 묻는 것이다.
맹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구황단 무인들이 시체 조각들을 하나하나 들어 내려놓았다.
“헛, 이자는.”
구황단 무인 한 명이 수레에서 머리통 하나를 끄집어내어 들고 놀란다.
“귀굴의 백인귀장 추봉의 머리다!”
“설마?”
무인들은 저들끼리 흥분해서 소리친다. 추봉은 지주에 원정 왔던 귀굴 측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하씨의 목을 벤 원수였다. 그런 자가 갈가리 찢긴 시신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
“그, 그쪽은 대체 누구십니까?”
처음 추봉의 머리를 발견한 무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쉿!”
막 몸을 움직이려던 곽능파가 휙 돌아서며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에 대었다.
“알려고 하면 다쳐요, 다쳐.”

방 안은 컴컴했다. 다만 창가 쪽에 올려둔 초 하나만이 희미하게나마 불을 밝혀준다.
톡. 톡.
조그마한 은잔(銀盞)에 누군가 정체불명의 가루를 털어 넣는다.
파지직!
그가 손가락을 비비자 그 사이에서 푸른 불똥이 튕겨져 나와 은잔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은잔에 쌓인 가루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게 과연 사람의 재주인가. 구름이 만드는 조화가 인간의 손에서 작게나마 재현되다니.
“쓰으읍. 푸아아…….”
곽능파는 연기를 코로 길게 들이마시고 가슴 깊이 머금은 다음 한 번에 내뱉는다. 그렇게 여러 차례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가 창 아래에 있는 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편해 보이는군요.”
약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누워 있는 이는 상관진이었다. 그의 온몸을 감은 하얀 천은 이미 금창약과 피가 섞인 채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고, 몇 번이나 갈았을 침상보는 흘러나온 고름 때문에 누렇게 변해 끈적거린다.
“초를 더 켜드릴까? 거 아플 땐 빛을 봐야 한다잖소.”
“되었소…….”
상관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 정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큰 책임을 지닌 자리에 있는 사람이 너무 무모했어요. 하마터면 지주가 다 육문에 날아갈 뻔했는데. 뭐, 제가 오면 달라지겠지만.”
“큭큭, 크크큭. 콜록! 콜록!”
상관진이 웃다가 말고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날 입었던 심각한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축하드립니다. 한동안 이 동네에서 똥통들 구경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곽능파가 짝짝 박수를 쳤다.
“이거 육문 녀석들 어디 겁나서 여기 발 들이겠어요? 총사령이란 분이 직접 나서서 윗대가리들을 다 썰어버렸는데. 껄껄껄껄껄.”
젊게 생긴 모양답지 않게 곽능파의 말투나 행동은 노련한 강호인의 그것과 닮아 있다.
“먼저 하 셋째 공자의 소식부터 들으시죠.”
상관진이 곽능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강에서 알짱거리던 수적(水賊)놈들은 이제 하가장에게 아무 위협이 안 될 겁니다. 싹 쓸어버렸거든요.”
상관진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축하 인사를 대신했다. 어차피 삼공자가 나선 이상 이렇게 될 것이라 짐작은 했었고.
“이쪽 피해도 막심하지만 뒤쪽의 후환을 완전히 제거해 놓았다는 점에서 꽤 성공적인 토벌이었죠. 이로 인해 백천당과 흑검문의 연합병력이 잔뜩 위축되었다고 하더군요. 합비 바로 코앞에 세를 구축하고 있던 것들인데 아예 수주로 근거지를 이동해 용린각에 붙어버렸습니다. 원래부터 다른 녀석들보다는 소극적이었던 놈들이니.”
곽능파가 다시 크게 연기를 호흡한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그는 이 괴상한 취미(?)에 집착하는 것일까.
“자, 이제 다음은 어디일까요?”
짓궂은 목소리로 곽능파가 물었다.
“…황산.”
“정답입니다.”
곽능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관진의 침상으로 다가간다.
“빌려주었던 이들을 다시 돌려받고자 왔어요. 거기에 더해 구황단을 좀 내어주셔야겠습니다. 적운단이 꽤 죽어서 말이죠. 회남 전역에 있는 하씨 방계들을 다 끌어와도, 또 현지에서 용병을 구해도 턱없이 모자라요. 썩을 본가 새끼들이 지놈들 혈육들은 뭐가 그리 귀한지 꽁꽁 싸매고 내어놓질 않으니. 괜찮겠죠?”
곽능파가 상관진의 상처에 살짝 손을 올렸다.
지지직! 파팟!
“윽!”
상관진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지금 곽능파는 상관진을 고문이라도 하는 것인가.
“하아, 하아…….”
피 냄새가 섞인 상관진의 숨이 역할 만도 한데 곽능파의 표정은 처음 그대로다.
“셋째 공자는 황산을 최후의 전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귀존을 제거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와해될 거란 뜻이죠. 뭐,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글쎄요. 흠.”
지지지직.
“으으윽!”
상관진의 신음이 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그의 얼굴색이 점점 좋아지는 듯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그럼, 좀 몸이 나아지면 자세한 얘기를 나누시죠. 한 내일 오전쯤이면 될까요?”
중상을 입은 환자 앞에서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당장 몇 달을 정양(靜養)해도 회복될까 말까한 상처인데.
한데 말을 하는 곽능파도 그게 당연하다는 투였고, 잠시간 고통에 몸부림치던 상관진도 그래도 되겠다는 표정이었다.
훗 짧게 웃음을 뱉은 곽능파는 상관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이거 두고 갈 테니 고통을 견디기 힘들면 들이마시고 뱉어요. 대신 오래 가까이 하지는 마시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은잔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하는 곽능파였다. 자기 자신은 아예 이 정체불명의 연기를 달고 살면서 타인에게는 쉬이 권하지 않는다.
“공천록…….”
느닷없이 상관진이 공천록의 이름을 말한다.
“그를 보면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소?”
순간 곽능파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총사령님. 아픔이 심하여 정신이 살짝 나가신 듯합니다.”
상관진이 멀쩡했다면 이런 무례를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야말로 그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자. 공천록을 보며 아무것도 못 느끼시냔 말이오.”
“세상에는 말이죠.”
곽능파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때로는 모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음을 상관 대주도 아실 겁니다.”
상관 대주라. 과거 남룡천에서 불렸던 상관진의 칭호가 아닌가.
“푹 쉬세요. 내일 뵙죠.”
곽능파가 다시금 밝게 웃으며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