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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황산(黃山)의 본래 이름은 이산(黟山)이다.
과거 당현종이 그 이름을 황산이라 부르도록 명했고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그의 시로 황산을 천하에 알렸다.
칠십이봉(七十二峰)과 오절(五絕)로 대표되는 황산의 으뜸은 운해(雲海)다.
구름의 바다. 그 위로 솟아나온 봉우리들. 마치 바다에 뜬 작은 섬들을 보는 양,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절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또한 비경(祕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허락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여기에 그런 장대한 세상을 보고 있는 운 좋은 이들이 있었다.
십만 관이 훌쩍 넘는 바위가 눈사람의 머리처럼 얹어져 있는 이름 모를 봉우리의 정상.
그 위에서 운해를 바라보는 이는 공천록이었다.
그도 ‘인간’이었던가. 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얼굴에 그윽하고 애틋한 표정이 담겨 있다.
혹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는 걸까. 만약 추억할 과거가 있다면 피와 부서진 뼈, 떨어진 살들이 난무하는 지옥은 분명 아닐 터이다. 그랬다면 이토록 간절한, 또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 결코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터벅, 터벅.
공천록은 자신의 뒤로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만 상대도 자신도 크게 예의를 차리는 편은 아니다.
“여긴 처음인가?”
올라와서 말을 거는 이는 하용보다.
“당연하겠지. 언제 이런 구경 해보기라도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공천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은 여전히 먼 구름의 바다에 둔 채로.
하용보는 조금 더 걸어와 공천록의 옆에 섰다.
두껍게 봉우리 아래를 덮은 구름은 진짜 바다처럼 도도히 흐르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꽤 여러 번이나 와보았지만 전혀 질리지가 않아. 뭐, 사실 이런 멋진 경치를 본 적은 많지 않다만. 저 운해는 부끄럼쟁이 처녀와 같아서 보고자 하면 그 용태(容態)를 더욱 가린다니까.”
하용보가 입맛을 다셨다. 그도 남들이 모르는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처음 황산의 봉우리에 올랐던 날은 내가 장가가는 날이었어. 가문의 명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거지만. 맨날 하던 일이라곤 북검패의 강적들과 이 땅이 내 것이네, 저 땅도 내 것이네 하면서 오늘은 이놈을 죽이고 내일은 저놈을 죽일까 같은 생각만 가득하던 때였지.”
공천록이 운해에서 눈을 거두고 하용보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상당히 유명한 곳이잖아? 귀신을 믿는 정신 나간 종자들이 우글대는 그런 곳. 그래서 애초에 기대도 안했어. 게다가 무슨… 크크크, 귀존의 무남독녀, 금지옥엽이래. 첫날밤부터 귀신이랑 동침하게 생긴 거지 뭐.”
하용보는 지금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뭐랄까… 보니까 그냥 좋더군. 신방에 들어가서 처음 아내의 얼굴을 봤는데 참 좋았어. 야, 뭐야 그 눈은. 이상한 상상하지 마라.”
“상상 안합니다.”
“음… 너 말이 좀 더 없어졌다. 덜 건방져 보이기도 하고. 무슨 일 있었나? 그동안.”
“아아, 매일매일 건방 떨다가 언젠가 맞아 죽을 것 같아서요. 당분간 입 좀 조심하려고 합니다.”
하용보는 공천록의 이러한 변화에 조금은 의외라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신다.
“어쨌거나 하던 얘기나 더 하자. 흠흠. 일단 뭐, 그때 알았지. 여긴 귀신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본 거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꼭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진리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는 말씀.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떻습니까.”
“아, 진짜 재미없는 새끼. 흠, 흠. 뭐 어째 저째 좋은 시절을 좀 보내고, 다시 남룡천으로 복귀하고 나서 몇 년인가 흘렀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졌고.”
‘그 사건’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공천록의 눈동자가 순간 살짝 흔들렸다.
“이후에 본가로 돌아와 손에서 피를 씻어내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후후.”
공천록이 다시 하용보를 쳐다본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어떤 찡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나와 혼인하고 참 고생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 크.”
하용보의 고개가 살짝 반대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공천록은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정말로 내가 원수 같았을 거야.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제 딸 데려다가 호강은 못 시켜줄망정 고생은 안 시켰어야지. 게다가 어라? 어느 날 세상을 떠났네? 아마 나라도 사위 놈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을 걸?”
귀존 서산이 얼마나 분노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담담히 말하는 하용보의 말투에서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겐 딸이 하나 있다. 알고는 있나?”
“지금부터요.”
“이제 열다섯… 맞나? 아무튼 음, 그래.”
하용보의 딸 하명명(何明明)은 하가장 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편이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는 절대 아니다. 귀존의 핏줄인데다가 심한 자폐증까지 앓고 있어 거의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미친척하고 날뛰는 이유, 당연히 짐작할 테지.”
끄덕.
“그럴 거야.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이니까.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큰 자리에서 수천을 호령할 놈이지. 쯧쯧. 아, 얘기가 좀 샜다.”
하용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심호흡을 했다.
“어떡하겠냐. 내가 가문을 위해 뭐라도 해야 불쌍한 딸자식이 그래도 미움이라도 덜 받지 않겠어? 만약 될 수 있다면 차기 하가장의 장주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고.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내 딸을, 상상 가능한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이게 내 진짜 속마음이다. 뭐, 나도 바보 아빠거든. 야! 어디 가서 말하면 뒤져.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니까.”
“왜요.”
“그래서 부탁인데…….”
부탁이라니. 회남을 넘어 강남 전체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무인이 일개 용병에게 부탁이라니.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잖나.”
공천록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용보를 빤히 쳐다본다.
“그냥 딴 거 없어. 자주 봐주고 기회가 되면 지켜도 주고. 알지?”
“등에 뭐 달고 다니는 건 질색인데요.”
하용보가 그답지 않게 선한 눈으로 안면 가득 웃음을 지었다. 공천록의 말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야야, 만약이야 만약.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만약! 알겠지?”
이번에는 공천록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하용보의 눈만 바라본다.
“내려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하용보가 먼저 몸을 돌렸다.
뿌우우웅―!
물소의 뿔로 만든 나팔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우― 뿌우우― 뿌우우―
나팔소리는 곳곳에 산재한 봉우리에 부딪혀 여기저기로 반사된다.
또르르르.
승천하는 비룡이 양각된 금잔에 맑은 술이 따라졌다.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자그마한 상 위에는 이렇다 할 안줏거리 하나 없다.
허름한 농부의 옷차림을 한 남자가 상 앞에 앉아 자신이 술을 따른 잔에 손을 올린다.
붉은 머리칼, 붉은 수염. 얼굴은 관옥과 같으나 세월의 흔적이 살짝 내려 있는 남자.
그의 차림과 술상의 변변치 못함은 그 외모와 화려한 금잔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남자의 뒤편에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키에 검은 무복(巫服)을 입고 세 개의 뿔이 달린 귀면을 쓴 그는 마치 목석처럼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뿌우, 뿌우―!
뿔 나팔 소리는 계속되었고 멀리서 함성이 들려온다. 잠시 그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던 붉은 수염 남자가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대자연이 직접 정과 망치를 들어 깎은 것 같은 절벽. 그 가장자리 가까이에 차려진 작은 술상. 생김새답지 않게 초라한 행색의 남자와 그 뒤에 시립한 귀면. 이들은 과연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척, 척.
큰 바위 뒤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귀면을 쓴 자의 무복 양쪽 소매 안에서 쇠갈고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붉은 수염 남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빈 잔에 술을 붓는다.
일부러 크게 터벅거리며 다가온 두 사람. 한 명은 하용보였고 다른 한 명은 넓고 긴 천으로 눈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덮은 공천록이었다.
그들을 본 붉은 수염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때, 공천록의 눈동자가 귀면 남자의 양손에 닿았다. 그의 소매 아래로 핏빛 갈고리가 사슬에 걸린 채 바람에 흔들거린다.
팅―!
공천록이 상의를 조금 걷어 요대에 걸린 채도를 검지로 튕겼다. 상대가 저리 나오니 이쪽도 그에 맞는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의미다.
붉은 수염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들어 귀면에게 치우라는 명을 내렸다.
철커덩.
귀면은 신속하게 주인의 명을 이행했다. 동시에 공천록도 요대를 다시 가린다.
하용보는 망설임 없이 붉은 수염이 차려놓은 술상 앞으로 다가가 턱하니 앉았다.
뿌웅― 뿌우우웅―!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절벽 너머 먼 곳을 째려본 하용보가 다시 붉은 수염에게 눈을 맞추었다. 하용보를 가느다란 눈으로 잠시 보던 붉은 수염이 술상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어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술을 따라 마시던 잔과 똑같은 모양의 금잔이다.
또르르르.
두 잔에 같은 양의 술이 채워진다.
하용보가 먼저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손가락을 모아 잔을 가린 뒤 고개를 돌려 술을 확 들이켰다. 생각보다 술이 독했는지 그의 코끝이 약간 일그러졌다.
붉은 수염은 실소를 터트린 뒤, 느긋하게 한 손으로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지위가 확실해졌다. 하용보가 아래, 붉은 수염이 위라는 뜻.
“크어∼!”
결국 하용보가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예의고 뭐고 다 뱉어낸다.
“정말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렇구먼.”
하용보가 존대하니 붉은 수염이 하대한다.
“하나, 둘, 셋, 넷… 한 팔 년?”
“대충 맞을 것이네. 자네 집사람 그리 가고 나서 발길을 끊었으니.”
집사람? 하용보의 아내를 말하는 것이라면, 혹시 이 붉은 수염이?
“장인어른께서 워낙에 화를 내셔서 제가 감히 찾아뵐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용보의 입에서 직접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이 나왔으니 틀림이 없었다. 이자가 바로 그 유명한 귀굴의 절대자, 귀존 홍면귀 서산이었다.
그냥 봤을 때, 오히려 하용보가 더 연장자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서산의 공력이 극에 다다라 노화를 역전시켰기 때문이리라.
서산은 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하용보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하용보는 손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감사의 예를 표했고.
“화를 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 그저…….”
와아아아!
“자네가 내 눈에 보였다면 그 자리에서 천참만륙(千斬萬戮)해 버렸겠지.”
팔 년 만에 만난 옹서(翁壻)간의 대화치고는 시작부터 살벌하다.
“옛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이 자리에서 굳이 나눌 필요는 없겠지요.”
서산이 하용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 했는가?”
“아시잖아요. 제게 필요한 것.”
귀면 사내의 몸이 움찔한다.
서산은 하용보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 잔 기억하는가.”
“제가… 장인어른께서 약주를 즐기신다는 말을 듣고 힘들게 구해온 녀석들이죠.”
“맞네. 이 한 쌍의 금잔을 내게 구해주려고 참 고생을 많이 했지. 그리고 아마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것 하나를 말해보라 하지 않았나?”
“예.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언젠가 생각이 나면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다고요.”
하용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데 어쩌나. 나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쉬이 줄 생각이 없으니 말이네.”
“저 또한 쉽게 얻을 것이라 여기진 않습니다.”
“그럼 이 자리가 무슨 소용인가.”
뿌우, 뿌우―! 와아아아아!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꼭 묻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왜 그러셨습니까.”
“…….”
“무엇이 장인어른을 하가의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습니까. 어떤 천하에 때려죽일 개새끼가 회남을 전란으로 이끌도록 만들었습니까?”
공천록은 하용보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떠는 귀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네. 과연 어느 쪽이 고인 물일까? 우리 육문은 고여 썩은 물을 퍼내고 깨끗한 새 물을 담으려 했던 것일 뿐.”
“틀렸습니다. 그럴 땐 수로를 내고 다른 곳의 물을 끌어와 합쳐서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인 연못도 그리하면 정화되듯 세상만사의 이치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크게 되지 못한 거라네. 아, 물론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연아와의 혼인을 추진하긴 했지만…….”
챵! 챠앙!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우…….”
서산과 하용보의 눈이 먼 곳에 흐르는 운해 쪽으로 움직였다.
황산(黃山)의 본래 이름은 이산(黟山)이다.
과거 당현종이 그 이름을 황산이라 부르도록 명했고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그의 시로 황산을 천하에 알렸다.
칠십이봉(七十二峰)과 오절(五絕)로 대표되는 황산의 으뜸은 운해(雲海)다.
구름의 바다. 그 위로 솟아나온 봉우리들. 마치 바다에 뜬 작은 섬들을 보는 양,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절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또한 비경(祕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허락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여기에 그런 장대한 세상을 보고 있는 운 좋은 이들이 있었다.
십만 관이 훌쩍 넘는 바위가 눈사람의 머리처럼 얹어져 있는 이름 모를 봉우리의 정상.
그 위에서 운해를 바라보는 이는 공천록이었다.
그도 ‘인간’이었던가. 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얼굴에 그윽하고 애틋한 표정이 담겨 있다.
혹 과거를 회상이라도 하는 걸까. 만약 추억할 과거가 있다면 피와 부서진 뼈, 떨어진 살들이 난무하는 지옥은 분명 아닐 터이다. 그랬다면 이토록 간절한, 또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눈빛이 결코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터벅, 터벅.
공천록은 자신의 뒤로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만 상대도 자신도 크게 예의를 차리는 편은 아니다.
“여긴 처음인가?”
올라와서 말을 거는 이는 하용보다.
“당연하겠지. 언제 이런 구경 해보기라도 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공천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은 여전히 먼 구름의 바다에 둔 채로.
하용보는 조금 더 걸어와 공천록의 옆에 섰다.
두껍게 봉우리 아래를 덮은 구름은 진짜 바다처럼 도도히 흐르며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꽤 여러 번이나 와보았지만 전혀 질리지가 않아. 뭐, 사실 이런 멋진 경치를 본 적은 많지 않다만. 저 운해는 부끄럼쟁이 처녀와 같아서 보고자 하면 그 용태(容態)를 더욱 가린다니까.”
하용보가 입맛을 다셨다. 그도 남들이 모르는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처음 황산의 봉우리에 올랐던 날은 내가 장가가는 날이었어. 가문의 명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거지만. 맨날 하던 일이라곤 북검패의 강적들과 이 땅이 내 것이네, 저 땅도 내 것이네 하면서 오늘은 이놈을 죽이고 내일은 저놈을 죽일까 같은 생각만 가득하던 때였지.”
공천록이 운해에서 눈을 거두고 하용보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상당히 유명한 곳이잖아? 귀신을 믿는 정신 나간 종자들이 우글대는 그런 곳. 그래서 애초에 기대도 안했어. 게다가 무슨… 크크크, 귀존의 무남독녀, 금지옥엽이래. 첫날밤부터 귀신이랑 동침하게 생긴 거지 뭐.”
하용보는 지금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뭐랄까… 보니까 그냥 좋더군. 신방에 들어가서 처음 아내의 얼굴을 봤는데 참 좋았어. 야, 뭐야 그 눈은. 이상한 상상하지 마라.”
“상상 안합니다.”
“음… 너 말이 좀 더 없어졌다. 덜 건방져 보이기도 하고. 무슨 일 있었나? 그동안.”
“아아, 매일매일 건방 떨다가 언젠가 맞아 죽을 것 같아서요. 당분간 입 좀 조심하려고 합니다.”
하용보는 공천록의 이러한 변화에 조금은 의외라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신다.
“어쨌거나 하던 얘기나 더 하자. 흠흠. 일단 뭐, 그때 알았지. 여긴 귀신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본 거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꼭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진리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는 말씀.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알면 어떻고 모르면 또 어떻습니까.”
“아, 진짜 재미없는 새끼. 흠, 흠. 뭐 어째 저째 좋은 시절을 좀 보내고, 다시 남룡천으로 복귀하고 나서 몇 년인가 흘렀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졌고.”
‘그 사건’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공천록의 눈동자가 순간 살짝 흔들렸다.
“이후에 본가로 돌아와 손에서 피를 씻어내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후후.”
공천록이 다시 하용보를 쳐다본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어떤 찡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나와 혼인하고 참 고생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 크.”
하용보의 고개가 살짝 반대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공천록은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정말로 내가 원수 같았을 거야.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제 딸 데려다가 호강은 못 시켜줄망정 고생은 안 시켰어야지. 게다가 어라? 어느 날 세상을 떠났네? 아마 나라도 사위 놈 목을 부러뜨리고 싶었을 걸?”
귀존 서산이 얼마나 분노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담담히 말하는 하용보의 말투에서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겐 딸이 하나 있다. 알고는 있나?”
“지금부터요.”
“이제 열다섯… 맞나? 아무튼 음, 그래.”
하용보의 딸 하명명(何明明)은 하가장 내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편이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는 절대 아니다. 귀존의 핏줄인데다가 심한 자폐증까지 앓고 있어 거의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미친척하고 날뛰는 이유, 당연히 짐작할 테지.”
끄덕.
“그럴 거야.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이니까.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면 큰 자리에서 수천을 호령할 놈이지. 쯧쯧. 아, 얘기가 좀 샜다.”
하용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심호흡을 했다.
“어떡하겠냐. 내가 가문을 위해 뭐라도 해야 불쌍한 딸자식이 그래도 미움이라도 덜 받지 않겠어? 만약 될 수 있다면 차기 하가장의 장주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고.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내 딸을, 상상 가능한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이게 내 진짜 속마음이다. 뭐, 나도 바보 아빠거든. 야! 어디 가서 말하면 뒤져.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니까.”
“왜요.”
“그래서 부탁인데…….”
부탁이라니. 회남을 넘어 강남 전체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무인이 일개 용병에게 부탁이라니.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잖나.”
공천록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용보를 빤히 쳐다본다.
“그냥 딴 거 없어. 자주 봐주고 기회가 되면 지켜도 주고. 알지?”
“등에 뭐 달고 다니는 건 질색인데요.”
하용보가 그답지 않게 선한 눈으로 안면 가득 웃음을 지었다. 공천록의 말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야야, 만약이야 만약.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만약! 알겠지?”
이번에는 공천록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하용보의 눈만 바라본다.
“내려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하용보가 먼저 몸을 돌렸다.
뿌우우웅―!
물소의 뿔로 만든 나팔소리가 길게 울렸다.
뿌우우― 뿌우우― 뿌우우―
나팔소리는 곳곳에 산재한 봉우리에 부딪혀 여기저기로 반사된다.
또르르르.
승천하는 비룡이 양각된 금잔에 맑은 술이 따라졌다.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자그마한 상 위에는 이렇다 할 안줏거리 하나 없다.
허름한 농부의 옷차림을 한 남자가 상 앞에 앉아 자신이 술을 따른 잔에 손을 올린다.
붉은 머리칼, 붉은 수염. 얼굴은 관옥과 같으나 세월의 흔적이 살짝 내려 있는 남자.
그의 차림과 술상의 변변치 못함은 그 외모와 화려한 금잔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남자의 뒤편에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큰 키에 검은 무복(巫服)을 입고 세 개의 뿔이 달린 귀면을 쓴 그는 마치 목석처럼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뿌우, 뿌우―!
뿔 나팔 소리는 계속되었고 멀리서 함성이 들려온다. 잠시 그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던 붉은 수염 남자가 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대자연이 직접 정과 망치를 들어 깎은 것 같은 절벽. 그 가장자리 가까이에 차려진 작은 술상. 생김새답지 않게 초라한 행색의 남자와 그 뒤에 시립한 귀면. 이들은 과연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척, 척.
큰 바위 뒤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컹!
귀면을 쓴 자의 무복 양쪽 소매 안에서 쇠갈고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붉은 수염 남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빈 잔에 술을 붓는다.
일부러 크게 터벅거리며 다가온 두 사람. 한 명은 하용보였고 다른 한 명은 넓고 긴 천으로 눈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덮은 공천록이었다.
그들을 본 붉은 수염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그때, 공천록의 눈동자가 귀면 남자의 양손에 닿았다. 그의 소매 아래로 핏빛 갈고리가 사슬에 걸린 채 바람에 흔들거린다.
팅―!
공천록이 상의를 조금 걷어 요대에 걸린 채도를 검지로 튕겼다. 상대가 저리 나오니 이쪽도 그에 맞는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의미다.
붉은 수염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들어 귀면에게 치우라는 명을 내렸다.
철커덩.
귀면은 신속하게 주인의 명을 이행했다. 동시에 공천록도 요대를 다시 가린다.
하용보는 망설임 없이 붉은 수염이 차려놓은 술상 앞으로 다가가 턱하니 앉았다.
뿌웅― 뿌우우웅―!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절벽 너머 먼 곳을 째려본 하용보가 다시 붉은 수염에게 눈을 맞추었다. 하용보를 가느다란 눈으로 잠시 보던 붉은 수염이 술상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어 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술을 따라 마시던 잔과 똑같은 모양의 금잔이다.
또르르르.
두 잔에 같은 양의 술이 채워진다.
하용보가 먼저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손가락을 모아 잔을 가린 뒤 고개를 돌려 술을 확 들이켰다. 생각보다 술이 독했는지 그의 코끝이 약간 일그러졌다.
붉은 수염은 실소를 터트린 뒤, 느긋하게 한 손으로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지위가 확실해졌다. 하용보가 아래, 붉은 수염이 위라는 뜻.
“크어∼!”
결국 하용보가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예의고 뭐고 다 뱉어낸다.
“정말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렇구먼.”
하용보가 존대하니 붉은 수염이 하대한다.
“하나, 둘, 셋, 넷… 한 팔 년?”
“대충 맞을 것이네. 자네 집사람 그리 가고 나서 발길을 끊었으니.”
집사람? 하용보의 아내를 말하는 것이라면, 혹시 이 붉은 수염이?
“장인어른께서 워낙에 화를 내셔서 제가 감히 찾아뵐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하용보의 입에서 직접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이 나왔으니 틀림이 없었다. 이자가 바로 그 유명한 귀굴의 절대자, 귀존 홍면귀 서산이었다.
그냥 봤을 때, 오히려 하용보가 더 연장자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서산의 공력이 극에 다다라 노화를 역전시켰기 때문이리라.
서산은 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하용보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하용보는 손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감사의 예를 표했고.
“화를 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 그저…….”
와아아아!
“자네가 내 눈에 보였다면 그 자리에서 천참만륙(千斬萬戮)해 버렸겠지.”
팔 년 만에 만난 옹서(翁壻)간의 대화치고는 시작부터 살벌하다.
“옛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이 자리에서 굳이 나눌 필요는 없겠지요.”
서산이 하용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 했는가?”
“아시잖아요. 제게 필요한 것.”
귀면 사내의 몸이 움찔한다.
서산은 하용보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이 잔 기억하는가.”
“제가… 장인어른께서 약주를 즐기신다는 말을 듣고 힘들게 구해온 녀석들이죠.”
“맞네. 이 한 쌍의 금잔을 내게 구해주려고 참 고생을 많이 했지. 그리고 아마 내가 자네에게 원하는 것 하나를 말해보라 하지 않았나?”
“예. 그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언젠가 생각이 나면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다고요.”
하용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데 어쩌나. 나는 자네가 원하는 것을 쉬이 줄 생각이 없으니 말이네.”
“저 또한 쉽게 얻을 것이라 여기진 않습니다.”
“그럼 이 자리가 무슨 소용인가.”
뿌우, 뿌우―! 와아아아아!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꼭 묻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왜 그러셨습니까.”
“…….”
“무엇이 장인어른을 하가의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습니까. 어떤 천하에 때려죽일 개새끼가 회남을 전란으로 이끌도록 만들었습니까?”
공천록은 하용보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떠는 귀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네. 과연 어느 쪽이 고인 물일까? 우리 육문은 고여 썩은 물을 퍼내고 깨끗한 새 물을 담으려 했던 것일 뿐.”
“틀렸습니다. 그럴 땐 수로를 내고 다른 곳의 물을 끌어와 합쳐서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인 연못도 그리하면 정화되듯 세상만사의 이치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크게 되지 못한 거라네. 아, 물론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연아와의 혼인을 추진하긴 했지만…….”
챵! 챠앙!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우…….”
서산과 하용보의 눈이 먼 곳에 흐르는 운해 쪽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