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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슈우우우∼ 파바바밧!
백여 발이 넘는 화살이 나뭇잎들을 뚫고 쏟아졌다. 그리고 그 뒤로 수없이 많은 비명이 뒤따랐다.
정수리에 꽂힌 화살이 아래턱으로 삐져나온 자, 심장을 그대로 꿰뚫린 자, 화살이 목과 어깨사이로 들어가 반대쪽 겨드랑이로 삐쭉 나온 자 등등. 수십 명이 우수수 쓰러진다.
귀굴 무인들은 동료들이 떼죽음을 당해도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삶을 옛적에 죽은 귀신들에게 바친 광신도들이다. 죽음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향과도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쏴! 더, 더, 더, 더!”
하진양이 활을 든 적운단원들을 재촉했다.
그의 눈에는 새까맣게 모여 있는 적들이, 눈을 감고도 쏴죽일 수 있는 먹잇감처럼 보일 뿐이었다. 잘 훈련된 백 명의 궁수들은 화살이 동날 때까지 되도록 많은 적들을 죽여야 한다.
뿌우우우―!
귀굴 측에서 또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
약 오백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귀신(鬼臣)들이 내공을 실어 함성을 질렀다.
척! 척! 척!
맨 앞에 선 자들이 두꺼운 나무 방패를 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 망할 것들아! 더 열심히 쐈어야지!”
하진양이 화난 목소리로 나무라자 화살을 날리던 궁수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감돈다.

먼저 자리를 잡고 하가의 황산 원정단을 맞이한 귀굴과 홍마군의 연합 세력은 총 구백의 대군이었다.
반면 협곡으로 진입한 하가장 무인들은 고작해야 이백 정도. 하진양이 이끄는 적운단 일부와 목여충, 구십삼반 무인 열아홉이 전부였다.
처음 공격은 철갑으로 무장한 홍마군 백여 명의 기병 돌격이었다. 긴 창을 앞으로 쭉 뻗고 전력으로 질주해 오는 그들은 적운단이 궁술에 완전 특화되었음을 몰랐다. 물론 철갑이 자신들을 어느 정도 보호해 줄 거라 믿었기에 더욱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반도 채 오기 전에, 비처럼 내리는 화살에 맞아 절반이 낙마하고 나머지는 혼비백산 협곡 안쪽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낙마한 홍마군 무인들 중, 아직 죽지 않았거나 부상을 입은 자들은 달려 나온 목여충과 구십삼반 무인들에 의해 모조리 목이 잘렸다.
서해대협곡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절벽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장엄하고 아름다운 황산의 명소는 이처럼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때부터 귀굴 무인들이 뿔 나팔을 불어 대며 함성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구슬프고 애잔한 나팔 소리였다. 거기에 높낮이가 다른 함성을 돌아가며 외치는 장면은 어떤 종교의식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진양은 가차 없이 화살을 쏘라 명했던 것이다.
척! 척! 척!
슉! 슈슈슛!
화살들이 날아갔지만 방패를 뚫지 못했다.
“홍마군 녀석들이 준비한 한 수로구먼.”
애꾸눈 단유가 입맛을 다셨다. 그도 오래 전에 군문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기에 진법의 운용에 대해서 잘 안다.
“강호의 싸움에 어울리지 않아.”
덕선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저쪽이나 우리나 누가 많이 죽이는가가 중요할 뿐이지. 안 그렇소?”
조훤이 하진양을 향해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웃음을 보냈다. 궁시로 인한 대량살상은 오히려 이쪽이 먼저였으니.
“다들 준비해라! 백병전이다!”
하진양이 적운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뿌우―!
짧은 나팔소리와 동시에 방패를 든 귀굴 무인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곧 방패를 던지고 도면에 방울이 달린, 귀굴 특유의 병기를 꺼내들고 달려온다.
“선봉은 우리요.”
맹포가 맥도를 휙휙 돌렸다.
황산에 들어온 뒤 항상 맨 앞에서 적들을 부수고 들어가던 이들이 바로 구십삼반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팟!
“어?”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이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참나…….”
먼저 치고나간 그림자의 정체는 목여충이었다.
수적으로 확실히 불리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수는 상대의 기를 초반에 꺾어놓는 방법뿐이다. 이제껏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를 겪은 목여충은 그것을 잘 알았다.
낭혼이라는 거인의 그늘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과거에 속했던 곳에서도 목여충은 끊임없이 싸웠고, 이러한 진리를 몸으로 체득했다.
“우오오오오오!”
적진에서 한 명만이 달려오는 것을 본 귀굴 무인들이 괴성을 질렀다.
거대한 파도가 작은 거북이를 덮치는 것처럼 귀신들의 인파(人波)가 목여충을 감싸고 들어온다.
스으으으으―
목여충이 어깨 위로 나온 두 섬전도의 자루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방립 아래 그늘진 그의 눈에서 하얀 빛이 펑 터졌다.
번쩍! 번쩍!
귀굴의 귀신들은 섬전(閃電)을 보았다. 그리고 곧 영원한 어둠을 맞이한다.
허공에 뜬 여덟 두의 머리통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또 섬전이 귀신들을 갈랐다.
기세 좋게 목여충을 덮으려던 귀파(鬼波)의 일부가 소멸되었다. 여기저기로 귀신들이 쥐었던 병기가 잘려 날아다녔고, 팔과 몸통, 머리들이 두둥실 떠올랐다가 떨어진다.
“어이, 넌 이백 명 정도 되는 미치광이들 사이에 떨어져 저렇게 싸울 수 있어?”
조훤이 정팔에게 물었다. 정팔은 당연히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대영감은 어디서 저런 작자를 데려왔을까. 내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인일세그려.”
챵! 챠앙! 끄아아아.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상당히 오래 전에 인연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저자를 알지 못하지? 대영감하고 한시라도 떨어져 본 적이 있던가? 우리가.”
맹포도 항상 목여충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어왔다.
“그만, 시끄럽고. 가서 귀신놀이 하는 저 괴상한 것들 좀 치우지?”
정팔이 대도를 쿵 바닥에 찍으며 대화를 종료시켰다.

여충(戾蟲)은 사나운 짐승, 즉 호랑이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가 낭혼의 사람이 되고난 후, 그는 새로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빠르고 잔인한 도법과 거친 전투 방식을 본 낭혼은 그 본래 이름을 버리게 하고나서 그에게 목여충이라는 새 이름을 내려주었다.
목여충은 자신이 본래부터 지녔던 장도(長刀)를 녹여 두 개의 환수도(環首刀)로 재탄생시키니, 이것을 섬전도라 이름붙이고 그의 별호로 삼았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묵직한 남자 목여충. 그의 진실한 정체는 무엇이며 그는 무엇을 위해 낭혼의 거대한 품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다시 나온 것일까.
빠각!
섬전도의 도환(刀環)에 정수리를 찍힌 귀굴 무인의 얼굴이 진흙처럼 부서졌다.
왼손에 든 섬전도에는 이미 두 명이 꿰여 흔들거린다.
차르르르! 차르르르르―!
목여충의 주변을 돌며 기회를 노리는 귀신들은 잔뜩 질린 표정이었지만 결코 죽음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눈앞의 고수에게 방금 전에도 열댓 명의 형제들이 도륙되었지만,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웅―
목여충이 왼쪽 섬전도를 크게 휘두르자 꿰여 있던 두 명의 몸이 위아래로 나뉘며 네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와 동시에 목여충도 함께 날았다.
휙∼ 휘이익∼!
목여충이 지나는 곳마다 귀신들의 기형도가 지나갔다. 아마 털끝 정도는 건드렸을지 모른다.
착지하자마자 땅을 몇 바퀴 구른 목여충이 일어나며 가슴 아래쪽으로 모았던 섬전도를 쫙 펼쳤다. 순간, 강한 풍압이 주변 귀신들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픽!
몇 명의 안면부에 핏물이 튀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그들의 상체가 스스르 떨어졌다.
훅, 후욱.
이미 분위기는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목여충은 홀로 백이 넘는 귀굴 선공대를 맞이하여 바가지로 뜬 물을 다 마실 시간 동안 절반을 베어 죽였다. 아무리 귀굴의 일반 무인들이 수준 이하라고 하지만 그 차이가 너무 심했다.
목여충의 무력은 상관진보다는 확실히 상수(上手)이며 하용보와 우열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또한 곽능파와 일대일로 붙어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
곽능파와 목여충 사이에 흐르는 기이한 기류만 아니었다면 둘은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은 지금껏 서로를 은근히 적대시하며 웬만해서는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는 또 무얼까.
삐리리리리―!
귀를 찌르는 고음의 초금(草琴)소리였다.
퍽, 써걱! 퍽, 퍼억!
쿵! 콰아악! 으아악!
목여충을 둘러싸고 있던 귀신들은 하씨네 무인들 쪽 방향부터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추가 투입되었던 귀굴, 홍마군 무인들의 비명이었다. 그들이 섰던 자리마다 피가 하늘 높이 튀었고, 부서지고 떨어진 육신의 조각들이 나비처럼 춤추며 비산한다.
“꺼져라!”
조훤이 크게 외치며 대부를 휘둘렀다. 한 방, 한 방에 귀굴 무인들의 머리가 쪼개지고 몸이 반 토막 났다. 구십삼반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뛰어든 것이다.
그들의 뒤를 이어 적운단이 벌 떼처럼 진격했다. 이백 대 구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 잔 더 하겠나?”
“물론이죠.”
하용보는 서산의 권주를 마다하지 않았다.
쭉쭉,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소리는 아래에서 들리는 전투의 굉음과 어울려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들리십니까. 저들의 비명이?”
“내겐 환호로 들리네만.”
서산은 그저 온화하게 웃을 뿐이었다.
“비록 저희가 장인어른의 세(勢)에 못 미치지만 하나하나가 능히 백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황산에 부는 피바람이 무고한 귀인(鬼人)들을 뒤덮지 않길 바랄 따름이지요.”
하용보가 슬쩍 서산을 도발해 보았다.
“세상에 죄 없는 인간이 있던가?”
서산은 이렇게 반문함으로 하용보의 다음 말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들었다.
“킥킥킥.”
하용보가 완전히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남은 술을 털어 넘긴다.
“내 예전에 또 자네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었을 거네.”
“하도 이것저것 말씀하셔서…….”
서산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발하며 사나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달라고 했지.”
“…….”
“꼭, 지켜달라고. 꼭.”
아마 죽은 하용보의 아내 서연을 말하는 듯하다.
“한데 자넨 그러지 못했어. 그건 무슨 이유였는가?”
“믿었지요. 너무나도 쉽게 믿어서 그랬습니다.”
차라리 둘을 따로 어디 보내서 할 말 다하고 나오라는 게 낫지 싶다.
“그래도 복수는 충분히 했습니다. 지역 일대의 하오문(下午門)놈들을 싹 잡아 죽였으니까요.”
“…다 틀렸다네.”
지금 둘이 각자 말하는 내용은 서로 엇나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아는 자는 오히려 서산이었다.
“그래, 명아는 잘 있고?”
하용보가 씨익 웃는다.
톡, 톡, 톡.
공천록은 아까부터 손가락으로 옷 아래 감춰진 채도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 시선을 서산 뒤에 선 귀면의 사내에게 둔 채로.
귀면에 뚫린 구멍 너머로 사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는 담소를 나누는 하용보의 머리를, 목을, 가슴을 차례로 보다가 다시 공천록을 바라본다.
귀면 사내는 확실히 갈등하고 있었다. 육문에게, 아니 그가 속한 귀굴에게는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여기서 하용보의 숨을 끊는다? 그럼 모든 것이 정리될 수 있다. 물론 서산은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탓할 것이다. 심한 경우 하늘같은 주인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에 초연한 귀굴인으로서 적의 수장을 붙잡고 사문(死門)을 연다면 그것으로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하용보를 따라온 미지의 남자. 저자가 계속 신경을 건드렸다.
물론 그 자신이 저 어린 녀석 따위에게 어떤 위협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귀굴 최강은 아니지만 자신의 위로 강자가 많지 않음은 안다. 그 말은 즉, 하용보를 수행해 온 어린놈을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톡톡, 톡, 톡톡톡… 뚝.
공천록이 채도를 치던 손가락을 내렸다.
“…….”
까딱.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가 다시 펴는 공천록. 순간 귀면 사내의 눈이 일그러졌다.
저 애송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소매 안 철구자(鐵鉤子)를 꺼낼 뻔했다. 만약 주인이 없었다면 당장 저 웃고 있는 눈알을 뽑아버렸을 지도.
공천록과 귀면 사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서산과 하용보는 남은 술을 계속 마신다. 각자의 무인들이 비명에 죽어가고 있건만 이들은 지금 순간만큼은 아무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럼 이만 일어나겠나.”
“에구, 허리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할 말을 다했는지 서산이 자리를 파하자고 먼저 말했다.
“아, 장인어른, 한 가지 더요.”
끄덕.
“지금쯤… 천도봉 일대의 홍마군 주둔지는 쑥밭이 되었을 겁니다. 성격 급한 친구 하나가 있는데 따로 데려온 무인들을 모조리 끌고 갔지 뭡니까. 손이 워낙에 매서운 자라 굳이 확인해 보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가봐야 시체와 파리떼, 까마귀들만 가득할 터이니 그냥 본진에서 쉬라는 의미다.
“상관없네. 어차피 우리와 어울리는 녀석들은 아니었다네.”
역시나 서산도 육문 내의 다른 문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조만간 뵙겠습니다.”
“그러세. 그때는 정말로 자넬 천참하고 또 만륙해야 할 것 같군.”
하용보가 일어나 서산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귀면 사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잠깐.”
“예.”
서산이 두 개의 금잔을 들어올렸다. 그것을 보는 하용보의 표정이 왠지 씁쓸해 보였다.
부글.
잔이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곤죽처럼 되어 땅으로 흘러내린다. 서산의 가공할 내력이 만든 결과다.
“이제 자네와 나 사이의 연은 완전히 끊겼네. 그러니 아무런 부담 가지지 말고 자네의 길을 걸으시게나.”
“감사합니다.”
다시금 서산에게 고개를 숙였던 하용보가 뒤돌아 걸었다.
잠시 서산과 귀면 사내를 응시하던 공천록은 인사도, 뭐도 없이 그대로 하용보를 따랐다.
스윽.
서산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공천록의 발길도 뚝 멈췄다.
“그…….”
공천록이 얼굴을 살짝 돌렸다.
“아닐세. 아니야. 가던 길 조심히 가시게.”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하용보와 공천록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여기에 남은 존재는 서산과 귀면, 그리고 바람과 바위뿐이다.
“존귀하신 주인이시여. 어찌하여 저들을 그냥 보내십니까.”
낮지도 높지도 않은, 무척이나 딱딱한 음성이었다.
“내 착각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해 하는 귀면 사내를 옆에 둔 서산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푸르게 빛나는 귀존의 눈.
지금 무엇을,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