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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1
1화
1.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봐요. 지금이 대체 몇 시예요?”
“아, 저기 오는 길이 막혀서……”
꾸벅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얼핏 본 시계의 바늘은 정각 여덟 시 이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빨리 옷 갈아입어요.”
“네…….”
혜원은 재빨리 로커룸으로 향했다. 깨끗하고 향긋한 향기가 떠도는 것 같은 정갈한 로커룸. 차가운 바깥과는 달리 언 볼이 저절로 풀리는 것 같은 따뜻한 공기. 일을 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환경이 아닌가, 이런 맹추위 속에서도 짧은 반팔에 짧은 치마를 입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추위를 떨치기에는 부족했던 모직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어제 빨아서 깨끗하게 다린 유니폼을 꺼냈다. 미미하게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풍기는 기분 좋은 감촉. 그러나 이 옷도 이틀을 버티진 못할 것이다. 제가 하는 일이 빳빳하게 다린 옷이 제 모양을 갖추고 있기엔 버거운 일이니까. 재빨리 두터운 터틀넥과 기모 바지를 벗고서는 얄따란 유니폼을 입었다. 언뜻 마트에서 산 낡은 속옷이 거울에 비춰지긴 했지만 살구색이기에 얇고 하얀 유니폼 밖으로 비치치는 않았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검은색의 망사 핀으로 고정시키고 옆으로 흘러내릴지도 모르는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핀으로 고정한 뒤 찬바람을 뚫고 오느라 날아간 파우더를 다시 바르고 얼굴의 혈색을 돋워 주는 옅은 색의 광택 없는 립글로스를 덧바르고 나온 것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늘 빨리빨리를 외치며 살아온 세월 덕에 그녀는 완벽하게 바뀐 모습으로 쾌적하고 깨끗한 복도로 걸어 나왔다.
“정혜원 씨, 각별히 주의하는 거 잊지 마십시오.”
차분한 목소리이지만 언제나 아랫사람들에게는 늘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지닌 정 팀장이 말했다. 굳은 얼굴로 보아 이번에 맡은 일의 중대한 정도를 알 것만 같았다.
“네, 정 팀장님.”
“복장 단정히 하십시오.”
“네.”
늘 하는 일인데도 제 소임을 충실히 하려는 사람의 버릇처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꾸벅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막 옆으로 지나가는 차트를 가슴에 안고 청진기를 목에 건 간호사와 비슷했다. 그러나 약간의 색조가 다른 유니폼은 약간이 아닌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깔끔하게 무릎 위까지 오는 랩스커트 형 반바지인 하의와 아이보리색의 어깨와 칼라에 은은한 스티치가 들어간 셔츠 형의 상의는 아이보리색의 우아하게 보이는 간호사들의 복장과 비슷했지만 간호사는 아니었다. 혜원의 정식 명칭은 간병 도우미였다. 일명 간병인이라고도 하는.
그러나 그녀의 말끔하고 깨끗한 복장과 말갛고 정갈한 외모만 본다면 간호사가 아니라 스튜어디스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스튜어디스만큼의 스펙과 그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보수를 받는 만큼 그녀가 걷고 있는 말끔하고 조용한 복도를 가진 병원은 조금 특별한 곳이었다.
서울의 외곽, 신도시 근처에 있는 보기에도 깔끔하기만 할 뿐 그리 튀어 보이지 않는 12층 건물의 외관에는 K&J 클리닉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무엇이라 더 설명도 없이 우아한 조명만 들어가 있는 건물의 1층에는 두어 대의 앰뷸런스가 서 있음으로 해서 이곳이 병원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는 병원임을 알 수 있는 표시나, 전문으로 진료하는 과에 대해 전혀 안내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은 저곳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있는 입구마저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유리문인데다 드나드는 사람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실제의 입구는 지하에 있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통하는 깨끗하고 널찍한 문이었다. 간호사들조차도 다들 중형차 이상의 차를 끌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그럼 이 정체불명의 병원에서 하는 것은 무엇인가. K&J 클리닉은 외국계 거대 자본이 세운 병원이었다. 주로 상류층, 특히 정계나 재계 쪽을 상대로 하는 특수 요양 병원이 외관이었다. 그러나 요양 병원이라고 해서 나이가 들어 치매기가 있는 노회장님이 여생을 보내는 곳 정도가 아니라 밖에서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는 거의 모든 진료를 할 수 있는 종합병원에 가까웠다. 원장과 상주하는 의사들은 병원의 규모에 비해 솔직히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클라이언트들이 원한다면 세계 유수의 병원이나 대학병원의 수술 팀을 전부 초청해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수술이 가능한 그런 곳이었다.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가 조금 과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 있지만.
로커룸에서 나온 혜원은 12층으로 향했다. 병원답지 않게, 호텔식의 식당이며, 사우나며 휴게실까지 갖춘 저층과 초정밀의 뇌수술까지 가능한 최신식의 수술실이 있는 중간층, 그리고 외부에서 초청된 의료진이 머무는 화려한 객실을 제외한 고층은 전부 다 초호화 병실로 되어 있었다. 특히 그녀가 가는 12층은 특별했다. 단 두 개밖에 없는 VVIP용 병실이었으니까.
각 병실마다 개인 간호사와 그녀와 같은 간병인이 딸려 있지만 12층은 특별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특별한 병원은,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유럽이나 가끔은 러시아 쪽의 의료진까지 초청되어 오는 것이 다반사인지라 영양사나 간호사, 하다못해 병 수발을 들고 목욕이나 배설물 같은 것을 치우는 일을 담당하는 간병인까지 적어도 삼 개 국어 정도는 능숙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채용 조건의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쓴 미소만 감도는 그녀의 과거 시절, 미국에서 몇 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닌 덕에 그녀의 영어 실력은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었고 따로 열심히 공부한 일어와 불어 또한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했기에 이런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도 한몫했다.
하지만, 아무리 근무하는 곳이 화려하고 보수가 남들보다 낫다고 할지라도 간병인이라는 일은 고단한 육체노동이었다. 특히 병실마다 개인 간호사까지 지정된 병원에서의 간병인 역할은 사실상 병실에 딸린 메이드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최상류층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간병인으로서 평소보다 훨씬 멸시를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기마저 다른 12층의 눈앞에 펼쳐졌다. 몇 번이나 이곳에서 파견되어 일했지만 12층 환자는 처음이었다. 웬만한 대기업 회장님도 오기 힘든 이 12층의 환자는 실로 어마어마한 거물급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일선에선 은퇴했으나 국내 재계 1위 기업인 SJ그룹의 실질적 총수 태명현 명예회장이었다.
가벼운 뇌출혈과 뇌경색으로 입원했는데 SJ 산하의 커다란 종합병원이 있었지만 달리 이곳에 입원을 한 것은 소문이 나지 않길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그러한 목적 때문에 오는 것이니까. 회장님의 명성에 걸맞게 미국의 존스홉킨스에서 신경외과 팀이 집도를 맡기로 했고 그쪽에서는 내일 병원에 도착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영어에 능숙한 혜원이 나이트를 맡게 된 것이었다. 이 정도의 클라이언트라면 5년차 이상만 맡을 수 있었지만 4년차인 혜원은 팀 중에서도 가장 영어에 능숙했다. 졸업만 했더라면……. 아마 이런 일은 안 했어도 됐겠지.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새 환자복과 패드 등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클라이언트의 특징이나 취향 등이 적힌 파일을 들었다. 짠 음식을 싫어하고 돼지고기를 꺼리고, 채소도 향이 강한 것을 멀리하고 왼쪽 시력이 약한 탓에 침대나 조명의 방향을 고려해야 하고, 저녁에는 반드시 불을 다 꺼야 숙면을 들고 하루 세 번 성경책을 읽고…….
화사하게 웃는, 그러나 왠지 지쳐 보이는 증명사진이 있는 신분증을 다시 한 번 매만지고, 혜원은 씩씩한 걸음걸이로 탕비실을 나섰다.
SJ그룹이라…….
그녀는 밑창이 고무로 되어 있어 발소리가 나지 않는 하얀 간호사용 신발 덕에 발소리도 없이 눈부시게 하얀 문을 지나 화려한 호텔 방을 연상시키는 넓은 다이닝 룸을 거쳐 병실로 들어갔다. 옆에 있는 고급스러운 소파에는 화려한 차림의 노부인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의 비서일 듯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역시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교대할 다른 간병인이 혜원을 눈으로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그러나 그녀의 인사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모님께 그녀 역시 전혀 감정 따위는 없이 기계적인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 뒤에 손에 든 것을 뒤쪽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보고 병실의 다른 간병인인 미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 잠드셨으니까 환의는 아침에 갈아입도록 도와드리세요.”
“네.”
둘의 대화 내용을 듣고 혜원을 그리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화려한 호피 무늬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노부인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밤에 여기 있을 간병인이야? 너무 젊은데다 얼굴이…….”
한마디로 너무 젊고 누구라도 뒤돌아볼 만큼 뛰어난 외모가 걸린다는 뜻인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회장님은 프로필상 나이가 83세였다. 아마 실제 나이는 여든다섯은 되었겠지. 그래도 70대 초반으로도 안 보이는 저 사모님은 그런 혜원이 걸리는 것 같았다.
“영어에 능숙해서요. 내일 오는 수술 팀한테 혹 밤새 있을지도 모르는 회장님의 상세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가 봅니다.”
모든 걸 체크하고 있는 사모님의 비서가 불편한 심기를 어찌해 볼 요량으로 조근하게 설명을 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을까.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이 일의 첫 번째 조건이 단정한 외모이지만, 그 외모 덕에 꺼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이가 적든 많든 대부분 이곳의 입원 환자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간호를 하거나 간병을 하는 사람들도 조금 외모가 괜찮다면 아무리 손녀딸뻘이라 해도 저런 ‘사모님’들은 일단 꺼리는 쪽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마치 창부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던 사모님은 여기 앉아 있는 게 지겨웠는지 몸을 일으켰다. 아무렴 병원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두어 시간 남짓이지만 갑갑스러운 병실에 앉아 있는 데 지친 사모님이 나설 채비를 하자 중년의 여자도 재빨리 뒤에 있는 옷장을 열어 보기에도 화려한 아이보리빛 모피 코트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그리고 절대 한 사람으로는 안 돼.”
늙고 병든 환자라 해도 남자는 남자라는 거겠지. 늘 있는 일이기에 혜원은 더욱더 기계적이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숙인 고개는 재빨리 제자리에 오지 못했다. 고개를 드는 시간을 미미하게나마 살짝 지연시킨 것은 언뜻 스쳐 지나가는 옅은 향기 때문이었다.
라리끄다. 크리스털 뻬올레 드 라리끄…….
동그랗고 투명한 디자이너의 크리스털 오팔 병과 그 주변을 둘러싼 검은색의 깃털.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름과 병 모양까지 생각이 나다니. 정말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향기지만 저 백단나무 향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 건가. 사모님과 일행은 이미 밖으로 나간 지 오래인데 그녀는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혜원 씨?”
같은 팀 미희의 목소리에 그녀는 잠시 잠깐 있었던 미망의 세계에서 깨났다. 아주 미미한 라리끄의 향이 묻어 두었던 10여 년 세월의 책장을 펼치게 하다니. 순간적인 ‘착각’을 한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진 혜원이 오히려 화사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들어가세요. 저 혼자 있어도 돼요.”
그래야 하겠지만 미희는 사모님의 말이 걸렸다.
“간호사 분들도 쉴 새 없이 드나드는데요 뭐.”
사실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다. 아마 전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누워서 간간이 코까지 고는 저 노회장님의 막내 손주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라고.
소리도 없는 가습기에서 나오는 적당한 습기, 세심하게 맞춰지고 있는 실내 온도, 멀리 인공 호수 주변에 삥 둘러서 있는 가로등이 마치 그림같이 보이는 커다란 창밖에 뭔가 흩날리고 있는 것을 깨달은 시간은 새벽 두 시쯤이었다. 첫눈인가. 환자를 돌보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는지라 이런 늦은 시간엔 가끔 책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봐야 할 것은 수십 번도 더 봐서 거의 외우다시피 한 환자에 대한 차트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원서 번역을 욕심껏 해서 넘기느라 낮에 잠깐 눈을 붙이지도 못했는지라 그녀답지 않게 눈꺼풀이 무거워진 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잠을 잘 설친다던 노회장님은 여전히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행스러운 고요였다.
고급스러운 블라인드 밑에 펼쳐진 넓디넓은 창은 마치 커다란 화폭 같았다. 바깥으로 보이는 한적한 야경에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첫눈치고는 꽤 커다랗게 보이는 눈송이들은 따뜻한 병실의 공기 탓인지 손을 내밀어 만지면 푹신하고 따뜻한 솜 덩어리 같을 듯 보였다. 그냥 창밖의 풍경에 취해서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에 쌓인 눈 위를 신고 온 굽 낮은 부츠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은 좀 접어 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또 보일러를 다 올리고 잠드는 건 아닐까. 규정상 절대 휴대폰 따위를 병실로 가져올 수 없는 혜원은 매일 밤 춥다면서도 버릇처럼 얇은 잠옷 가운만 입은 채 시간으로 돌려 놓은 보일러를 끝까지 올리고 이불 따위는 내던지고 잠들어 버리는 그녀의 엄마에게 문자라도 하나만 보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컥……. 컥.”
그녀를 상념에서 깨나게 한 것은 짙은 가래가 섞인 기침 소리였다. 혜원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침상으로 다가갔다.
“회장님,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낮고 고요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엑…… 캑……. 캑.”
가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침상의 머리맡에 있는 벨을 눌렀다.
“1호입니다. 가벼운 Aspiration(사레, 기관 내 이물질)인데 와 주세요.”
단지 가래가 조금 끓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석션을 하고 이래저래 잠이 깬 노인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받아들이면서 기본적인 바이탈을 재고 당직 의사까지 왔다 간 후로 환자는 잠이 다 깨 버린 듯했다. 깐깐한 목소리로 다리가 아프니 다리를 주물러라, 방 안의 습도가 높다, 불이 밝다, 어깨가 결린다, 이것저것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더니 긴 겨울밤이 희끗해질 무렵이 돼서야 겨우 다시 잠들었다. 수술이 모레 오후에 있어 금식에다 물도 마시면 안 되는 환자였다. 그러나 갈증이 난다고 해서 거즈에 물을 묻혀 입술을 적시느라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환자가 잠들고 나니 혜원의 얼굴도 퍼석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전 6시가 되어야 교대 시간이니 그때까지는 잘 버텨야 했다.
한가해지자 혜원은 차트를 들었다. 간호사들도 자세하게 차트를 작성하긴 하지만 간병인도 간병인 나름대로 있었던 모든 일을 다 꼼꼼히 시간에 맞춰 기록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에 수술하는 팀이 미국의 유명한 병원에서 오는 팀이라 그녀는 간병일지도 영어로 작성해야 했다. 나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사태에든 대비해야 했기에. 손에 든 보이스 레코더에 짧게짧게 분 단위로 기록한 음성 메모를 다시 돌려 가면서 끝이 동그란 아름다운 글씨로 있었던 일을 적고 나서 혜원은 병실을 정리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이래저래 사용한 물건들을 갱의실에 갖다 놓고 새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뜨면서도 그녀는 병실이 비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참 간호사에게 환자를 부탁하고 방을 나섰다.
다들 처음에는 이런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혜원의 외모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녀를 꺼려했지만 늘 열심히 일을 하고 남들한테 공손하고 예의 바른 그녀의 붙임성 때문인지 차차 마음을 터놓는 분위기였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잠시 쉬던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쉰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말은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병실보다는 약간 서늘한 기운이 도는 복도의 청랑함에 금세 내리눌리던 눈꺼풀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복도의 커다란 창밖으로 하얗게 눈이 쌓여, 어제 발을 동동 굴리며 병원으로 오던 저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바깥 풍경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게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 자신의 상념이 싫어진 혜원은 고개를 돌렸다. 퇴근할 때는 제발 눈발이 잦아들길 바라면서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왜 올라오셨습니까?”
“그냥 습관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차트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조용한 스테이션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는 낯선 목소리를 듣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외국인 의사들도 늘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외부에서 초청되어 오는 전문의들이 단 한 건의 수술을 위해 방문하는 게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Aspiration이 있었군요.”
“가벼운 증세였습니다. 석션하고 다시 잠드셨습니다. 수술에 지장은 전혀 없을 것 입니다.”
갱의실로 들어가려는 혜원의 발걸음이 멎은 것은 너무나 조용한 특별층 간호 스테이션에서 들리는 대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담당 환자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겠죠.”
싸한 데스크의 하얀 대리석처럼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인은 그게 말버릇인지 모르겠지만 듣는 간호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될 만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섞은 듯했다.
본인도 모르게,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번에 오는 의료 팀은 존스홉킨스에서 온다고 해서 당연히 외국인일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또렷한 발음의 목소리는 분명히 한국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러다가 뭐 그 팀에 한국인도 있을 수 있겠지 하고 흘끗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 잠깐의 시선이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호텔의 로비 같은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된 스테이션에는 새벽에 새로 바꿔 놓은 커다란 하얀 장미가 소담스럽게 꽂힌 커다란 수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꽃에 걸맞은 눈부신 하얀 가운을 입은 훤칠한 키의 낯선 의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잔뜩 호의를 품은 익숙한 조 수간호사의 모습도 보였고.
“다른 차트는?”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차트를 건네받은, 큰 키 덕에 스테이션에 구부정하게 기댄 의사의 뒷모습은 절로 그 반대쪽을 기대하게 하리만큼 훌륭했다. 단지 누구나 입는 의사 가운에 연회색의 정장 바지를 입은 뒷모습뿐인데도 호감을 갖게 하리만큼 자세가 반듯하고 키가 커서일지도 몰랐다. 혜원은 이상스러운 낯설지 않음이라는 감정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재빨리 갱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어제의 차트도 좀 주시겠습니까?”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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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봐요. 지금이 대체 몇 시예요?”
“아, 저기 오는 길이 막혀서……”
꾸벅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얼핏 본 시계의 바늘은 정각 여덟 시 이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빨리 옷 갈아입어요.”
“네…….”
혜원은 재빨리 로커룸으로 향했다. 깨끗하고 향긋한 향기가 떠도는 것 같은 정갈한 로커룸. 차가운 바깥과는 달리 언 볼이 저절로 풀리는 것 같은 따뜻한 공기. 일을 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환경이 아닌가, 이런 맹추위 속에서도 짧은 반팔에 짧은 치마를 입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추위를 떨치기에는 부족했던 모직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어제 빨아서 깨끗하게 다린 유니폼을 꺼냈다. 미미하게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풍기는 기분 좋은 감촉. 그러나 이 옷도 이틀을 버티진 못할 것이다. 제가 하는 일이 빳빳하게 다린 옷이 제 모양을 갖추고 있기엔 버거운 일이니까. 재빨리 두터운 터틀넥과 기모 바지를 벗고서는 얄따란 유니폼을 입었다. 언뜻 마트에서 산 낡은 속옷이 거울에 비춰지긴 했지만 살구색이기에 얇고 하얀 유니폼 밖으로 비치치는 않았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검은색의 망사 핀으로 고정시키고 옆으로 흘러내릴지도 모르는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핀으로 고정한 뒤 찬바람을 뚫고 오느라 날아간 파우더를 다시 바르고 얼굴의 혈색을 돋워 주는 옅은 색의 광택 없는 립글로스를 덧바르고 나온 것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늘 빨리빨리를 외치며 살아온 세월 덕에 그녀는 완벽하게 바뀐 모습으로 쾌적하고 깨끗한 복도로 걸어 나왔다.
“정혜원 씨, 각별히 주의하는 거 잊지 마십시오.”
차분한 목소리이지만 언제나 아랫사람들에게는 늘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지닌 정 팀장이 말했다. 굳은 얼굴로 보아 이번에 맡은 일의 중대한 정도를 알 것만 같았다.
“네, 정 팀장님.”
“복장 단정히 하십시오.”
“네.”
늘 하는 일인데도 제 소임을 충실히 하려는 사람의 버릇처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꾸벅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막 옆으로 지나가는 차트를 가슴에 안고 청진기를 목에 건 간호사와 비슷했다. 그러나 약간의 색조가 다른 유니폼은 약간이 아닌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깔끔하게 무릎 위까지 오는 랩스커트 형 반바지인 하의와 아이보리색의 어깨와 칼라에 은은한 스티치가 들어간 셔츠 형의 상의는 아이보리색의 우아하게 보이는 간호사들의 복장과 비슷했지만 간호사는 아니었다. 혜원의 정식 명칭은 간병 도우미였다. 일명 간병인이라고도 하는.
그러나 그녀의 말끔하고 깨끗한 복장과 말갛고 정갈한 외모만 본다면 간호사가 아니라 스튜어디스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스튜어디스만큼의 스펙과 그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보수를 받는 만큼 그녀가 걷고 있는 말끔하고 조용한 복도를 가진 병원은 조금 특별한 곳이었다.
서울의 외곽, 신도시 근처에 있는 보기에도 깔끔하기만 할 뿐 그리 튀어 보이지 않는 12층 건물의 외관에는 K&J 클리닉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무엇이라 더 설명도 없이 우아한 조명만 들어가 있는 건물의 1층에는 두어 대의 앰뷸런스가 서 있음으로 해서 이곳이 병원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는 병원임을 알 수 있는 표시나, 전문으로 진료하는 과에 대해 전혀 안내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은 저곳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있는 입구마저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유리문인데다 드나드는 사람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실제의 입구는 지하에 있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통하는 깨끗하고 널찍한 문이었다. 간호사들조차도 다들 중형차 이상의 차를 끌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그럼 이 정체불명의 병원에서 하는 것은 무엇인가. K&J 클리닉은 외국계 거대 자본이 세운 병원이었다. 주로 상류층, 특히 정계나 재계 쪽을 상대로 하는 특수 요양 병원이 외관이었다. 그러나 요양 병원이라고 해서 나이가 들어 치매기가 있는 노회장님이 여생을 보내는 곳 정도가 아니라 밖에서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는 거의 모든 진료를 할 수 있는 종합병원에 가까웠다. 원장과 상주하는 의사들은 병원의 규모에 비해 솔직히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클라이언트들이 원한다면 세계 유수의 병원이나 대학병원의 수술 팀을 전부 초청해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수술이 가능한 그런 곳이었다.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가 조금 과하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 있지만.
로커룸에서 나온 혜원은 12층으로 향했다. 병원답지 않게, 호텔식의 식당이며, 사우나며 휴게실까지 갖춘 저층과 초정밀의 뇌수술까지 가능한 최신식의 수술실이 있는 중간층, 그리고 외부에서 초청된 의료진이 머무는 화려한 객실을 제외한 고층은 전부 다 초호화 병실로 되어 있었다. 특히 그녀가 가는 12층은 특별했다. 단 두 개밖에 없는 VVIP용 병실이었으니까.
각 병실마다 개인 간호사와 그녀와 같은 간병인이 딸려 있지만 12층은 특별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특별한 병원은,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유럽이나 가끔은 러시아 쪽의 의료진까지 초청되어 오는 것이 다반사인지라 영양사나 간호사, 하다못해 병 수발을 들고 목욕이나 배설물 같은 것을 치우는 일을 담당하는 간병인까지 적어도 삼 개 국어 정도는 능숙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채용 조건의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쓴 미소만 감도는 그녀의 과거 시절, 미국에서 몇 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닌 덕에 그녀의 영어 실력은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이었고 따로 열심히 공부한 일어와 불어 또한 간단한 회화 정도는 가능했기에 이런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도 한몫했다.
하지만, 아무리 근무하는 곳이 화려하고 보수가 남들보다 낫다고 할지라도 간병인이라는 일은 고단한 육체노동이었다. 특히 병실마다 개인 간호사까지 지정된 병원에서의 간병인 역할은 사실상 병실에 딸린 메이드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최상류층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간병인으로서 평소보다 훨씬 멸시를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기마저 다른 12층의 눈앞에 펼쳐졌다. 몇 번이나 이곳에서 파견되어 일했지만 12층 환자는 처음이었다. 웬만한 대기업 회장님도 오기 힘든 이 12층의 환자는 실로 어마어마한 거물급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일선에선 은퇴했으나 국내 재계 1위 기업인 SJ그룹의 실질적 총수 태명현 명예회장이었다.
가벼운 뇌출혈과 뇌경색으로 입원했는데 SJ 산하의 커다란 종합병원이 있었지만 달리 이곳에 입원을 한 것은 소문이 나지 않길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 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그러한 목적 때문에 오는 것이니까. 회장님의 명성에 걸맞게 미국의 존스홉킨스에서 신경외과 팀이 집도를 맡기로 했고 그쪽에서는 내일 병원에 도착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영어에 능숙한 혜원이 나이트를 맡게 된 것이었다. 이 정도의 클라이언트라면 5년차 이상만 맡을 수 있었지만 4년차인 혜원은 팀 중에서도 가장 영어에 능숙했다. 졸업만 했더라면……. 아마 이런 일은 안 했어도 됐겠지.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새 환자복과 패드 등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클라이언트의 특징이나 취향 등이 적힌 파일을 들었다. 짠 음식을 싫어하고 돼지고기를 꺼리고, 채소도 향이 강한 것을 멀리하고 왼쪽 시력이 약한 탓에 침대나 조명의 방향을 고려해야 하고, 저녁에는 반드시 불을 다 꺼야 숙면을 들고 하루 세 번 성경책을 읽고…….
화사하게 웃는, 그러나 왠지 지쳐 보이는 증명사진이 있는 신분증을 다시 한 번 매만지고, 혜원은 씩씩한 걸음걸이로 탕비실을 나섰다.
SJ그룹이라…….
그녀는 밑창이 고무로 되어 있어 발소리가 나지 않는 하얀 간호사용 신발 덕에 발소리도 없이 눈부시게 하얀 문을 지나 화려한 호텔 방을 연상시키는 넓은 다이닝 룸을 거쳐 병실로 들어갔다. 옆에 있는 고급스러운 소파에는 화려한 차림의 노부인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의 비서일 듯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역시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교대할 다른 간병인이 혜원을 눈으로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그러나 그녀의 인사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모님께 그녀 역시 전혀 감정 따위는 없이 기계적인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 뒤에 손에 든 것을 뒤쪽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보고 병실의 다른 간병인인 미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 잠드셨으니까 환의는 아침에 갈아입도록 도와드리세요.”
“네.”
둘의 대화 내용을 듣고 혜원을 그리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던 화려한 호피 무늬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노부인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밤에 여기 있을 간병인이야? 너무 젊은데다 얼굴이…….”
한마디로 너무 젊고 누구라도 뒤돌아볼 만큼 뛰어난 외모가 걸린다는 뜻인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회장님은 프로필상 나이가 83세였다. 아마 실제 나이는 여든다섯은 되었겠지. 그래도 70대 초반으로도 안 보이는 저 사모님은 그런 혜원이 걸리는 것 같았다.
“영어에 능숙해서요. 내일 오는 수술 팀한테 혹 밤새 있을지도 모르는 회장님의 상세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가 봅니다.”
모든 걸 체크하고 있는 사모님의 비서가 불편한 심기를 어찌해 볼 요량으로 조근하게 설명을 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을까.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이 일의 첫 번째 조건이 단정한 외모이지만, 그 외모 덕에 꺼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이가 적든 많든 대부분 이곳의 입원 환자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간호를 하거나 간병을 하는 사람들도 조금 외모가 괜찮다면 아무리 손녀딸뻘이라 해도 저런 ‘사모님’들은 일단 꺼리는 쪽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마치 창부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던 사모님은 여기 앉아 있는 게 지겨웠는지 몸을 일으켰다. 아무렴 병원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두어 시간 남짓이지만 갑갑스러운 병실에 앉아 있는 데 지친 사모님이 나설 채비를 하자 중년의 여자도 재빨리 뒤에 있는 옷장을 열어 보기에도 화려한 아이보리빛 모피 코트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그리고 절대 한 사람으로는 안 돼.”
늙고 병든 환자라 해도 남자는 남자라는 거겠지. 늘 있는 일이기에 혜원은 더욱더 기계적이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숙인 고개는 재빨리 제자리에 오지 못했다. 고개를 드는 시간을 미미하게나마 살짝 지연시킨 것은 언뜻 스쳐 지나가는 옅은 향기 때문이었다.
라리끄다. 크리스털 뻬올레 드 라리끄…….
동그랗고 투명한 디자이너의 크리스털 오팔 병과 그 주변을 둘러싼 검은색의 깃털.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이름과 병 모양까지 생각이 나다니. 정말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향기지만 저 백단나무 향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 건가. 사모님과 일행은 이미 밖으로 나간 지 오래인데 그녀는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혜원 씨?”
같은 팀 미희의 목소리에 그녀는 잠시 잠깐 있었던 미망의 세계에서 깨났다. 아주 미미한 라리끄의 향이 묻어 두었던 10여 년 세월의 책장을 펼치게 하다니. 순간적인 ‘착각’을 한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진 혜원이 오히려 화사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들어가세요. 저 혼자 있어도 돼요.”
그래야 하겠지만 미희는 사모님의 말이 걸렸다.
“간호사 분들도 쉴 새 없이 드나드는데요 뭐.”
사실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다. 아마 전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누워서 간간이 코까지 고는 저 노회장님의 막내 손주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라고.
소리도 없는 가습기에서 나오는 적당한 습기, 세심하게 맞춰지고 있는 실내 온도, 멀리 인공 호수 주변에 삥 둘러서 있는 가로등이 마치 그림같이 보이는 커다란 창밖에 뭔가 흩날리고 있는 것을 깨달은 시간은 새벽 두 시쯤이었다. 첫눈인가. 환자를 돌보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는지라 이런 늦은 시간엔 가끔 책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봐야 할 것은 수십 번도 더 봐서 거의 외우다시피 한 환자에 대한 차트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원서 번역을 욕심껏 해서 넘기느라 낮에 잠깐 눈을 붙이지도 못했는지라 그녀답지 않게 눈꺼풀이 무거워진 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잠을 잘 설친다던 노회장님은 여전히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행스러운 고요였다.
고급스러운 블라인드 밑에 펼쳐진 넓디넓은 창은 마치 커다란 화폭 같았다. 바깥으로 보이는 한적한 야경에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첫눈치고는 꽤 커다랗게 보이는 눈송이들은 따뜻한 병실의 공기 탓인지 손을 내밀어 만지면 푹신하고 따뜻한 솜 덩어리 같을 듯 보였다. 그냥 창밖의 풍경에 취해서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에 쌓인 눈 위를 신고 온 굽 낮은 부츠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은 좀 접어 버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또 보일러를 다 올리고 잠드는 건 아닐까. 규정상 절대 휴대폰 따위를 병실로 가져올 수 없는 혜원은 매일 밤 춥다면서도 버릇처럼 얇은 잠옷 가운만 입은 채 시간으로 돌려 놓은 보일러를 끝까지 올리고 이불 따위는 내던지고 잠들어 버리는 그녀의 엄마에게 문자라도 하나만 보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컥……. 컥.”
그녀를 상념에서 깨나게 한 것은 짙은 가래가 섞인 기침 소리였다. 혜원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침상으로 다가갔다.
“회장님,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낮고 고요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엑…… 캑……. 캑.”
가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침상의 머리맡에 있는 벨을 눌렀다.
“1호입니다. 가벼운 Aspiration(사레, 기관 내 이물질)인데 와 주세요.”
단지 가래가 조금 끓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석션을 하고 이래저래 잠이 깬 노인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받아들이면서 기본적인 바이탈을 재고 당직 의사까지 왔다 간 후로 환자는 잠이 다 깨 버린 듯했다. 깐깐한 목소리로 다리가 아프니 다리를 주물러라, 방 안의 습도가 높다, 불이 밝다, 어깨가 결린다, 이것저것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더니 긴 겨울밤이 희끗해질 무렵이 돼서야 겨우 다시 잠들었다. 수술이 모레 오후에 있어 금식에다 물도 마시면 안 되는 환자였다. 그러나 갈증이 난다고 해서 거즈에 물을 묻혀 입술을 적시느라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환자가 잠들고 나니 혜원의 얼굴도 퍼석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전 6시가 되어야 교대 시간이니 그때까지는 잘 버텨야 했다.
한가해지자 혜원은 차트를 들었다. 간호사들도 자세하게 차트를 작성하긴 하지만 간병인도 간병인 나름대로 있었던 모든 일을 다 꼼꼼히 시간에 맞춰 기록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에 수술하는 팀이 미국의 유명한 병원에서 오는 팀이라 그녀는 간병일지도 영어로 작성해야 했다. 나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사태에든 대비해야 했기에. 손에 든 보이스 레코더에 짧게짧게 분 단위로 기록한 음성 메모를 다시 돌려 가면서 끝이 동그란 아름다운 글씨로 있었던 일을 적고 나서 혜원은 병실을 정리하기 위해서 일어났다. 이래저래 사용한 물건들을 갱의실에 갖다 놓고 새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뜨면서도 그녀는 병실이 비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참 간호사에게 환자를 부탁하고 방을 나섰다.
다들 처음에는 이런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혜원의 외모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녀를 꺼려했지만 늘 열심히 일을 하고 남들한테 공손하고 예의 바른 그녀의 붙임성 때문인지 차차 마음을 터놓는 분위기였다.
“걱정 말고 다녀와요. 잠시 쉬던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쉰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말은 고마워서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병실보다는 약간 서늘한 기운이 도는 복도의 청랑함에 금세 내리눌리던 눈꺼풀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복도의 커다란 창밖으로 하얗게 눈이 쌓여, 어제 발을 동동 굴리며 병원으로 오던 저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바깥 풍경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게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 자신의 상념이 싫어진 혜원은 고개를 돌렸다. 퇴근할 때는 제발 눈발이 잦아들길 바라면서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왜 올라오셨습니까?”
“그냥 습관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차트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조용한 스테이션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는 낯선 목소리를 듣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외국인 의사들도 늘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외부에서 초청되어 오는 전문의들이 단 한 건의 수술을 위해 방문하는 게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Aspiration이 있었군요.”
“가벼운 증세였습니다. 석션하고 다시 잠드셨습니다. 수술에 지장은 전혀 없을 것 입니다.”
갱의실로 들어가려는 혜원의 발걸음이 멎은 것은 너무나 조용한 특별층 간호 스테이션에서 들리는 대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담당 환자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겠죠.”
싸한 데스크의 하얀 대리석처럼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인은 그게 말버릇인지 모르겠지만 듣는 간호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될 만큼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섞은 듯했다.
본인도 모르게,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번에 오는 의료 팀은 존스홉킨스에서 온다고 해서 당연히 외국인일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또렷한 발음의 목소리는 분명히 한국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러다가 뭐 그 팀에 한국인도 있을 수 있겠지 하고 흘끗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 잠깐의 시선이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호텔의 로비 같은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된 스테이션에는 새벽에 새로 바꿔 놓은 커다란 하얀 장미가 소담스럽게 꽂힌 커다란 수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꽃에 걸맞은 눈부신 하얀 가운을 입은 훤칠한 키의 낯선 의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잔뜩 호의를 품은 익숙한 조 수간호사의 모습도 보였고.
“다른 차트는?”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차트를 건네받은, 큰 키 덕에 스테이션에 구부정하게 기댄 의사의 뒷모습은 절로 그 반대쪽을 기대하게 하리만큼 훌륭했다. 단지 누구나 입는 의사 가운에 연회색의 정장 바지를 입은 뒷모습뿐인데도 호감을 갖게 하리만큼 자세가 반듯하고 키가 커서일지도 몰랐다. 혜원은 이상스러운 낯설지 않음이라는 감정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재빨리 갱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어제의 차트도 좀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