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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감정도 한 줌 실리지 않은 것같이 명료하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또한 왠지 익숙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있나.
혜원은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서 본, 한 십 미터쯤 떨어진 하얀색 간호 스테이션에 기대 있던 의사가 몸을 세우고 건네받은 파일을 보는 데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낯선 의사는 단지 무의식적으로 대리석의 스테이션에 기대기 위해서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옆으로 몸을 돌린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의 단정하고 눈부신 와이셔츠와 짙은 회색빛의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보인 미지의 남자는 한마디로 뒷모습으로 인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한 외모였다. 그냥 두면 흘러내릴 듯한 길이 감의 앞머리를 잘 넘겨 올리고 싸늘한 이미지의 금테 안경을 쓴 남자의 얼굴은 하얀 가운만 아니라면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잘났다고 할 만했다. 넘겨 올린 머리카락으로 인해 드러난 반듯한 이마, 차가운 금색 안경테 덕에 날카로움이 훨씬 더하는 듯한 매섭고 또렷한 눈매, 반듯한 이미지를 확고하게 해 주는 날 선 듯 휨 없이 깨끗하게 솟은 콧대, 그리고 꾹 다문 맵시 있는 입술 선까지.
잠시 잠깐 아주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던 혜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려 갱의실로 향했다. 다만 손에 들고 있던 모포를 지나치게 꽉 쥐고 있어서 손이 저려 온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난……. 모르는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 외치는 것이 더 이상스러운 것이라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태 회장님 수술 팀은 도착하셨나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정 간호사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싶었다. 그냥 자신의 담당 환자에 대해 묻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어젯밤에 도착하셔서 숙소에 머무나 봐. 아, 애초에 팀이 오기로 했는데, 그쪽 사정상 집도의 한 분만 오셨대. 그리고 어시스트는 선광대 병원에서 오기로 했나 봐. 뭐 그리 복잡한 수술은 아니니까. 오늘 오후에 컨퍼런스하고 내일 오후에 수술이니 그다지 급할 것은 없지. 저기…….”
정 간호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오셨다는 Operator(집도의)가 한국계더라고. 존스홉킨스 신경외과 팀에서 유명하시다는 분인데. 소문에, 닥터 주하고 뭐 좀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그래서 이런 대단찮은 수술을 하러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아무리 태 회장님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Cerebral Hemorrhage(뇌출혈) 정도 어찌 못할 건 아니지. 소문대로 닥터 주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 이쪽으로 아예 오려는 건지도 모르고. 아까 얼핏 지나가는데 진짜 잘나긴 했더라. 게다가 존스홉킨스 출신이라니. 나이도 엄청 젊다고 들었는데. 어머, 나 좀 봐, 무슨 소릴. 그냥 소문이 그렇다고.”
그나마 친하다고 여기는 정 간호사지만 내가 간병인 따위한테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듯 혼자 웃고 있었다. 둘 다 교대 시간이 같아서 퇴근을 하면서 같은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탄 탓이었다. 가끔 두 사람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다 12층 담당이라 혜원이 일이 있으면 자주 보는 사이였다.
닥터 주라고 하면 클리닉의 원장 딸 아닌가.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게 무슨…….
“아우, 밤새 눈이 와서 차 끌고 가려나. 그냥 택시 타고 가야겠네. 혜원 씨는 차 어떻게 해요? 아 참, 혜원 씨 차 없지. 면허 따라니까.”
“그러게요. 시간이 없어서…….”
피곤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면허를 딴 건 십오 년도 더 지난 일이니까.
“조심해서 가요.”
골드미스인, 40대 중반의 정 간호사는 이곳의 떵떵거리는 수입에 걸맞게 가을에 새로 뽑은 신형 에쿠스가 첫눈에 어찌 될까 봐 택시를 타러 종종거리면서 택시 정거장으로 향했다. 새로 산 코트가 눈에 젖을까, 혹은 저번에 장만한 루이비통 티볼리에 물이라도 묻을까 그녀가 조심조심 우산을 펴고 가는 뒷모습이 늘 그렇듯 부럽게만 느껴졌다. 아니, 그런 적은 별로 없었지만 오늘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야만 했다. 지하에 차가 있다면 이 정도 길쯤이야. 아, 저 코트 예쁘다. 사이즈가 88쯤 되려나. 루이비통은 참 고집스러워, 아직도 저 디자인이 젤 인기라니. 발끝이 차가운 걸 보니 물이 새나…….
누군가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멋쩍게 큰 소리를 치듯 그녀답지 않은 생각들을 골똘하게 하면서 종종걸음 치듯 눈 위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야 보이는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쌓인 눈이 녹으면서 생긴 진창이 그녀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 오셨다는 Operator가 한국계더라고. 존스홉킨스 신경외과 팀에서 유명하시다는 분인데. 소문에, 닥터 주하고 뭐 좀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그래서 이런 대단찮은 수술을 하러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아무리 태 회장님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Cerebral Hemorrhage(뇌출혈) 정도 어찌 못할 건 아니지. 소문대로 닥터 주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 이쪽으로 아예 오려는 건지도 모르고. 아까 얼핏 지나가는데 진짜 잘나긴 했더라. 게다가 존스홉킨스 출신이라니. 나이도 엄청 젊다고 들었는데…….’
그냥, 비슷하게 생긴 사람일 수도 있다. 암, 그냥 키가 크고 번듯하게 생겼기 때문에 비슷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 그 사람은 이제 나 같은 건 모를 거야. 다른 사람이야. 의대에 다녔다고 해서, 키 큰 남자가 모두 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미국으로 갔다고 했지……. 미국에서 학교 다녀 봐서 알잖아. 그 땅이 얼마나 넓은 땅인지. 그리고 그렇게 떠났다면 넌덜머리가 나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거야. 맞아…….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차가운 바람 속에서 갑자기 얼굴 한 귀퉁이가 뜨끈해지고 있었다. 혜원은 재빨리 손을 들어 그 뜨거운 것을 닦아 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냥 비슷한 의사일 뿐이었다. 만약 그렇다 해도……. 대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버스가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오지 않는 건 과한 첫눈 덕에 생긴 진창 때문에 느릿느릿 걷고 있는, 대로에 가득한 차들 때문일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40분이나 가야 하는데 오늘은 집에 돌아가는 길이 몇 시간이나 걸릴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후비는 듯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를 막으려 낡은 코트의 깃을 세우고 시려 오는 발끝을 동동 굴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눈앞에 샛노란 색의 차가 느릿느릿한 차들의 흐름 속으로 지나쳤다. 제 품속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혜원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이 이른 시간에 전화가 올 데라고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어, 엄마.”
<올 때, 과일 좀 사 와.>
“사과 남았을 텐데.”
<나 사과 싫어하잖아.>
그제 분명히 사과를 드시고 싶다고 해서 종종거리며 사러 나갔던 기억에 혼자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또 보일러를 올린 채겠지.
“알았어.”
말을 마치자마자 뚝 끊긴 휴대폰 저편에서는 뚜뚜뚜 하는 기계음만 울렸다. 막 동이 트고 있는 차가운 거리에 밤샘 근무를 하고 들어가는 딸에게 춥냐는 말 한마디 없는 엄마……. 혜원은 손이 싸늘하게 식어든 걸 느끼고 휴대폰을 얼른 가방에 넣었다.
“아, 시발, 포르쉐 카레라 911이다. 신형이야.”
뒤에 있던 유명 상표의 붉은색 파카를 입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 보이는 학생 티가 물씬 나는 청년이 제 친구에게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어제 탑기어 코리아에 나왔는데. 저거 제로백이 3.4초래.”
“제로백이 뭔데?”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서 있다가 시속 100킬로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 말이지. 대박이지 않냐.”
“뒤태 작살인데! 오늘 길 때문에 똥 됐다.”
“그러게 말이야.”
“면허만 따면 다 죽었어.”
“아씨, 난 엄마가 다음 달에 등록하래. 아, 저런 차 한번 타 봤으면 좋겠다.”
“저게 몇 억인데, 에이 시발.”
포르쉐 카레라……. 그녀의 눈에도 진창을 뒤집어쓴 샛노란색의 매끈한 스포츠카가 느릿느릿 지나가는 게 보였다. 갑자기 왜 저 차가 지나가는 거지. 뭐 대로니까 그럴 수도 있지. 제 일도 아닌데 신나게 떠들고 있는 이들은 아마 수능을 막 친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의 학생들일 것이었다. 딱 저맘때였나. 아니, 저때보다 한 살은 많았었나.
그녀의 첫차…….
그리고 마지막 차였던 포르쉐 박스터 2.5 2000년식, 성년이 되고 첫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가 사 주셨던 그녀의 차.
2.
“……차도 보여 줘야지. 죽여. 포르쉐야, 포르쉐! 예영이도 온다고 했어? 기집애 애인이랑 온데? 나? 나야 뭐……. 악!”
끼이익, 쾅!
“으윽…….”
요란한 굉음과 함께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려 있던 은색의 폴더 휴대폰이 날아가 유리창에 부딪친 뒤 차 안 어딘가로 떨어졌다.
<야, 무슨 일이야? 야!>
휴대폰 안에서는 왜 그러냐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으로 꼭 잡은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설핏 내린 눈들이 한적한 뒷길에 살짝 덮여 있는 날이었다. 차 안이야 히터가 후끈하게 틀어져 있기에 입고 있던 폭스 재킷이 약간 갑갑스러워져 창문을 살짝 열려고 했을 뿐이었다. 물론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그녀의 차가 세미 오토였기에 기어를 바꾼다는 게 잘못 넣어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옆의 인도를 타고 올라갔을 뿐이었다. 에어백도 터지지 않았고, 차는 그다지 빠른 속도가 아닌데다 오르막이었기에 덜컥거리고 올라섰을 뿐이고, 그녀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서 요란한 소리가 났을 뿐이었다. 다만…… 눈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죽은 거 아냐.
한참 동안 고개도 못 들던 그녀가 막 핸들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조금 열린 창문 밖으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아……. 이런!”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낮은 차체 앞으로 누군가의 새까만 머리통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죽지는 않았나 보다. 피가 범벅이 돼 있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살아 있으니까 우선은 나가 봐야 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고 공포에 떨면서 후들거리는 팔로 문을 열고 나섰다. 후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나서자마자 그녀의 반짝거리는 새빨간 광택의 포르쉐 박스터가 눈 덮인 인도에 걸쳐 올라간 게 보였다. 약간 긁힌 건가. 뭐야, 끌고 나온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shit! 이걸 어째!”
저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뒤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람이 쓰려져 있다면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닙니까?”
그제야 누군가 있었고 그 때문에 확인하러 나왔음을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로 보아 선뜻 차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끔찍한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나 보다 싶은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지름길이라고 누군가 가르쳐 준 관악산 뒷길의 언덕배기에는 차가운 바람이 휘익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오히려 열이 얼굴로 몰린 듯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기……. 많이 다치셨어요?”
내키지 않는 목소리가 역력했다.
도서관에서 막 호출기의 번호를 보고 급하게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날은 추웠고 급한 마음만큼 매끄러운 얼음판 위를 걷는 발걸음은 빨라지지 않았었다. 후배한테 빌린 전공 서적과 복사본의 무게가 가뜩이나 낡은 가방을 위태롭게 만드는 즈음 막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새빨간 자동차가 굉음을 내면서 달려들었고 놀란 그가 몸을 틀었으나 균형을 잃고 매끄러운 얼음판 위를 나뒹굴게 돼 버렸다. 욱신거리는 엉덩이와 바닥에 디딘 손바닥의 차가운 기운보다 바닥에 나뒹군 게 더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크게 다친 건 아닌 듯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차에서 내린 누군가가 제 차 걱정을 먼저 하는 거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차가 돌진하는 소리에 놀라 넘어지긴 했지만 차에는 살짝 부딪쳤을 뿐이었다. 다만 과하게 꽈당 소리가 날 정도로 넘어졌기에 엉치뼈가 욱신거려 잘 일어나기 힘들어져 망연하게 주저앉아 있다 보니 옷이 젖어 버린 게 문제였다.
“저기……. 많이 다치셨어요?”
굉음과 차가운 바람과 불편스러운 통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은 목소리……. 차 뒤쪽에서 누군가 묻고 있었다.
금갈색 같은 낯선 색의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곱게 웨이브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따뜻해 보이는 하얀색의 폭신한 여우털 재킷, 늘씬한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난 가죽 미니스커트, 그리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가죽 롱부츠로 더욱더 돋보이는 매끈한 각선미, 그러나 그의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인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약간 상기된 복숭앗빛 볼에 맑은 눈과 오뚝한 콧날과 이 엄동설한의 빙판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달착지근하고 사르르 녹아 버릴 것만 같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같은 분홍빛 입술…….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시간에도 눈이 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눈으로 보고 놀라면서 동시에 초라하고 옹색한 자신을 흘끗 돌아보고 있었다.
“많이 다친 건 아니죠?”
정신을 차린 건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이제 비켜 달라는 듯한 콧소리 든 여자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엉치뼈가 뻐근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골반뼈는 Sacrum 선골(仙骨)이라고도 하며, 5개의 천추(薦椎)가 융합해서 된 것으로 척주를 구성하는 척추 중에서 가장 크다.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은 설형(楔形)을 이룬다. 넓은 상면을 천골저, 뾰족한 하단을 천골첨이라고 한다. 전면은 우묵해져 골반강을 향하고 4가닥의 가로선이 있다. 이것은 각 천추의 융합부로서 이 가로선의 양단에 1개씩, 합계 8개의 전천골공(前薦骨孔)이 있다. 후면은 융기되고 역시 8개의 후천골공이 있으며…….
이틀째 도서관에서 낑낑거리면서 외운 것이 이것들이었으니. 정신을 차려야 했다. 빈속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병원 가야 되는 건 아니죠?”
이제 여자의 아이스크림같이 달콤한 목소리는 약간 짜증까지 섞여 있었다. 잠시 현기증에 머뭇거린 것 때문인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딱 이 상황에 어울릴 듯했다. 여자의 생김새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것은 별개였다. 잠시 정신이 나간 거지. 그 덕에 그는 힘을 내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뭐라 해야 할까, 막 적당한 단어를 고르고 있는데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후드득 소리가 요란하더니 기어이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샀던 배낭형의 가방이 사단이 나 버렸는지 책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어머!”
왜 비싼 책들이 쏟아져 눈구덩이에 젖어 버리는 것보다 여자의 목소리에 더 신경이 쓰이는 걸까. 저것은 조소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책 쏟아졌어요!”
“누가 모른답니까!”
그는 괜히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창피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낫겠지만 그는 묵묵히 책을 집어 들었다. 눈 위에 떨어진 해부학 책이 젖을까 봐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접어 버리고 재빨리 책들을 줍기 시작했다. 겨우 빌린 것들인데, 게다가 복사본은 젖으면 다 번져 버릴 게 뻔했다. 손놀림을 빨리하는데 갑자기 묘한 향내가 코끝을 스쳤다. 꽃 냄새? 아니 나무 냄새인가? 마치 화사한 봄날의 유리 화원을 연상시키는 달착지근하고 몽롱하기까지 한 향기…….
“뭐가 이렇게 무거워요? Human Anatomy……. 의대생이에요?”
흉측한 안면 근육이 그려진 묵직한 책보다는 책을 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 손톱의 윤이 나는 핑크색 매니큐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숨결까지 달콤한 여자의 매끄러운 발음까지……. 갑자기 고개를 들기 힘들어졌다.
“여기요, 이거 되게 무겁네.”
빨리 받으라는 듯한 채근이 있은 뒤에야 그는 책들을 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
“괜……찮은 거죠? 아, 추워! 병원에 태워다 드려요?”
여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섞여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남자는 회색 파카를 입고 청바지와 운동화를 입은 채 두 손으로 받쳐 들기 벅찰 만큼의 책을 들고 여자를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괜찮습니다.”
엉덩이뼈가 쑤셔 왔다. 그리고 젖은 옷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남자가 멀쩡하니 일어서서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또 모르지. 이렇게 사고가 나면 나중에 드러누워서 병원비를 뜯어낸다는데……. 눈 오는데 새 차 끌고 나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밥상머리 연설이 찌잉하니 울렸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한국에서 보내려고 뉴욕에서 온 정연이와 자신의 환영 파티라지만 실은 약혼을 앞둔 예영이의 자랑질을 위한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옷차림에도 신경 썼고 자랑삼아 아빠에게 받은 새 차를 억지로 끌고 나온 건데……. 나오자마자 사고를 쳤다고 알려지면 좋을 게 없었다. 병원이 이 근처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갔다 가기엔 빠듯한 시간, 어차피 자신이 주인공이니까 늦게 나타나도 좋다지만 너무 늦는 것도 그렇다. 보기에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니까 뭐 대충 병원비 몇 푼 줘서 보내면 되지 않을까……. 여자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어디까지 가요? 괜찮다고 해도 넘어지신 거 같으니까 데려다 줄게요. 아, 추워!”
엄마랑 어제 명품관에서 산 여우털 재킷 덕에 등짝은 추운 줄 몰랐지만 얼굴에 느껴지는 찬바람은 짜증스러웠다. 이러다 화장 다 날아가겠네.
“괜찮습니다.”
그가 다시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제야 여자는 남자를 다시금 올려다보았다. 굽이 꽤 있는 부츠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컸다. 파리한 안색의 잔뜩 찌푸린 얼굴은 평생 웃어 본 적이 없어 보일 만큼 굳어 있었다. 나이가 몇이나 됐나,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왠지 어두운 기색이 가득 몰려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덥수룩한 머리카락 밑에 시원스럽게 뻗은 콧대와 쫙 뻗은 눈썹은 어딘지 모르게 단정해 보였다. 그리고 꾹 다문 입술이란……. 어머, 어쩜 저렇게 생겼지. 키아누 리브스 같네. 한참 그의 영화에 빠져 허덕였던 게 작년이었다. 그런데 이런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서 저렇게 생긴 남자를 만나다니.
“태워다 줄게요. 그 책 다 들고 어떻게 가요. 가까워요?”
“됐습니다.”
여자의 눈빛에 슬쩍 스쳐 간 것 같은 동정의 눈빛―그것은 다분히 그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에 그는 기분이 상했다. 오렌지족이라는 말도 한물간 지 오래지만 한눈에 봐도 스무 살을 갓 넘긴 것 같은 여자의, 눈이 휘황스러울 만한 차림새나 혹은 인도를 타고 올라선 저 새빨간 정체불명의 외제차만 봐도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부모 덕에 호의호식 희희낙락하는 부류가 틀림없었다. 그가 휙 몸을 돌려 잠시 잦아들다 다시 굵어지려는 눈발이 날리는 길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아…….”
저도 모르게 삐끗한 것 같은 손목에서 힘이 빠졌다. 그나마 플라스틱 덮개가 하나 더 있는 스프링 노트를 맨 위에 올려 젖는 것을 막으려 했던 두꺼운 책 더미들은 든 손이 흔들리자 다시 후드득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저기요, 그쪽보다 책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타요. 다 젖겠네. 어머, 이거 젖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여자는 제 비싼 모피 재킷에 잠시 멈춘 듯했던 눈이 커다란 송이가 되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척하고는 젖은 눈 위에서 노트와 책들을 집어 들더니 종종걸음으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정말로 팔이 아파서, 아니면 가야 할 그의 반지하 월세방이 너무 멀어서, 그도 아니라면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감당할 수 없어 그 차에 탔던 것일까? 그는 먼 훗날에도 필름을 되돌리면 늘 첫 장면이 되는 그때 그 차를 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후회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