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의대생이에요?”
차가 출발하고 한동안 미끄러운 바닥을 보며 운전에만 신경을 쓰던 여자가 힐끗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제발 말 따위는 하지 말고 운전에 집중해 줬으면 싶었다. 커다란 눈송이가 나풀거리면서 쏟아지는 통에 쉴 새 없이 좌우로 움직이는 와이퍼가 무색해질 지경인데 여자는 자꾸만 힐끗거리고 있었다.
“앞이나 잘 봐요.”
“이봐요, 나 이래 봬도…….”
뉴욕 주의 법에는 만 16세만 되면 부모의 동의하에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벌써 운전 경력이 4년이나 됐는데……. 하지만 그 뒷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남자가 옆에 타고 있는 건 자신의 운전 과실 때문이니까.
왜 자꾸 힐끗거리게 되는 걸까. 정말로 키아누 리브스를 닮아서? 저렇게 그림처럼 꾹 다문 선이 예술적인 입술은 처음 봤기 때문에? 게다가 방학 때도 늘 귀국하긴 했지만 한국 땅에서 처음 볼 만큼 키가 커서?
“어디라고 했죠?”
여자가 자신의 말대로 앞만 보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 시선을 느끼고 있다는 게 괴로워질 정도니까. 그는 앞만 보고 있었다. 두툼한 사파리형의 오리털 파카가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히터 덕에 등짝에 열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매끄러운 가죽 시트에 첨벙 젖은 엉덩이가 미안스러워지고 있었지만 그는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넘어진 건 여자 탓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잔뜩 들고 있는 책이었다. 어처구니없게 가방 밑이 빠져 버리다니. 좀 과하게 넣어 다니긴 했었다. 그렇다고 보자기에 싸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걸어서는 한참이나 걸릴 거리인데 후끈거리는 차는 금방 익숙한 언덕배기를 눈앞에 보여 주었다.
“저기 보이는 골목 앞에서 세워 주시면 됩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설핏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차 안에 가득한, 새 차에서 나는 휘발성 냄새와 함께 뭔지 모를 묘한 꽃향기가 흘러들어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마 옆에 있는 여자의 매끄럽게 웨이브 진 금갈색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만 같아서였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기였다. 나무 냄새도 아니고 장미 향도 아니고, 그가 맡아 본 적이 없지만 왠지 모르게 보라색 같은 색조의 묘하고 작은 꽃이 연상되는 그런 향기…….
“연락처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깨나게 했다. 보라색 꽃이라니……. 미친놈. 그는 스스로 질책하고 나서 다시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전 안 괜찮아요. 그쪽에서 저 그냥 이렇게 가고 난 담에 뺑소니니 뭐니 하고 신고해 버리면 어떡하라고요. 그러니까 연락처 줘요. 그리고 저 때문에 넘어진 거고, 지금은 아니어도 뭐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니까 보상은 하겠어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사고를 빌미로 돈이나 뜯어먹는 인간으로 보이다니…….
차가 섰다. 눈발이 더욱더 굵어지고 있었다. 그는 차창 밖을 흘끗 보고는 손에 든 책들을 챙겼다. 올라가야 할 언덕을 생각해 보고 그동안 책이 젖지 않을까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여기요!”
딸각하는 소리와 여자의 목소리와 더 짙어진 향기가 아니라면 그는 무시하고 차 문을 열고 내렸을 것이었다.
“……?”
그의 시선에 하얀 종이를 든 여자의 손이 보였다.
“쓸 것 좀 줘 봐요.”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자못 짜증스러웠다.
“연락을 하든 안 하든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난 사고를 냈으니까 연락처를 남기는 의무를 하려는 것뿐이라구요!”
여자의 고집스러운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락을 안 하면 그만 아닌가.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파카의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들었다. 말없이 손을 내밀자 핑크색의 매끄러운 매니큐어가 칠해진 하얗고 작은 손은 쏙 하고 볼펜을 빼내 갔다. 아주 잠깐 여자의 따뜻한 손가락이 스친 건가. 그는 더욱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재빨리 손을 거둬들였다.
“017-***-****. 정……. 혜……. 원…….”
하얀색의 길쭉하고 넓적한 종이 위에 쓰이는 글씨는 마치 여자의 얼굴처럼 동글동글하고 단정했다. 소리를 따라 흘끗 그쪽을 보는 그의 굳은 얼굴은 더욱더 굳어지고 있었다.
“종이가 이것밖에 없어서요. 약소하지만 이건 치료비로 쓰세요. 제가 좀 바빠서요.”
여자가 휴대폰 번호와 이름을 써서 내민 것은 그냥 네모난 종이가 아니라 하얀색의 수표였다. 그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졌다. 동그라미가 하나, 둘, 셋, 넷……. 저도 모르게 새겨진 동그라미를 세고 있는 제 자신에 당황스러웠다.
“그쪽이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됐습니다.”
과도한 동그라미가 갑자기 그의 속을 쓰리게 했다.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그는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산이 역류하는 역류성 식도염을 고등학교 때부터 앓아 왔었다. 속이 타는 것 같은 느낌에 그가 차 문을 열려고 밀었다. 그러나 문은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문 열어 주십시오.”
“이건 종이가 없어서구요. 맞아요. 저 돈 많아요. 그러니까 이런 거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셔도 돼요. 제가 사고를 친 가해자니까 그쪽에서 치료비 내놓으라고 드러눕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드리는 거니까 그냥 받으세요. 그리고 뭔가 이상하면 연락하시구요. 그렇지만 과도하게 한 몫 물어야겠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이에요. 그런 거 처리할 변호사를 한 트럭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가 있으니까요. 겁주는 건 아니에요.”
기분이 나빠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의 말하는 것의 내용보다는 마치 노랫소리같이 지저귀는 리듬만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차 안의 열기 때문인가 창백한 그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기 연락처 주면 안…… 돼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자가 내미는 저 하얀 수표……. 저것이 있으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는가. 두 달째 밀린 방세, 사단이 나 버린 가방, 사고 싶었던 전공 서적, 텅 빈 냉장고도 채울 수 있는 거고…….
“됐습니다.”
그는 차 안을 살펴서 잠금장치를 찾아내고는 문을 열었다. 타는 것 같은 열기가 가득하던 차 안에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오자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질식할 듯한 여자의 꽃향기가 가시자 그는 재빨리 이곳에서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펄펄 날리는 눈 속으로 나서려는데 사그라지던 여자의 꽃향기가 확 콧속으로 끼쳐 왔다.
“조심해서 가요.”
그가 두 발을 내밀고 두 손으로 책을 가득 든 채 차 밖으로 몸을 내미는 순간 여자의 손이 그의 낡은 회색 파카 주머니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냥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또 생각나면 그리로 연락하구요. 잘 가요!”
경황도 없이 차 밖으로 나섰다. 그는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턱까지 숨이 차오르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반지하 방으로 마구 뛰어들고 싶었다. 그가 막 차에서 몸을 빼자 여자는 안전벨트를 풀고는 몸을 내밀어 차 문을 닫았다. 뒤에서 탁 소리가 나자 그는 그답지 않게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발을 내디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는 굉음을 내면서 자신이 내린 차가 미련도 없이 가 버리는 소리가 뒤통수에서 울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아직 채 가시지 않는 자신의 얼굴에 떠도는 열기, 완전히 사라진 게 분명하지만 뇌 속에 떠돌고 있는 것만 같은 묘한 꽃향기가 그를 그답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커다란 눈송이 덕에 늘 잡스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좁은 골목길은 쥐죽은 듯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아주 낯선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 손에 든 책의 무게가 차가운 공기 속을 가르고 가는 길에 열기를 더해 주었다.
정……혜원.
문득 이름이 예쁘다는 생각을 한 그는,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 더욱더 빠른 속도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차들이 움직이는 교차로에서 그녀는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로 휴대폰이 어디 떨어졌는지 알았다. 아까 어디론가 날아가 떨어졌는데 다행히 차 안에 있었다. 마침 긴 신호에 걸려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바닥에 떨어진 은색의 폴더 폰을 집어 들던 그녀의 입꼬리가 갑자기 생끗 올라갔다. 축축하게 젖은 채인 조수석의 아래쪽 발 매트 위에 무엇인가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물기가 젖은 스프링 노트. 그녀는 얼른 그것을 들었다.
서울대학교 의예과 98*** *** 길재현.
“어머? 이상한 성이네. 길재현?”
휴대폰에서는 요란하게 12비트의 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서 요란하게 빵빵거리는 다른 차들의 클랙슨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을 더 눈 덮인 대로 가운데 차를 세워 둔 채로 있었을 것이다.
3.
연일 폭설이 계속되어서 차를 끌고 나온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 되어 버린지라 택시에서 내린 혜원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눈이 그치긴 했지만 길이 엉망진창이었고 그전의 사고 소식을 함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엄한 운전 금지령 덕에 새 차는 달랑 이틀을 타고 차고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의 차나 아버지 차를 타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혜원은 소스라치게 찬 바람에 깜짝 놀라면서 길을 건너려고 둘러보았다. 그녀는 이번에 새로이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서울대 캠퍼스가 그렇게 넓은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서울도 뉴욕 주의 살인적인 땅값과 비교해 만만치 않을 텐데 부지가 황당할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넓은 대학 부지 안에 의대만 없다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녀가 귀국하면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려서 맨날 돌아다니던 대학로에 서울대 연건캠퍼스가 있고 의대는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예영이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혜원은 절대 자신의 박스터 운전석에 올려놓고 잊어버린 그 차에 부딪쳤던 키아누 리브스의 노트 따위는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길이 좋아져서 차를 몰고 다닐 수 있을 때쯤에는 아마 무슨 쓰레기람 하고 지하 차고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우, 우리 정훈 오빠 진짜 대박인 거 같아. 엄마 졸랐잖아. 약혼식이라도 빨리 올리자고……. 울 아버님이 날 얼마나 예뻐하는지……. 최 회장님 말이야. 우리 오빠 대학교 때도 진짜 인기 많았다더라. 이번에 졸업만 하면 정식으로 경영 수업 받느라고 회사에 출근한대. 정말 너무 잘생기지 않았니? 그 얼굴이면 키 180 안 되는 것도 다 커버된다니까! 혜원아, 너는 어때? 너 뉴욕에서는 니그로 애가 쫓아다녔다면서? 아우, 냄새 안 나니? 뭐 하긴, 네 성격에……. 한국 남자는 좀 인내심이 필요할 거야. 그지?>
학교에서 단짝이던 샘을 굳이 니그로라고까지 표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히스패닉과 혼혈인 건 솔직히 더 모양새가 빠지긴 했지만 샘은 결정적으로 게이였다. 그러니 정말로 소울 메이트일 뿐.
<너만 이번에 혼자 오겠네? 다 커플끼리인데…….>
그냥 그런 자리 따윈 안 간다고 했어야 했다.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CG전자의 최 회장님 막내아들이 완전히 개망나니에다 반반한 얼굴값 하느라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다닌 건 이 바닥에서 누구나 알고 있었다. 뉴욕에서 방학 때마다 귀국하는 제 귀에도 다 들릴 정도니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숏다리인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싸가지인 예영이와 커플이 된다고 해서 배 아플 것은 없었다. 또한 예영이의 떨거지들이 끌고 오는 것들이 하나같이 변변한 놈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그룹 사촌의 둘째 아들입네, 무슨 법률법인 부대표의 조카입네……. 명함을 내밀 만한 건더기도 없는 것들이 어떻게든 지들 등쳐 먹으려고 분위기 맞추면서 쫓아다니는 것도 모르고 한심하게 몰려다니는 게 딱했다. 오징어가 인간으로 환생한 듯한 것들이 자신만 힐끗거리는 것도 참기 힘들었다. 어디 근사하게 생긴 호스트라도 없나……. 생각 중에 떠오른 건 그 재수 없는 날에 차에 부딪쳐 넘어진 대학생이었다.
밤에 벌떡 일어나 그 추운 차고까지 가서 들고 온 노트는 서울대 마크가 떡 찍힌 스프링 노트였고 거기에는 학번과 이름까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넘겨본 내용은……. 절로 머리가 찌근거릴 만큼 엄청났다. 노트 살 돈도 없는 건지 정말로 깨알같이 쓰여 있는 정체불명의 글자란……. 중학교부터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물을 먹은 그녀로서도 이해 못할 온갖 의학용어며, 두개골, 손뼈, 다리뼈. 내장이며……. 온갖 형광펜으로 색색이 칠해진 내용은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혜원의 얼굴에는 씨익 하고 미소가 떠올랐다. 옷차림을 보니 뭐 그다지 넉넉한 사람은 아닌 듯하지만 방학 때에도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다 그 키 하며, 정말로 키아누 리브스밖에 떠오르지 않는 외모 하며, 근사한 슈트로 도배를 한 후에 머리만 좀 정리를 하고 한술 더 뜨자면 피부 관리 같은 것만 좀 하면 꼴뚜기에서 멋진 샤크 한 마리로 변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전화 따위는 안 오는 거 보면 한몫 잡아 보겠다는 그런 생각도 안 하는 정말로 건실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만 해도 신나서 뱃속이 근질근질하는 것만 같았다. 아주 그것들 코가 납작해지겠지. 서울대 의대생인데……. 혹 인연이 잘돼서 정말 사귀게 되어도 근사할 것 같았다. 음, 아버지를 졸라서 의대 졸업하고 나면 뉴욕에서 같이 공부를 해도 괜찮을 거 같고. 아, 목소리도 괜찮았던 거 같은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퍼마시다 배가 터져 버린 듯했다. 아마 미끄러운 빙판길에서 삐끗할 뻔하지 않았더라면 머릿속에서의 진도는 어디까지 더 나갔을지 모를 만큼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의대라지만 앞에 있는 커다란, 그러나 그다지 예술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병원 건물을 제외하고는 뒤에 있는 건물들은 추위 탓인지 몰라도 앙상한 나무들 덕에 내용물만큼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 어제처럼 물어물어 사방을 다녀야 하나 하고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좁은 구역이라 다행이었다. 편한 신발을 신은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빙판에 이 추위에 이 수고라니……. 찾기만 해 봐라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서 찾는다? 그렇게 책을 많이 가지고 어딘가를 헤매지는 못 할 것이고, 어딘가 앉아서 공부를 하지 않을까.
‘아! 도서관.’
혜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등 뒤를 쿡쿡 찌르는 게 느껴졌다. 그의 이마가 구겨졌다. 책장 넘기는 소리,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끄적거리는 소리, 한참을 돌아가다 멈추어 적막을 느끼게 해 주는 온풍기 소리 사이로 저쪽 열 구석에서 누군가 쉴 새 없이 코를 훌쩍이고 있는 게 아까부터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그가 뒤를 돌아보자 과 후배가 서 있었다.
‘왜?’
입 모양만으로 묻자 후배는 손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그는 필기하던 노트를 접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의자 끄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학생증 때문인가? 솔직히 그는 학과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는 신분이 못 되었다. 2학년 1학기만 마치고 휴학을 한 상태였고 복학을 준비는 하고 있으나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도서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축복받은 머리를 가지고 그것보다 더 축복 받은 집안 환경을 지닌 과 동기가 정말로 뭐 빠지게 공부해도 모자란 이 판국에 보름 동안이나 알래스카로 불곰을 잡겠다고 해외로 떠나면서 빌려 준 학생증 덕분이었다.
그는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예과라 관악캠퍼스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곳 도서관에서는 그가 필요한 책들이 부족했고 이쪽 의대 쪽 서관이 공부하기도, 자료를 찾기도 좋았다. 봐야 할 책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그는 복학할 학비도 빠듯했기 때문에 미리 공부를 하고 구할 수 있는 책들을 정리라도 해서 날고뛰는 후배들과 동기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게다가 가진 보름의 시간 중에 벌써 3분의 2가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조급한 마음에 끼니 때울 시간도 건너뛰고 책에 박혀 있는 중이었다. 학생증에 있는 사진은 누가 봐도 지금 자신의 얼굴과는 달랐다. 그러나 입구에서는 바코드만 필요할 뿐 얼굴은 확인하지 않았는데 혹시 뭐가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아직 정산 못한 장례비 때문인가…….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굳이 후배 녀석이 자신을 불러낼 것은 뭔가.
과의 특성상 대한민국에서 최상층의 수재들만 모인 이곳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하늘이 내린 지능을 지닌 게 다반사였고 그와 더불어 그에 못지않은 배경을 지닌 이들도 다수였다. 가난한 고학생이라니. 정말로 80년대 신파도 아니고. 입학할 때만 해도 신이 내린 머리와 신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서울대 의대에 붙었다고 떠들썩하게 동네잔치를 벌일 만큼의 집안은 되었었다. 그것이 과거형으로 끝나 버렸지만.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었다. 물론 나중에 입신양명해서 뛰어난 의사가 돼 안정된 수입을 가지고 그가 꿈꾸는 돈 걱정 없는 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최종 목표일지는 몰랐지만 우선은 공부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모르는 것을 알아 가고 그 지식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마냥 좋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는 이 대학에 와서 그 공부라는 걸 정말로 원 없이 신물이 나도록 한 지난 일 년 반이 죽도록 행복했었다. 그 행복이 비록 허망하게 끝나긴 했지만…….
“형 누가 찾아요.”
후배 녀석이 두꺼운 안경알 밑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흉측하게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잼나냐 하고 확 무안을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꾹 눌러 참았다. 일어났더니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누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걱정이 앞섰다. 누구일까,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며칠 전에는 차에 치이더니, 귀중한 해부학 필기 노트도 잃어버리고, 오늘은 간발의 차이로 늘 앉던 자리까지 뺏겨 버린지라 그는 영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 그전의 사고는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맞는 건가. 차에 치였던 건 정말 잘됐던 걸까.
그 어린 나이에 건방지게도 으리으리한 외제차를 몰던 여자가 메모지로 던져 준, 자그마치 백만 원이나 되는 수표 덕에 눈치 보이던 주인 할머니께 방값을 내밀 수 있었고, 싸지만 새 가방을 살 수 있었고, 또한 늘 얻어먹기만 하던 후배와 동기에게 밥 한 끼 살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복이던가. 이제는 머릿속에서 지우고만 싶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종이 한 장을 두고 밤새 책도 덮은 채 스스로의 자존심과 벌였던 싸움은 되돌려 생각하기에도 끔찍했다. 정말로 그걸 던진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 것이다……라고 제 자신에게 몇 번이나 변명했어야 했던가.
“형!”
후배의 다그침에 그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엄청 예쁜 여자던데……. 숨겨 놓은 애인이에요?”
“뭐?”
여자라니, 그의 이마가 다시 찌푸려졌다. 엄청 예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한 여자가 그의 주변에 있었던가?
“하긴 뭐, 선남선녀라는 말이 있잖아. 형만 한 외모에 딱 어울리는 여자지. 우리 학부생은 아닌가 봐. 도서관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로비에서 기다리던데요. 아우, 진짜 끝내주더만요! 형, 파이팅!”
“무슨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