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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로비로 나가면서도 그는 머릿속이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제발 그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가울 리 없는 사람이었다.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뜨거운 커피는 빈속을 훑어 내리는 것만 같았지만 뜨겁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커피 값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운 한편으로 커피 두 잔의 값치고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늘 고요하고 적막한 실내에만 있던 그는 나름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커피숍의 내부조차 번잡스러웠다. 게다가 그 커피숍에는 제 또래의 젊은이들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구석구석 앉아 시간을 죽이느라 웃고 떠들고 있다는 사실도 그의 속을 뒤틀리게 하는 데 한몫했다.
거기에 그의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건너편에 앉아서 파이팅을 외치는 후배 녀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쏘아보던 당당한 눈빛을 가진 눈이 부신 여자의 존재였다.
“아프지는 않으셨나 봐요. 전화 없었던 거 보니.”

뭐가 그리 대단해서 이 정혜원을 그토록 고생을 시켰는가 싶은 생각에 다들 흘끗거리면서 지나가는 커다란 도서관 로비에 서 있을 때는 정말로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했다고 할 수 있었다. 뭐 이런 도서관이 다 있는지, 그녀의 학교 같으면 도서관이야 필요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여긴 학생증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 덕에 쫓겨난 고양이마냥 로비에 서성거려야 했다니.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이야기 걸어 단번에 그 형 알아요, 하고 말이 나온 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진짜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달랑 서울대 마크 찍힌 노트 하나 들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당사자를 앞에 놓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약간 야위었나? 내가 낸 사고 덕인가? 머릿속에는 늘 키아누 리브스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밝은 곳에서 정면으로 보니 그건 전혀 아니었다. 아니, 언뜻 입술이 닮은 듯했지만 신경질적으로 생겼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남자는 잘생기긴 했지만 그녀가 상상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며 마른 것 같은 몸매는 마음에 들었다. 이래저래 견적은 나오는 외모인 걸 다시 확인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괜찮았었어요?”
아까부터 대답이 없는 남자의 찌푸린 이마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 괜찮았었습니다. 연락을 하고 안 하고는 제 마음이었지 않습니까.”
거참, 뻣뻣하네. 그러나 혜원은 다시 새침하게 웃었다. 스스로에게 안 어울리게.
“차에 노트 놓고 가셨더라고요. 본의 아니게 좀 보긴 했는데 필기한 게 정말 경이로울 정도던데요? 아무래도 잃어버리면 좀 많이 속상해 보일 듯해서요.”
여자가 그녀의 하얀색 커다란 백에서 노트를 꺼내 놓았다. 젖었었는지 약간 얼룩이 진 노트. 그의 찌푸려졌던 얼굴이 약간 펴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그 노트를 찾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었다. 빌리기 힘든 해부학 서적을 두 권이나 써머리한 그의 노트. 자신이 가장 잘 안 외워지는 걸 요약하고 정리한 저 노트에 들인 시간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그가 그의 수첩에 옮겨 적은 여자의 휴대폰에 연락을 하지 못한 건 이제는 없는 여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남겨진 그 하얀 종이 때문이지 않았던가. 그 처음 타 본 뚜껑도 열리게 되어 있던 외제차나, 여자의 모피 코트에 비하면, 그가 받은 그 종이의 가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일 거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이야기했지만 그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정말로 너무 과한 것, 아니 한마디로 사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챙기고 노트까지 돌려 달라고 하기엔 그의 양심이 허락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런 모습으로 눈앞에 앉아서 노트를 내밀다니. 그는 그답지 않게 고개를 떨구고 아직도 온기가 남은 커피 잔만을 잡고 있었다.
“의대생인 거죠? 아, 진짜 그 공부를 어떻게 다 해. 전…… 경영학을 배우고 있어요. 물론 여기서는 아니구요. 한국은 물어보니까 학번으로 따진다고 하던데요. 몇 학년인 거죠? 98이면……. 3학년 올라가는 건가요? 헷갈려. 봄에 학기가 시작되니까 어떻게 세야 하는지 모르겠네.”
날름 혀까지 내미는 쇼를 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약간 백치미가 흐르는 게 낫지 않을까? 상대는 공부에 찌든 사람이니까. 자신의 외모가 남들에게 섹스어필하기에도 좀 거리가 있고, 쉽게 근접하기 힘들어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밝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고, 좀 더 부드럽게 보이려고 요란스러운 웨이브를 고집했으며 밝은 색의 캐시미어 터틀넥에 풍성한 퍼가 가득한 아이보리빛 양가죽 코트를 입었고 가방도 일부러 밝은 색으로 들었다. 물론 화장까지도 신경을 썼다. 순진하고 멍청하게 보이게. 그런데 참, 앞에 앉은 남자는 타고난 외모 빼고는 정말 성의 없지 않은가. 버석 마른 얼굴은 세수만 한 게 틀림없고 머리카락도 윤기 하나 없이 퍼석거렸다. 그리고 전에 보았던 회색의 멋대가리 없는 점퍼, 똑같은 어정쩡한 길이의 청바지, 똑같은 운동화……. 게다가 이렇게 재잘거리는데 대답도 없다.
“노트 가져다 줬으면 뭐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챙기지 않았음 우리 기사 아저씨가 차 청소하면서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고맙습니다.”
정말로 더욱더 성의 없어 보이는 대답.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한마디로 얼굴에 쉴드 100%인 모습 아닌가. 더 이상 다가오지도 무언가를 캐려고도 하지 말라는 저 꾹 다문 입술이란. 그러나 여기서 멈출 정혜원이 아니었다. 그랬으면 이 엄동설한에 택시까지 타고 여기까지 쫓아오지도 않았지.
“이름이…… 길재현 씨예요?”
“네.”
그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지만 따뜻했다. 속이 아릿한 짙은 색의 액체. 향기는 그럴듯하지만 전혀 그에게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하는 액체.
그는 눈을 들었다. 눈앞에 여자가 있었다.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으리만큼 곱실거리는 긴 금갈색의 머리카락, 곱게 드리워진 머리카락 밑에 단 한 줌의 고생이라는 것은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니고, 그가 늘 속이 뒤집어지도록 부럽다 못해 시기하는 그의 학과 동기들처럼 축복받은 가정환경에서 항상 웃으면서 저 밝은 머리카락이나, 혹은 손톱 위의 매끄러운 매니큐어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이 커피처럼 하등의 쓸모도 없이 그냥 쓴맛으로만 느껴질 것 같은 그런 여자. 누군가에게는 커피가 간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겐 그렇지 않다.
“노트 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그가 하얀색의 탁자와 어울리지 않는 칙칙하고 얼룩진 그의 노트를 집어 들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노트는 그의 생각대로 끌려오지 않았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솔직히 그거 내가 버렸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걸 일부러 이렇게 가지고 와서 찾아 줬는데 그냥 그렇게 가 버리는 건,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
저 여자는 뭐라고 말하는 건가. 그는 그냥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커피 냄새가 가득한 아늑한 카페의 낮은 음악 소리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도, 그리고 그를 괴롭게 하는 여자의 꽃향기 같은 저 향수 냄새도 익숙하지 못했다.
“그럼 노트 놓고 가지요.”
다시 만들면 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대단하네. 서울대 의대생은 이렇게 다들 뻣뻣한가?”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차를 끌고 다닌다면 스무 살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냥 온실의 화초처럼 곱고 어리게만 보이는 여자는 사뭇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서 있던 그가 찌푸려진 여자의 이마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저더러 어떡하라는 겁니까?”
내려다보는 여자의 금갈색 머리카락이 있는 정수리가 동그랗게 보였다. 그리고 그 밑에 이마도 동그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게……. 참 예쁘다고 느껴졌다. 바보같이.
그제야 걸려들었다는 표정의 혜원이 금방 치켜떴던 눈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그야, 그쪽에서 제가 노트를 가지고 여기까지 온 수고만큼만 수고를 해 달라는 거죠. 시간 많이 뺏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억울하시면 오늘 일당도 드릴게요. 재밌는 아르바이트가 있거든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더라면 그는 그냥 밖으로 나가 버렸을 것이다. 또다시 막 날리기 시작하는 눈발 사이로 횡단보도의 빨간색 불이 파란색으로 바뀌길 신경질적으로 기다리면서 길을 건너 도서관의 텁텁한 공기가 가득한 열람실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훌쩍거리는 누군가의 콧소리를 원망하면서 또 하루를 세포의 면역력에 대한 필기에 온갖 신경을 다 쏟은 채로 마감했을 것이었다.


4.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었다. 갑갑하게 목에 딱 걸린, 교복 이후에 딱 한 번 장례식장에서 매었던 넥타이하고는 비교가 안 되도록 각이 잘 잡힌 매끈한 넥타이가 숨통을 조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 소리와 사기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들과 뒤섞여 들리는 사람들의 낮고, 무심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목소리들이 주는 억압인지 몰라도 그는 손을 움직거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늘어선 포크와 나이프, 겹쳐진 그릇들마저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우아하게 앞에 앉아 그런 저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죠? 나도 왜 이렇게 많이 늘어놓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바깥 거부터 쓰는 건데 왜 그런진 몰라요. 그나마 여기 고기는 좋은 거 써서 일부러 왔는데 괜히 왔나 봐.”
“…….”
배가 고팠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러나 여자의 손을 보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하지만, 쓰윽 하고 칼질을 하자마자 드러나는 고깃덩이의 시뻘건 생속살은 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여기는 좀 먹을 만해요. 많이 먹어요. 어차피 이따 가면 먹을 만한 거는 하나도 없을 테니까.”
여자의 화사한 미소가 그의 식욕을 억누르는 데 일조했다. 그의 포크는 잘려져 육즙이 흘러나오는 스테이크 대신 옆에 놓인 모서리 없이 잘 돌려 깎은 감자와 당근으로 향했다. 그는 여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한겨울이라 벌써 어둑해지는 바깥을 비추는 커다란 통유리 창에 낯선 남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찌푸린 표정의 남자가 마네킹마냥 어울리지도 않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저 얼빠진 병신 같은 놈은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 * *

“일당 드릴게요. 진짜 넉넉하게. 정말이지 딱 세 시간만 할애해 주시면 돼요.”
“저 가겠습니다. 노트는 고마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트가 아깝긴 하지만 4일 정도 밤을 새면 새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저 여자한테 다시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가 이제 가진 것이라곤 정말로 자존심 하나뿐이지 않은가. 우리나라 최고의 학교, 최고의 학과를 다닌다는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밖에 더 이상 남지 않았고 이제 그것이 또 어떻게 사라질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뻔했다. 다만 이제 그 시간을 좀 늦추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이미 저 여자가 던진 수표 조각에 그 알량한 자존심이란 건 사라졌는지도 몰랐다. 냉장고 안에 단무지를 채워 넣고 라면을 사 들이고 어깨를 펴고 방값을 내밀면서 다 공기 중에 흩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또 뭘 하라고…….
돌아서서 재빨리 나가 버릴 생각이었다. 따뜻하고 향기만은 그럴듯한 카페에서 나가 얼른 침침한 열람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하얗고 노란 것이 휘익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따뜻한 카페의 온기 덕에 막 등에서 땀이 날 듯했던 커다랗고 두꺼운 그의 사파리 오리털 파카의 겨드랑이 쪽으로 무엇인가가 파고들었다.
“제발∼요.”
여자의 코맹맹이 소리 같은 것보다 그의 오른쪽 팔을 파고드는 여자의 야리야리한 팔뚝―퍼가 풍성한 양가죽 코트의 안쪽에는 이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반팔 캐시미어 터틀넥을 입고 있어서 가느다란 팔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리고 몽글거릴 것만 같은 여자의 금갈색 머리카락이 그를 당혹스럽게 했던 묘한 꽃향기를 풍기면서 얼굴 바로 밑으로 파고들어 온 건……. 그에게 나름대로의 충격이었다. 아마…… 그래서 정신이 나간 것이었겠지.
“저…… 이…… 놓으십시오.”
주변의 시선이 모아지는 게 느껴졌다.
“안 돼요! 나한텐 절박하단 말이에요. 예스라고 할 때까지 안 놓을 거예요.”
“이봐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지만 매달린 여자는 절대 놓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한 번만요!”

그 일당이 빵빵한 아르바이트의 요지는, 참 한심스럽게도 이 한심스러운 여자의 친구들 앞에서 애인인 척해 달라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저 같은 사람 데려가 봤자 망신만 당할 게 뻔합니다.”
여자를 겨우 떼어 놓고 그가 한 말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셔도 돼요. 내가 다 할 거니까. 그냥 그쪽의 잘생긴 얼굴과 서울대 의대생이라는 간판이 필요하다고요. 참새같이 와서 물어보거든 적당히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그냥 적당히 분위기만 맞춰 주시면 된다니까요! 재현 씨가 안 해 준다면 저 심부름센터 같은 데 가서 속에 어떤 심보를 가졌을지도 모를 알바생이라도 구할 판이라고요!”
생끗 웃음 짓는 여자는 정말로 그러고도 남아 보였다.
과연 그게 적당히 될 일일까. 단 한 번도 옷을 사러 어디론가 가 본 적이 없었다. 늘 책상 앞에 앉아 있느라 옷이라곤 어머니가 사다 주는 것, 혹은 사촌형의 헌 옷을 잘 손질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어느새인가부터 사촌형보다 키가 훌쩍 자라 옷을 받지 못한 뒤에는 교복이라는 좋은 옷이 있어 그다지 그런 것에 신경 안 쓰고 살아왔었다.

“이건 색이 촌스럽네. 이봐, 이거밖에 없어? 지금 이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자기보다 훨 나이 많아 보이는 점원에게 반말을 하는 게 귀에 거슬릴 지경이었지만 그걸 가지고 빌미 삼아 뭐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어? 아, 진짜 잘 어울려요. 이거 어때요?”
막 피팅룸을 나온 저를 보고서는 마치 두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변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좋아요? 아니면 이 색이 나아요?”
제가 보기엔 다 똑같이 턱도 없이 요란스러워 보이는 넥타이였다. 그리고 안 보려고 애썼지만 언뜻 보인, 제가 입은 어깨선이 매끄럽게 들러붙는 슈트 상의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는 잔뜩 얼굴이 굳어 버린 터였다.
“…….”
대답이 없는 그에게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또다시 후회를 했다. 왜 이런 곳에 온 것일까. 그러나 어느새 다가와 제 밑에 바싹 서서―굽 높은 부츠 덕에 여자의 키는 제 입술 근처에 정수리가 닿아 있었다―광택이 있는 보라색 넥타이를 들이미는 여자에게서 나는 그 묘한 꽃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셔츠 올려 봐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멍하니 있는 그를 보고 여자는 다시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밀어 목 뒤의 셔츠 깃을 들어 올렸다. 얼결에 고개를 숙이자 여자의 핑크빛 복숭아 같은 동그란 볼이 제 시선의 아래 바싹 다가붙었다. 뭐가 우스운 걸까, 여자는 내내 아기처럼 꺄르르 웃어 댔지만 그는 제 목덜미에 닿아 저를 간질이는 여자의 보라색 숨결 때문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귀찮은 마음에, 혹은 그녀가 제시하는 금액에 그는 그러마 하고 대답한 뒤에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거기에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곳에서 머리까지 강제로 이발을 당하고 뭔가를 잔뜩 발라 놓은 뒤에는 거울 속에 웬 낯선 얼뜨기가 서 있을 뿐이었다.

* * *

“전, 정혜원이라고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학교를 다녔어요. 지금은 뉴욕 메리얼 칼리지에 경영학부 2학년이고 크리스마스 휴가차 들어온 거예요. 음……. 우린 언제 만났다고 할까? 사실대로 저번에 차 사고로 만났다고 하죠 뭐. 내가 걔들 속여서 뭐해. 뭐 또 저에 대해 알고 싶은 거 있어요?”
여자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분홍빛 립스틱을 바른 조그마한 입으로 작게 썬 새빨간 스테이크를 넣으면서 말했다.
저 여자에 대해 뭘 알고 싶은 걸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공부 무지 잘하나 보다. 음……. 난 솔직히 지금 하는 게 재미있어서 하긴 하지만 공부에는 취미 없더라고요. 어차피 뭐 아버지 호텔 물려받을 거니까 경영학이나 열심히 하면 될 듯은 한데.”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는 그로서는 여자가 이야기하는 호텔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혼자 조잘거리던 여자는 다시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여자의 긴 머리는 드라마틱한 컬이 되어 있었고 아무나 하기 힘든 화려한 주얼리로 된 핀이 옆으로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혀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고로 만났다고 하니까 무지 드라마틱해 보인다. 그렇죠?”
그러나 남자는 대답 없이 새빨간 육즙이 흘러나와 흥건한 스테이크에 시선을 고정시키려 애쓸 뿐이었다.
“무슨 운명적 만남 같아. 걔들은 아마 무지 부러워할 거예요. 이런 걸 알기나 할까?”
여자가 말하는 ‘걔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여자와 똑같은 부류일 터였다. 그러니 그들이나 여자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저 혼자 특별한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참, 남자가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뾰족하게 입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도 다 아르바이트에 속하는 거니까. 잘 들어 줘요!”
“잘 듣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살짝 비꼬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본인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나 여자의 눈에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잠시 시선을 제게 옮긴 남자의 모습이 뭐라 쏘아붙일 거리조차 잊어버릴 만큼 완벽하게 보이자 혼자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에휴!”
여자의 한숨의 의미를 모르는 그는 다시 시선을 접시에 옮겼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 여자의 모습조차, 이 완벽하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하찮게 만들 만큼 우아했기 때문이다.

“……저기.”
단단하게 옥죄는 것 같은 넥타이와 새 구두의 딱딱한 바닥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휘황찬란한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팔 사이로 파고든 여자의 가느다란 팔이었다.
“이봐요.”
그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지만 뒤에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왜요? 재현 씨?”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낯설었다. 날이 선 새 와이셔츠의 빳빳한 느낌 위로 여자의 팔이 감겨들자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에 여자의 손길이 닿은 것만 같이 당혹스러웠다.
“릴렉스.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요. 우린 애인 사이잖아요. 안 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