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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뒷목이 뻣뻣해질 지경이었다. 애인이라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생경한 단어는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번 학기에 복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날이 풀리면 뭔가 일을 해야만 했다. 서울대생이라는 타이틀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과외 같은 건 그에게 잘 맞지 않았다. 누군가를 일대일로 대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럼 대체 뭘 해야 할까. 이것저것 알아본 바에 의해도, 지금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하는 게 다였던 그인지라 뭘 해야 할지도 망설여졌고, 그래서 뚜렷하게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잘 참아야 한다. 그냥 일을 하는 거라고, 돈 많은 여자의 애인 따위가 아니라 일당을 받고 뻣뻣이 서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있잖아요.”
보기에도 위태로울 정도의 굽이 있는 부츠를 신었건만, 그도 나름대로 굽이 있는 신사화를 신었기 때문인지 여자는 그 높은 구두를 신은 발을 깡총하게 들고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뿜어 대면서 속삭였다. 이 여자 그 때문에 더욱더 굳어 있는 자신을 전혀 이해 못하는 여자였다.
“아, 잊은 게 있다. 잠시만요.”
여자가 가방에서 뭔가 꺼내기 위해서 팔을 빼고 물러서자 그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자는 부산스럽게 이상한 모양의 가방을 뒤지더니 뭔가 네모난 작은 벽돌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네모난 것의 뚜껑인지 튀어나온 갈색의 나무로 된 것 같은 네모난 것을 뽑아 들더니 그에게 내밀면서 뿌려 댔다.
“이게…… 뭡니까.”
그가 인상이 찌푸려지면서 뒤로 물러서는데도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오히려 다가와 또다시 향수를 뿌렸다.
“메이크업의 완성은 향수라고요. 새 옷 냄새 너무 나는 거 같아서. 아까 머리 만질 때 산 거예요. 앙크르가 다 있다니 진짜 운이 좋은 거지. 이거 면세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거예요. 재현 씨랑 딱 어울리는 향이라니까요. 라리끄 빼흘레하고 앙크르는 완벽한 세트라구요. 마치 우리처럼!”
여자의 말 따위를 이해할 수 없는 그에게는 독하기만 한 듯한데 그 덕에 여자가 팔을 풀고 한 발짝 떨어졌으니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다들 해외유학파라고 어설프게 호텔의 작은 룸을 빌려 연 스탠딩 파티 비스무레한 자리는 가벼운 음료 대신 꽤 도수 있는 알코올음료와 갖가지 상표의 고급 맥주들, 와인, 위스키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화려한 꽃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음식들도 대개 안줏거리였다. 모인 사람은 스무 명 남짓 했으나 다들 화려한 옷차림과 눈에 거슬릴 만큼의 요란스러운 장신구들이 번쩍거렸고 구석에는 현악4중주 대신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이들이 잔잔한 재즈풍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정혜원이네?”
맨 앞에 있던 조금 뚱뚱하다 싶은, 몸매를 과장되게 드러낸 쫙 붙는 원피스에 커다란 목걸이를 칭칭 감아 질식할 듯 갑갑해 보이는 새빨간 머리의 여자가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나이는 분명히 옆에 있는 여자와 비슷할 듯한데 짙은 화장 때문인지 아줌마 티가 확 나는 분위기의 여자는 전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 진짜네.”
“애인이야?”
호들갑스런 뚱뚱한 여자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모아지자 그는 당혹스러웠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이 따가울 정도였다.
“인사해. 우리 재현 씨야. 음, 지금 서울대 의대 다니는 학생이야.”
“뭐?”
“어머…….”
혜원은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힐끗 옆을 보았다. 뭐 좀 굳은 표정이긴 하지만 얼굴 자체가 그런 마스크인지 별로 티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저도 그렇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해 본 적이 없는지라 솔직히 이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싶긴 했었지만 백화점으로 끌고 가 외모만 바꿨을 뿐인데도 완전히 100% 달라진 것을 보고 자신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절로 오 예스가 외쳐지는 이 외모란. 마치 귀여운 여인이란 영화의 줄리아 로버츠 같지 않았던가. 제가 뭐 그 백만장자 같지는 않았지만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진주를 꺼내 목걸이에 꿰어 보석으로 만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솔직히 남자에 대해서 아직까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혜원은 자기가 그렇게 부탁을 해서―절대 애원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자존심일 것이었다―라지만, 이렇게 잘난 남자를 옆에 끼고 나타나 보니 누군가 옆에 있는 것도 근사한 기분일 듯했다. 언뜻 보기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긴 했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약간 찌푸린 듯한 싸늘한 표정은 주변에 절대 주눅 들지 않는 듯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늘 있는 위스키 파티, 약간은 낯설 수도 있는데……. 칵테일파티의 외양을 뒤집어썼지만 나름 재벌 2, 3세의 모임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하듯 우아하게 칵테일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것과는 달리 음악도 재즈로 깔고 약간의 도수 있는 술들을 즐기면서 어른들 눈치 안 보고 맘껏 수다를 떠는 분위기였지만 이건 초장이나 그랬다. 어차피 막판으로 가면 술이 과해지는 인간이 나오고 언성이 높아지고 그걸 즐기는 이도 있었고 조금 과격하다 싶음 주먹질도 오갈 수 있는 자리였다. 우선 예영이의 지들끼리 약혼 축하 파티 겸 자신과 친구의 환영 파티니까 주인공인 저가 초장에 자리를 뜰 수는 없었지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저 잘난 남자 덕에 중간에 자리를 뜰 예정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시선들이 점점 그러기 싫어지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어머……. 서울대 의대생이시라구요? 오호, 공부 무지 잘하셨나 보다.”
“혜원이랑은 어떻게 만나셨대요?”
재잘거리길 좋아하는 축들이 지들의 파트너인 오징어들을 따돌리고 몰려들었다. 이미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키만 해도 군계일학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게 혜원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것만 같았다. 이쯤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남자를 위해 그녀가 행동을 취해야 할 때였다. 아까 백화점에서 남자의 옷을 사면서 그녀도 새로 사서 입은, 남자의 슈트와 색이 맞는 검은색 실크 미니드레스가 꼭 죄어진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득의양양한 승리자 같은 표정으로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박스터 덕이야. 우리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사 준 포르쉐 박스터 덕에 만났다니까. 내가 눈길에 미끄러졌는데 길 가던 재현 씨가 부딪쳤지 뭐야.”
“뭐? 네가 사고 낸 거야?”
“그렇지 뭐.”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옷이라니. 백화점에서 나오면서 여자의 옷차림을 보고 놀라 말을 잊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옷들은 외국의 영화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나. 그러나 그런 요란스런 옷들을 입은 채―단지 격식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다들 치렁치렁한 것과는 거리가 먼 나름대로 단출한 옷이었지만 처음 보는 이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일 리가 없었다―화려한 화장과 장신구를 한 여자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자, 짙은 향수 냄새와 독한 알코올 냄새가 마구 콧속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게다가 정신없이 재잘대는 것 같은 여자들의 목소리라니……. 그때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혜원이 다가와 또다시 가느다란 팔을 자신의 팔 옆으로 둘렀을 때, 그는 당혹스럽게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며칠 안 됐잖아. 너 사고 낸 지.”
사고 당시에 통화를 하고 있던 희선이 한마디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뭐 시간이 중요한 거야? 안 그래?”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미소 지으며 혜원이 물었다.
“안 그래요? 재현 씨?”
단지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의 얼굴에만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낯설고 휘황한 다른 이들을 쳐다보기엔 스스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그를 흘끗거리며 보는 이들 모두 한껏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내고 한껏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어머, 그래요?”
그보다 주변에서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가식적인 웃음이 넘쳐 났다.
지분덕거리는 것 같은 재즈의 끈적거리는 리듬, 누군가 피워 물고 서 있는 담배의 연기, 흐릿한 조명들……. 늘 숨소리조차 죽은 듯한 열람실에서 살던 그였다. 갑갑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여자들은 그에게 잔을 내밀었고 뭔가 다른 음식들을 권하기도 했고 뭔가를 묻기도 했다. 그러고는 하나같이 저를 보고 꺄르르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당혹스러운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예, 아니오로만 대답을 일관했다. 아니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옆에 있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그 다행스러움도 잠시, 누군가 여자를 끌고 저쪽으로 가 버리자 그는 혼자 여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의 시선은 여자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는 마치 오만한 여왕같이 참새처럼 몰려와 조잘거리는 이들에게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정혜원이라는 여자밖에 보이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Yeah? Really funny stuff. That’s all?”
여자의 매끄러운 외국어 조크와 웃음소리가, 스며드는 것 같은 끈적끈적한 공기 속에 청랑하게 울렸다.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다들 위태로울 만큼 높은 신발을 신고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 사이에 단출하지만 몸매가 잘 드러나는 블랙의 미니드레스를 입은, 긴 금갈색의 머리카락을 한 싱싱한 꽃같이 화려한 그녀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여자에게 저는 그저 옆에 서 있는 장식품의 대용임을 알고 있었지만, 묘한 향기와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은 끈적이는 재즈음이 그에게 환각을 심어 주는 것 같았다. 마치 저 오만하고 아름다운 여왕 같은 여자가 제 것인 것 같은…….
갑갑한 넥타이와 텁텁한 공기가 그를 숨쉬기 힘들게 하고 있지만 저 여자가 있는 곳에, 그 곁에 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가 막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저에게 무의식적으로 지정해 준 자리에서 발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혜원이 한 성격 하잖아요. 아마 조금만 있으면 질릴 게 분명해요.”
검다 못해 푸른색이 도는 새까만 머리가 이마 위에 가지런히 잘려진 긴 생머리의 여자가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하얀 얼굴로 은밀하게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왠지 그 여자가 다가오자 옆에 구름 떼같이 몰려 있던 여자들이 모두 다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잠깐 사이에 그 여자 빼고 다른 여자들은 주변의 어두침침한 곳으로 사라진 듯했다. 어느새 질척거리는 배경음악은 좀 더 끈적거리는 브루스 음으로 바뀌었고 군데군데 민망스러운 모습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심취한 커플들이 생겨났다.
“대학생이라는 거……. 뭐 굳이 속일 필요는 없잖아요? 얼마 받았어요?”
“……?”
질문의 요지를 금방 파악한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어딘지……. 금방 산 옷에 라벨도 제대로 안 떼 줬네. 옷값도 포함인가요? 비싸기는 하네. 하긴 뭐 정혜원한테 썩어 문드러지는 게 돈일 테니까. 잘 해 봐요. 저렇게 헤벌쭉한 거 첨 보네. 일당 말고도 한 밑천 챙길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새빨간 립스틱 사이로 가느다란 담배를 입에 무는 게 보였다.
“말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예스 아니면 노였던 그의 입에서 원칙을 어기고 긴 대답이 흘러나왔다. 여자의 입에서 뿌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약간의 재채기를 하면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무심코 손에 들려 있었기에 한 모금 마셨던 달착지근한 액체가 갑자기 머릿속을 핑 돌게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새카만 머리카락의 여자가 하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기 싫은 걸까.
“친구들 모임이라는데 친구가 아니신 모양이군요.”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그가 말을 내뱉고 잠시 후회했다.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두 배를 줄 테니까 나랑 나가요. 뭐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고.”
여자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나른하고 어딘가 끈적거리는 목소리였다. 그가 막 한마디 더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팔꿈치 사이에 익숙한 체온이 미끄러져 들었다. 뿌연 담배 연기 냄새를 확 몰아내는 것 같은 보랏빛의 꽃향기…… 그녀였다.
“니 껀 저쪽에 찌그러져 있잖니. 아무리 남의 떡이 좋아 보인다 해도 그런 식으로 질척거리는 버릇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똑 부러지는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그의 갑갑한 가슴 한구석에 쩡하는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이 기분은 대체 뭔가.
“왜, 흥정 중인데. 어디 가서 근사한 남창을 하나 끌고 왔나 본데. 내가 배를 준다고 했지.”
다시 담배를 물고 있는 새빨간 입술에 갑자기 휙 소리가 났다. 곧이어 쫘악 하는 소리가 질척한 브루스 음 사이로 들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놔요.”
혜원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있는 건 재현이었다.
“상대할 필요 없어. 본인이 저질이라고 해서 남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손댈 필요 없어. 손만 더러워지지. 담배 연기 몸에 좋을 거 없으니 나가지.”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난 것일까. 정말로 담배 연기 때문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구역질이 심해져 머리 꼭대기까지 넘쳐 버린 것 같았다.
“그래요. 재현 씨 말이 맞아. 오늘 일 잘 기억할게. 혹 술이 깬다면 재현 씨가 쉘튼 호텔의 사장이 됐을 때 너희 삼오 상사하고 거래를 계속할 것 같은지 그런 거나 생각해 봐. 애들아, 오늘 나 때문에 파티 열어 준 건 고마운데 우린 이만 가야겠다. 우리 재현 씨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거 같거든. 하여튼 고마웠어.”
혜원은 여왕처럼 우아한 표정으로 여전히 몽롱한 표정의 검은 머리 여자를 본 척도 아니하고 밝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냥 가는 거니?”
별로 아쉬울 것 없다는 날티 나는 키 작은 남자의 팔짱을 낀, 화려한 레이스로 된 꽉 끼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물었다. 그러나 혜원은 대답 따위는 하지도 않고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그 공간을 벗어났다.

“한 대 갈기도록 놔두지 그랬어요? 그년은 맞아도 싼데. 싸구려 같은 게 부르지 않아도 잘도 찾아온다니까요.”
카운터에서 양가죽 퍼 코트를 걸치면서 빨갛게 상기된 얼굴의 혜원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찌푸린 인상으로 자신의 옷이 담긴 커다란 종이가방을 건네받으면서 그는 아까와는 달리 침묵을 일관했다. 그 텁텁한 공기 속을 빠져나오자마자 마치 몽롱한 꿈에서 깬 듯 말짱해진 정신으로 방금 전에 한 말들과 행동은 자신이 아닌 이 옷이나 신발에 어울리는 그 어떤 누군가가 한 말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도 주제넘은 말들이었다.
“전 돌아가겠습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여긴 애들이 있단 말이에요. 같이 나가야죠.”
그녀는 손을 까딱거려 그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옆에 있는 벨보이에게 들라고 한 뒤에 택시를 잡아 달라고 했다.
“저기…….”
그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혜원은 그에게 팔짱을 꼈다. 하루 사이에 이 꽃향기가 나는 여자의 가느다란 팔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던 말들이 갑자기 증발되듯 사라져 버린 게 느껴졌다.
“우리끼리 한 잔만 더 해요.”
쌩끗 웃는 여자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있자 그녀는 그를 끌듯이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회전문을 나섰다. 또다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막 검은색에 노란 등을 켠 택시가 와 섰고 벨보이가 뒷좌석 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광경들인데 자신의 팔에 매달린 이 화려한 여자 덕분인지 그는 왠지 이런 것에 익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막 그녀가 택시 뒷좌석에 먼저 타고 그가 옆으로 올라탄 뒤 문이 닫히자 그녀가 말했다.
“바나바나로 가요.”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마치 그녀의 분홍빛 립스틱을 칠한 매끄러운 입술이 귓가에 닿기라도 할 듯이. 과한 화장품 냄새와, 아까 그곳에서 묻어난 담배 냄새, 매캐한 술 냄새 같은 것들이 깨끗한 택시 안에서 또렷이 풍겨 왔다. 여자의 화사한 코트 위 부드러운 퍼 덩어리까지 제 코끝에 밀려왔다. 그는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여자는 그의 몸짓을 느끼기도 전에 제가 먼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저거 보여요?”
여자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그도 고개를 돌려 여자 쪽의 창밖을 보아야만 했다.
“저 호텔이 우리 아빠 거예요.”
자랑스러움마저 섞인 여자의 얼굴선 뒤로 화려한 조명에 싸인 커다란 건물이 휘익 스쳐 지나갔다.
“다른 데도 있지만, 저기가 제일 커요. 그리고 제일 예쁘고. 그렇죠?”
그 말에 택시의 등받이로 제 등을 갖다 대어 제 자리를 찾는 남자의 굳은 얼굴 따위가 보일 리 없는 여자는 더욱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진짜 사귈까요?”
여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밖으로 쏟아지는 가로등이 만들어 내는 얼룩 사이로 보이는 굳은 남자의 얼굴이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혹은 뿌연 그 파티장에서 제 손을 잡는 남자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같이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세워 주십시오.”
굳은 남자의 목소리가 컸는지 택시 기사는 영문도 모르고 마침 들어선 번화가의 길가에 차를 세워 버렸다.
“재현 씨?”
역시 영문도 모르는 여자가 의아하게 제 이름을 부르자 그는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고는 제 다리 사이에 있던 옷이 들어 있는 커다란 종이가방을 들면서 말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옷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벗어서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만나야 하는 건가. 그러나 여자는 이미 남자의 싸늘한 말투에서 뭔가를 알아챈 듯했다.
“옷은 가져요. 그거 입을 사람도 없고 환불하기도 챙피하니까.”
“…….”
그녀의 말을 듣고 더욱더 복잡해진 심정의 그는 막 택시에서 내리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여자의 손이 훨씬 빨랐다. 여자의 매끄러운 손이 제 손을 잡은 데다 그로 인해 여자의 퍼 코트는 다시 제 얼굴을 간질였다.
“추워요. 집에까지 타고 가요. 그리고 나 농담 아닌데.”
묘한 여자의 목소리가 화한 꽃향기를 풍기며 제 귀에 들렸다. 확 얼굴에 열이 오른 그가 차갑게 대답했다.
“저한테는 농담으로 들립니다. 그럼.”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그는 차가운 공기 밖으로 나왔다. 모직이라지만 달랑 와이셔츠와 슈트만 입은 제 잔등으로 찬바람이 쓸고 지나갔지만 열이 오른 그의 얼굴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졌다. 그럼 가요. 어쩔 수 없지. 담에 봐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까지 흔들면서 차 문을 닫았고 택시는 순식간에 붉은색 후미등이 가득한 도로의 차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제야 찬바람이 얼굴에 느껴지는 남자는 커다란 종이가방을 든 채 어딘지도 모르는 길가에 한참을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