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5.
사귀자니…….
그는 머리가 찌근거려서 책을 덮었다. 이런 적은 드문 경우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책을 펴면, 그 속에 쓰여 있는 것들이 골 아프고 복잡할수록 더욱더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던 그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늘한 벽에 걸린, 방 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한 블루블랙의 날렵한 슈트와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그 여자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긴 늘 아버지 넥타이를 매 드리며 용돈벌이를 했다고 재잘거리면서 맨 매듭이 맵시 있는 보랏빛 넥타이가 마치 살아 있는 이처럼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네까지 것이 이런 걸 입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 하고 책망하면서.
달착지근하고 은근히 싸하던 거품이 나는 액체 때문인지 머리가 다시 찌근거렸다. 혹은 독한 담배 냄새 때문이거나 아니면 지분덕거리는 것 같았던 음악 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게 다 꿈이었으면……. 그가 머리를 싸늘한 책상에 떨어뜨리고는 북북 문질렀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뭔가 뻣뻣한 것이 잔뜩 묻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으로 갔어야 했나, 아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으로 돌아갔어야 했나…….
그가 청운의 꿈을 안고 의대에 입학해서 과의 수석 차석을 다투며 하던 공부를 멈추고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홀어머니 때문이었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하나뿐인 아들이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고 동네 잔치까지 해 주셨던 어머니, 이미 중학교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작은 가게를 하면서 홀로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던 그 어머니가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갔다 온 후였다. 뇌출혈로 쓰러져 한동안 운신을 못하시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에 억척같이 하나 남은 뒷바라지로 바쁘셨던 어머니. 남의 집 일을 다니고 새벽에는 쓰러져 가는 집 옆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내다 팔면서 그저 공부 잘하고 잘나디잘난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아오신 어머니는 두어 달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바싹 여위어 반쪽이 된 누런 얼굴과 복수가 차올라 부푼 둥그런 배를 하고도 저에게 걱정 말라고 손짓하던 어머니의 모습이라니…….
그가 조금만 더 일찍 공부를 했으면 달라졌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미 어떤 의사가 와도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어머니의 병은 깊었고 그가 휴학을 한 지 3개월 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의료 보험도 되고 주변에서 도움이 있기도 했지만 변변한 보험 하나 들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결국 그의 조그만 시골집은 병원비로 넘어가고 장례비조차 채 정산을 다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는 재학생이 아니니 기숙사를 들어갈 수도 없었고 겨우 학교 근처에 다른 선배가 쓰던 쪽방을 얻긴 했는데 그 선배마저 일이 있어 시골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달째 방세도 밀린 상태로 죽은 듯 숨어 다니며 도서관만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동기 녀석이 돌아와 학생증을 달라고 할 때까지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그다음엔 다음 학기 등록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라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그런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 것 자체가 충격이었고, 충격 다음에는 약간의 부러움이 그다음에는 좀 더 센 강도의 분노가 일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 자기보다도 나이가 어린 여자에게 딴 여자가 말했던 그 남창같이 옷까지 얻어 입고 옆에 서서 접대부 노릇을 한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떡이 진 머리나 찬물에 감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려, 길재현…….
* * *
요란한 음악 소리가 가득한 옷가게 안의 피팅룸에서 나온 혜원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예뻐요. 언니. 근데…….”
“근데 뭐요?”
화려한 양털 재킷과 한눈에 봐도 고가의 외국제 프리미엄 진을 맵시 있게 입고 들어온 여자가 겨우 보세 후드티와 체크 남방에 싸구려 청바지를 입고 나오자 뭐라 할 말이 없어진 점원은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려고 애써야 했다.
“착한 학생 같아 보이죠? 좀 더 모범생같이 보이는 거 없나.”
“저기, 신발만 맞춰 신으면 괜찮겠는데……. 우리는 신발은 안 팔아요.”
굽이 9센티가 넘는 마놀로 블라닉 앵클부츠를 보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저기 쟤가 신은 거. 저거 줘 봐요.”
신발까지 사러 가기 귀찮은 그녀의 말에 점원은 한달음에 가서 코디용으로 마네킹에 신겨 놓은 캔버스 화를 벗겨 와야 했다. 가져온 신발을 대충 신어 본 혜원은 거울을 보는데 뭔가가 허전했다. 힐끗 뒤를 보니 옆 의자에 놓인 제 가방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나온 지방시 판도라 백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검은색의 클링클 가죽 백이 후드티에 어울릴 리 없었다.
“언니, 마네킹이 든 가방도 줘요.”
“그거 신발이랑 전부 코디용이라 파는 거 아닌데.”
난처한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은 쭈뼛거리면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러 갈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두 배로 계산할 테니 줘요.”
실은 아침에 다른 걸 사러 가느라 옷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네? 아, 그래도. 저기 주인 언니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기다려요.”
“빨리 와요.”
혜원은 겨우 그런 거 때문에 기다려야 하나 하면서도 마네킹의 가방을 벗겨 와서는 이리 메고 저리 둘러 보았다. 별로 예쁘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저 시커먼 가죽 가방보다는 나아 보였다. 막 어디서 왔는지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여자가 급하게 들어왔다.
“어머, 언니. 이건 파는 거 아닌데.”
“두 배로 계산한다니까요.”
그녀의 말은 둘째 치고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혜원의 가방과 구두, 양털 재킷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막 계산을 하려는데 계산대 옆에 흩어진 노트와 필통이 흘끗 보였다. 대학가 근처에 있는 옷가게라 점원은 학교에 다니는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마침 한산한 방학기의 오전 시간이라 잠깐 책을 펴 놓은 거였다.
“그거 언니 거예요?”
“네?”
혜원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은 예쁘장한 아르바이트생이 되물었다.
“그 노트랑 필통 나한테 팔면 안 돼요?”
“네?”
“얼마면 돼요?”
혜원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옆에는 오면서 급조한 책들이 두어 권 쌓여 있었다. 제 전공 서적 따위는 여기서 구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서점에서 비슷하게 경영학이 들어간 원서 두어 권을 사 들고 왔다. 그리고 아침 댓바람부터 근처 옷가게에서 쓸어 온 가방과 점원의 노트, 필통까지 완벽하게 공부하는 학생의 물건들이 옆 좌석에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내려다보자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 정혜원이 여기까지 와서 공부란 걸 다 하게 될 줄이야.
솔직히 공부 따위 관심도 없는 그녀로서는 학기 중에 과제하는 것조차 겨우 학점을 받기 위해 마지못해 해 갔었고, 그런 그녀가 한국에 책 따위를 싸 들고 올 리는 만무했다. 그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오는 것이니 부모님도 그녀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이해서 집에 오면 으레 신나게 노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책을 다 사 가지고 온 것은 나름 깊은 속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기사 아저씨가 광이 나도록 닦아 놓은 빨간색의 포르쉐 박스터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았다. 제 옷장에는 하나도 없는 학생다운 체크 셔츠, 빨간색의 후드 티, 그리고 단정한 부츠컷 청바지, 조금은 크지만 걷는 데는 지장 없는 운동화와 캔버스 천으로 된 가방까지. 샛노란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땋아서 드리웠다. 물론, 아까 그 친절한 점원 언니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보송보송한 양털 재킷.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로서는 그것까지는 양보할 수 없어서 제일 수수한 것으로 입고 나왔다. 완벽하게 주변을 걷고 있는 학생들과 같은 제 모습에 만족한 혜원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만 그녀가 책을 집어 든 빨간색의 스포츠카와는 약간 괴리감이 있었지만.
“어디, 한번 해 볼까?”
찬바람에 손이 시리긴 했지만 그녀는 두꺼운 책 두 권과 캔버스로 된 가방을 꺼내 어깨에 메고 차 문을 잠그고 종종걸음으로 의대 도서관으로 향했다.
“……형!”
아까부터 코가 맹맹한 게 머리가 찌근거리고 몸이 떨리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찬물에 머리를 감고 그냥 잤던 게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런데 뒤에서 쿡쿡 찌르는 손길이 느껴지자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사나운 눈매로 돌아보자 움찔하면서도 뭔지 모를 요상한 표정으로 있는 놈은 어제 자신의 등줄기를 찌른 그 녀석이었다. 두꺼운 안경 밑으로 더욱더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바깥을 가리키는 손끝을 보고 그는 다시 머리가 찌근거렸다. 혹시 또? 그의 찌푸린 인상에도 뭐가 좋은지 후배 녀석은 히죽거리면서 바깥으로 자꾸만 손짓을 했다.
“그녀가 왔어요. 그녀가 왔다구요!”
열람실을 나서자마자 노래라도 할 듯한 녀석의 멱살을 잡고 싶은 걸 겨우 참은 그가 되물었다.
“뭔 개소리야.”
“와, 진짜 예쁘다니까. 형 생각 없음 나 좀 소개시켜 줘요.”
대답도 없이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왜 자신의 다리는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휑한 도서관 입구 로비로 가자마자 한눈에 알아 볼 듯한, 카드로 여는 금속 바 옆에 서서 화사한 얼굴로 책을 들고 손짓을 하는 여자는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딱 캠퍼스에서 마주칠 것 같은 발랄하고 유난히 얼굴이 예쁜 후배 같은 그런 복장이었다.
“저기…….”
왜 이러냐고 물을 생각이었다. 당신같이 잘난 여자가 배알도 없냐고, 아니면 나 같은 놈 놀려 먹는 게 재밌냐고……. 그러나 차마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못했다. 여자의 한 옥타브쯤 올라간 맑은 목소리가 먼저 울렸기 때문이었다.
“나도 공부하러 왔다구요. 그런데 아직 밥 안 먹었죠? 내가 밥 사려고 왔어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평소에는 비싸서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카페테리아 식당에 앉은 그가 이것저것 반찬이 든 쟁반과 밥까지 들고 앞에 앉은 여자를 보고 말했다. 카페테리아라는 식당은 밥과 반찬을 가짓수로 골라 사는 곳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쟁반에 양껏 반찬을 담아 위태롭게 들고 오는 여자를 그는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물론 그도 매너라는 것은 알았다. 적어도 여자가 이런 걸 들고 오게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지 말아야겠다고 꾹 참고 있을 뿐이었다.
“배고파서요. 음, 재현 씨가 보고 싶어서 왔고, 얼굴을 봤으니 같이 밥이 먹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밥을 사 들고 왔으니 같이 먹어만 주면 되네.”
“이봐요. 장난해요?”
“장난이라뇨. 나 재현 씨가 좋아요. 뭐 믿기지는 않겠지만 나도 나름 인기 있는 여자라구요. 그런데 그쪽이 좋으니까, 뭐 좋아하는 쪽이 손해 보는 거 아니겠어요?”
별로 맛있게 보이지는 않지만 뭘 입을까, 어떤 머리를 할까, 무슨 책을 사야 할까로 저답지 않게 일찍 일어나 수선을 피우고 돌아다녔더니 뜨끈한 것들이 식욕을 당겼다. 혜원은 여전히 변함없이 회색 사파리 점퍼에 검은색 터틀넥, 똑같은 청바지를 입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이봐요…….”
“저 이름 있어요. 정혜원이라고 했잖아요. 뭐 알리사 정이라는 이름도 있지만. 여긴 한국이니까. 혜원이라고 해요. 그런데……. 어디 아파요? 얼굴이 빨갛네.”
그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느라 끼익하는 의자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여자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이마에 닿을 뻔했기 때문이다.
“이봐요!”
“정혜원이라고요. 밥 먹고 병원에 가 봐요. 아님 약이라도 사 먹던지. 감기 걸렸나 봐요. 국물 식기 전에 먹어요. 그런데, 진짜 아파 보인다!”
간단한 분식도 팔고 매점도 있는 식당 이층 휴게실에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는 그는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 앉아 있는 건 왜일까. 여자는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책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도 책을 보는 척하는 여자를 계속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가 오늘 암기해야 할 노트는 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The principles of Business Administration(경영학 원론)이라고 쓰여 있는 거대한 하드커버의 책은 한눈에 봐도 책장도 잘 넘어가지 않는 빳빳한 새 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노트나 심지어 볼펜까지도.
왜 이러는 걸까.
“어? 나 보고 있었어요? 공부 안 했었네. 쉬는 거면 커피 한 잔 하러 갈래요?”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여자의 말갛고 정말이지 조막만 한 계란형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만 하십시오. 내일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저 시간 없습니다.”
“저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방학이잖아요. 좀 쉬면 어때서 그래요? 뭐 하긴 의대니까 공부해야 하는 건 알지만. 잠깐 나랑 커피 마셔 줄 시간도 없어요?”
“없어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들고 나왔던 노트를 챙겼다. 솔직히 모든 것이 써머리 된 노트 하나면 그의 암기는 끝이니 이것만 들고 다니면 되는 거였다.
“길 미끄러운데 조심해서 가십시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또다시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오리털 파카 위라지만 여자의 가느다란 손길이 주는 악력은 아무래도 그를 멈칫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남자 팔 덥석덥석 잡는 게 취밉니까?”
“그래요. 원래는 아메리칸 식으로 덥석 뛰어올라 안기기도 해요. 그쪽 옷은 푹신하겠네요. 아, 사실 오늘 줄 게 있어서 왔어요.”
“전 받을 거 없습니다.”
여전히 놓을 생각이 없는 저 빨간 후드 티 밑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어찌 뿌리쳐야 할까 생각에 잠긴 채 그는 대답했다.
“전화기 없죠?”
그녀는 여전히 그의 한쪽 팔을 잡은 채로 캔버스 가방을 뒤지더니 그녀의 작은 손바닥보다 더 작은 초콜릿 바만 한 은색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새로 나온 건데 너무 작아 귀엽더라고요. 뭐 선전하는 안재욱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받으세요.”
“제가 이런 걸 왜 받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옆에서 힐끗거리는 시선이 모아졌다. 아니 이미 그가 서 있으므로 해서, 어쩌면 그 전에 잘난 남자의 외모와 칙칙한 휴게실하고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여자의 외모는 알게 모르게 그곳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뇌물이에요. 받아요. 쓰든 안 쓰든 상관은 없어요. 단축 번호 1번이 내 번호니까 연락하고 싶으면 그쪽이 먼저 하세요. 알죠? 그냥 1번 꾹 누르면 되는 거. 영원히 안 해도 뭐라 안 할 거니까. 그건 재현 씨 자유예요. 그리고 물론 휴대폰 값 정도는 내가 내요.”
“돈 많아서 좋으시겠습니다.”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혜원은 이미 눈이 멀었는지 헤살프게 웃기만 했다.
“좋죠, 돈 많으면. 하지만 재현 씨가 더 좋은걸요.”
그녀의 말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우 하는 함성이 들릴 만큼.
“조심해서 가요. 그리고 아까 산 약 꼭 챙겨 먹어요. 감기 걸리면 아픈 사람만 손해니까요.”
“…….”
그의 붉어진 얼굴은 더욱더 굳어져만 갔다.
연애는 밀당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그녀의 추종자들―대부분 게이이거나, 혹은 레즈비언이거나, 혹은 바람둥이들이었지만. 그녀의 소울메이트들의 개인적인 성적 취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에게 그녀가 카운슬링을 하면서 늘 주장했던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밀고 당기는 것이다. 한번 거세게 밀어붙였으면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주변 사람이 어떤 눈으로 쳐다보건, 서울에서 제일 잘난 대학의 끔찍스럽던 그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어 가면서도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 장만한 커플 휴대폰까지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휴대폰은 전혀 울리지 않았다. 한 손바닥에 쏙 들어갈 만큼 앙증맞고 귀여운 휴대폰은 벌써 사흘째 충전하는 보람도 없이 울리기는커녕 문자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옆에 있는 그것의 두 배나 돼 보이는 폴더 폰은 쉴 새 없이 요란하게 울려 대는 게 일이었지만.
“나? 못 나가. 컨디션이 꽝이야……. 아, 우리 재현 씨? 완전 퍼펙트하지 않아? 그렇지? 너도 그렇게 보이지? ……. 예영이가? 하하, 지도 눈이 있음 그 꼴뚜기가 보이겠어?”
휴대폰을 들고 자지러지는 그녀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짧은 반바지 사이로 드러난 미끈한 다리를 공중에 흔들면서 웃어 댔다. 그녀가 웃는 일이라곤 그 파티 이후에 슬쩍슬쩍 그녀에게 물어오는 그의 자랑을 해 댈 때뿐이었다.
“너 보는 눈이 정확하다. 맞아, 내가 홀딱 반했어. 그렇지만 그건 순리 아니야? 어떻게 그런 남자한테 반하지 않을 수 있냐고!”
휴대폰 저편에서 한심하다는 듯 비웃는 게 확실했지만 그래도 혜원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입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 듯했다.
* * *
“형, 안진욱 교수님네 조교가 형 연락처 좀 알려 달라는데?”
그가 막 도서관의 열람실이 문 닫는 것과 맞춰서 가방을 메고 나왔을 때였다. 감기를 호되게 앓고 나서인지 그의 얼굴은 한층 더 핼쑥했지만 과 후배의 목소리에 그는 정신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왜?”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교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데. 형 휴대폰 없잖아. 아, 형 호출기 있었지? 그거라도 좀 번호 줘 봐. 조교 형이 꼭 알려 달라고 했는데 내가 잊어버리고 있었네.”
“아, 그래. 015-885-…….”
그의 목소리가 희끗해졌다. 이제는 거의 사용하는 사람도 없는 호출기를 아직도 들고 다닌 그였지만 그나마 두 달째 요금을 내지 않아서 그저께 정지가 돼 버렸던 걸 문득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왜?”
후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섞인 듯했다. 내키지 않는 심부름에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며 쌓인 피로가 귀찮음으로 몰려오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1학기에 세포대사에 대해 배우면서 그가 제출했던 리포트의 독특한 이론에 대해 직접 A4 반 장에 가까운 설명을 곁들여 가며 관심을 보이던 안 교수를 생각해 내고는 허겁지겁 연락이 되는 것을 찾으려다가 문득 여자가 내밀었던 장난감 같은 휴대폰이 생각났다. 여자에게 반강제적으로 받은 뒤에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는 휴대폰이 어디 있더라.
“형, 나 가 볼게.”
체념한 듯한 후배가 돌아서려고 할 때 그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아, 잠깐만.”
그러고는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배낭의 앞에 불룩하게 달린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그러자 반갑게도 은색의 조그마한 휴대폰과 충전기가 나왔다. 하지만 휴대폰은 이미 삼 일이나 지나서인지 화면이 꺼진 채였다.
“어? 형 휴대폰 있었네. 어, 새로 나온 어필이잖아? 와, 진짜 작긴 작다.”
그제야 관심을 보이는 후배 녀석의 너스레에 그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지만 연락처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몇 번이야?”
“어…… 그게.”
생각해 보니 휴대폰 번호를 알지 못했다. 여자는 휴대폰을 던져 주기만 했지 번호 따위는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도 묻지 않았었다.
“설마 모르는 거야?”
“그게……. 내일 아침에 알려 줄게. 내일 아침에 보자.”
“참내. 알았소. 어차피 지금 안다고 해도 내일이나 조교 형을 볼 거니까. 형 진짜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