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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후배가 혀를 차며 돌아서는 것을 보고 그도 당황스러웠다. 여자한테 연락을 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나. 막 불이 꺼져 가는 어둑한 열람실 복도에서 그는 처음으로 만져 보는 작고 반짝거리는 조그마한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 최저 기온이라더니 정말로 춥긴 추웠다. 언덕을 올라오는 길에 정말로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방에 들어와 들이치는 바람은 사라졌지만 싸늘한 냉기가 가득한 방에 서둘러 전기장판의 코드를 꽂고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버릇처럼 옆에 어울리지 않게 걸린 슈트를 흘끗 쳐다본 그는 두 개의 이불이 깔린 전기장판 위로 올라가 젖은 양말을 벗어 옆에 던져 놓고는 이제 막 켜서 온기 따위는 없지만 왠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불 밑으로 몸을 들이밀고는 책가방을 잡아당겼다. 자존심 따위……, 필요치 않지 않은가. 그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안 교수의 연락은 정말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세계적인 세포 변이와 대사의 대가인 안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황공할 지경인데 그분에게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니.
그는 눈을 질끈 감고 휴대폰의 충전기를 꺼내 코드를 꽂았다. 그리고 네모난 휴대폰을 거치대 위에 올리자 붉은색의 불이 들어왔다. 충전이 되어서 통화를 하자면 좀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근 사흘이나 꾹 눌러 놨던 여자가 다시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몽글거리는 것 같은 금갈색의 긴 머리카락, 계란형의 하얀 얼굴, 매끈한 분홍빛이 칠해진 손톱……. 그는 주섬주섬 책을 꺼냈다. 전기장판의 온기가 싸늘하게 굳어 있던 발가락 끝을 간질거리고 있었다. 책을 펴자, 오늘 외워야 할 림프절의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는 주문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자꾸만 휴대폰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어? 어? 어머! 으악!”
한창 가장 좋아하는 거품 목욕을 하다가 그녀는 하마터면 거품 속으로 빠져 들어갈 뻔했다.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욕실에서 소리를 지르니 그 소리가 더욱 커져서 귓가에 울려 댔다. 근 삼 일이나 찍 소리도 없던 휴대폰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심지어 지금처럼 목욕을 할 때조차 들고 다닌 걸 저 사람은 알까? 아, 이러려고 내가 저걸 그렇게 들고 다녔구나 싶은 혜원은 젖은 손을 급한 대로 머리에 둘둘 감고 있던 수건에 닦고는 경쾌하게 울리는 8비트의 세일러문 주제곡이 꺼지기 전에 얼른 휴대폰의 플립을 열었다.
“여보세요?”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하이 톤이라는 것도 잊었다. 전화가 오면 그럼 그렇지, 나도 도도하게 맞받아 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지만 삼 일이나 지난 후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잘못 왔나? 휴대폰 저편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뭐야…….
“여보세요? 재현 씨? 재현 씨죠?”
전화가 온 사실만 중요했다. 그래, 전화가 온 거야. 저 남자도 내 생각이 난 거라고. 난 이긴 거야. 저 사람도 내가 좋은 거야. 그럼, 세상에 날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 그녀가 속으로 외쳐 대고 있을 때 저쪽에서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네. 길재현입니다……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여자에게 전화를 한 것은 이 휴대폰의 번호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걸 알려고, 이 휴대폰 저편의 여자가 휴대폰을 샀고, 통화요금을 낼 것이고―그의 호출기 기본요금하고는 몇 배나 차이가 나는―하는 것들을 파렴치하게도 잊고서.
여자가 그런 무시무시한 차를 끌고 다니니까, 한 학기 등록금의 절반이나 되는 돈을 메모지로 쓰는 여자니까 이따위 휴대폰 하나쯤 얻어 쓴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치사하고 못된 생각에는 아랑곳없이 여자의 휴대폰 저편의 목소리는 정말로 그가 몇 달에 한번 집에 가면 그의 어머니가 맨발로 뛰쳐나오면서 외치는 것 같은…… 이제는 들을 일 없는 그런 반가움이 가득 차다 못해 철철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곱게만 들렸다.
<그동안 잘 있었어요? 감기는요? 맨날 도서관 간 거예요? 저녁은 먹었어요? 오늘 엄청 추웠다는데 집이에요?>
무미건조하게 용건만 이야기하려는 그의 입을 막는 건 여자의 세세한 안부를 묻는 총알같이 빠른 말들이었다. 장판의 열기에 얼었던 발끝이 녹으면서 더욱더 간질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간지러운 것은 여자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저 명치끝 어딘가일 듯했다.
<아, 너무 좋다. 나 전화기 주면서도 정말 전화 안 하면 어쩌지 하고 고민했단 말이에요. 삼 일 내내 전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질 못했다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목욕하는데도 들고 왔지. 아, 참. 목욕탕 안이라 목소리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니죠?>
추웠다. 덜컥거리는 바람 소리가 열면 바로 밖으로 통하는 알루미늄 문을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발끝과 엉덩이는 뜨거웠지만 어깨는 시렸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혓바닥은 얼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피가 몰려 뻣뻣해진 다른 어떤 곳처럼 뻣뻣해진 것인지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6.
“잘 썼다. 고마워.”
“글쎄다. 나도 이제는 뭐 슬슬 준비 좀 해야지. 넌 어쩌려고? 복학한다고 하면 임시로 증명서 발급해 줄 텐데.”
“알아. 과사에 가 볼 거야.”
라고 말은 했지만 그는 자신이 없었다. 복학은 못하더라도 임시 증명서라도 받을 수 있을까. 곰 따위는 구경도 못했다고 투덜거리는 녀석은 얼굴이 검게 그을린 채로 건장한 팔뚝을 흔들면서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너무 다른 세상에 사니까 이제는 부러움 따위도 없었다.
아침부터 당혹스럽게 알게 된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주긴 했지만 휴대폰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너무 작아서 그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모토로라의 흉측한 호출기만 한 휴대폰은 쉴 새 없이 편지 봉투 모양의 그림이 떠 있었다. 신경을 끊어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누르고 보면 별 중요하지도 않은 여자의 수다가 적혀 있었다.
<와, 오늘 엄청 춥네. 오늘도 공부하러 가요?>
<나랑 점심 먹을래요?>
<진짜 너무하다. 답장도 하나 없고.>
<나 삐짐.>
<졌다! 졌으니까 밥 살게요. 어디로 갈까요?>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냈다가는 도로 넣어야만 했다.
전에도 대시해 오는 여자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또래보다도 키가 컸고 당연히 성적은 최고였으며 스스로 거울을 봐도 그리 빠지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곱게 접힌 딱지 모양 메모지 밑에 초콜릿 같은 것이 신발장에 들어 있기도 했고, 한창 유행하던 반끼리 하는 마니또에도 실장이 편지를 안 쓰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아서 마지못해 몇 줄 적어 내면 그의 것을 용케 찾아내어 서로 싸우면서 차지한 여학생이 그를 만나러 학교 앞까지 왔던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대놓고 만나자는 선배 누나들도 있었고 또래 여학생들도 있었거니와 대학교 때는 그게 더 심했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여학생들에게 대꾸조차 한 적이 없었다. 여학생들의 편지는 무정하게 바로 열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직행했고, 초콜릿이니 혹은 정성스런 선물들은 옆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친구 놈들의 차지가 돼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왜 지금 그가 이런 메시지를 받아야 하는 건가.
문제는……
돈인가? 스스로도 어이없어 그는 주머니 속에 그 작은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이고, 흐르는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혜원은 어김없이 그의 도서관 앞에 나타났고 그녀의 손에는 제대로 펼쳐 보지도 않는 경영학의 하드커버 책들과 함께 그녀의 성화와 채근에 온갖 멋을 내 가며 도우미 아줌마가 만든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나 진짜 고백하는데, 태어나서 스테이크용 칼 말구요. 요리하는 칼. 그거 첨 들어 봤다니까요. 정말 믿기지 않겠지만 나 사과도 깎아 본 적이 없거든요. 그 샌드위치 내가 자른 거예요. 가운데 대각선으로 자른 거 말이죠. 아, 물론 속은 우리 아줌마가 만들어 주셨지만. 맛있죠? 내가 정말 최고의 재료로만 싸라고 무지 부탁했거든요. 포장은 내가 했다니까요. 아, 알루미늄 호일이 그렇게 질길 줄이야!”
그의 인생에, 칼질도 한 번 안 해 본 여자가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다. 키가 크고, 아무리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아직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어린 대학생일 뿐이었다.
과 사무실에서 겨우겨우 발급받은 임시 학생증으로 연건이 아닌 관악캠퍼스의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채 공부를 하려고 했던 그는 매일 제 학교인 양 드나드는 혜원 때문에 심각한 방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밝은 색의 몽글거리는 머리카락에서 나는 꽃향기에 중독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마치 딴 세상 같은 이야기도 그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그냥 마냥 듣기 좋은 노랫소리만 같았다.
게다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 생각해야 했던 데이트 비용 같은 것도 절대 걱정할 리 없는 이 부잣집 외동딸은 그에게 한 번쯤은 여자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겠다는 죄책감 따위를 없앨 만큼 돈이란 게 차고 넘치는 여자라 오히려 부담감 따위가 없어져서 마음이 편했다. 여자가 보여 주는 넘치도록 가진 자들의 세계는 그동안 가진 것 없고, 사람 관계가 전무했으며 오로지 공부에만 치여 있던 그를 조금씩 좀먹어 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 만큼 아직 그는 현명하지 못했다.
“재현 씨!”
“……?”
그가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부터인지 그는 점심시간 이후에는 휴게실에서 책을 보고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앞에는 할 것이 없어 눈치만 보는 금갈색 머리의 여자가 생글거리며 앉아 있었다. 여자가 싸 오거나 혹은 여자의 새빨간 스포츠카로 어디론가 가 먹는 과한 점심 때문이라도 그는 잠시 그녀의 앞에 앉아 있어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예의’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외에 다른 마음 따위는…… 절대 없다고.
어디론가 슬쩍 갔다 온 여자의 손에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캔 커피가 들려 있었다. 블랙커피 따위를 즐기지 않는 남자를 위해 달착지근한 맛이 나는 커피를 들고 온 여자는 힐끗하는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 화사하게 웃었다. 힐끗 저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던 그가 말했다.
“이제 가. 나 올라갈 테니까.”
하얗고 창백한 얼굴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와, 진짜 재현 씨는 나쁜 남자 맞다.”
나쁜 남자? 영문은 모르겠지만 여러 번 들어 본 말이었다. 다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한 것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 여자한테는 나름 많은 걸 양보하고 있는 거 같은데. 하지만 그걸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올라간다.”
그가 보고 있던 노트를 덮었다.
“아우, 잠깐만요.”
여자가 또 내미는 손길, 그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히터 앞쪽에 자리를 잡아서 등짝이 후끈거릴 지경이라 벗어 놓았던 사파리 점퍼 덕에 그의 반 터틀넥의 검은색 스웨터 위에 여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매번 곤혹스럽게도 여자는 제 손이나 팔을 덥썩덥썩 잡아 대는 통에 정신이 사나웠다. 그가 슬그머니 팔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
“왜?”
“나 소원 하나 들어줘요!”
딱딱하게 굳어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혜원은 저도 모르게 손사래를 쳐야 했다.
“어려운 거 아니라니까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봐야죠!”
남자의 돌덩이 같은 얼굴에 대고 자신이 계획한 걸 이야기하려고 하니 목구멍이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참, 이 키아누 리브스 공략하기 어렵다.
“적어도 얘기는 꺼내도 되는 거죠?”
꺼내지도 말라는 표정의 남자에게 혜원은 다시 살살 웃음을 뿌려 댔다.
“뭔데?”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남자는 마치 어린 학생에게 꾸중을 하는 선생님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마냥 좋은 여자는 제 말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우리 여행 가요!”
택도 없는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무슨 그런…….”
여자와의 여행이라는 단어가 찰나에 보여 주는 의미 때문에 순식간에 붉어지는 얼굴이라니……. 나름대로 혜원이 얼마나 머리를 굴렸던가.
* * *
“아, 김해는 안 돼. 거긴 엄마 호텔이야. 동네가 좁아서. 거기 직원들 내 얼굴 다 알아. 시설이야 뭐 아늑하고 좋지만 말이야. 은정아, 그런 데 말고, 어디 좋은 데 없니? 제주도가 좋지만 너무 멀잖아.”
“진짜 가려고? 둘이? 남자랑 단둘이?”
“안 그러면 우리 재현 씨 놓쳐.”
“와, 진짜 단단히 씌었구나. 뭐 잘생기고 키 큰 건 인정하지만 뭐가 그렇게 좋은데?”
둘 다 상반신을 드러낸 채 머리에는 부드러운 타월을 감고, 제 또래의 유니폼을 잘 차려입은 젊은 여자 둘이 열심히 등에 오일을 발라 마사지를 하고 있는 테라피 숍에는 향초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향이 풍기고 있었다.
“글쎄, 뭐가 그렇게 좋지? 영문도 모르겠는데 다 좋아. 하루라도 안 보면 미칠 거 같아. 나 뉴욕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만 해도 앞이 깜깜해. 엄마한테 다 털어놓고 같이 보내 달라고 하고 싶어.”
“정말 미쳤구나. 아주 단단히 빠졌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어깨와 목에 오일을 발라 쓸어내리고 있는 손길은 한낮을 춥고 답답한 대학교 휴게실에 있느라 굳어 있던 어깨를 풀어 주고 있었다. 옆에 있는 그녀의 친구는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자세히 볼 걸 그랬다. 한 번 더 데리고 오지 그래? 이번엔 좀 자세히 보게.”
“아우야, 안 돼. 절대.”
“왜? 그때는 왜 왔는데?”
“그때야…….”
잠시 할 말이 사그라들었다. 그때는, 잘 모르고 그리고 또 일당을 받으려고 했으니까 온 건가? 지금은? 지금은 사귀는 사이인데 친구들 한번 같이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절대 그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오라고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 그는 싸늘하고 자존심 강한 남자라는 걸 알게 된 것이 가까워졌다는 증거니까.
“그러지 말고, 은정아, 우리 일박 이 일로 어디 갈 데 없나 생각 좀 해 봐.”
“여행 가서? 가서 뭐 어쩌려고? 남자라도 덮치려고?”
갓 스무 살밖에 안 된 두 여자였지만,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외국 생활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 남자와 가는 여행의 이유 따위는 친구인 은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기분 좋아진 고양이 같은 눈길을 하고 있는 혜원은 은정의 말만 들어도 뱃속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설마, 키스도 안 해 본 거 아니야?”
다분히 농담이라고 하는 은정의 말에 속이 뜨끔해진 혜원이 급하게 말했다.
“얜 무슨 그런 소릴…….”
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을 인정하긴 싫었다. 그 멋진 남자를 쫓아다닌 지 열흘이 더 됐는데 아직 키스도 못 했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노릇이니까. 갑자기 그저께 밤이 생각났다. 조르고 졸라서 그나마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에 갔던 기억을. 독하디독한 블랙러시안을 두 잔이나 마시더니 그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돌긴 했지만 적막한 차 안에서 30분이나 멍하니 있어도 고개도 안 돌리던 그 남자를.
“나 어디 좀 고칠까? 입술에 지방 넣으면 괜찮대?”
“어이구, 너 키스도 못 해 봤구나? 진짜 그 남자 강적이다. 천하의 정혜원을 그렇게 몸 달게 만드는 거 보니.”
이미 뼈 속까지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그런 은정에게 뭘 속이겠는가. 피식하고 한숨이 삐져나오는 걸 어쩔 수 없는 혜원은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 좋은 데 없냐구!”
“그런데, 너 그 남자 진짜 좋아하는 거야? 너야말로 남자는 길가에 채이는 돌보다 흔하잖아.”
호텔 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집안의 외동딸인 그녀는 친구인 은정이 봐도 그들의 세계에서조차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런 혜원이 뭐가 부족해 가난한 고학생에게 저리 목을 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거야, 정신 나간 병신들이고. 우리 재현 씨는 달라.”
“너 그 사람이 널 자꾸 거부하니까 억하심정에 그러는 거 아니야? 안 넘어가는 나무 찍어나 본다고. 그래서 그 남자가 너 좋다고 하면 버리는 거 아냐?”
“뭐? 그럴 리가 없어!”
라고 소리를 꽥 지르자 등 뒤에서 마사지를 하고 있던 종업원까지 제가 뭐 실수한 게 없나 하고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해요.”
등 뒤에 말을 하고 나서 다시 제자리를 잡아 누우면서 혜원은 생각해 보았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 남자가 저를 좋다고 하면 이런 기분이 사라질까? 제가 싸 들고 다니는 도시락 맛있다는 말 한 번도 없는 그 남자를?
“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잘 생각해. 그게 진짜인지.”
“몰라. 아냐, 진짜일 거야. 난 평생 이런 마음 처음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 내 거로 만들 거야. 재현 씨는 누가 뭐래도 내 애인이야!”
“애인? 아이런? 남편? 중국어에서는 애인이 배우자란 뜻이라고.”
중국에 유학 중인 은정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 남편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흔하잖아. 재산 때문에 결혼하는 거. 하지만 난 그런 거 아니야. 난 정말 그 남자 사랑해.”
라고 말은 했지만 우울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니까, 좋은 데 가야 해. 그래서 마음을 돌릴 거야!”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저 여왕 같은 친구가 두 주먹 불끈 쥐고 있는 걸 이해할 수 없는 은정이었다.
* * *
“아…… 진짜 길 험악하다.”
제발 그녀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꼬불거리고 급경사에 금속으로 된 가드레일도 아닌 노랗고 검은색이 칠해진 시멘트 덩어리만 군데군데 있는 길가는 낭떠러지였다. 게다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오 미터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이라니……. 악전고투라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끼익거리는 타이어가 꺾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또다시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다다음 주면 뉴욕으로 떠나야 하고, 다음 주에는 가족끼리 여행을 가야 하기 때문에 이번 주말에는 필히 자기하고 근사하게 시간을 보내 줘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건 이제 이 여자가 떠나면 제 생활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남녀 둘이 가는 여행 따위에 의미를 두지 않은 것은 뭔가 일어난다면 남자의 음흉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신이 그렇지 않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찾은 곳은 동해안.
한 번도 혼자 가 본 적이 없는 속초를 행선지로 잡은 것은 그녀가 은정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가족끼리야 속초 여행은 몇 번 왔었다. 그러니 혼자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 호텔인 쉘튼은 서울, 제주도, 경주, 수안보, 그리고 김해에 있었다. 그중에 김해는 아주 작은 규모였는데 그곳의 호텔은 순전히 그녀의 엄마, 즉 사랑하는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에 지은 것이었다. 지금은 홍천에 대규모 테마 파크와 함께 콘도 사업이 확장 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가깝고 그녀의 아버지 호텔이 없는 속초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겨울 바다와 눈 덮인 설악산 속의 호텔이라면 충분히 분위기가 잡힐 거라고 귀띔해 준 은정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집에다는 아이들과 함께 고성에 있는 스키장에 간다고 이야기해 놓은 상태였다. 물론 은정이 알리바이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생각 못한 건, 한계령이라는 어마어마한 고개였다. 제가 운전을 직접 해서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거의 수직인 듯 보이는 좁고 가파른 고개는 둘째 치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덕분에 차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긴 굽이굽이는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