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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아, 진짜 안 보인다.”
“조심해!”
“아이고…… 허리야.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서 미시령으로 가는 건데……!”
미시령이 더 급하고 험한 고개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혜원은 지도에서 본 고개 이름만 되뇔 뿐이었다. 운전이라곤 해 본 적이 없기에, 그는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창문 위쪽의 손잡이를 온 힘을 다해 잡은 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고개 꼭대기의 환상적인 풍경에 놀라기도 전에 또다시 처박히다시피 하는 길고 지리한 내리막길에서는 온통 타이어의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맡아야 했고, 다시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겨우 내리막길을 내려서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이고 길이고 눈이 가득 쌓여 온통 하얀 세상이 되어 있는 산속의 길이라니! 수학여행 때 빼고는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서해 바다는 봤어도 눈이 시리도록 푸른 동해 바다도 처음이었다. 양양을 지나 낙산의 언덕을 넘자마자 차창 밖으로 살짝살짝 보이기만 하던 바다는 금방 눈앞을 콱 메워 대고 있었다.
“아, 공기 너무 좋다. 진짜 오길 잘했죠?”
잠시 차를 세우고 설악산 해수욕장의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바닷바람을 맞고 서 있는 그의 팔에 익숙한 듯 감아 돌면서 내미는 그녀의 손에는 뜨거웠지만 금방 식어 드는 자판기 커피가 들려 있었다.
“너무 좋다. 속초는 몇 번 와 봤지만, 오늘이 제일 좋다. 재현 씨랑 왔으니까.”
분명히 이건 다른 세상이었다. 제 얼굴을 얼얼하도록 때리는 짠 기가 가득한 회색 파도가 일렁거리는 시커먼 바다와 발자국조차 드문 하얀 눈이 펼쳐진 넓디넓은 백사장. 동경은 했으나 볼 수 없었던 동해의 무시무시한 파도 소리조차 마치 장엄한 음악같이 그르렁거리고 있는 이 광경에 그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 파도 소리보다, 이제는 얼굴의 감각도 없어질 만큼 차가운 바닷바람보다 더 어이없는 사실은 무엇인가. 제 두꺼운 점퍼 밑으로 파고드는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달착지근한 향기는 거세게 밀려오는 바다의 짠 기운보다 더 강렬했다. 이 꽃향기가 감겨 도는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명치끝이 시릴 정도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여자의 감겨드는 팔이 주는 감미로움이, 지도상에만 보이던 지명이 눈앞에 펼쳐져 시린 파도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는 사실이, 짭짤한 바다의 향기 속에 여자의 향이 섞여 이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꿈만 같았다.
“건배! 우리의 첫 여행을 위해!”
여자의 손에 들린 붉은빛의 와인이 담긴 잔에서 땡 하는 경쾌한 소리가 여운을 남기면서 자신의 손끝을 울리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했다. 여자를 만난 이 며칠 만에 손에 들린 와인 잔 따위가 익숙해졌고, 칼 사이로 쓸린 스테이크의 핏빛 육즙에도 입맛이 들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어마어마한 봉우리들이 가득한 설악산 밑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별로 없어 보였다.
“별이 다섯 개짜리라는데 진짜 별로다. 우리 아빠 호텔은 이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죠. 속초는 눈이 엄청나게 오더라고요. 저번에 왔을 때는 눈이 일 미터도 넘게 왔더라니까요. 그래서 굴을 파고 다니기도 한대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그는 거의 늘 침묵이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혜원의 목소리를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 듣고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오늘따라 예쁘게 굽이치는 금갈색 머리카락의 보송거림이 손바닥 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런데 와인은 마음에 든다. 우리 한 잔 더 할까요?”
“그러지 뭐.”
그는 늘 입던 사파리 오리털 점퍼와 체크무늬의 두툼한 남방 차림이었다. 난방이 잘 되고 있는 덕에 그의 점퍼는 옆의 의자에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유난스러운 혜원의 성격상 그에게 어울리는 옷 따위를 못 살 건 아니지만 그가 선을 그었다. 그녀를 만나는 것은 괜찮다고, 다만 손에 무엇인가 들고 오거나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는 말아 달라고. 혜원은 그의 말을 잘 들었다. 만나서 함께하는 일들에는 돈을 지불하는 그녀였지만 그의 까다로운 성격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자존심에 대한 존중인지는 몰라도 새 옷을 사 입히려거나 하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를 좋아하는 게 사실이니까.
맛있다고 몇 잔이나 권하는 통에 얼큰할 때까지 와인을 마시고 자리를 옮겨서 칵테일도 한 잔 한 게 문제였다. 전혀 취기가 보이지 않는 혜원과는 달리 술이라고는 별로 해 본 적 없는 그에게 은근히 도수가 있는 칵테일과 와인은 정신을 흐릿하게 하고 있었다.
“스위트 룸으로 했어요. 방을 두 개 잡기는 그렇잖아요. 침실이 두 개니까 괜찮죠?”
키를 들고 묻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한 그는 침실이 두 개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여행을 가기로 하기 전에 그는 절대 같은 방은 안 된다고 못 박았고 혜원도 따로 방 두 개면 가는 거죠? 하고 되물었었다. 벨보이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스위트 룸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했다. 클레식한 가구들이 가득 찬 커다란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설악산의 야경,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화려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나오는 말은 정반대였다.
“와, 진짜 후졌다. 김해에 있는 엄마 호텔보다도 못하네. 아, 정말 이 정도일 줄을 몰랐네. 미안해요, 재현 씨.”
뭐가 미안한지 알 수가 없는 그는 핑 도는 머릿속을 들키기 싫어서 천천히 움직였다. 어디론가 뒤에서 나는 소리를 피해 가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가슴 한구석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방이 어디지? 나 피곤한데.”
“음……. 그래요? 그럼 먼저 씻고 자요.”
아직까지 저 핑크빛 입술도 한번 훔쳐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방이 두 개라니까, 뭐 이상한 일은 없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실수였다. 벨보이가 그녀가 주는 팁을 받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라는 의미 있는 말을 하고 문을 닫자마자 이 넓고 조용한 룸에 뭔가 은밀한 듯한 향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막한 실내에 단둘만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 나 먼저 자야겠어.”
그가 말끝을 흐리면서 욕실을 찾아 가려는데 또다시 버릇마냥 이제는 약간 희미해진 꽃향기보다는 오히려 톡 쏘는 칵테일의 향이 풍기는 여자가 다시 또르르 그의 팔로 말려들었다.
“음, 잠시만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아……. 그게.”
급했다. 어디론가 이 여자의 꽃향기가 나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그러나 늦었다. 여자의 말려든 팔이 이번에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앉았다. 그의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 들려 있었다. 손을 내릴 수 없는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혜원은 그녀가 몇 날 며칠 밤을 꿈꾸며 상상하던 약간 메마른 것 같은 남자의 날씬한 허리와 마른 풀 같은 버석한 체취가 풍기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저기…….”
당혹해하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귓가에 쿵쾅거리는 숨소리만 들어도 이 남자의 심장이 놀라 과도하게 피를 뿜어내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사랑해요. 재현 씨.”
그녀는 두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돈 많은 건 둘째 치고 거울 속의 스스로의 얼굴도 자신이 있었기에 대놓고 대시하는 남자들, 은근히 달려드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결국 남는 건 돈이 많아 성질이 더럽다는 뒷말뿐. 그건 진짜 정혜원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한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였다.
이 바싹 마른 낙엽 조각 같은 남자의 마음속에 정말로 들어가고 싶었다. 정말이지 이 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는 절대 미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잠이 들 때도, 잠에서 깨어나도, 밥을 먹어도 온통 혜원의 머릿속에는 길재현이라는 남자뿐이었다. 만난 지 이 주나 됐는데 키스도 한번 못해 보다니 말이 되는 건가. 항상 건너편에 앉아서 밥을 먹는 그를 볼 때도, 아니면 열람실 옆에 앉아 책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앉아 있는 그를 훔쳐볼 때도 저 그린 것같이 완벽한 입술을 한번 훔쳐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무리 무드를 잡고 차 안에 앉아 시간을 죽여도, 으슥한 곳에서 팔에 딱 붙어 길을 걸어도, 아무리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곱게 해도 남자는 전혀 자신의 여성적인 매력 따위에 눈길을 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극약 처방을 내린 거 아닌가. 남자랑 단둘이 여행이라니……. 그리고 일부러 방 두 개짜리 스위트 룸 잡은 것도 다 그녀의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를 도망가려고…….
“저기……. 이러면 안 돼.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가까스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게 맞는 거니까.
“재현 씨는 내가 싫어요? 내가 불쌍해서 만나 준 거예요? 좋지도 않은데? 그런 거죠. 돈은 많은데 싸가지가 없으니까. 아무도 놀아 주는 사람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죠?”
“그……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의 목소리가 더듬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러는데요? 좋아한다면 스킨십 정도는 자연스러운 거 아니에요?”
그녀가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품 안의 작고 말간 얼굴을 한 여자는 약간의 홍조를 띤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약간의 알코올기가 그의 망막에 뿌연 가리개를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철통같은 자제심이라는 곳에도 한 겹의 뿌연 커튼을 친 듯했다.
“정말 내가 불쌍하기만 해요?”
숨결이 달착지근하니 엉겨 붙었다. 어찌 이 아름다운 여왕 같은 여자를 불쌍하게 여길 남자가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렇다면 키스해 줘요.”
두 눈을 똑바로 뜬 혜원이 천천히 말했다.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키스라니……. 어떻게 저런 단어를 입에 담을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저런 눈으로 당당하게 키스를 해 달라고 이 적막한 방에 단둘만 있는데 그럴 수 있는 거지.
그의 당혹스러운 눈을 본 것인지 혜원은 그의 허리를 감고 있던 두 팔에 힘을 뺐다.
“그래요. 이해해요. 다들 날 그런 눈으로 봐요. 날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따위 하나도 없었어. 재현 씨한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지. 그냥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여자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려는 혜원을 붙잡았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여자는 품 안에 쏙 들어왔다. 마치 어지럽게 흩어진 퍼즐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같이……. 여자가 저 혼자 제 허리를 감고 있는 것과 자신이 안고 있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언제나 언저리에 머물러 있기만 했던 여자의 꽃과 같은 향기가 품 안에 있었다. 곧 여자의 가느다란 두 팔이 아까처럼 자신의 허리를 감는 게 느껴지자 뭐라 말할 수 없는 쾌감이 그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불쌍해서 그러는 거죠. 괜찮아요. 그래도 난…….”
“널 불쌍하게 여긴 적 없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여자를 불쌍하게 여긴 적은 절대 없었다. 그냥 너무 높은 절벽 위에 핀 꽃일 뿐이었다.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아니 갖고 싶다는 마음도 가져서는 안 되는……. 그런 화려한 꽃이었다. 그 꽃이 자신을 갖고 싶다 해도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 절대로……. 그가 몽롱한 가운데도 그것을 떠올리고 안고 있는 여자를 밀어내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사랑해요. 재현 씨.”
사랑이 어떤 건지 그는 몰랐다. 아니 영원히 자신에게 그런 단어란 건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것도 사랑이란 건 아닐 것이었다. 여자에게서 나는 좋은 꽃향기가 자신을 미치게 하는 것이라고, 차가운 한겨울의 강물 같던 자신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손을 내밀어 여자의 두 볼을 감쌌다. 매끄럽고 작은 얼굴이, 늘 볼펜을 쥐고 있어 굳은살이 박이고 차가운 공기에 터 버린 까칠한 손바닥에 느껴졌다. 따뜻한 열기가 그의 심장을 더욱더 뛰게 만들었다.
안 된다고 외치는 뇌하고는 달리 그의 말라붙은 입술은 처음 그 빨간 외제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았을 때부터 매끌거리며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매끄럽고 달착지근하고 그의 혼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 같은 맛이 났다. 여자의 두 손이 자신의 목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어찌할 줄 모르고 입술만 물고도 황홀에 빠져 있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과감하게 그의 입술을 벌렸다. 뭣도 모르고 취해 있던 그의 입속으로 여자의 달큰하고 말랑하고 향긋한 혀가 파고들었다. 그가 숨을 삼켰다. 처음 맛보는 여자의 입술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매달리는 여자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그의 머릿속은 멎어 버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의 핸드백 속에서 요란한 휴대폰 소리가 울렸고, 부모님에게 온 전화를 받느라 그녀가 고개를 돌린 사이에 그는 겨우 한쪽의 침실 옆에 있는 욕실에 들어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거울 속의 비썩 마른 남자는 얼굴이 흉측하도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약간 부풀어 오른 것 같은 입술에는 여자의 핑크색 립스틱에서 묻어 나온 반짝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뭘…… 한 거야.’
그는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손끝에 펄이 묻어나는 게 보였다. 키스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흉측하게 부푼 바지 앞섶을 보고는 당혹스러웠다. 지금, 이 넓지만 밀폐된 공간에 여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가 자신의 이런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며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 있는 사이 통화가 끝난 여자가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재현 씨? 여기 있는 거죠?”
자신이 나가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는 목소리가 역력했다.
“응……. 안에 있어.”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쇳소리가 났다.
“씻고 나오세요. 옷 안 가져왔죠? 아마 거기 안에 가운 있을 텐데……. 피곤하면 얼른 씻고 자요. 난 다른 쪽 욕실에 가서 씻을게요.”
그녀가 가는 소리가 났다. 그게 다행이었다. 씻는다는 소리에 겨우 가라앉은 몸이 또 반응을 일으켰다. 과연 오늘 여기서 잘 수 있을까. 그는 당혹스러워졌다. 한참이나 기척을 살피다가 조용해진 것을 알고 혹시나 몰라 문까지 잠그고 옷을 벗고 들어선 욕실은 당혹스러울 만큼 호화로웠다. 둥글고 커다란 욕조, 샤워 부스……. 자신의 반지하 방보다 더 넓은 욕실은 따뜻하고 호화로웠다. 거울로 보이는 자신의 비쩍 마른 몸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는 감히 욕조 쪽으로는 다가가지 못하고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지는 샤워기 밑에서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질 만큼 몸을 씻었다.
입었던 청바지와 두꺼운 폴라폴리스 남방을 입기에는 실내의 온도가 너무 높았다. 파우더 룸에 있는 스킨과 로션까지 바르고 곁에 걸려 있는 감촉이 부드러운 샤워 가운을 걸치고 마치 도둑마냥 조심스럽게 파우더 룸을 나오자 실내는 취침 등만 켜진 채 고요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아까 들어온 거실의 좌우로 통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그렇게 방이 두 개 있는 듯했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없는 방 안에 서 있었다. 혜원이 씻고 저쪽의 침실에서 자는 건가? 아까 자신의 배나 되는 술을 마신데다 어두우니 그녀가 어디로 가진 않았을 것이다. 가서 자는 걸 확인해 봐야 하나.
그러나 여자를 생각하기만 해도 피가 몰리는 것 같아 그는 포기했다. 자신에게 잘 자라고 했으니까 그녀도 잘 잘 것이다 생각하고는 방의 한가운데 거대하게 포진하고 있는 침대에 다가갔다. 매끈하게 주름 하나 없이 쫙 펴진 향기 좋은 침대. 눕기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는 갈증이 밀려오긴 했지만 꾹 참고는 취침 등마저 꺼 버리고 샤워 가운을 벗어 옆에 있는 의자 위에 걸쳐 놓고는 속옷만 입은 채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온기가 있는 푹신하고 좋은 향기가 풍기는 매끄러운 시트가 몸에 감기는 듯했다. 베개가 약간 높은 것 같았지만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안락하고 푹신한 침대는 아까 전에 있었던 그 황홀한 감각들을 잠시 묻어 두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여자의 서툰 운전에 과하게 걱정을 하며 한계령을 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기도 했었고, 과한 와인의 기운도 한몫했다. 눕자마자 그의 정신이 막 레테의 강을 넘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침실에는 문이 없었다. 그러니 문이 열리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꿈인지 생시인지 눈앞에 보라색의 꽃밭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꽃향기였다. 그녀 하면 떠오르는 꽃향기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응……? 혜원……?”
그가 당혹스러움에 떠지지 않는 눈을 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떤 따뜻한 것이 자신의 옆으로 스며들었다.
“아…… 저기.”
그가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의 맨몸 위에 여자의 따뜻한 살갗과 매끄러운 속옷이 닿았다. 그리고 그의 입을 아까의 따뜻하고, 진득거리는 화학 약품이 없는, 온전하게 따뜻하고 매끄러운 입술이 막아섰다.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었던 여자의 몽글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다. 몸을 떼려고,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머릿속에서는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제 입속을 배회하는 뜨거운 것을 허겁지겁 찾아다니는 제 자신은 이미 이성 따위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물러날 곳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이 점점 물러나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재현 씨!”
숨이 넘어가는 듯 달싹거리는 여자의 뜨거운 입술이 귓가를 스치자 그의 입에서는 으윽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오고 몸은 움찔거렸다. 이미 여자의 입술을 느낀 순간 터질 듯 부풀어 버린 그의 일부가 저한테도 느껴지고 있었다. 목줄기에 입을 맞추는 여자의 매끄러운 슬립 밑의 동그란 가슴이 그의 맨가슴을 스쳤다. 혜원의 짧은 속옷 밑으로 드러난 한쪽의 맨다리도 역시 과감하게 그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제발…….”
그만두라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하라는 것인지 남자의 입에서 목 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가 남자의 마른 가슴에 입술을 묻고 납작한 젖꼭지를 혀로 핥아 내려가자 숨을 헐떡이는 소리는 더욱더 커졌다. 이성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마른 남자의 따뜻한 가슴보다는 길재현이라는 남자의 맨살이기 때문에 혜원은 기뻤다. 얼른 이 남자가 제 몸 구석구석에 뜨거운 입맞춤을 해 주길 원하면서 딱딱해진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허벅지를 살그머니 밀어 넣었다. 그러자 금방 그녀가 원하는 반응이 일어났다. 마치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내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악력이 위에 있던 여자를 끌어 내리고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곧 제 몸 위로 올라간 남자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저를 내려다보았다. 뿌연 어둠 사이로 남자의 욕망에 일렁거리는 눈빛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자 혜원은 기쁨에 두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입술이, 그토록 꿈만 꾸던 거칠고 마른 입술이 그녀의 입안을 사정없이, 그리고 전혀 요령도 없이 훑어 내려갔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혜원은 남자의 입술을 따라가려 애썼다. 그러나 경험도, 여자에 대한 배려도 모르는 혈기 왕성한 남자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제 몸속에 날뛰는 불덩어리만 중요했지, 저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마음 따위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