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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어차피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가느다란 끈만 있는―레이스가 가득한 것으로 할까, 아니면 감촉이 좋은 민무늬로 할까 고민하며 첫날밤을 위해 고르고 골라 어제 백화점 명품관에서 마련한 고가의 슬립이었다―속옷은 거칠게 벗겨져 내동댕이쳐졌다. 남자의 타는 것 같은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매끄럽고 동그란 젖가슴을 사정없이 빨아들였고 여자는 고통과 함께 기쁨의 탄성을 지르기 바빴다. 숨이 차오르고 머릿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남자는 부풀어 터져 버릴 것 같은 제 몸을 주체 못하고 뿌연 어둠 속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운 여자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여자의 매끄럽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제 눈앞에 흩어져 있었다. 아주 잠깐의 열락은 서툴게 끝나 버리고 갑자기 머릿속이 싸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뜨니 제 마른 몸 밑에는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숨을 내쉬고 있는 여자의 맨몸이 희미하게 어둠 속에 드러나 있었다.
“아…….”
그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찰나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아직까지도 겹쳐져 있는 여자의 아래와 제 아랫도리 사이에는 찐뜩하고 뜨거운 것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이게 지금 어찌 된 일이지……. 모두 다 생각이 나는데,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으킨 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한쪽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 밑에 있던 여자는 한숨을 돌렸는지 수줍게 물든 볼을 한 채 손을 들에 동그랗고 아름다운 젖가슴을 가리더니 말했다.
“사랑해요. 재현 씨!”
“아, 난…….”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움찔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는 여자를 위해 그는 창피하게도 드러나 있는 제 몸을 이불로 가리면서 미끌거리는 것들을 느끼고는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아, 이불에 다 묻었네. 씻고 잠은 저쪽 방에서 자요. 우리 같이 씻을래요?”
생긋 웃는 혜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면서도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채 인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파정을 하고서야 이성을 차렸는지, 그는 제가 한 일에 대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자꾸만 제 방에서 자라는 걸 그는 도망치듯 나와 이불이 바닥에 떨어진 채 고역스러운 냄새가 밴 것 같은 넓디넓은 침대가 있는 방에서 양말까지 다 신고 두꺼운 남방을 목까지 단추를 채운 뒤에 질펀한 등줄기에 흐르는 땀줄기를 외면하고 찌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른 채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내가 처음은 아닐 거야…….’
‘혹 임신이 되지는 않겠지.’
‘미친 새끼, 정말 제정신이야.’
‘정말 돌은 거 아니야?’
혼자서 수많은 폭언과 욕설을 스스로에게 퍼부으면서 자책하고 있는 사이 저쪽 반대편의 침실에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해내 뿌듯한 마음인 한 여자가 내내 운전하느라 곤두섰던 신경을 확 풀어 헤친 채 달디단 잠에 빠져 있었다.


7.

“……아이디어가 진짜 뛰어나서. 내가 전에 생각은 하고 있던 주제인데 방향을 이런 쪽으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2학년 휴학 중이라고?”
“네.”
“성적을 보아하니 휴학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거 같은데……. 군대에 갔다 오려는 건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아, 그래?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그럼 복학하겠구먼?”
뿔테 안경 밑의 눈부신 하얀 백발을 가진 옅은 분홍빛의 장난스러운 눈매를 지닌 중년의 교수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구부정하게 서 있는 학생에게 물었다.
“그게…….”
“이 정도면 학비는 장학금으로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글쎄요.”
난처한 빛을 띠는 학생에게 교수는 다시 말했다.
“아, 용건은 이게 아니고. 자네가 리포트 주제로 발표했던 세포의 대사이상성에 대한 논리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고 싶어서 말일세.”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가 생각하기엔 완벽해 보였지만, 안 교수의 그 긴 논리에 대한 오류 지적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 이론은 논리의 비약이 심했네. 하지만 거기서 내가 연구하고 있던 주제에 대해 완전히 다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거든. 그래서 이번에 그것을 기초로 해서 프로젝트를 하나 발주했는데 원래는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들과 생명공학부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하고 있어. 그런데 도의상, 자네의 아이디어 때문에 이런 연구를 시작하게 된 거라. 휴학생이지만 자네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를 했으면 해서 말일세. 늙어서 아이디어 도둑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네?”
그의 눈이 커졌다.
“대신 자넨 자격이 없어서, 그냥 내 개인 연구원으로 쓸 생각이네. 하지만, 배울 것도 많을 거고. 뭐 약소하지만 연구 수당도 나오니까 내가 공짜로 부려 먹는 건 아니네. 어떤가?”
“아…….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커다란 키의 비쩍 마른 그는 거의 책상에 코가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교수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글쎄 좋은 일일까? 난 연구생들 혹독하게 부려 먹는 걸로 유명해. 게다가 자넨 들어오면 제일 막내라 아마 연구실에서 눈알이 빠지게 현미경만 들여다봐야 할 거야.”
그러나 그는 감사합니다만 연발하고 있었다.

“와, 형 진짜 대단하다. 안 교수님이 보통 분인가? 조교수들도 후들겨 까는 분이라고. 어떻게 그 교수님 눈에 들었데?”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입이 귀에 걸렸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참에 의대 공부보다 세포 공학 쪽으로 넘어가던지.”
아마 부러워서 그럴 것이었다. 그는 후배 녀석의 삐죽거림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냥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을 뿐이었다. 아마 의대를 합격한 뒤에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워낙에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었던 터라 대학 합격은 당연한 거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와 보니 자신보다 더 날고뛰는 놈들이 사방에 있음을 알고 기가 찼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병리학의 대가인 안 교수의 프로젝트에 학부생도 아닌 휴학생 신분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가 막힌 행운이라 여길 수 있었다. 열람실로 가는 길에도 혼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막 열람실로 들어가면서 버릇처럼 휴대폰을 끄려는데 또다시 편지 봉투 모양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재현 씨, 사랑하는 우리 재현 씨! 나 지금 일어났어요. 꿈에도 보고 싶었어요!>
<아침은 먹고 도서관 갔나? 지금 어디예요?>
<재현 씨, 보고 싶어요! 뭐 해요? 또 열람실?>
<나 안 보고 싶나 봐!>
그는 갑자기 얼굴로 열기가 확 몰리는 게 느껴졌다. 단지 초록색의 액정화면에 뜬 아무런 생명도 없는 글자들뿐인데도, 이 글자들을 만들기 위해 꼭꼭 눌렀을 여자의 하얀 손가락 끝에 칠해진 매끄러운 핑크빛 매니큐어와, 매끄러운 금갈색의 머리카락, 보랏빛 꽃향기, 그리고 매끄러운 그녀의 감촉……. 같은 것들이 갑자기 그를 마구 짓누르는 것 같았다.

* * *

그날 아침 분명히 자신은 잠을 자지 않았던 거 같은데 새벽의 여명 속에서 침대의 귀퉁이에 엎드려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제와 똑같이 화장까지 완벽하게 마친 여자는 아마 근사하게 호텔의 조식이라도 먹으려고 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침 댓바람부터 온 전화를 받고는 사색이 되어 급하게 서울까지 올라온 뒤에 그를 터미널에 내려 주고는 제 지갑에서 차비를 꺼내 괜찮다는 제 주머니에 쑤셔 놓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 뒤에 허겁지겁 돌아가 버렸다. 여자가 마치 죽을 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심히 기분이 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기엔 여자의 미안해하는 정도가 너무나 컸다. 그러고는 집에 중대한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한다고 메시지를 보내더니 연락두절이 되었었다.
차갑고 바람이 들이치는 방에서 그는 멍하니 그 전날에 있었던 환상 같은 시간들을 지우려 애썼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참지 못했을까를 되뇌었다.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제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학하면서…….

아침은 아무런 변화 없이 똑같이 시작되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빈속에 라면을 끓여 먹고 코가 떨어져 나갈 듯한 새벽의 컴컴한 공기를 헤치고 도서관이 문을 열기 기다려 재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늘 앉던 자리를 다시 찾아 앉은 뒤에 얻은 그 평온한 안온감에서 그는 그것이 꿈이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주머니에 든 조그마한 휴대폰이 그것은 그의 바람이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안 교수님 연구실에서 전화가 오기까지, 그는 어떤 기분이었나……. 도서관의 열람실에 앉아 있기는 했었다. 그의 해부학 노트와 이제 새로 시작한 세포대사에 대한 책을 펴고서 그는 머릿속에 그것들을 넣을 수 있었나.
그라고 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이나 성욕에 대해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학창 시절 누구나 돌려 보는 성인 잡지나 빨간 딱지의 비디오테이프에 대해서 흘끗거리지 않을 수 있는 정상적인 학생이 몇이나 있을까. 그것들에 대해 기웃거리지 않더라도 언뜻 스쳐 지나간 살색 사진 한 장으로도 밤새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할 수도 있는 게 정상적인 혈기 왕성한 남자였다.
여자는 누가 봐도 돌아볼 만큼 아름다웠고 자신의 미모에 대해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부어 가며 가꾼 티도 역력했다. 그런 여자가 남자의 품에 찾아들었다. 그냥 꿈이겠거니, 그냥 단순한 ‘사건’이라고 치부한다 해도 몸은 그 잔영을 자꾸만 리와인드하고 있었다. 여자의 매끄러운 입술과, 뜨거운 혀의 감촉과, 생각만 해도 얼굴로 열이 오르는 여자의 나신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리고 여자의 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여자가 미안하다면서 어디로가 사라졌을 때, 그녀에게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금 어디 있는지, 지금 무얼 하는지 물을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게 더 괴로웠다.
지금 여자가 보고 싶다는 사실이, 그녀와 입 맞추고 싶다는 사념이,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괴롭게 했다.

* * *

새벽부터 아무것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애써 모든 것을 외면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휴대폰의 배터리를 빼 분리하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받아야 할 연락을 받았으니 나머지는 이제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안 교수의 연구실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가방과 책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늘 앉던 2층을 떠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6층의 고문헌 자료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나마 도서관에 있는 자료실 중 사람이 적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공계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도서관 안이라 조용하긴 했지만 자료실은 책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자료를 찾는 사람들, 서로 소곤소곤 의견을 교환하는 사람들……. 사람이 많아서 열람실의 정숙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용케 자료실의 구석에 있는 빈자리를 찾았다. 아마 저를 찾는 후배 녀석도 여기까지 올라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힐끗 창밖을 보았다. 또다시 날이 흐린 것이 무엇인가가 쏟아져 내릴 듯한 날씨였다.
아마…….
찾던 것이 없다면 집으로 가고 싶어 할 만한, 그런 날씨였다.

* * *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휴대폰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급하게 오느라 차에 두고 왔나? 은정이가 ‘나도 거기 참석해야 한다고 엄마한테 끌려왔어, 그러니 너도 와야 해!’라고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부랴부랴 오느라 그에게 제대로 말도 못하고 올 것은 아니었다.
“커피 하시겠어요?”
“아니!”
저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유니폼을 입은 여자의 부드러운 물음에 쌀쌀하게 대답한 혜원은 어디 화풀이할 때가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이거 원래 이렇게 냄새가 지독한 거야?”
“아, 그게…….”
염색약의 냄새 가지고 일개 스텝이 뭐라 할 수는 없는 거였다.
“얘! 얼굴도 엉망이다. 아우, 시간도 없는데, 그러게 이 날씨에 웬 스키장이야!”
엄마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정쩡히 서 있던 젊은 여자는 더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겨울에 스키를 타지 그럼 여름에 타요?”
제 얼굴이 망가진 건 찬 산바람 때문이 아닌 게 찔린 혜원은 톡 쏘아붙이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혹 조심성 없는 그 때문에 생긴 목의 키스 마크 따위를 들킬까 봐 갑갑한 캐시미어 터틀넥으로 갈아입을 만큼의 시간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니엘 조 선생님 오셨지?”
“네. 사모님.”
“우리 애 머리도 빨리 하고 마사지도 좀 속성으로 해요. 오늘 7시야. 시간이 빡빡하네. 아니지, 내가 직접 가서 이야기해야지.”
“엄마! 어딜 가는데?”
영문도 모르고 집에도 들어가지도 않고 바로 강남의 헤어숍으로 끌려온 혜원이 물었다.
“조용히 있어. 오늘 네 운명이 바뀔지도 몰라!”
의미심장한 경숙의 목소리에 혜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운명이 바뀐다는 건, 평소에 실없는 1920년대 풍 흑백 멜로 영화를 즐겨 보는 엄마의 시답잖은 대사였는지도 몰랐다. 그냥 평범하고 지리한 어느 회사 회장님의 칠순 파티였을 뿐이었다. 내가 왜 이런 데 와야 하는데!
‘어땠어?’
은정이가 없었더라면 더 지루했을 것이었다. 까맣고 긴 생머리에 겨우 우겨서 목까지 오는 화려한 러플 블라우스와 타이트한 샤넬 정장을 입은 혜원은 저쪽 테이블에서 아는 척을 하며 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옷차림의 은정이 입 모양으로 묻는 데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자랑스럽게 대답을 하고 나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래서?’
그때였다. 은정이의 입 모양을 보고 뭐라 대답해야 하나 하고 있다가 은정의 눈이 토끼처럼 커진 것을 본 것은.
“어?”
“실례합니다.”
남자의 근사한 저음이 들렸다.
“아, 네.”
은정이의 표정을 보고 힐끗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새까만 얼굴에 곱슬기가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건장한 젊은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정장을 차려입고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든 채 서 있었다. 남자의 까맣게 탄 얼굴은 제가 말한 대로 스키장의 겨울 자외선 탓은 아닌 듯 보였다. 아무래도 계절이 반대편인 곳이라든지 사시사철 열대 햇살이 쏟아지는 곳에서 방금 온 듯 보였다. 내게 실례할 게 무어람. 머릿속이 온통 딴 남자로 가득 찬 혜원의 눈에 실례하고픈 남자의 사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혹, 정혜원 씨?”
“아, 네. 그런데요.”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기분이 나빠진 혜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정혁 군, 오랜만이네. 호주에 있었다더니 이번에 들어온 거죠?”
“아, 네. 그렇습니다.”
눈에 거슬릴 정도로 친하게 구는 제 엄마의 모습이 낯설 지경이었다. 아마 분명히 어디 잘나가는 회장님네 아들인지도 몰랐다. 꼭 저런 애들한테만 친하게 말을 거는 게 엄마의 특징이니까.
“우리 혜원이 처음 보죠?”
“네.”
“학교는 거기서 다니고?”
“아니요. 뉴헤이븐에서요.”
“아! 나 좀 봐. 정신 하고는. 하긴 휴가니까.”
혜원은 언제나 저 대화가 끝날까 싶어 한마디 했다.
“저, 화장실 좀.”
그 순간 엄마의 이마가 찡그려지는 게 느껴졌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또 어딜 나가? 집에 좀 있어. 아빠 들어오시면 너 찾는데 어떻게 그리 매번 없어?”
막 머리 손질을 마치고 립스틱을 바르고 있는 혜원의 방에 들어선 경숙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엄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나 약속 있단 말이야.”
하루 종일 그 갑갑한 파티장에서 인형처럼 있다가 집에 와서 제일 먼저 찾은 휴대폰은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음뿐이었다. 게다가 메시지 따위도 전무한 상태고. 바꿔 생각해도 화가 날 만했다. 그러니 눈을 뜨자마자 나갈 차비를 했지만 그래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 저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시커먼 머리카락이 덜해 보이도록 화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장한 엄마의 모습이 껄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있으라니까! 아줌마한테 도시락도 싸 달라고 한다며? 너 공부하러 다니는 게 사실이야? 네가 방학 기간에 공부가 웬 말이야. 너 사실대로 말해. 엉뚱한 짓 하는 거 아니야?”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엄마의 말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야 했다.
“엄마, 나도 이제 2학년이야. 마냥 놀 나이는 아니라는 거지.”
“놀아도 돼. 아니면 학교 그만두던지.”
“왜?”
적응이 안 되는, 길게 펴서 새까맣게 물들인 머리카락을 빗던 그녀가 돌아섰다. 홈드레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는 밝은 실크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화장대에서 머리를 빗는 그녀의 언니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맵시 있는 올림머리를 하고 굵은 진주 목걸이로 포인트를 준 여자는 딸의 고운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바보야, 너 아직도 몰라? 어제 사태 파악이 안 됐어?”
“어제?”
어제의 그 어수선한 생신 파티에 대체 뭘 파악했어야 했는데. 수많은 노인네들과 아저씨들에게 우리 딸이에요, 하는 엄마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이 뻣뻣해지도록 미소 지은 것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게 내가 학교 그만두는 거하고 무슨 상관있어?”
“어제 정혁 군 못 봤어?”
“누구? 어제 사람이 좀 많았어? 내가 인사하다 허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는데.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세진 건설 태 회장님 넷째 손자 말이야.”
“그렇게 하면 내가 더 모르지.”
그러면서도 그녀는 흘끗 자신의 휴대폰을 보았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묵만 지키는…….
“그때, 엄마랑 같이 봤던 다부진 청년 있잖아. 까무잡잡하고.”
“아 그 동남아 원주민 같던 떡대?”
“얘!”
엄마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맞잖아.”
입을 삐죽거리는 혜원에게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으로 경숙이 말했다.
“태 회장님네 손자야. 태 회장님네 아들인 세진 전자 태 사장님이 너 좋게 보셨다고. 정혁 군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던데?”
“뭐? 엄마, 내가 나이가 몇인데 무슨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를 해. 진짜 웃긴다.”
어이가 없어진 혜원이 비웃듯이 말했지만 경숙은 나름 진지했다.
“잔말 말고, 싸돌아다니지 마. 집에 있어. 아버지 요즘 홍천 판타지아 파크 때문에 골 아픈 일 많아. 그러니까 너 집에서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