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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혜원은 입만 삐죽 내밀 뿐이었다.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얼른 학교에 가는 게 더 급했다. 돌아설 때의 재현의 표정이 영 맘에 걸렸다.
갑자기 온 전화를 받고 엄마가 방을 나가자 혼자 있게 된 혜원은 더욱더 정성껏 화장을 했다. 그러면서도 문자를 보냈지만 역시나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뭔가’가 일어났다고 달라질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서운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녀의 입꼬리는 다시 빙긋이 올라갔다. 다시금 기억이 생생한 그의 따뜻한 가슴, 뜨거운 입술에 그녀는 마냥 행복해졌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늘 여자가 싸다 주던 요란한 도시락이라던지 그것이 아니라면 화려한 레스토랑의 음식들에 길들여져 있어서인지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때운 속은 어두워지고 밤이 깊어져 자료실이 닫을 시간이 되자 쓰라림이 심해졌다. 열람실들은 아직 열었지만 자료실은 일찍 문을 닫는 터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서 허기를 좀 달랜 뒤에 내일부터 들어갈 프로젝트에 대해 넘겨받은 자료를 좀 검토해 볼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허기도 물러가는 것 같았다. 내일이면 새 세상이 펼쳐질 테니까. 그는 얼마 전에 새로 산 가방에 책들을 넣다가 잠시 멈칫했다. 단 몇 주 만에 곳곳에 여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듯했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는 애써 기어 나오려는 기억들을 책들과 함께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온풍기 바람이 적은 복도는 썰렁했다. 열람실처럼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아직 이른 시간에도 적막함이 있었다. 복도의 창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배터리를 분리해 버린 휴대폰이 만져지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꺼내 들었다. 꺼진 채 있는 자그마한 휴대폰. 여자는 분명히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은 아니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하면서 그를 데려다 주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게다가 유쾌한 기분일 수는 없었지만 차비까지 주머니에 넣어 주지 않았던가. 대신 돌아오는 길의 버스 안에서 느낀 그의 처참하게 구겨진 자존심 따위는 이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이 휴대폰 덕에 자신이 안 교수의 연락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는 입술을 깨물고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배터리를 끼우고 전원을 켰다. 한참 만에 켜진 휴대폰에는 쉴 새 없이 편지 봉투 모양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재현 씨 도서관이 있는 거 맞죠?>
<나 여기 로비 앞인데…….>
<재현 씨 어디예요?>
<좀 나와 봐요.>
<나 때문에 화났어요?>
<나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는 잠시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난 시간부터 찍혀 있는 메시지……. 지금은 벌써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사파리 점퍼 때문에 괜찮지만 드러난 얼굴에는 복도의 휑한 찬 기운이 느껴질 시간이었다. 도서관의 로비는 아마 온풍기 따위가 돌아간다 해도 한참 서 있기에도 추울 만한 날씨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가 버렸겠지.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여자의 잘못이란 건 없다. 잘못은 그저 제가 그 차에 치인 것, 아니 그 여자의 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이제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섹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처럼, 그저 한겨울 날의 꿈일 뿐이었다. 싸늘해지는 공기에 점퍼를 추스르며 1층 로비에 갔을 때 익숙한 금갈색 머리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아주 잠시 잠깐 스쳐 간 감정은 서운함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연락을 피한 건 저였다. 그러니 이런 서운함은 적반하장이었다. 그는 푹 고개를 숙인 채 검색대를 통과해 나갔다.
“재현 씨!”
그의 발길이 멎었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이 쓰라림은, 단순히 위산이 역류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늘 그랬듯이 명치끝이 싸하게 쓰라렸다. 울컥하는 것 같은 느낌에 발걸음이 멎었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려는 무의식을 간신히 잡아 눌러야 했다. 막 발을 떼는데 또다시 보랏빛이 떠오르는 여자의 꽃향기가 찌르르 다가왔다.
“화난 거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래서 나 하루 종일 기다렸어요…….”
여자의 울먹임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익숙하게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가느다란 팔이 달린 여자는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새하얀 얼굴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대체 뭐가 미안한 거야, 잘못은 누가 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한 번씩은 전부 다 머물렀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짜 미안해요. 화 많이 났죠?”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목구멍에 콱 걸려서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는 생각들을 말이 되어 쏟아 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고마웠다.
여자의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그 부드러운 금갈색의 물결치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생생한데 긴 검은 생머리를 한 여자는 마치 딴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까맣고 깊은 눈이나 오뚝한 코, 그리고 그를 마른침만 삼키게 만들어 버리는 분홍빛의 작은 입술도 변함이 없었다.
“집안에 행사가 있어서요. 제가 절대 빠질 수 없는 그런 행사였어요. 아버지 회사에 관한 일이라……. 내가 그냥 그렇게 가 버려서 화난 거죠? 연락도 없고…….”
연락을 안 한 건 그였다. 아직도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여자를 보고 그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 안 났어.”
어찌 제 주제에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속이 쓰렸다. 그는 얼른 차에서 내려 자기의 그 싸늘한 방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왜 자신의 이 몸뚱이는 따뜻한 히터 바람이 가득 차 있는 여자의 차 안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얼른 이 차에서 벗어나자. 그는 속으로 힘차게 외쳤다. 그가 막 차 문을 열려는데 차가운 손이 닿았다.
“재현 씨!”
늘 따뜻했던 여자의 손이었다. 가느다랗고 따뜻하고 보드랍고. 그런데 오늘따라 손끝이 차가웠다. 아마 내내 휑한 도서관 로비에 있어서였을 것이었다. 여자가 꼭 들고 있던 종이가방에는 아마 자기의 비루한 위장을 채워 주려고 싼 분에 넘치는 도시락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여자의 손처럼 차갑게 식은 채.
너무 차가워서……. 안쓰럽도록 차가워서 뿌리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게 이유였다. 자기도 모르게 나간 손이 여자의 가느다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갑자기 숨이 쉬기 힘들어졌다. 하루 종일 그는 차분하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부를 하던 놈은 제 진짜 속이 아니었다. 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는 속은 가질 수도 없는 여자를 가지고 싶어 미쳐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놈은 아마 이 흩뿌리는 눈 속을 미친 듯이 헤매다 지금 돌아온 것일 것이다.
매끄러운 여자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뻗어 하얗고 창백하고 아직도 눈물기가 묻어 있는 여자의 작은 얼굴을 감싸 앉았다. 내일이면, 아니 단지 30분 후면 이 열락에 미친 놈의 목을 졸라 꽝꽝 얼어붙은 한강 바닥에 처넣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질 못했다. 이 미친놈도 자신의 일부였으니까. 그는 정말로 미친 것처럼 여자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하루 종일 쓰라리던 속이 금세 가라앉은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뜨겁고, 약간은 짠 맛이 나는 여자의 입술을 헤집으면서 미친 그놈은 행복에 겨워 웃고 있었다.
“내일부터 학교 오지 마.”
“왜요?”
품에 안겨 있던 혜원이 몸을 빼면서 물었다. 매끄러운 어깨가 절로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나른한 온기에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지만, 몸을 들끓던 욕정의 열기가 빠져나가고 나니 당혹스러워진 그가 기운을 짜내 말했다.
“나, 연구실에 들어가. 가면 밤 샐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의 격한 입맞춤에 거의 다 지워져 버린 화장에 얼룩진 그녀가 고개를 불쑥 들었다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술에 입을 맞추느라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딘지 모를 낯선 호텔의 침대 위에는 다시 후끈거리는 것 같은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나…… 하여튼 내일부터 못 나와. 그러니까 도서관에 오지 마.”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죠?”
여자의 매끄러운 몸이 다시 그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동그란 가슴이 그의 가슴에 겹쳐지자 기운을 잃고 있던 아래에 다시 찌르르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대답 대신 여자의 위로 올라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름다운 젖가슴을 물어 갔다. 숨이 차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 그녀를 싫어할 수가 있을까. 다만 제 자신이 싫을 뿐이었다.
“아…… 재현 씨.”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반쯤 흐느끼듯 울렸다. 스스로 미친 걸 인정해야 했다. 아니 미치고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당장 내일이 없더라도 지금 이 열락의 구덩이에 빠져 죽더라도…….
* * *
한번 진창에 빠진 발걸음은 쉬이 마른 땅에 올라서지 못 했다. 여자는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남자를 열렬히 쫓아다녔다. 여자가 주는 성적인 쾌락 말고도,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호화찬란한 새빨간 스포츠카라든지, 혹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시간을 때우는 데 드는 비용 같은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아니 마음이 아니더라도 몸을 제대로 단속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방학 중이라 다양하지 못한 학교 구내식당의 싸구려 백반보다야 휘황찬란한 한정식의 정갈한 너비아니가 맛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다만 여자가 유려한 흘림체의 사인을 카드 명세서에 할 때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어야 하는 곤란스러움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에도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매번 이게 마지막이라고 외치는 것에조차도.
“……아이참, 엄마도! 지금 간다니까. 나만 빠지면 애들이 삐진다고. 알았어, 알았다구!”
전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숨소리조차 참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는 다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되뇌기도 전에 여자의 입술이 다가왔다.
“화장 했잖아!”
그가 빠르게 이야기했지만 핑크빛 립스틱이 가득 칠해진 입술은 그의 입술에 닿았고 자동적으로 그는 그녀의 쏙 내밀어진 부드러운 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늦었어. 가.”
한참 만에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여자의 얼굴을 떼어 놓으려고 애썼다.
“아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
단정하고, 평범한 호텔의 디럭스 룸에는 후끈한 실내 열기와 함께 묘한 향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향수 냄새까지…….
“진짜 가기 싫다.”
“가, 시간 됐어.”
가기 싫다는 여자의 칭얼거림은 진짜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는 석연치 않았다.
“나…….”
“뭐?”
“아니에요. 갈게요. 잘 자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닫히고 삐리릭 소리를 내면서 저절로 잠겼다. 여자의 힐 소리가 멀어졌다. 멍하니 혼자 남은 그는 후덥지근한 방 안의 공기 덕에 러닝셔츠에 낡은 청바지만 입은 채 맨발로 돌아섰다. 티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쳐지듯 널브러진 제 책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노트와 책을 꺼냈다. 아무렇지도 안은 듯, 그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침대 위에는 이불이 절반쯤 걸쳐진 채였고, 밑에 시트는 심하게 구겨져 있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만했다.
처음에는 그냥 급한 불만 끄고 호텔 방을 나섰지만, 차차 이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차피 하루치 숙박료를 냈는데 그냥 차가운 반지하 방에 가서 자느니 이곳에서 자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마치 신데렐라처럼 여자는 자정을 넘기기 전에 부랴부랴 씻고 화장을 고치고 그를 남겨 둔 채 방을 나서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공기는 제 반지하 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따뜻하고 쾌적했고, 화장실에 한 번 가려면 그 추운 냉기를 뚫고 문도 없이 소변기만 덜렁 있는 바깥의 허술한 곳으로 가야 하는 것에 비하면 비데까지 달려 있는 최고급 호텔의 디럭스 룸은 분명 물질적으로는 천국일 것이었다.
‘저기, 내가 미리 계산 다 했는데, 냉장고 안에 있는 거 먹으면 따로 체크아웃 때 계산해야 돼요. 알죠?’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노트를 내동댕이친 건 여자의 말이 문득 생각나서였을까. 적막 속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노트는 바닥에 구겨져 있던 이불 더미 위에 처박혔다.
“병신 새끼.”
화려한 화장대의 거울 안에는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열락에 들떠 미친 듯이 날뛰던 놈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 속이나, 하다못해 유치한 드라마처럼 옆에 있는 노란색의 야한 불빛을 내뿜는 화려한 비단의 갓을 쓴 스탠드라도 던져 저 유리 속의 놈을 박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저 또다시 욕지거리나 내뱉으면서 떨어진 노트를 들고 와 시뻘겋게 핏발 선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이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는 주문인 양 거기 쓰여진 것들을 외워 머릿속에 박아 넣을 뿐이었다.
8.
“나 진짜 안 가도 돼?”
“한 학기 쉬어. 골프도 좀 배우고, 여기저기 얼굴도 내밀고 해. 너 뭐 어차피 성적도 좋은 거 아니잖아.”
“엄마는! 나 그래도 중상위권이야. 무슨 그런 말을.”
그러나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뉴욕에 안 가도 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너 좀 살이 붙은 거 같아. 엄마 다니는 휘트니스 센터 너 꺼도 하나 끊으라고 박 비서한테 전화했어. 내일부터 수영도 하고…….”
“엄마!”
휘트니스에 들어가면 기본이 서너 시간이었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아줌마, 선식 가져와요. 너 오늘부터 아침은 그거만 먹어. 어젯밤에도 군것질했다면서? 그리고 일찍 다녀.”
“엄마.”
일하는 아줌마가 주는 하얀 액체가 담긴 컵이 제 앞에 왔을 때였다. 갑자기 비릿한 땅콩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는 듯 혜원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우엑. 이거 뭐야, 엄마.”
“그거 다이어트 선식이야. 얼마나 비싼 건데.”
“엑, 나 안 먹어.”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가는 혜원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의 경숙이 뒤쫓아갔다.
“체했니? 어제 뭐 먹었어. 아줌마!”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매번 이제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해야지 하지만 얼굴을 보면 다음번에……. 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흘에 한 번 나흘에 한 번, 그가 연구실에서 나오는 날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도서관 앞에는 빨간색의 포르쉐가 서 있었고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둘은 어느새 이름도 모르는 호텔 방에 나란히 누워 있는 사이가 돼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위험한 줄타기였다. 줄타기의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그 줄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는 막 연구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특별한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나이가 어려서인지 연구원들 사이에 팽팽하게 감도는 경쟁의 구도에서는 한쪽 곁에 서 있었고 그 덕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세포의 돌연변이 분열 같은 것을 주구장창 앉아서 기다리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짬짬이 공부를 할 수 있었으므로 그로서는 큰 불만은 없었다. 따뜻하고 책장 넘기는 소음조차 없는 조용하고 적막한 연구실은 그에게 정말로 좋은 공부 장소였다. 다만 그의 불안감은 연구실을 벗어나면 시작될 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눈에 보여야 할 것이 없어서인가.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이기적이게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만 연락을 받는 것도 익숙해진 못된 버릇일지도 몰랐다.
휴대폰에도 아무런 메시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건 무슨 일일까. 며칠 전에 까무룩하게 내린 눈이지만 연일 한파주의보라고 떠들어 대는 날씨 덕에 조금도 녹지 않은 얼음 조각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오물처럼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것들에 미끄러지지 않게 발을 디디는 데 온 신경을 쏟으려고 해도 그는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늘 그 빨간 스포츠카는 그가 나오기 전에 저 주차장에 포진하고 있었었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 오후에 끝나서 갈 수 있겠다, 하고 메시지를 보냈고 여자는 알았다고 했었다. 늘 피곤에 지쳐 나오자마자 따뜻하게 히터가 틀어져 있는 차에 올라타서일까, 오늘따라 바람이 칼날같이 옷 속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겠지라고 되뇌어 보지만 왠지 적반하장으로 가볍게 화가 나는 것만 같은 느낌은 피곤하고 속이 비어서일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얼른 걸음을 빨리했다.
늘 차를 타고 다니는 데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한심스러워졌다. 그 잘나디잘난 여자가 저 같은 게 뭐가 좋다고 그리 지극정성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호의를 받기만 했다는 사실을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는 찬바람 덕에 알게 된다는 건 그로서도 당혹스러운 현실이었다.
막 그의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시작되는 모퉁이에 돌아섰을 때였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윙 하고 떨림이 느껴졌다. 두 손을 주머니에 쿡 지르고 있는데도 시려움을 면하기 힘든데 그는 진동이 느껴지자마자 손을 빼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자였다.
“……?”
쉬이 여보세요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 번쯤 혜원아, 어디니 하고 다정스럽게 물어 줄 수도 있는데 그는 또다시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는 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났다.
<……흑……흑.>
분명히 우는 소리였다. 여자의 소리가 맞나 의심스러운.
“저기…… 왜 그래?”
당황한 그가 버벅거리면서 물었다.
<나 집 나왔어요. 재현 씨 집 어떻게 가면 되는 거죠? 택시 타고 뭐라고 해야 해요?>
“뭐? 왜?”
더 당혹스러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요. 가서 말할게요. 어디라고 해야 돼요? 나 지금 택시 타고……. 여기가 어디지……. 하여튼 관악산 서울대 있는 데 가자고 했어요. 어디라고 말해야 해요?>
울음소리와 함께 겨우겨우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그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그 찬바람 속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올 것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심각했다. 보일러를 틀고 전기장판을 끝까지 올렸지만 여자는 코트조차 벗지 못할 만큼 방 안은 냉기만 가득했다. 그는 오리털 파카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마주 앉았지만 할 말을 잃은 채였다. 화장도 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팅팅 부어 있었다. 그래서 더 낯설어 보였다.
“저기……. 그게 사실이야?”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는 여자는 서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또 버릇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항상 나의 잘못이야……. 라고 말해 줬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딱 붙어 버린 채였고 다만 감추려고 해도 당장에 드러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엄마가…… 수술을 하라고 해서. 난 그렇게 못해. 어떻게 재현 씨와 나의 아기를 없앨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돼. 그렇죠? 그래서 엄마랑 싸웠어요. 엄마가 나가라고 해서……. 그래서 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서……. 재현 씨, 나 무서워요. 우리 아기, 우리가 키우면 되잖아요. 그렇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방법도 없이 젊고 건강한 남녀가 관계를 갖는다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에게는 당연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너무 예쁘겠죠? 우리 아기 말이에요. 내가 책을 보니까 5개월만 지나면 막 움직인대요. 사실 병원에 가려고 했었는데……. 생리가 안 나와서 테스터기를 샀더니 두 줄이 나와서……. 그걸 그냥 욕실에 놔뒀는데 아줌마가 엄마한테 이야기를 했나 봐요. 사실은 재현 씨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