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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알아듣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부모가 된다니……. 그 지나가다 보면 안고 다니는 아기가, 길가에 아장거리면서 걸어 다니는 아이가 저 여자의 뱃속에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다…….
그는 뭔가 말을 해야 했다. 옛날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는가, 새 생명이 생긴다는 것은 축복 받을 일이다. 그리고 ‘기쁜 일’이고 엄청난 일임에 틀림없었다. 아직은 어리고, 귀하게만 자란 여자한테 이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그런데 왜 제 얼굴은 굳어만 있는 걸까. 왜 제 목구멍은 말라붙어 버리는 걸까.
“저기…… 재현 씨…….”
여자의 말꼬리가 사그라졌다. 아마 제 뻣뻣한 얼굴을 봐서 그럴 것이었다. 여자의 조바심에 찬 맨얼굴은 곱게 화장을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그는 바싹 마른입을 축였다.
“힘들었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는 비 맞은 고양이마냥 눈치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하고 아기처럼 우는 여자에게 그는 어정쩡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무너지듯 품에 안겨 왔고 남자는 힘을 주어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품 안에 이 작고 여리기만 한 여자를 두고 잠시 잠깐 나쁜 생각을 품었던 것을 깊이 뉘우쳤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여자의 꿈처럼 두 사람과 또 하나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해피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자는 쫓겨난 것이었다. 그녀의 전지전능한 카드나 어마어마한 외제차 따위도 없었다. 모든 걸 놓고 나가라는 엄마의 말에 그녀는 옷만 입은 채로 나왔고, 당장에 택시비도 없어서 그가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낸 것이었다. 그는 당장 벌이도 없었고, 그저 안 교수의 연구실에서 눈칫밥이나 얻어먹으면서 주구장창 현미경이나 들여다보고 온도를 재고 배지를 배양하는 일만 밤새도록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주겠다던 연구 수당도 한 달이 되어야 나오는 것이었다. 당장 배고픈 그녀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주 전에 사 놓았던 라면을 끓여 주고는 그는 마음 한구석이 베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나 매운 거 못 먹는데. 이거는 되게 맛있네. 그죠?”
팅팅 불은 라면을 그것보다 더 많은 냉수를 먹어 가며 삼키는 그녀가 웃는 게 안쓰러워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당장 내일 아침에 연구실에 가야 하는데……. 여자를 이 빈집에 두고 어찌 가겠는가.

“……네, 저기 급한 일이 생겨서……. 저기 내일……. 아, 죄송합니다. 오후에라도 꼭 가겠습니다. 네, 네……. 정말 급한 일이라…….”
사정사정해서 그는 새벽에 나가야 할 일을 오후로 미뤘다. 당장 둘이 덮을 이불도 제대로 없는 바람이 새는 방 안이 제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여자한테는 미안스러워서 그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에게는 다행히 통장에는 돈이 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여자에게 받은 돈이었다. 그 사고의 뒤처리로 받았던 수표에서 당장 이리저리 쓰고 남은 돈과 황당스러운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돈들. 평소에 사는 데 그리 돈을 쓸 일 없이 살아온 덕에 그나마 좀 남아 있던 것들이었다. 복학을 할 학비는 손 안 대고 모아 놓았지만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은 어쩔 수 없어서 그는 생기는 대로 잘 모아 놓았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오로지 공부만 해도 쫓아가기 버거울 만큼 정신이 없는 곳이 의대니까. 그러나 당장은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재현 씨랑 있으니까 너무 좋다. 이제 밤에 집에 가려고 헐레벌떡 샤워하고 나오지 않아도 되잖아. 방이 무지 좁은데 아늑해요. 좀 춥긴 춥네. 그건 어쩔 수 없지 뭐. 와, 맨날 이런 데서 자니까 감기 걸렸었구나.”
그는 보다 못해 자신의 사파리 점퍼를 내려 여자가 덮고 있는 얇은 이불 위에 더 덮어 주었다.
“아, 재현 씨 냄새다. 나 이 냄새 너무 좋더라.”
그는 옆에 바싹 붙어 누워 있는 여자를 한번 껴안아 주었다. 곧 엉겨 붙는 여자의 팔을 빼고는 엎드려 다 하지 못한 보고서에 수치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이렇게 공부만 하네.”
여자의 목소리가 뾰로통했지만 그게 진심이 아닌 애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부 아니야. 이건 보고서 쓰는 거야. 내가 하는 일.”
옆으로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그가 쓰는 것을 보던 여자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꽃이 피었다.
“글씨 너무 잘 쓴다. 진짜 인쇄한 거 같아요.”
별게 다…… 좋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자가 사랑스러울수록 무거워만 졌다.

우선 아침에 눈을 뜨자 쉬이 일어나지 못하는 여자에게 휴대용 가스버너로 끓인 물을 들고 들어가 세수를 하게 한 후에 근처 학생들이 많이 가는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켜 먹였다. 아무리 공부만 하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그에게도 여자가 임신을 하면 잘 먹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여자에게 뭐 하나 좋을 게 없는 싸구려 라면을 먹인 게 가슴이 아픈 그는 매운 김치찌개를 잘 먹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또다시 미안해졌다. 제 딴에는 그래도 제가 제일 좋아하지만 자주 먹을 수 없는 푸짐한 음식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는 세상이 달랐던 그녀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가득 들어 있던 수저통에서 꺼낸 숟가락과 젓가락을 영 꺼림칙해 하는 여자의 눈길을 무시하고 그는 연기가 펄펄 나는 찌개를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물론 알뜰하게 고깃점도 있는 대로 찾아내 여자의 그릇에 수북하게 담아 주었다. 그러나 여자는 한 숟갈 떠먹더니 쿡쿡 찌르기만 할 뿐이었다.
“아, 되게 맵다. 음, 나 멕시코 음식 잘 먹는다고 친구들이 부러워했었는데, 한국 음식이 더 맵네. 저기, 물 넣어 먹어도 돼요?”
결국 가득 떠 놓은 찌개 접시에 물을 부어 흥건하게 만들어 놓고는 채 먹지도 않고 수저를 놓은 것을 보고, 그는 인상만 찌푸린 채 제 밥그릇의 밥을 비우는 데만 신경을 써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우선 근처의 산부인과 병원부터 갔다. 새파랗게 어린 두 사람이 만삭의 임산부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조차 당혹스러웠지만 혜원의 화장기 없는 퍼석한 얼굴에는 웃음꽃만 피어 있었다.
“와, 아기한테 필요한 거 되게 많네. 그런데 너무 예쁘다.”
산부인과 대기실 옆에 있는 신생아용품 카탈로그를 보면서 여자는 끊임없이 예쁘다, 귀엽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는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가지가지 물건들이 한 가득씩 나와 있는 카탈로그를 흘끗 들여다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과연 정말로 사과도 깎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아기를 키울 수 있을까……. 그 아이를 저와 둘이 키울 수나 있을까.
아직은 초기라 뉴스나 티비에서 본 듯이 커다란 배에 초음파 기계를 대서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 따위는 하지 못했다. 다만 그는 진찰실 옆에서 기다리고 여자와 의사가 옆의 진찰실로 들어가 한참이나 있더니 검은색 바탕에 그려진 희끄무레한 동그라미가 보이는 종이를 들고 왔을 뿐이었다.
“지금 임신 4주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산모 분이 체력이 약하신 거 같으니까 각별히 조심하시고 영양 섭취 많이 하시고 안정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새로 얻은 산모라는 명칭조차 즐거운 듯 보였다. 나보고 산모래요, 하고 깔깔거리고 웃을 뿐이었다. 이리저리 검사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산모님, 산모님 하고 부를 때마다 까르르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피 검사다 뭐다 해서 근 십여만 원이 넘는 검사비를 내고 나온 그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 있었다. 기뻐야 하는데, 이리도 행복해하는 여자의 감정에 동참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고 있었다.
병원을 나와 그녀와 그는 주변의 신림동 재래시장으로 갔다. 필요한 게 많았다. 싸늘한 겨울날은 오늘따라 바람이 덜 불어 그나마 다닐 만은 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없는 그는 부지런히 주변을 살펴야 했다. 어제 그리 밤을 지새우며 당장 여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냈었는데 얼른얼른 그것들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아까 넉넉하게 찾았다고 생각했던 돈은 병원의 검사 비용으로 너무 많이 써서 제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많이 줄여야만 했다. 그는 발걸음을 빨리하려 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아, 추워! 어머, 여기 꼭 브룩클린 벼룩시장하고 비슷해요. 어머, 저건 뭐지? 와, 연기 나는 게 따뜻할 것 같아. 이거 무슨 냄새죠? 맛있는 냄새다. 와, 이불 너무 예쁘다.”
핑크색의 하트가 그려진 합성섬유로 된 싸구려 차렵이불을 들고 환하게 웃는 그녀의 구겨진 고가의 코트가 미안스러워졌다. 당장에 여자가 쓸 칫솔이니 수건이니 그런 것들도 없었다. 주변에 그가 자주 이용하는 천냥마트가 있어 거기에 들어섰다.
“와, 너무 예쁘다!”
자질구레하게 쓸모도 없는 것들 앞에서 마치 외국인인 듯 꺅꺅 소리까지 질러 대는 여자를 보면서 그는 잠시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칫솔과 치약이니, 제 낡은 세숫대를 대신할 플라스틱 대야 따위와 수건 등을 사고 있는데 여자는 토끼 모양의 머리핀을 들고는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 보며 웃고 있었다.
“나 이거 사 줘요! 이거 너무 예뻐요. 완전 귀여워!”
“그래.”
지금까지 필요한 것 아니면 뭔가 사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천 원짜리 토끼 머리핀으로 여자가 웃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겨우 몇 만 원도 안 되는 계산을 하면서도 그의 두툼한 사파리 점퍼 사이에 살그머니 껴 오는 여자의 가느다란 팔을 느끼면서 그는 그동안 여자가 호텔 방의 체크인을 할 때 구석에서 시선을 돌리며 서 있어야 했던 그 비참했던 시간들을 모조리 보상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아주 순간적인 달콤함 같았다.
어린 두 연인은, 재래시장에서 손을 호호 불어 가며 계란이나 두부 같은 반찬거리를 샀다. 날은 추웠지만 두 사람은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마치 처음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어린 부부 같은 묘한 설레임은 강추위도 비켜갈 만큼 달기만 했다. 이불이 든 커다란 봉지를 들고 있으면서 새빨개진 콧등을 하고선 마침 길가에 있던 호떡 냄새에 혹해 사 들고, 그것을 신기해하며 먹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그는 그동안 여자에게 가지고 있던 묘한 거리감 같은 것이 확 줄어든 느낌이었다. 제가 여자한테 뭔가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아주 당혹스러운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곧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을 알고 연구실로 가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여자가 들고 있는 호떡에서 달착지근한 설탕의 냄새가 느껴졌다. 훌쩍거리는 여자의 빨간 코끝이 제 눈 아래 있었다. 제 인생의 계획에는 전혀 없던 광경이었다. 감히 그의 인생에 여자라는 존재가 스치기라도 했던 적이 있었던가.

남자가 가 버린 방 안은 싸늘했다. 내내 웃고는 있었지만,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사라졌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살지.”
혼자 중얼거렸지만, 중얼거린다고 해서 뭔가 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정말로 이런 데서도 사람이 살 수 있나? 제 방이 그리 넓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냥 뭐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하지만 이 방은 제 침대 하나 놓으면 틈도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뒹구는 걸 좋아해서 엄마가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주문제작해 준 침대는 이 방보다 넓을지도 몰랐다.
낡은 나무로 된, 그야말로 처음 보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다 합쳐도 열 개도 되지 않아 보이는 옷걸이에 걸린 추레한 옷들과 그 옆에 누런색 테이프가 귀퉁이에 붙여진, 용도가 뭔지도 알 수가 없는 플라스틱으로 보이는 상자가 가구라는 것의 다였다. 책상 옆 바닥에는 낡은 책들이 일렬로 죽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숭숭 새어 들어오는 알루미늄으로 된, 열기만 하면 바로 바깥인 문 옆에는 얼굴이 겨우 보일 만한 낡은 거울이 하나 붙어 있었고 거기엔 못에 걸린 낡은 플라스틱 컵에 면도기와 칫솔 치약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닥에 일인용 전기장판이 있었고 그걸 덮고 있는 이불이 그다지 지저분해 보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새로 산 이불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자동차의 배기가스 같기도 한 그런 냄새였다. 책상 위에 칫솔과 치약 컵과 수건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지만 그것을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기도 싫을 만큼 방 안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이 집에 들어와서 잘 때 빼고는 벗어 본 적이 없는 그녀의 아이보리색 아르마니 코트는 이미 심하게 구겨져 엉망이 된 상태였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모피를 입고 나올 걸.”
모피가 아니라 짐이라도 좀 챙겨서 나올 걸, 아니 하다못해 카드가 든 가방이라도 들고 나올 걸 하고 후회만 하고 있는 여자였다. 순간 갑자기 돌풍이 풀었는지 휘힉 하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고 문이 크게 들썩거리자 벽에 붙어 있던 거울까지 휘청였다.
“어마!”
혼자 소리를 질렀지만 빈방에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흑, 재현 씨…….”

“나 오늘은 못 가. 전기장판 너무 올리지 말고. 데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없어서 어떻게. 심심하겠다.”
<오늘 못 와요? 나 너무 무서운데.>
휴대폰을 잡고 있는 그의 입가가 굳어 있었다.
“오늘, 엄청나게 중요한 실험 때문에…….”
<방에 아무것도 할 것도 없구, 배고픈데……. 그리고 화장실 가는 것도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여자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흘러나올세라 그는 손으로 가려야 했다.
“문 잘 잠궈. 되도록이면 일찍 갈게.”
지나가는 선배의 흘끗거리는 시선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느라 휴대폰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그가 얼른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끊어. 잘 자.”
<재현 씨!>
휴대폰 저편에서도 덜컥거리는 바람 소리가 났다. 문풍지를 사야 한다는 걸 깜빡 잊었다. 분명히 어젯밤에는 생각이 났었는데. 그의 방에는 그의 전공 서적뿐,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 같은 것도 없었다. 그 적막하고 추운 방에서 대체 여자 혼자 무얼 하고 밤을 지낼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오늘 중요한 세포 분열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밤새 휴대폰 같은 것은 꺼내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구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슨 일 있냐, 학부생?”
“아, 아닙니다.”
대학원생 2년차인 하늘같은 선배가 복도를 지나가면서 물었다. 물론 그도 이따 슬쩍 얼굴을 들이미는 의대 조교수들한테는 기를 못 펴지만, 이 실험실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저보다야 휠 윗자리인 것은 틀림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오늘 고비다. 시간 정확하게 기록해. 한눈팔면 큰일 난다.”
“네.”
그의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선배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그는 이제 오로지 눈앞의 현미경에만 집중해야 했다.

제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 방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은 상당히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비록 그 사람이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밤새 지친 몸을 누일 새도 없이 이것저것 들어줘야 하고 챙겨 줘야 하지만 그것도 그는 참을 수 있었다. 뭔지 모르게 그동안 진 빚을 갚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여자의 카드로 호화찬란한 곳들을 돌아다닐 때 그는 오히려 여자에게 미운 소리만 하고, 여자의 애탄 전화 따위를 묵살하고 다녔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만 바라보고 저가 다 챙겨 주어야 할 때가 되니 오히려 여자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밤새 혼자 둔 게 미안스럽고, 배고프다는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는 아침부터 슈퍼에서 혼자서는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는 밑반찬인 멸치 볶음과 김치까지 사 와 열심히 상을 차렸다. 그나마 탄 것이 적은 밥을 골라 여자의 몫으로 뜨고 찬바람에 자꾸 꺼지는 휴대용 버너로 먹음직스러운 계란 프라이까지 한 어설프지만 그래도 정성이 가득한 밥상을 들고 좁은 방에 들어온 그는 밤새 현미경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다 뻑뻑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일어나, 밥 먹자. 배고플 거 아니야.”
마지못해 이불을 들추고 일어난 여자는 입이 뿌루퉁하게 나와 있었다.
“먹자.”
철야를 하고 연구실에서 밤참을 시켜 먹었지만 돌도 소화할 나이의 청년이었다. 허기진 속에 급하게 첫술을 뜨려 하는데 물을 안 떠 왔다는 걸 생각해 낸 그는 혼자 같았으면 그냥 마른밥을 넘겼겠지만 여자를 생각해서 얼른 일어나 밖에 가서 물 한 잔을 떠 왔다. 그사이 여자는 젓가락을 들었었는지 묘한 표정으로 있다가 제가 상머리에 앉자 젓가락을 놓았다.
“왜?”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너무 딱딱하고, 김치는 맵고. 밥도 이상해. 나 프렌치토스트 먹고 싶어요. 카프리제 샐러드랑.”
그는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을 꼬박 샌 그에게는 과분한 아침상이었다.
“칼슘이랑 철분, 단백질이야. 먹어.”
멍한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어제 기다리던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아서 팀이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 있기 때문에 오늘은 빨리 가 봐야 했다. 시간이 다 되어 가기에 설거지도 못하고 갈 것 같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 있던 참이었다.
“먹기 싫다구요.”
“먹어.”
전기밥솥이 망가져서 밑이 타 버린 누룽지는 제 밥그릇에 잔뜩 담겨 있었다. 여자의 말 따위 무시하고 막 밥숟갈을 뜨려는데 여자가 다시 말했다.
“재현 씨, 나 이거 싫다니…….”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조그만 양은으로 된 밥상에 쨍 하는 소리는 제가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는 소리였다. 소리를 질러 놓고는 그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여자가 움찔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게…… 더 마음이 상했다. 뭔가 따뜻한 것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만들 줄도 몰랐고 만들 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제 손으로 밥상 한번 차려 본 적이 없는 귀한 아들이었고, 학교 다닐 때는 내내 기숙사에서 생활했었다. 제 손으로 궁색한 밥을 차려 먹은 것은 이번 겨울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차려 놓고도 미안스러운 밥상이었다. 그래도 그는 할 만큼 했다. 오로지 여자와 아이를 먹이겠다는 일념에 그 찬물에 쌀을 씻고, 슈퍼에 가서 절대 들지 않았을 멸치 봉지와 김치까지 사 온 것이었다. 어설프지만 상을 차렸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피곤했을 뿐이었다.
“먹을게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차라리 여자가 안 먹겠다고 우겼으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럼 소리쳐서 미안해하는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움찔한 여자의 모습에서 더 화가 났다.
“먹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르고 벌떡 일어난 그가 멀뚱거니 서 있었다. 가뜩이나 키가 큰 그가 좁은 방 안에 혼자 서 있자 여자는 그를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꺾어졌다. 여자의 눈에 보이는, 제 광포한 모습이…… 그를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그는 막 젓가락을 들려는 여자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고는 상을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반찬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기에 상을 들어 엎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못했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상이 날아가고 난 뒤였다.
“사 먹어. 서랍에 돈 있으니까. 너 먹고 싶은 거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