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2화
그건 그의 마음이었다. 가야 하니까 시간이 쫓겨서 사 줄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런 비루한 밥상 말고,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 다만 억양이 그렇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는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놀란 여자의 모습을 보기 싫어서. 그게 미안해서.
남자가 나간 방은 박차고 나가느라 차가운 바람이 가득 들어와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제가 추울까 봐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꼭 닫고 간 뒤였다. 평소에도 아침은 샐러드와 곡물 스프 같은 것으로 해결하던 그녀였다. 빵이니 스파게티니 하는 것들을 좋아했지만 그런 것만 먹다간 서양 아이들처럼 엉덩이만 커지고 처진다고 엄마가 어렸을 적부터 신선한 야채니 과일이니 하는 것을 끼니마다 챙겨 주신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이런 밥과 짜고 딱딱한 반찬 따위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제도 배가 고파서 먹었지만 저녁 내내 생각하니 그 시뻘겋던 찌개는 다음부터 싫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렇게 나가 버리다니.
그가 다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재현이라는 남자를 사랑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건 아닌데……. 눈앞에는 형광등마저 어두워 칙칙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리본이 프린트된 싸구려 차렵이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고파 왔다. 그게 더 우울했다. 바보같이, 싸우느라 그가 세숫물도 떠다 주지 않았다. 이도 닦지 못 했는데. 그리고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히 그들이 기다리던 세포 분열은 빨리 일어났고 다들 얼싸안고 환호를 질렀으며 안 교수와 연구생들은 다들 갈빗집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졌다. 하루 종일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여자의 그 모습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은 이미 허기의 정도를 넘어서 속이 시려 오고 있었다. 프렌치토스트라는 걸 파는 데가 없어서 그는 학교 앞 토스트 가게에서 제일 비싼 토스트 두 개를 사서 식을세라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날따라 날은 더욱더 찼고 바람이 몰아쳤지만 그는 미안한 마음에 한달음에 언덕을 올라갈 수 있었다. 집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따듯한 공기가 가득했다.
“왔어요? 재현 씨? 오늘 늦는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갑긴 하지만 뭔가 껄끄러웠다. 아침에 제 탓일 거라 생각하니 미안스러워졌다. 여자가 저를 반겨 주는 게 정말로 다행이다 싶었다.
“밥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먹었어요.”
그녀가 대답하자 그는 안색이 굳어졌다. 둘러보니 아침에 그냥 치웠던 밥과 반찬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설거지까지 되어 있었다.
“설거지 네가 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손이 좀 시려웠어요.”
그는 품에 안고 있던 토스트를 꺼내 놓았다. 식어 가긴 했지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라는 말보다는 두 손을 내밀어 지금은 따뜻한, 그러나 어쩐지 거칠게 느껴지는 여자의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찬물에 설거지 한번 한다고 해서 손이 거칠어질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모두 제 잘못 같아서 미안하기만 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찍 와서 좋네. 하루 종일 너무 심심했어요.”
그는 손을 내밀어 여자를 꼭 안았다. 품에 안기는 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아득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누가 부르는데?”
“절요?”
그는 산더미 같은 데이터를 뒤지고 있다가 자신을 찾은 대학원생 선배의 말에 표정이 굳어져 대답했다. 누구지…… 혜원인가? 화해를 했다고 하지만 공주같이, 아니 여왕같이 살던 여자에게 누추한 움막보다 못한 그의 집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아닌 척하지만 그게 눈에 보이니까 그의 마음은 더욱더 불편해졌고 알게 모르게 그게 자꾸만 불쑥거리며 튀어나고 있었기에 혜원이 왔을 거라 생각하니 그는 갑자기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그는 밖으로 나서면서도 갑갑해졌다. 이제 그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도 해야 할 일도 많았고 피곤했으며 날은 풀릴 기세가 없이 연일 최저 기록을 갱신하며 맹추위를 떨치고 있었다. 원래 남학생들만 있는 쪽방인지라 여자가 있는 것에 대해 아침부터 옆방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온 터에 그녀가 바깥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뭔지 모르게 화가 나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막 대학원 연구실 뒷문으로 나왔을 때 그는 눈앞의 광경에 어리둥절해서 멈춰 서야만 했다. 교수님들의 차도 대지 못하는, 연구 자재용 차량만 드나드는 공간에 새까만 외제 승용차가 포진해 있었고 웬 검은색의 정장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가 서 있었다.
“길재현 씨?”
남자의 입에서 험악하게 제 이름이 나오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차의 뒷좌석 문이 열렸다. 덩치 좋은 남자가 문을 열려고 했었는지 고개를 숙였지만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세 좋게 문이 먼저 열리고 뭔가 희끄무레한 옷을 입은 누군가가 용수철에 튕기듯 일어나 나오는 게 보였다.
“누구신…….”
그가 말을 채 내뱉기도 전이었다. 내려선 여자의 손바닥이 기세 좋게 뺨을 올려붙여 공터에 요란한 소리가 울린 뒤에 터진 욕설로 그는 이 아름다운 중년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개새끼! 너 같은 개새끼가 감히 우리 혜원이를 넘봐?”
9.
“이봐, 학생.”
터진 입술을 닦으면서 그는 오랜만에 듣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지?”
“죄송합니다.”
아래층에는 잘 내려오지 않는 주인집 할머니였다.
“우리 집은 남학생들만 있는 집이야. 이게 무슨 짓인가.”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요.”
“내가 자네 딱한 거 알아서 방세 밀려도 뭐라 안 했네만. 이건 아닐세.”
“죄송합니다.”
“다시 말하지 않게 해.”
“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할머니가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 찬바람이 몰아치는데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선 그는 맨 끝에 있는 자신의 방 앞으로 갔다. 보기에도 화려한 하얀색의 여자 구두에는 반짝거리는 보석 장식이 박혀 있었다. 얼른 구두를 들어 옆에 있는 신발장으로 쓰는 낡은 책꽂이에 넣고 쓰레받기를 위에 올려 가렸다. 덜컹거리는 그의 소리를 들었을까.
“재현 씨?”
제 이름인데도 그는 깜짝 놀라야 했다.
“아…… 나야.”
잔뜩 골이 난 표정의 혜원보다는 후끈한 방 안의 열기가 더 먼저 얼굴에 닿았다. 그는 서둘러 보일러부터 내렸다.
“나 추운데요.”
“공동으로 쓰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혜원은 그래도 그가 왔다는 사실이 더 좋은 듯했다.
“여기…… 화장실…… 다른 데 없어요?”
윗집에 노인 내외와 반지하 같은 아래층에 네 개의 방이 있는 구조의 전형적인 대학가 셋집이었다. 남학생들만 있는 집이니 화장실은 당연히 공동이고 남자용 변기가 노출돼 있고 옆에는 쭈그리고 앉는 수세식 변기만 달랑 있는 바깥 화장실이 다였다.
“비데도 없고…….”
제 얼굴에 난 생채기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걸까. 자기에게 무슨 일 있냐고 호들갑스럽게 묻는 여자에게 둘러댈 변명 따위를 생각하며 그 추운 길을 오는 내내 생각에 잠겼던 그는 허탈함에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에 구립 문화회관에 가 보자.”
여자의 입이 뿌루퉁하게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또 일찍 나가야 했다. 깜빡 잊은 문풍지가 더욱더 간절한 밤이었다. 그는 떨고 있는 혜원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옛날 노트들을 찢어 문틈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는 품을 파고드는 여자가 있어 오히려 좋았다. 혼자 자는 것보다 훨씬 따뜻하니까. 감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는 긴 머리는 꼭 묶은 채였다. 도무지 머리를 감을 엄두가 나지 않는 날씨와 장소인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달리, 강철도 뚫을 것 같은 젊은 혈기에 여자를 안기만 하면 버릇처럼 솟아나오는 욕구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밑으로 파고들었다. 늘 그의 손길을 좋아하던 여자가 오늘은 그의 손을 잡았다.
“나 못 씻었어요. 만지지 마.”
며칠째 옷도 갈아입지 못한 여자가 거의 미칠 지경이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여자에게 필요한 칫솔이나 컵 등을 사면서도 여자의 속옷 따위를 신경 못 쓴 남자의 무심함은 무지에서 온 것이었다.
“괜찮아.”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 말라니까요.”
“난 괜찮아.”
“싫어, 더러워요.”
“…….”
공동으로 있는 화장실에 갈 수 없는 그녀는 며칠째 그가 데워다 떠 주는 세숫물에 세수와 양치만 했는지라 딴에는 남자의 입맞춤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였다. 그의 손길이 멎고 바람 소리만 적막을 요란하게 울렸다.
“화…… 났어요?”
화…… 난 게 맞았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가. 이 모든 현실에 화가 났다. 제 여자 하나 어찌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여자의 돈만 믿고 안일하게 모든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누리기만 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같이 이야기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에 대해서.
“재현 씨…….”
여자가 오히려 그를 안아 왔다. 그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몸은 제멋대로 정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늦게 왔기 때문에,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악담을 듣느라 마침 찬거리조차 마련하지 못한 아침이었다. 수도가 꽝꽝 얼어서 세수도 할 수 없었다. 집 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연일 전기장판만 틀어 댔더니 머리가 아팠다. 혜원도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렸고 훌쩍거리는 콧물에, 목이 가라앉은 게 감기 초기 같았다. 망설이던 그는 마지막 비상금 3만 원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디 따뜻한 데 가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와. 나 오늘도 늦어. 미안해.”
“고마워요, 재현 씨.”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 듯하게 느껴진 건 제 자격지심이라 생각하고 그는 문을 나섰다.
“나오지 마. 좀 있다 해가 나면 나가. 지금은 너무 추울 테니까.”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쓰린 속을 안고 그가 말했다.
“알았어요. 잘 갔다 와요.”
너무나 천진난만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아픈 속도 잊을 수 있었다. 막 그가 나서는데 옆방에서도 두 학생이 나섰다. 역시 그들도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어, 일찍 가네?”
평소에는 눈인사도 잘 안 하던 사이였다.
“예쁘던데. 재주도 좋아.”
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닌지 구별하긴 힘들었지만 혹 얇은 문으로 안에까지 들릴까 그는 고개만 까닥하고는 재빨리 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도 곧 뒤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학교에 가는 길이니 같은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 의대생은 연애할 시간도 있네.”
“것도 찐하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옆방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할 때 몇 번 신경질적으로 시끄럽다고 한 적이 있어서였다.
“밤에 잠을 못 자겠던데.”
“본인들도 못 잤을 텐데 뭐.”
“으히히히.”
그는 손을 들어 귀를 막을 수는 없기에 걸음걸이를 더 빨리 해야만 했다.
“좋겠다. 의대생은 좋다고 대주는 여자들이 줄을 섰나 보다.”
그는 입술만 꾹 깨물 뿐이었다.
세수도 못한 채 머리만 겨우 듬성듬성 빗은 꼴은 거울에서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혜원은 한숨을 내쉬다가 코트를 걸쳤다. 아무리 깃을 올려 봐도 인간의 몰골이 아닌 듯했다. 구석에 있는 전기밥솥의 탄 자국을 흘끗 보고는 그가 꺼내 놓은 만 원짜리들을 들고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섰는데 제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더러운 바닥에 발바닥을 딛고 싶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얇은 장판 위에 뭔가가 버스럭거리는 것 같아 그에게는 말을 못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한참 만에 더러운 쓰레받기 밑에 모양도 없이 푹 찌그러진 제 신발을 보고 잠깐 화가 난 그녀는 체념한 채 신발을 신었다. 차가운 얼음덩이 속에 발을 들이민 것 같아 소름이 쫙 끼칠 정도였다. 손끝이 시리고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이런 날씨가 몸서리쳐졌다.
“샤워도 하고 싶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웬 할머니. 자신을 왜 째려보는 걸까 생각하다 그녀는 그 눈길을 무시하고 문을 나섰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정말이지 사람이 살 데가 못 되네.”
그 앞에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던 말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나오는데 뒤에 할머니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위에 종종걸음을 치며 나섰다. 버스나 지하철 따위는 타 본 적이 없었다. 택시조차도 몇 번 타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아무리 길을 가도 굽이진 골목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길을 가도 택시가 다니는 큰길은 보이지 않고 귀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으며 어제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속은 허기로 짜증이 났다. 간신히 골목길을 나오는 택시를 타고 그녀는 말했다.
“비올레타요.”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고급 파스타 집이었다. 이 시간에 하려나? 그러나 택시 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 어디 있는 거죠?”
“기사 아저씨가 알죠. 거기가 어디더라. 아, 쉘튼 호텔 근처예요.”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빠 호텔 옆이라 혹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나 그곳의 파스타가 먹고 싶은 그녀는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힐끗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옷을 본 기사는 말했다.
“좀 먼데……. 거기 가시는 거죠?”
“가요. 빨리!”
그녀는 오랜만에 히터가 틀어져 따뜻한 택시 안의 공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제가 타고 다니던 아버지의 벤츠나 제 포르쉐의 좌석이 어떤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차장 밖을 바라보면서 지하 차고에 있을 제 박스터가 너무나 그리웠다.
‘너, 집 나가 봐라. 얼마나 고생인지. 나가서 니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엄마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혜원은 당혹스러웠다. 택시비가 이만 원이라니……. 한 번도 파스타의 값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적어도 이 택시비보다는 비쌀 것이 뻔했다. 달랑 만 원……. 이걸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걸까. 물론 택시 기사가 아침의 러시아워에 막혀 길에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길도 몰라 한참을 돌아갔다는 것 따위는 혜원이 알 수가 없었다. 이걸로 집에 돌아나 갈 수는 있을까. 찬바람이 부는 길에 서서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엉엉엉, 재현 씨…….”
사실은 저가 밤을 새야만 했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전화가 되지 않았다. 주인 할머니의 말도 걸렸고, 뭔가 잘못되지는 않았나, 혹 자신의 연구실까지 찾아온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데려가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넌 강간범이야! 너 순순히 혜원이 설득해서 보내. 우리 혜원이 너 같은 놈한테 절대 어울리지 않아. 걔 세진 건설 며느리가 될 애라고! 너 제대로 안 하면 감옥에 처넣어 버릴 테니까 좋은 말 할 때 혜원이 보내. 어디 네까짓 게!’
그는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혼자 두지 않는다면 어쩌란 말인가. 연구는 지금 한창 막바지였다. 이제 결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세포학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중대한 가설을 입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아마 혼자 있었더라면 이런 집 따위 올 일도 없을 것이었다. 연구실 옆에 간이침대에서 쭈그리고 눈만 붙이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눈이나 붙일 시간이 있었을까? 저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다들 빈둥거리면서 어떻게 연구 결과나 나면 제 이름이나 논문 뒤에 실어 볼까 하는 속셈이 뻔한 인간들이 득시글했다. 이런 사정만 아니라면…… 좀 더 여기에 신경을 썼더라면 안 교수의 눈에 더 들 만큼의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에게는 여자와 아이가 있지 않은가. 제가 신경 써야 할 여자와 아이가. 미끄러운 길을 괜히 조바심에 뛰어가다 미끄러질 뻔했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집에 왔을 때 불이 꺼져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방 안에 뛰어 들어갔다. 온기는 있었지만 어두웠다. 그는 불부터 켰다. 그러자 구석에 혜원이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쪼그리고 있었다. 갑자기 콱 쏟아지는 것 같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수많은 두려움에 그는 소리부터 질렀다.
“혜원아!”
그가 튕기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집에서 뭐라고 해?”
그는 다분히 그녀의 엄마가 한 말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우리 집이 왜요? 뭐 잘못이에요?”
혜원이 팅팅 부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과는 다른 가시가 묻어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의 기세 때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우리 집이 잘사는 게 뭐가 문제냐고요!”
“…….”
그녀의 엄마가 그의 뺨을 때리며 했던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쑥 들어가고 눈물자국이 있는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야윈 혜원의 눈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달리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아침을 생각해 내고 말을 꺼냈다.
“밥은 먹었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몰라……. 몰라요. 엉엉엉. 몰라. 못 먹었어요.”
“왜?”
그녀는 울기만 했다.
“그걸 택시비로 다 썼다고?”
돈 만 원이 아쉬울 때였다. 그도 큰맘 먹고 그녀에게 준 마지막 여윳돈이었다. 뱃속의 아기와 따뜻한 것을 먹을 만큼 먹으라고 준 돈이었다.
“비올레타의 파스타가 먹고 싶었단 말이에요. 난 가까운 줄 알았지. 택시비가 그렇게 비쌀 줄 몰랐단 말이에요. 엉엉엉. 배고파.”
“근처에 가면 되잖아. 이 근처에도 많은데…….”
그가 치솟는 그 무엇을 억누르며 말했다.
“거기밖에 모른단 말이에요. 나 먹고 싶은 거 먹으라고 했잖아. 택시비만 준 재현 씨도 잘못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택시비냐구. 그거면 몇 끼를 먹는데!”
그는 목소리가 커졌다. 옆방에 다 들릴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이미 목소리는 나온 뒤였다.
“왜 그래요, 난 몰랐단 말이에요!”
혜원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둘 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날은 추웠다. 그는 몸이 피곤했고 그녀도 중간에 택시에서 내려 걸어온 것이 분했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비싼 게 먹고 싶으면 집으로 가!”
그건 그의 마음이었다. 가야 하니까 시간이 쫓겨서 사 줄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런 비루한 밥상 말고,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 다만 억양이 그렇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는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놀란 여자의 모습을 보기 싫어서. 그게 미안해서.
남자가 나간 방은 박차고 나가느라 차가운 바람이 가득 들어와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제가 추울까 봐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문을 꼭 닫고 간 뒤였다. 평소에도 아침은 샐러드와 곡물 스프 같은 것으로 해결하던 그녀였다. 빵이니 스파게티니 하는 것들을 좋아했지만 그런 것만 먹다간 서양 아이들처럼 엉덩이만 커지고 처진다고 엄마가 어렸을 적부터 신선한 야채니 과일이니 하는 것을 끼니마다 챙겨 주신 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이런 밥과 짜고 딱딱한 반찬 따위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어제도 배가 고파서 먹었지만 저녁 내내 생각하니 그 시뻘겋던 찌개는 다음부터 싫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렇게 나가 버리다니.
그가 다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재현이라는 남자를 사랑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이건 아닌데……. 눈앞에는 형광등마저 어두워 칙칙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리본이 프린트된 싸구려 차렵이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고파 왔다. 그게 더 우울했다. 바보같이, 싸우느라 그가 세숫물도 떠다 주지 않았다. 이도 닦지 못 했는데. 그리고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히 그들이 기다리던 세포 분열은 빨리 일어났고 다들 얼싸안고 환호를 질렀으며 안 교수와 연구생들은 다들 갈빗집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졌다. 하루 종일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여자의 그 모습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은 이미 허기의 정도를 넘어서 속이 시려 오고 있었다. 프렌치토스트라는 걸 파는 데가 없어서 그는 학교 앞 토스트 가게에서 제일 비싼 토스트 두 개를 사서 식을세라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날따라 날은 더욱더 찼고 바람이 몰아쳤지만 그는 미안한 마음에 한달음에 언덕을 올라갈 수 있었다. 집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따듯한 공기가 가득했다.
“왔어요? 재현 씨? 오늘 늦는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반갑긴 하지만 뭔가 껄끄러웠다. 아침에 제 탓일 거라 생각하니 미안스러워졌다. 여자가 저를 반겨 주는 게 정말로 다행이다 싶었다.
“밥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먹었어요.”
그녀가 대답하자 그는 안색이 굳어졌다. 둘러보니 아침에 그냥 치웠던 밥과 반찬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설거지까지 되어 있었다.
“설거지 네가 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손이 좀 시려웠어요.”
그는 품에 안고 있던 토스트를 꺼내 놓았다. 식어 가긴 했지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라는 말보다는 두 손을 내밀어 지금은 따뜻한, 그러나 어쩐지 거칠게 느껴지는 여자의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 찬물에 설거지 한번 한다고 해서 손이 거칠어질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모두 제 잘못 같아서 미안하기만 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찍 와서 좋네. 하루 종일 너무 심심했어요.”
그는 손을 내밀어 여자를 꼭 안았다. 품에 안기는 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아득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누가 부르는데?”
“절요?”
그는 산더미 같은 데이터를 뒤지고 있다가 자신을 찾은 대학원생 선배의 말에 표정이 굳어져 대답했다. 누구지…… 혜원인가? 화해를 했다고 하지만 공주같이, 아니 여왕같이 살던 여자에게 누추한 움막보다 못한 그의 집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아닌 척하지만 그게 눈에 보이니까 그의 마음은 더욱더 불편해졌고 알게 모르게 그게 자꾸만 불쑥거리며 튀어나고 있었기에 혜원이 왔을 거라 생각하니 그는 갑자기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그는 밖으로 나서면서도 갑갑해졌다. 이제 그냥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도 해야 할 일도 많았고 피곤했으며 날은 풀릴 기세가 없이 연일 최저 기록을 갱신하며 맹추위를 떨치고 있었다. 원래 남학생들만 있는 쪽방인지라 여자가 있는 것에 대해 아침부터 옆방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온 터에 그녀가 바깥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뭔지 모르게 화가 나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솟아오르고 있었다. 막 대학원 연구실 뒷문으로 나왔을 때 그는 눈앞의 광경에 어리둥절해서 멈춰 서야만 했다. 교수님들의 차도 대지 못하는, 연구 자재용 차량만 드나드는 공간에 새까만 외제 승용차가 포진해 있었고 웬 검은색의 정장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가 서 있었다.
“길재현 씨?”
남자의 입에서 험악하게 제 이름이 나오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차의 뒷좌석 문이 열렸다. 덩치 좋은 남자가 문을 열려고 했었는지 고개를 숙였지만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기세 좋게 문이 먼저 열리고 뭔가 희끄무레한 옷을 입은 누군가가 용수철에 튕기듯 일어나 나오는 게 보였다.
“누구신…….”
그가 말을 채 내뱉기도 전이었다. 내려선 여자의 손바닥이 기세 좋게 뺨을 올려붙여 공터에 요란한 소리가 울린 뒤에 터진 욕설로 그는 이 아름다운 중년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개새끼! 너 같은 개새끼가 감히 우리 혜원이를 넘봐?”
9.
“이봐, 학생.”
터진 입술을 닦으면서 그는 오랜만에 듣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지?”
“죄송합니다.”
아래층에는 잘 내려오지 않는 주인집 할머니였다.
“우리 집은 남학생들만 있는 집이야. 이게 무슨 짓인가.”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요.”
“내가 자네 딱한 거 알아서 방세 밀려도 뭐라 안 했네만. 이건 아닐세.”
“죄송합니다.”
“다시 말하지 않게 해.”
“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할머니가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 찬바람이 몰아치는데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선 그는 맨 끝에 있는 자신의 방 앞으로 갔다. 보기에도 화려한 하얀색의 여자 구두에는 반짝거리는 보석 장식이 박혀 있었다. 얼른 구두를 들어 옆에 있는 신발장으로 쓰는 낡은 책꽂이에 넣고 쓰레받기를 위에 올려 가렸다. 덜컹거리는 그의 소리를 들었을까.
“재현 씨?”
제 이름인데도 그는 깜짝 놀라야 했다.
“아…… 나야.”
잔뜩 골이 난 표정의 혜원보다는 후끈한 방 안의 열기가 더 먼저 얼굴에 닿았다. 그는 서둘러 보일러부터 내렸다.
“나 추운데요.”
“공동으로 쓰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혜원은 그래도 그가 왔다는 사실이 더 좋은 듯했다.
“여기…… 화장실…… 다른 데 없어요?”
윗집에 노인 내외와 반지하 같은 아래층에 네 개의 방이 있는 구조의 전형적인 대학가 셋집이었다. 남학생들만 있는 집이니 화장실은 당연히 공동이고 남자용 변기가 노출돼 있고 옆에는 쭈그리고 앉는 수세식 변기만 달랑 있는 바깥 화장실이 다였다.
“비데도 없고…….”
제 얼굴에 난 생채기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걸까. 자기에게 무슨 일 있냐고 호들갑스럽게 묻는 여자에게 둘러댈 변명 따위를 생각하며 그 추운 길을 오는 내내 생각에 잠겼던 그는 허탈함에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에 구립 문화회관에 가 보자.”
여자의 입이 뿌루퉁하게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또 일찍 나가야 했다. 깜빡 잊은 문풍지가 더욱더 간절한 밤이었다. 그는 떨고 있는 혜원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옛날 노트들을 찢어 문틈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는 품을 파고드는 여자가 있어 오히려 좋았다. 혼자 자는 것보다 훨씬 따뜻하니까. 감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는 긴 머리는 꼭 묶은 채였다. 도무지 머리를 감을 엄두가 나지 않는 날씨와 장소인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달리, 강철도 뚫을 것 같은 젊은 혈기에 여자를 안기만 하면 버릇처럼 솟아나오는 욕구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밑으로 파고들었다. 늘 그의 손길을 좋아하던 여자가 오늘은 그의 손을 잡았다.
“나 못 씻었어요. 만지지 마.”
며칠째 옷도 갈아입지 못한 여자가 거의 미칠 지경이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여자에게 필요한 칫솔이나 컵 등을 사면서도 여자의 속옷 따위를 신경 못 쓴 남자의 무심함은 무지에서 온 것이었다.
“괜찮아.”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 말라니까요.”
“난 괜찮아.”
“싫어, 더러워요.”
“…….”
공동으로 있는 화장실에 갈 수 없는 그녀는 며칠째 그가 데워다 떠 주는 세숫물에 세수와 양치만 했는지라 딴에는 남자의 입맞춤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였다. 그의 손길이 멎고 바람 소리만 적막을 요란하게 울렸다.
“화…… 났어요?”
화…… 난 게 맞았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가. 이 모든 현실에 화가 났다. 제 여자 하나 어찌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여자의 돈만 믿고 안일하게 모든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누리기만 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같이 이야기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에 대해서.
“재현 씨…….”
여자가 오히려 그를 안아 왔다. 그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몸은 제멋대로 정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늦게 왔기 때문에,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악담을 듣느라 마침 찬거리조차 마련하지 못한 아침이었다. 수도가 꽝꽝 얼어서 세수도 할 수 없었다. 집 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연일 전기장판만 틀어 댔더니 머리가 아팠다. 혜원도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렸고 훌쩍거리는 콧물에, 목이 가라앉은 게 감기 초기 같았다. 망설이던 그는 마지막 비상금 3만 원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디 따뜻한 데 가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와. 나 오늘도 늦어. 미안해.”
“고마워요, 재현 씨.”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는 듯하게 느껴진 건 제 자격지심이라 생각하고 그는 문을 나섰다.
“나오지 마. 좀 있다 해가 나면 나가. 지금은 너무 추울 테니까.”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쓰린 속을 안고 그가 말했다.
“알았어요. 잘 갔다 와요.”
너무나 천진난만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아픈 속도 잊을 수 있었다. 막 그가 나서는데 옆방에서도 두 학생이 나섰다. 역시 그들도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어, 일찍 가네?”
평소에는 눈인사도 잘 안 하던 사이였다.
“예쁘던데. 재주도 좋아.”
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닌지 구별하긴 힘들었지만 혹 얇은 문으로 안에까지 들릴까 그는 고개만 까닥하고는 재빨리 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도 곧 뒤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학교에 가는 길이니 같은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 의대생은 연애할 시간도 있네.”
“것도 찐하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옆방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할 때 몇 번 신경질적으로 시끄럽다고 한 적이 있어서였다.
“밤에 잠을 못 자겠던데.”
“본인들도 못 잤을 텐데 뭐.”
“으히히히.”
그는 손을 들어 귀를 막을 수는 없기에 걸음걸이를 더 빨리 해야만 했다.
“좋겠다. 의대생은 좋다고 대주는 여자들이 줄을 섰나 보다.”
그는 입술만 꾹 깨물 뿐이었다.
세수도 못한 채 머리만 겨우 듬성듬성 빗은 꼴은 거울에서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혜원은 한숨을 내쉬다가 코트를 걸쳤다. 아무리 깃을 올려 봐도 인간의 몰골이 아닌 듯했다. 구석에 있는 전기밥솥의 탄 자국을 흘끗 보고는 그가 꺼내 놓은 만 원짜리들을 들고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섰는데 제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더러운 바닥에 발바닥을 딛고 싶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얇은 장판 위에 뭔가가 버스럭거리는 것 같아 그에게는 말을 못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한참 만에 더러운 쓰레받기 밑에 모양도 없이 푹 찌그러진 제 신발을 보고 잠깐 화가 난 그녀는 체념한 채 신발을 신었다. 차가운 얼음덩이 속에 발을 들이민 것 같아 소름이 쫙 끼칠 정도였다. 손끝이 시리고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이런 날씨가 몸서리쳐졌다.
“샤워도 하고 싶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웬 할머니. 자신을 왜 째려보는 걸까 생각하다 그녀는 그 눈길을 무시하고 문을 나섰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정말이지 사람이 살 데가 못 되네.”
그 앞에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던 말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나오는데 뒤에 할머니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위에 종종걸음을 치며 나섰다. 버스나 지하철 따위는 타 본 적이 없었다. 택시조차도 몇 번 타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아무리 길을 가도 굽이진 골목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길을 가도 택시가 다니는 큰길은 보이지 않고 귀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으며 어제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속은 허기로 짜증이 났다. 간신히 골목길을 나오는 택시를 타고 그녀는 말했다.
“비올레타요.”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고급 파스타 집이었다. 이 시간에 하려나? 그러나 택시 기사는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 어디 있는 거죠?”
“기사 아저씨가 알죠. 거기가 어디더라. 아, 쉘튼 호텔 근처예요.”
그러나 생각해 보니 아빠 호텔 옆이라 혹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나 그곳의 파스타가 먹고 싶은 그녀는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힐끗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옷을 본 기사는 말했다.
“좀 먼데……. 거기 가시는 거죠?”
“가요. 빨리!”
그녀는 오랜만에 히터가 틀어져 따뜻한 택시 안의 공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제가 타고 다니던 아버지의 벤츠나 제 포르쉐의 좌석이 어떤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차장 밖을 바라보면서 지하 차고에 있을 제 박스터가 너무나 그리웠다.
‘너, 집 나가 봐라. 얼마나 고생인지. 나가서 니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엄마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혜원은 당혹스러웠다. 택시비가 이만 원이라니……. 한 번도 파스타의 값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적어도 이 택시비보다는 비쌀 것이 뻔했다. 달랑 만 원……. 이걸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걸까. 물론 택시 기사가 아침의 러시아워에 막혀 길에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길도 몰라 한참을 돌아갔다는 것 따위는 혜원이 알 수가 없었다. 이걸로 집에 돌아나 갈 수는 있을까. 찬바람이 부는 길에 서서 혜원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엉엉엉, 재현 씨…….”
사실은 저가 밤을 새야만 했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전화가 되지 않았다. 주인 할머니의 말도 걸렸고, 뭔가 잘못되지는 않았나, 혹 자신의 연구실까지 찾아온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데려가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넌 강간범이야! 너 순순히 혜원이 설득해서 보내. 우리 혜원이 너 같은 놈한테 절대 어울리지 않아. 걔 세진 건설 며느리가 될 애라고! 너 제대로 안 하면 감옥에 처넣어 버릴 테니까 좋은 말 할 때 혜원이 보내. 어디 네까짓 게!’
그는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혼자 두지 않는다면 어쩌란 말인가. 연구는 지금 한창 막바지였다. 이제 결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세포학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중대한 가설을 입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아마 혼자 있었더라면 이런 집 따위 올 일도 없을 것이었다. 연구실 옆에 간이침대에서 쭈그리고 눈만 붙이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눈이나 붙일 시간이 있었을까? 저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다들 빈둥거리면서 어떻게 연구 결과나 나면 제 이름이나 논문 뒤에 실어 볼까 하는 속셈이 뻔한 인간들이 득시글했다. 이런 사정만 아니라면…… 좀 더 여기에 신경을 썼더라면 안 교수의 눈에 더 들 만큼의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에게는 여자와 아이가 있지 않은가. 제가 신경 써야 할 여자와 아이가. 미끄러운 길을 괜히 조바심에 뛰어가다 미끄러질 뻔했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집에 왔을 때 불이 꺼져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방 안에 뛰어 들어갔다. 온기는 있었지만 어두웠다. 그는 불부터 켰다. 그러자 구석에 혜원이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쪼그리고 있었다. 갑자기 콱 쏟아지는 것 같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수많은 두려움에 그는 소리부터 질렀다.
“혜원아!”
그가 튕기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집에서 뭐라고 해?”
그는 다분히 그녀의 엄마가 한 말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우리 집이 왜요? 뭐 잘못이에요?”
혜원이 팅팅 부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과는 다른 가시가 묻어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녀의 기세 때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우리 집이 잘사는 게 뭐가 문제냐고요!”
“…….”
그녀의 엄마가 그의 뺨을 때리며 했던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쑥 들어가고 눈물자국이 있는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야윈 혜원의 눈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달리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아침을 생각해 내고 말을 꺼냈다.
“밥은 먹었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
“몰라……. 몰라요. 엉엉엉. 몰라. 못 먹었어요.”
“왜?”
그녀는 울기만 했다.
“그걸 택시비로 다 썼다고?”
돈 만 원이 아쉬울 때였다. 그도 큰맘 먹고 그녀에게 준 마지막 여윳돈이었다. 뱃속의 아기와 따뜻한 것을 먹을 만큼 먹으라고 준 돈이었다.
“비올레타의 파스타가 먹고 싶었단 말이에요. 난 가까운 줄 알았지. 택시비가 그렇게 비쌀 줄 몰랐단 말이에요. 엉엉엉. 배고파.”
“근처에 가면 되잖아. 이 근처에도 많은데…….”
그가 치솟는 그 무엇을 억누르며 말했다.
“거기밖에 모른단 말이에요. 나 먹고 싶은 거 먹으라고 했잖아. 택시비만 준 재현 씨도 잘못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택시비냐구. 그거면 몇 끼를 먹는데!”
그는 목소리가 커졌다. 옆방에 다 들릴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이미 목소리는 나온 뒤였다.
“왜 그래요, 난 몰랐단 말이에요!”
혜원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둘 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날은 추웠다. 그는 몸이 피곤했고 그녀도 중간에 택시에서 내려 걸어온 것이 분했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비싼 게 먹고 싶으면 집으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