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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그는 해야 할 말이 아니라는 걸 말을 하면서는 몰랐다.
“나도 가고 싶지만 어떻게 가!”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가 멈칫한 것을 보고 혜원도 제 입에서 말이 잘못 나온 것을 깨달았다. 그게 정말로 제 본심이었을지도 몰랐다.
“가! 전화해. 그 잘난 기사보고 모시러 오라고 하라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정말 그 깊은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그 말이 듣고 싶었다는 사실이, 저를 미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당연한 건데, 어리고 이런 생활이 한없이 불편한 여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왜 저는 그것을 이해 못하고 제가 할 만큼 했지만 여자가, 여자가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 버린 거라고 제 스스로에게 변명하려는 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혜원이 소리쳤다. 그러나 속에 있는 마음과는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지 못했다.
“여기 있는 게 싫잖아. 구질구질하고 씻지도 못하고 춥고 배고프잖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해. 난 원래 이렇게 살았어. 공주같이 여왕같이 산 너하고는 달라. 그러니까 돌아가!”
그가 소리 질렀다. 그때 벽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 좀 조용히 합시다. 사랑싸움은 밖에서 해.”
옆방에서 나는 소리에 놀란 혜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낡은 책상 위 유리 밑에는 검은색 종이에 하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 애기는 어쩌구……. 내가 집에 돌아가면 우리 애기는…….”
옆방의 소리 때문에 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책상을 내리쳤다. 쾅 소리가 요란했지만 유리가 깨지지는 않았다.
“나……보고 어쩌라고. 나보고.”
혜원도 울기만 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람은 더욱더 심해졌다.
“안…… 가면 안 돼요?”
“안 돼.”
김치와 끓인 누른 밥으로 겨우 허기를 면한 두 사람 사이에는 냉기만 흘렀다. 추운 밤 내내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였다. 밤에 화장실을 가겠다고 나갔다 온 후로 그녀는 밤새 울기만 했다.
“하루쯤은 나와 있어 줄 수도 있잖아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나도 너무 힘들었다고요. 몰라서 그런 건데…….”
“알아. 미안해, 나도. 하지만 오늘이 중요한 고비야. 연구실의 막내라서 이렇게 빠지면 안 되는 거야, 원래.”
“그게 나랑 우리 애기보다 중요해요?”
혜원이 물었다.
중요해……. 이걸 해야 내가 돈을 벌 수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고작 40만 원이지만 난 그걸 벌어야 해……라고.
“오늘만……. 오늘만이야. 오늘만 참아.”
“미워…….”
잘 다녀와요 재현 씨,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여자가 같이 있다고 해서 밥을 차려 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자의 가시 박힌 말 한마디에 제대로 눈 한번 붙이지 못한 그는 점점 지쳐만 갔다.
“…….”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제 왜 자신이 미안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까지 가 버렸다.
“능력도 좋다, 학부생.”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하는 것이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저의 옆구리를 쿡 쑤셔 대는 것만 같았다. 저 말은 제가 학부생으로 연구실에 들어온 것을 이야기하는 거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능력이 좋아야만 할 일이니까. 그런데 왜 그 말이 다른 뜻으로 들리는 걸까. 등 뒤로 지나가는 선배의 말을 잊으려고 애쓰고 허락을 구하는 그의 고개는 뚝 떨어져 있었다.
“너 교수님 빽 믿고 그러는 거냐?”
“아닙니다. 절대로…….”
아무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가야만 했다. 방금 온 전화…….재현 씨만 부르다 뚝 끊긴 전화……. 무슨 일이 있었다. 가야만 했다.
“너 자꾸 그러면 욕먹는다.”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문……. 진짜냐?”
어디까지, 어떤 소문인지 정작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할 말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처신 잘해. 너 앞으로 공부만 죽어라 해도 여기 붙어 있기 힘들다. 내가 너 아껴서 하는 말인데,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거다.”
뭘…….
뭘 어떻게 정리를 하란 말인가. 그는 피가 안 통하도록 주먹을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보일러가 켜진 채 방문이 제대로 닫혀 있지도 않았다. 주인 할머니가 나와서 한마디 했다. 시커먼 옷 입은 남자랑 웬 여자랑 와서 끌고 갔다고, 동네가 떠나가라 난리가 났었으니 이젠 좀 방을 빼 달라고…….
떨어진 신발만 뒹굴고 있었다. 제 발로 나가지도 못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방 안에서 끌려 나갔어야만 할 만큼……. 죄를 지은 건, 분명 자신이었다. 그렇게 악담을 퍼부으며 싸웠지만 정말로 여자가 제 집으로 이렇게 끌려갈 줄은 몰랐다. 그는 여자에게 그렇게 말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자의 휴대폰조차 저 방구석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제 영영 여자에게 연락마저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자가 어디 사는지, 여자의 집이 어느 동네에 있는지도 모르고 저 어린 여자의 뱃속에 제 자식까지 만들어 놓은 뻔뻔한 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무로 된 책상 유리 밑에 며칠 전 산부인과에서 가져온 검은색 바탕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종이가 끼워져 있는 게 보였다.
불쌍한 녀석…….
넌 어떻게 되는 거니.
그는 갑자기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뭔가가 이 일련의 사건들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덜컥거리는 알루미늄 문도 닫지 않아서 내내 보일러가 돌아가던 방 안의 온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큭……. 큭큭.”
웃는 소리인지 우는 소리인지 저도 구별 못할 소리가 제 입술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데 그것 또한 들리지 않았다. 여자가 보고 싶은가, 아니 그녀가 불쌍한가, 그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처지가 저주스러운 것인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 실험의 성공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자네의 덕을 봤다고 생각하네.”
“……감사합니다.”
그는 겨우 대답을 했다. 안 교수님의 연구실은 따뜻했다. 그가 늘 내주는 박하차는 따뜻하지만 목구멍을 넘기면 싸한 맛이 났다. 언젠가 저도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고 조교수가 되고 교수가 될 날이 있다면 이렇게 연구실에 박하차를 놓고 마시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박하차를 놓고도 그는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먼. 뭐 이놈들이 또 세도를 부리느라 자네만 고생시켰겠지. 그냥 학부 시절의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넘겨야지 어쩌겠나. 음, 내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네?”
자꾸만 어디론가 새 나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교수님이 자신만 직접 부른 것은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그의 이 구렁텅이 같은 생활에서 제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단 하나의 실마리가 바로 안 교수님의 연구와, 그의 연구실과 그의 부름이 아닌가.
“내가 이제 시작하는 학기에 듀크 의대로 가게 됐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미국 내에서는 남부의 하버드라 할 만큼 시설이 좋고 연구하기가 좋은 학교지. 그쪽 의대에서 날 초청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이번에 급하게 보고서를 낸 세포대사이상성에 대한 이 연구 때문이야. 그쪽의 제프리 하워드 의대 부학과장이 같이 대학원에서 공부한 동기인데 이 연구 주제에 대해서 상당히 흥미 있어 했거든. 그래서 이번에 그쪽에서 같이 연구를 하자는 거지. 본론은 말 일세. 내가 그쪽 학교에 갈 때 교환 학생을 데려가기로 했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이성호 학생이 갑자기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되지 않았나. 엊그제 연락이 왔는데 좀 예후가 안 좋아서 당분간 학업을 계속하기가 힘들게 됐네.”
“…….”
그는 잠자코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정황의 앞뒤가…… 그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생각에 이번 연구에 아이디어를 낸 자넬 추천하려고 해. 그쪽 학비가 좀 비싸긴 하지만, 추천이니까 장학금으로 해결될 것 같아서. 자넨 학비는 걱정 없을 거 같아. 물론 가서 열심히 해야겠지만. 난 좀 급하게 이번 말에 출국하네. 그쪽은 9월 학기가 시작이니까 이왕 가는 거 나랑 같이 나가는 게 편할 걸세. 내 연구원들한테는 말 안 했네. 성호 대신에 순번 대기 줄이 긴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가능성에 무게를 준 것이니까. 그러니 신나서 떠벌리지는 말고. 밖에 있는 우식이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거 물어보고 준비하게. 혹 가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다는 걸 단언하는 교수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말끝이 흐려질 만큼 뭔가가 울컥 또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투자야. 투자. 게다가 자네의 아이디어 덕에 그런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거니까. 그 정도 대가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그런 줄 알게. 가 봐. 소문내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실을 나오면서 그는 심장이 벌컥거려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에게도 기회란 게 오는구나. 듀크 대학이라니…….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였다. 지금 자신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가 옆에 붙은 조교실로 가자 교수실만큼이나 책이며 서류들이 가득 쌓인 책상에 앉아 있던 팍삭 늙어 버린 외모를 지니고 그에 어울리게 머리카락조차 듬성듬성 빠져 가는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조교님!”
“대단해!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
“듀크라니, 횡재야, 횡재. 여기도 물론 좋지만 그쪽에 가면 시간이 절약되는 거지. 거기 대학원은 진짜 좋다고 하더라. 거기서 잘 풀리면 존스홉킨스로 갈 수도 있다고 했어.”
“아, 네…….”
“대신 거기 생활비가 만만치 않아. 너 지금 해부학 2 수업하는 조우상 교수님 알지?”
“네.”
“그분도 거기 출신이잖아. 뭐 거의 장학금으로 다니셨다는데 물가가 장난 아니라더라. 교수님 이번 달 말에 가시는데 내가 비행기 표 예약하려고 하거든. 어떻게, 네 것도 같이 할까?”
“아…… 그게 비용이 얼마나…….”
그러나 텅 빈 방 안에 들어온 그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그랬듯이 싸늘한 냉기만 가득한 빈방. 그러나 문 앞에는 여자의 맵시 있는 낮은 굽의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전기장판 위에는 여자가 리본 그림이 귀엽다며 고른 빨간색의 이불이 덮여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핑크색 하트가 그려진 머그컵에 꽂혀 있는 두 개의 칫솔과 가운데가 푹 눌려진 치약이 있었고 그 옆에는 싸구려 스킨로션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집에 혼자 있으면서 보겠다고 들고 온 산부인과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산모와 아기에 관한 책들과 팸플릿까지…….
그는 빨간색의 이불 옆에 스르르 무너지듯 앉았다. 그러나 이불 위에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옆에 쪼그리듯 앉을 뿐이었다. 여자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저 몇 년만, 몇 년만 더 지난 다음에 만났더라면, 하다못해 레지던트라도 되어 가운이라도 입고 설칠 수 있을 때였더라면,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당장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교환 학생의 신분으로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게다가 저런 엄청난 명성을 지닌 교수님과 같이 간다는 것은 교환 학생으로서 크나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 경쟁이 치열한 서울 바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운이 트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제 아이를 가진 여자가 이렇게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끌려갔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집안에서 반대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마치 구름과 진흙 같은 그녀와의 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며칠간의 생활이 어떠했던가.
긴장이 탁 풀려 버린 그가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빨간색의 이불에 막 몸을 눕혔다. 싸구려라 그런지 아직도 휘발유 냄새 같은 것이 나는 것만 같은 폴리에스테르 이불에는 여자의 향기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걸까? 이 싸구려 이불 밑에서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었다. 아니, 불행해 보였다. 저 검은색 종이 속의 동그라미……. 저 녀석도 과연 여기서 행복할 수 있을까. 저 녀석이 손발이 생기고 눈꺼풀이 생기고 태동을 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니, 저 여자의 몸을 열고 나와서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는 쪼그리고 앉아 연구실에서 감아 뻐덕거리는 머리카락을 움켜쥘 뿐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저 검은색의 동그라미 속에 영혼이란 게 벌써 깃들어 있지 않기를…….
그는 빌었다.
그냥 단순한 세포의 분열이 만들어 낸 큰 세포 덩어리이기를…….
그냥 잉태되지 않은 채였기를…….
세상의 이런 아픔을 알지 못 하기를.
* * *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알아볼 방법도 없었지만 알아볼 시간도 없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냐고 누군가 손가락질을 할지도 몰랐지만 그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그를 손가락질할 일은 또 다른 곳에도 있었다. 막 전산실에서 듀크 대와 주변에 대해, 유학 준비를 위한 것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연구실에 갔을 때였다.
“어이, 반반한 얼굴의 학부생!”
그는 꾸벅 인사를 함으로써 시비를 걸려는 사람에게 저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뜻을 완곡하게 내비추었다. 그것 말고도 머리 아픈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새끼가 선배가 말씀을 하시는데 무시를 해?”
“야, 참아라.”
옆에서 말리는 소리도 그다지 진정이 들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에 교환 학생 됐더라? 아주 교수님한테 찰싹 붙어 있더니만 비결이 뭐래?”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도 모를 거라 했지만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특히 비아냥거림에 앞선 사람은 몸이 아파서 유학을 갈 수 없는 사람의 바로 다음 서열이었다.
“새파란 새끼가 무슨 꼬리를 쳐서. 하긴 뭐 맨날 주차장에 서 있는 삐까뻔적한 차 끌고 나니는 반반한 계집애도 끼고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책을 챙기기 시작했다.
“왜 그 여자네 집에서 찔러 주던? 걔 무지 유명한 앤데 잘도 꼬셨더라. 하긴 뭐 보통 인물이어야지.”
“…….”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는 건, 다들 말릴 생각이 없다는 뜻일 것이었다.
“무슨 호텔 사장 딸이라며? 왜 처갓집에 돈도 많을 텐데 그렇게 궁상떨고 다니면서 이런 공짜 교환 학생 자리나 노리냐구! 어린 새끼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가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다들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는 게 역력해 보였다.
“어쭈, 새끼가 어디 선배 앞에서 소릴 질러? 교수님이 총애하니까 뵈는 게 없냐?”
“야, 그만 해라.”
“저 새끼는 한번 손봐 줘야 해. 어린 새끼가 뻣뻣하긴!”
“그만 하십시오!”
“이 새끼야, 조용히 해!”
멱살을 잡는 손길이 거세게 그의 숨통을 막아 쥐었다.
저가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는 자리였다. 마침 들이닥친 조교수들 덕에 사태는 진정됐지만 이미 몇 대의 주먹이 날아든 그의 얼굴은 전에 터졌던 입술이 다시 터져 흉하게 번져 있었다. 뭐래도 좋다. 이 지긋지긋한 곳 떠나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는 화장실의 차디찬 물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겨우 간들간들하게 비행기 표 값만 되는 수중에 있는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가야 했다. 짐도 싸야 했고 여권도 만들어야 했다. 시간이 촉박하기에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버리면 머릿속에 든 것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흔들고선 찬바람 사이를 뚫고 은행으로 향했다.
“교수님은 바쁘셔서 직항 타고 가실 건데……. 같이 가는 거 아니야?”
그는 당혹스럽게 서 있었다. 그가 알아본 바로는 80만 원대 항공편도 있었던 거 같은데 항공 요금이 배나 차이가 났다.
“같이 가, 옆에 붙어서 가라구. 하긴 뭐 교수님은 비즈니스 석이라 비싸겠지만 넌 이코노미라도 같은 걸 타고 가. 슬쩍 옆으로 가서 이것저것 물어볼 수도 있고.”
“아, 그건 그렇지만…….”
“왜 빠듯해?”
안 교수의 조교인 우식이 힐끗 쳐다보았다.
“하긴 뭐 교환 학생으로 가는 애들이 집이 널널하지 않으면 직항편 타고 가긴 힘들지. 하여튼 날짜가 29일이니까. 너도 전날에 가던지 해서 도착하는 시간 맞춰 봐. 난 그럼 교수님 꺼만 예약한다.”
“아……. 네, 그렇게 하세요. 제가 알아보고 가지요.”
“짐 너무 많이 가져가지 마. 그것도 다 돈이다. 아, 그리고 거기 좀 남부라 따뜻한 건 알지? 두꺼운 옷 많이 가져갈 필요는 없다.”
“네, 감사합니다.”
“저기, 어찌어찌해서 애들이 알게 됐나 보더라. 특히 형진이 무지 열 받았을 거야. 원래 성호보다 걔가 더 오래됐거든. 그런데 너도 봐서 알잖나. 그놈 꼴통끼 다분한 거. 안 교수님 철저하게 아메리칸 식이시라 서열이니 순서니 하는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니까 그런 거야. 넌 진짜 운 좋은 거다. 그러니까 뒤에서 뭐라 해도 그냥 조용히 있어. 어디 덤비지 말고. 그리고 너 해코지할지 모르니까 연구실에 가지 마.”
이미 당했습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는 그는 그냥 꾸벅 인사만 하고 나왔다. 사무실 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멎어 있었다. 대신 꾸물거리는 하늘이 뭔가 확 쏟아질 것만 같았다. 겨울이…… 너무 길고 춥게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만 이 꾸물거리는 하늘 밑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를 하면 할수록 그는 빠듯한 사정에 우울해졌다. 보증금도 내지 못한 월세로 녹아 없어져 방을 뺀다 해도 턱없이 모자라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 이상 연구실에 갈 필요가 없어진 지금, 한 시간 반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전에 차창에 지나가면서 보았던 화려한 호텔이었다. 저기에 들어가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적어도 가기 전에 얼굴은 한번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보다도 화려하고 멋들어진 문 앞의 벨보이조차 어찌 할 수 없었다. 전에 그녀와 호텔에 드나들 때는 저런, 자기 또래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드나들지 않았던가.
한동안 화려한 회전문이 있는 곳을 쳐다만 보고 있다가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그렇게 간 뒤로 안 교수의 사무실 외에는 전화 오는 곳이 없었었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보니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