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4화
* * *
“엄마, 나 절대 안 돼. 이 애기는 우리 애기란 말이야!”
“미쳤어? 너 지금 돈 거 아니야?”
“안 돼……. 엄마…….”
아무것도 먹지도 않은 채 울기만 하는 혜원은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였다.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경기도 변두리에 있는 병원까지 와 숨어 있어야 했다. 세진 건설의 막내며느리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생판 모르는 대학생 녀석이랑 이런 짓이나 하다니. 경숙은 머리가 찌근거렸다. 가뜩이나 애 아빠의 일도 복잡한데 딸년의 소식을 듣고 혈압이 올라 병원에 실려 갈 뻔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하루라도 날짜가 더 가기 전에 얼른 수술이라도 하고 모른 척해야 할 텐데 입에 물 한 모금 안 대고 저러고 있는 딸을 보니 속이 상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 새끼가 뭐가 좋다고 그래! 너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거야? 미친 거 아니냐고!”
“엉엉엉, 재현 씨…….”
또다시 무릎을 세우고 울고만 있는 이 철없는 딸이 불쌍하기도 했다. 어디 그런 나쁜 놈한테 걸려서…….
“넌 잘못 없어. 네가 재수가 없어서 나쁜 놈한테 당한 거라구. 수술해. 그럼 아무도 몰라. 그리고 약혼하고 다시 공부 마저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엄마는 몰라!”
“정신 차려, 이 기집애야! 지금 아빠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왜 너까지 난리냐구!”
“싫어! 싫어! 아기는 내가 키울 거야. 엉엉엉.”
“정신 차려!”
울면서도 그녀는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병실의 공기가 눈물 나게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런 것도 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한테 끌려 나오면서도 따뜻한 차와 뒷좌석의 푹신한 시트가 그리웠었다. 꾸질거리게 땟국이 흐르는 혜원을 병원의 특실로 데려와 당장 씻으라고 할 때도 뜨거운 물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이를 닦으면서 정말로 눈물이 나게 행복했었다. 깨끗한 환자복조차 그토록 좋은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게다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링거 줄에서는 그녀를 죽지 않을 만큼의 영양분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엄마! 엄마 말 잘 들을 테니까. 나 소문 안 나게 숨어 있을 테니까. 안 되면 미국이라도 가서 숨어 있을게. 애기 내가 키우면서 살면 안 돼? 엄마!”
그녀가 원하는 건 이것이었다. 그래 엄마랑 키우지 뭐. 애가 좀 크고 나면 재현 씨도 의사 선생님이 될 거고, 그러면 엄마 앞에도 당당해 질 거야. 애기도 거기보다는 우리 집에서 크는 게 더 행복할 거야. 그런 좁고 더럽고 추운 데서 대체 애기를 어떻게 기른다고.
“미쳤어? 그 새끼가 그러래?”
엄마의 목소리는 강경했다.
“엄마!”
“이놈을 그냥! 넌 가만히 있어!”
철딱서니 없는 것. 딸의 머릿속을 알 리가 없는 경숙은 이를 갈면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세진 전자 사장님이 조만간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따님도 같이 보자고 웃으면서 한 말을 지켜야 했다. 딸의 뱃속에 뭔가가 있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행여 소문이라도 돌아선 안 되는 거였다. 마침 밖엔 자신을 기다리던 박 실장이 서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이미 작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들릴까 귓가에 소곤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됐네. 좋아, 어디 해 보자고. 나쁜 새끼, 가만두나 보자.”
“네, 사모님.”
경숙의 이마에 미미하게 주름이 가고 있었다. 나쁜 자식, 그때 더 혼구녕을 내 놨어야 했는데……. 이를 가는 경숙이었다.
“야, 전화 받아.”
입술이 말라비틀어진 채 얼굴이 누렇게 뜬 혜원이 팅팅 부은 눈을 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 자식이야.”
“뭐?”
겨우 입술을 달그락거리고 있는 게 이렇게 놔두면 안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자식이야. 그 자식이 너더러 수술하래.”
“뭐?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재현 씨가 그럴 리가 없어.”
“거봐, 엄마가 뭐랬어. 그런 애들 다 사기꾼이야. 의대 좋아하고 자빠졌네. 너 돈 많은 거 보고 사기 치는 거라구. 엄마가 몇 푼 집어 줬더니 바로 꼴도 안 보이게 미국으로 간다더라. 넌 수술하고 유럽으로 가. 그딴 새끼하고 마주치지도 말아야지. 재수 없게 또 미국은! 전화 받아. 지 입으로 너 수술하라고 말해 준다고 했으니까.”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받으래두!”
경숙이 내미는 휴대폰을 안 받으려고 했지만 휴대폰 저편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혜원아…….>
“재현 씨? 재현 씨 맞아요? 흑흑,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어디예요?”
며칠 만에 들은 목소리에 이 따뜻한 병실에 있는 저를 걱정할 그의 춥고 좁은 방이 떠올라 더 간절해졌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제가 한 잘못들이 자꾸만 되새김질 되듯 떠올라 철없는 그녀조차 마음에 걸렸었다.
“놀고 있네. 쳇.”
경숙이 째려보자 혜원은 고개를 돌려 휴대폰을 감싸 쥐고 급하게 물었다.
“재현 씨!”
<혜원아, 미안해. 미안한데. 수술해…….>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뭐라고요?”
<수술해. 그리고 나도 잊어.>
“뭐……. 뭐라고요?”
물기라곤 한 방울도 없을 것만 같았지만 갑자기 두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콧물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우리 애기를요? 뭐라고요?”
<수술해. 그리고 나 같은 건 잊어.>
“재현 씨…….”
<수술하라구!>
그가 악에 받쳐 소리치고 있었다.
“재……현 씨…….”
<수술해. 그리고 나 같은 건 잊어버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한테. 우리 애기한테…….”
<그 애를 니가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넌 그 애기 못 키워…….>
“어떻게……. 야, 길재현!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 어떻게…….”
* * *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기운도 없었다. 왜 눈물이 나는 거야. 이제 그 검은색의 동그라미 안에 있던 녀석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받아 버린 돈 때문에? 아니면 저가 다 들을 걸 알면서도 악담을 퍼붓는 여자의 엄마 때문에?
“욕해. 그래 난 원래 그런 놈이었어. 니가 재수가 없었어. 니 엄마 말대로. 난 이제 떠나.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넌덜머리나는 이 땅…….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 같은 거 잊고 잘 살아. 알았어?”
<나……. 사랑했잖아. 안 그래요? 우리 사랑했었잖아…….>
너무 울음이 섞인 나머지 휴대폰 저편에서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랑했나? 그게 사랑이었나? 그 꽃향기에 취해서 잠시 미망을 헤맸던 게 사랑인가? 이게 사랑이라면 다시는……. 다시는 사랑이란 걸 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이렇게 어이없이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다. 가진 것이 없어서 너란 여자와 내 아이를 잃는 고통 따위 겪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으로 끝내 버리자. 모든 걸 다 잊어버리자…….
“간다. 영원히. 그러니까 너도 잘 살아. 안녕.”
<재현 씨! 야! 길재현! 길재현!>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작디작은 휴대폰은 꽝꽝 언 보도블록 위에서 흉측하게 박살이 나고 있었다.
“됐죠? 됐습니까?”
“네. 돈은 계좌에 넣어 드리죠. 바로 확인하십시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겨울용이지만 검정색 슈트 차림이어서 길바닥에 서 있는 게 저도 괴로운 듯 들고 있던 녹음기를 끄더니 길가에 시동이 걸린 채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가 버렸다.
“참……. 돈 벌기 쉽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젖은 얼굴에 맺혀 있던 눈물이 금세 차게 식어 얼굴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이제 은행에 가야겠지.
저에게 그 통장을 찢어 버릴 만큼의 자존심도 없음에 한없이 화가 났다.
* * *
금방 끝날 거라 했다. 그러더니 정말 금방 끝났다. 잠시 눈을 감은 거 같은데 저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원래부터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던 아기는 제게 왔었는지도 모른 채 가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휴대폰 저편에는 상대방의 전원이 끊어져 있다는 여자의 목소리만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아기가 없어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생리 때 하는 패드에 피가 조금 묻어 있을 뿐이었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사과를 깎던 엄마가 전화를 받더니 급하게 나가 버렸다. 혜원은 이제 눈물 같은 것도 나지 않았다. 이게 뭐람……. 고개를 돌렸을 때, 썰다 만 사과 조각과 조그마한 과도가 보였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날 재현 씨한테 보내 줘. 그녀는 힘없이 사과에게 말했다.
“안녕……. 아가야.”
“여보,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당신은 알 거 없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편이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경숙은 제가 할 일은 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수술도 잘 끝났고, 속 썩이던 놈도 이제 치워 버렸다. 치근덕거리면서 지저분하게 들러붙지 않고 푼돈으로 끝낸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얼굴이 좀 나아지면 앞으로는 일사천리처럼 일은 잘될 것이었다. 그 집 손자가 제 딸한테 홀딱 반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여보!”
근 한 달 만에 딸의 얼굴을 보러 병실에 온 남편은 경숙에게 바깥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믿음직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옷이 그답지 않게 형편없이 구겨진 것이 들리는 소문이 사실인가 싶었다.
“홍천에…… 부도 난 거 사실이에요?”
“당신은 알 거 없대도!”
평소에는 자상하기만 하던 남편의 신경질적인 기세에 움찔한 경숙은 딸의 병실을 찾아 문을 열었다.
“혜원아, 아빠 오셨어……. 악! 혜원아!”
“혜원아!”
딸은 행복한 듯 눈을 감고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하얀색의 침대 시트는 온통 붉은빛이었고 아직도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혜원아! 아……. 혜…….”
“여보! 여보! 혜원아! 간호사! 이봐요! 여기 좀 봐요!”
경숙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병실에 울리고 그 소리를 듣고 간호사들이 우르르 뛰어나오고 있었다.
10.
잔잔한 음악 소리가 깔리고 있었다. 적당한 담배 연기, 조금은 갑갑스러운 것 같은 뜨거운 난방기에서 나오는 열기, 그리고 조곤거리는 소리가 내려앉은 사람들의 열기. 바에 어울리는, 열기에 덥혀진 공기는 사람들이 가진 일련의 경계심을 한 꺼풀 녹여 내리는 듯했다.
“마티니 하나 더.”
조금 지나지 않아 투명한 칵테일 잔에 드라이진과 베르무트가 섞였지만 무색투명한 액체에 초록색 올리브가 떠 있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들이밀어졌다. 여자의 손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매니큐어는커녕 반지도 없는 여자의 매끄러운 손이 잔을 집어 들었다.
“한 잔 더 하지 그래요.”
“내일 수술이 있어서. 게다가 차도 있고…….”
그는 반쯤 비워진 술잔을 옆으로 살짝 밀어 놓았다.
“대리기사 부르면 돼요. 한국은 그런 것도 있으니까.”
“대리기사?”
“차 대신 운전해 주는 거 말이죠. 아, 차가 좀 까다롭나. 맞다, 차는 마음에 들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깨끗했다. 맑고 명료해서 마치 백색 소음처럼 깔리는 음악 소리나 잔이 부딪치는 달그랑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듯한 대화 사이에도 정확히 들렸다.
“마음에 듭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대화 내용만 듣는다면 비꼬는 것같이 들릴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가벼운 웃음으로 넘겼다.
“어떤 분이라고, 닥터……. 아니 그냥 제이슨이라고 불러도 되죠?”
“물론입니다.”
“벤츠는 너무 칙칙하고 아우디는 너무 흔하고, 그래서 고른 거예요. 제이슨의 이미지에는 카레라 정도는 돼야 하지만. 뭐 가끔 수술하고 지치면 뒷좌석에서 편히 쉬면서 귀가하시라고 파나메라로 골랐어요. 너무 싼 티 난다고 구박하는 건 아니죠?”
“유머도 있으시군요.”
희미한 미소를 보이던 남자는 손을 들어 밀어 놓았던 술잔을 입에 대었다. 이 정도 입에 댄다고 내일 수술에 지장이 있을 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잘 보여야죠. 어떻게 모셔온 분인데. 뭐 기분이 좀 좋아지셨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여자가 할 말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알고 있다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뭐 클리닉은 아침에 돌아봤다고 하셨으니까. 보셔서 아실 거예요. 아담하고, 조용하고, 또 수입도 좋고…….”
그녀의 말은 전적으로 동의할 만했다.
“원장님은 주말에나 돌아오시죠. 오시면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할 거예요.”
남자는 여전히 술잔에만 시선이 꽂혀 있었다.
“분명히…… 포기하시는 게 많아야겠죠. 학자로서의 개인적인 열정이나 의사로서의 사명감 같은 거 말이죠. 지루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가끔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경우도 생기겠죠. 여기 오는 환자들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그것들은 그만큼의 대가를 얻게 될 거예요. 그건 장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원장님이 원하시는 건 좀 더 의미가 깊다는 거……. 알고 계시죠?”
남자는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많이 고민하셨다고 들었어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미안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지만 남자는 그런 미안스러움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약간의 오해가 있군요.”
“네?”
“저는 그다지 사명감이나 열정이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그건 다분히 오해겠죠.”
“솔직하시군요.”
여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마티니를 홀짝거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을 덧붙였다.
“거기에 저는 덤이에요.”
“남자로서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자가 웃었다. 웃음소리는 약간 히스테릭하게 들렸지만 그건 여자의 버릇일 뿐 그녀는 진심이 담긴 웃음 소리였다.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라요.”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는 거죠. 손익계산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선은 내일 수술에 집중하지요.”
“닥터 길같이 유능한 의사가 그렇게 신경 쓸 난이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환자가 스페셜 하니까. 그럼 일어나시죠.”
“그래요. 우선 수술이 먼저니까.”
여자가 일어서자 남자의 얼굴에는 차갑고 딱딱하지만 의례적인 미소가 흘렀다. 약간의 취기가 도는 여자의 얼굴에는 깊은 만족감이 흘렀다.
“밖에 대리기사 왔습니다.”
바텐더가 정중하게 이야기하고 카드를 결제했다. 그리고 귀에 달린 이어폰 마이크에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희끗하게 눈이 날리는, 질척거리는 날씨였다. 남자가 걸쳐 주는 코트를 입은 여자는 뒤를 흘끗 보았다. 진회색의 매끈한 슈트만 입은 남자는 전혀 추위 따위 느끼지 못하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만했다. 계단을 내려와 후문으로 가니 발렛 파킹을 한 포르쉐 파나메라가 소리도 없이 와 앞에 서 있었다. 남자가 익숙한 듯 뒷좌석 문을 열자 여자는 우아하게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삼성동 현대 아이파크.”
여자의 목소리에 앞에 선 낯선 사람이 피디에이를 조작하는 소리만 적막 속에 작게 울렸다.
“Cerebral Hemorrhage(뇌경색)에 새로운 방법을 쓰실 거라고 하던데…….”
“아닙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경로를 검색한 차가 출발했다. 화려한 네온 등불 빛을 지나니 차창 밖으로 희끗한 것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권위적인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여자는 어떻게든 남자와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다.
“올해는 눈이 많이 오네요.”
약간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여자가 말했다. 짙은 담배 연기와 바의 퇴폐적인 향이 없어지니, 뺀다고 뺐는데도 느껴지는 새 차의 휘발성 냄새와 함께 남자의 슈트에서 풍기는 이제는 날아간 듯한 체취는, 취기를 가장해 몸을 기댈 수 있는 용기를 내게 할 만큼 유혹적이었다. 차 안의 어두운 조명과 아까의 대화가 차갑고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제 선을 지키는 남자의 벽 하나를 허물어 버린 듯, 남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 얼마나 대단한 제안인가.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너무 시간 끌면 매력 없어요.”
남자가 가볍게 웃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고 싶었지만 여자는 그냥 기대어 있는 게 좋았다. 남자의 슈트에서 나는 청랑하고 깨끗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잠깐 올라가지 그래요?”
화려한 국내 최고가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뒷배경이라면 그것은 구미가 당기는 유혹일 수도 있었다.
“돌아가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자는 거절의 뜻을 표했다.
“그래요. 우선 수술 잘 끝내고 보죠. 내일 사람 보낼게요. 병원으로 옮기시는 게 좋겠죠?”
이것도 잠시 잠깐 이별이라 생각되는지 여자는 쉬이 문고리를 열 생각이 없어져 말을 덧붙였다.
“짐은 없습니다. 차도 있는데 제가 알아서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여자의 그런 생각에 대해 매정하도록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내일 병원에서 뵙죠. 올라갈게요.”
“네, 들어가십시오.”
더 이상 차 안에 있을 이유가 없는 여자가 그제야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나섰다. 안에 있어도 그만인 남자가 따라 내리는 것을 보고 여자는 용기가 났을지도 몰랐다. 아마 술김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제쯤 들어가, 희진아. 하는 말을 듣게 될까.”
남자가 한쪽 입술 끝을 올린 채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술기운이 올라와서인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 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제 속마음 탓일 것이었다. 그에 보답하듯 남자가 대답했다.
“조만간.”
“기다리죠.”
가벼운 목례를 하고 여전히 시동이 걸린 채 서 있는 차에 올라탔고 그 차가 대로의 수많은 차들 사이로 섞여들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저답지 않게.
차가운 공기가 차 안에 섞여 들었다.
“호텔 마셀리나.”
그가 짧게 말했고 앞에 어둠 속에 있는 대리기사는 열심히 피디에이에 검색을 하더니 띵똥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좌회전 신호를 열심히 넣기 시작했다.
아까만 해도 꼿꼿하게 앉아 있던 그는 깊숙이 시트에 기대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휘황찬란한 빌딩들의 불야성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차가 속도를 늦출 때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흩날리는 눈발들……. 불야성에 눈이 부신 건지 아니면 보고 싶지 않은 건지, 남자는 눈을 감았다.
“다 왔습니다.”
콱 잠긴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에 한참 만에 눈을 뜬 남자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호텔의 입구였고 호텔의 벨보이가 문을 열기 위해 다가왔다.
“카드뿐인데.”
“주십시오.”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깊이 모자를 눌러쓴 누군가가 카드를 받더니 아까 내비게이션으로 쓰던 피디에이 옆을 통과시켰다.
“사인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