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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내민 플라스틱 펜과 수많은 사람이 사인을 해서인지 흠집이 잔뜩 가 있는 피디에이를 내밀자 그는 사인을 했다.
“거리 할증 때문에 4만 원입니다.”
여자 대리기사라니 조금 의외다 싶었지만 몰려오는 피곤에 그는 조금 뒤에 뽑아 준 영수증을 아무렇게나 잡아 들고 이미 문이 열려 찬바람이 들어오는 차 밖으로 나갔다. 차 문이 닫히고 그가 호텔의 회전문을 향해 가려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점퍼를 입은 사람이 운전석에서 내리고 주차를 대신하는 호텔 직원이 차를 몰고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는 찌근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돌아서 호텔 안으로 향했다.
* * *
“22호 은평구 호텔 마셀리나입니다.”
피디에이에 힘없이 말했다. 찬바람 사이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쌓일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 마침 근첩니다. 기다리세요. 한 10분?>
저쪽에서 씩씩한 남자의 목소리가 걸걸하게 들려왔다.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릴게요.”
<오케이!>
운전하기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부피가 큰 점퍼를 입고 나오지 않아서, 고급차 안의 따스한 온기가 가신 뒤 한기는 더욱더 심해졌다. 종종걸음으로 버스 정거장 밑으로 들어가니 날리는 눈발은 피할 수 있었지만 바람은 여전히 찼다. 이미 버스가 끊긴 시간 지나가는 택시들은 내리는 눈이나 얼은 길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쌩쌩 소리가 나도록 달리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굴리며 서 있던 사람은 주머니에서 아직도 온기가 있는 피디에이를 꺼냈다. 터치펜으로 지난 내역을 치니 방금 전에 보았던 하얀 사인란에 유려하게 그려져 있는 사인이 보였다. 한동안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피디에이에 뚝 하고 떨어졌다. 그것에 놀란 듯 그 사람은 손으로 피디에이에 떨어진 따듯한 물방울을 지우고는 그걸 끄고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친절대리라고 커다랗게 쓰인 회색의 낡은 프레지오 봉고가 다시 빵빵거리고 있었다. 다가가 뻑뻑한 뒷문을 힘주어 여니 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우, 엄청 춥네. 앞으로 타요.”
“아니에요.”
올라타 문을 닫으니 차 안은 후끈했다. 오히려 바람 소리가 요란해진 것으로 보아 일부러 히터를 더 튼 것 같았다.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자 일부러 운전석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콜이 없네.”
“저 오늘 그만 할려구요. 어디까지 가요? 가는 데까지만 태워 줘요.”
“어? 혜원 씨 어디 아파요?”
“감기 기운이 있나 봐요. 들어가려고요.”
차를 출발시키며 고개를 힐끗거리는 앞좌석의 남자는 바로 뒤에 앉은 그녀가 보일 리가 없었다.
“어, 오늘 오랜만에 와 놓고는……. 하나밖에 안 했잖아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좋네요.”
그녀는 다시 피디에이를 꺼내 들었다.
“왜요? 아까 외제차 나가지 않았나? 뭐라 그래요? 하여튼 외제차는 차 값은 비싼데 모는 새끼들은 싸구려라.”
“아니에요.”
“다들 포르쉐라면 몸서리를 쳐서. 혜원 씨 없으면 그런 외제차 콜 못 받는데.”
그녀는 힘없이 웃었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보일 리가 없었다.
<19호 상암, 상암 월드컵 경기장 앞입니다.>
무전 소리가 났다.
“가세요. 근처네. 나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에이씨 무슨, 금방 날라 갈 거니까 괜찮아요.”
소리가 나기 무섭게 기어를 바꾸는 소리가 요란했다.
“길 미끄러운데 천천히 가요.”
“베테랑 픽업맨을 뭐로 보고! 꼭 잡아요!”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쏟아지는 콜에 픽업차 기사인 상훈은 호감이 있으나 좀 더 의미 있는 접근을 하지 못했던 혜원을 끝까지 데려다 주지는 못했다. 혜원은 더 굵어졌지만 쌓이지는 않는 눈을 헤치고 언덕을 오르려다 불빛이 환한 편의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올 때는 비닐봉지에 차가운 소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눈이 설핏하게 깔려 있는 계단을, 밑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빗자루로 눈을 쓸고 올라오느라 집 안에 들어온 건 한참 후였다. 부산스럽게 점퍼를 벗고 후끈한 집 안을 둘러보다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끝까지 올라가 있는 보일러를 다시 시간으로 맞추어 놓고는 나와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올려놓은 보일러 덕에 뜨거운 물이 잘 나왔지만 힘에 겨운 그녀는 세수를 하고 언 발을 씻어 녹이기만 하고 나왔다. 채 한 시도 안 된 시간. 원래 세 시나 네 시쯤 들어와 자야만 했다. 그러나…….
잠시 멍하니 좁은 주방에 서 있던 그녀는 그냥 일을 더 할 걸 했다 싶었지만 이미 늦었으므로 체념한 듯 구석에 있는 접이식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을 젖히고 스킨과 로션을 뻑뻑해지는 얼굴에 발랐다. 거울 속의 여자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창백하고 멍한 얼굴이었다. 묶었던 단발머리의 끝은 삐죽거리며 바깥으로 뻗혀 있었다. 화장대 안에 있던 낡은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그녀는 멍하니 거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듯 화장대 문을 닫고 일어섰다.
좁은 이인용 식탁 위에는 전자레인지며 약봉지이며 아침에 끓여 놓은 찌개 뚝배기, 주유소에서 받은 휴지뭉치, 고지서 뭉치 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아까 사 들고 온 초록색의 병이 비닐에 싸인 채 생뚱맞게 놓여 있었다. 컵 걸이에 걸려 있는 이화미용실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들어오는 하얀색 머그컵을 들고 그녀는 식탁에 앉았다. 어디선가 바람에 푸드덕거리는 비닐 소리가 났다. 아마 주인아저씨의 운동 기구들을 덮어 놓은 비닐이 또 빠져나와 바람에 몸서리치고 있는 것이리라.
손만 대도 차가울 듯 보이는 소주병에는 따뜻한 집 안의 열기 덕에 송골거리며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병을 땄다. 그리고 머그컵에 깨끗하고 무색투명한 액체를 따랐다. 마치 커피를 마시듯 반쯤 찬 머그컵을 꼭 감아쥐었지만 손에는 냉기만 가득 흘러나왔다. 한 모금 들이킨 액체의 맛이 이제는 달큰하게 느껴졌다. 혹 먹을까 하고 아침에 먹던, 마트에서 산 김을 곱게 잘라 차곡차곡 넣어 둔 플라스틱 통을 꺼내 놓았지만 뚜껑을 열지는 않았다.
“소주가 다네.”
혼자 중얼거리다가 적막함에 입을 다물었다.
One Dozen.
십 년하고도 이 년이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조금 더 지난 시간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다시 머그컵에 투명한 액체를 따랐다. 세상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변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아니 그 사람도 변했다.
변한 모습이 좋아 보여 다행이었다.
십 년하고도 이 년이 더 지난 것도 다행이었다.
지난 10년간은 당신을 미워만 했으니까. 이제 그 미워만 한 시간이 지나니까 이렇게 또 마주치게 되는 건가.
“오늘만, 오늘만이야…….”
그녀가 마저 머그컵을 홀짝거렸다. 이제는 쓴 뒷맛이 느껴졌다.
11.
“수술 끝난 지 세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담당 간호사와 중환자실 전문 간호사 분도 숙직을 서니까 그다지 할 일은 없을 겁니다만,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네, 정 팀장님.”
팀장이 좋아하는 결연한 대답을 한 혜원은 인사를 하고 파일들을 들고 나왔다. 이 병원에는 중환자실이 따로 없었다. 각자의 병실에 중환자실용 방이 따로 다 마련되어 있었고, 필요에 따라서 각각 중환자 전용 간호사들이 옆에서 숙직을 섰기 때문이었다. 환자의 위중에 따라서는 담당 의사조차도 그 방에서 숙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전히 나이트 근무기 때문에 교대 시간은 9시지만 일찍 나와서 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환자 분 가족 분들도 많이 오시니까 그쪽에 대한 서비스도 철저하기 바랍니다.”
“네.”
정 팀장이 이 시간까지 남아 교대자까지 체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기세를 보니 자정까지는 같이 있을 분위기였다. 간병인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에 대부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환자에 대한 것보다 환자 보호자에 대해서 하는 것들이 더 많았다. 중요한 수술이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지인들이 얼굴 도장을 찍으러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병원 자체가 폐쇄적이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이나 친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친척 친지라는 관계 또한 이런 세계에서는 이익 관계가 동반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격식이나 접대 같은 의미가 컸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차를 내가거나 하는 병실의 개인 메이드와 같은 일도 대부분 이곳의 간병인들이 맡게 되었다.
병실의 환자실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접견실이라 할 수 있는 다이닝 룸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 흔적이 역력했다. 특히 이런 저명한 노회장의 수술이었으니 데이 근무자인 미숙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는 안 보고도 뻔했다. 특히 저 로봇같이 변함없는 마스크의 팀장조차 얼굴에 피곤한 기가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 평소에 몰려드는 사람들과는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혜원은 교대자인 미숙이 탕비실에서 열심히 달그락거리면서 과일을 깎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옆으로 가 싱크대에 쌓여 있는 커피 잔과 과일 접시 등을 씻었다.
“많이 오셨었나 봐요.”
“네.”
“그것만 해요. 제가 하죠.”
“아니에요. 시간 될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어요.”
그러나 그녀들의 대화는 멈춰졌다.
“박 이사,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인가.”
“소식을 너무 늦게 들었습니다. 경과는 좋으시다 들었는데…….”
미숙은 재빨리 손을 닦고 옷을 살핀 뒤에 탕비실 밖으로 나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 혜원은 열심히 찻잔과 앞접시들을 씻어 옆에 있는 일회용 타월로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깎다 만 과일들을 조금씩 보기 좋게 담았다. 바쁘게 들어온 미숙이 인원수대로 차를 준비하는 동안 과일 껍질들을 쓰레기봉투에 담고 바쁘게 움직였다.
“고마워요.”
“얼른 나가 보세요.”
교대 시간인 9시가 넘어 미숙이 가고 나자 혜원은 보호자들에게 가서 제가 야간 담당임을 알리고 병실에 가서 간호사들에게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환자가 있는 특별 병실 안에 혜원이 들어갈 일은 없었다. 안에는 간호사가 두 명이나 있었기에 혜원은 밖에서 간호사들에게 시킬 일을 물어보고 다시 접견실로 돌아왔다. 노회장의 아들 중 하나인 중년의 남자와 옆에 꽃처럼 앉아 있던 중년 부인이 기지개를 켰다.
“이제 올 사람도 다 왔을 거 같으니 들어가세요.”
“그래야겠어. 내일 아침에는 성준이가 와 있을 거니까.”
“둘째 아주버님이요? 별일이네. 전 여기 있다가 정혁이 오는 거 보고 갈게요. 공항에 도착했다고 전화 왔었어요.”
“그냥 집으로 가라 하지 그랬어. 내일 와도 되는데 말이지.”
“오늘 여기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들어가세요.”
재주껏 대화를 듣고 있던 그녀는 보호자들이 갈 채비를 하는 게 느껴졌다. 혜원은 나가서 지정된 자리에 단정하게 서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존재 같은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노회장의 아들과 그의 비서, 수행원 등이 나가고 나자 중년의 여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박 비서, 나 잠깐 누워 있을 테니까. 밑에서 누가 올라온다고 연락 오면 말해.”
“네.”
보호자용 일반 침실이 두 개나 딸린 넓은 병실은 금세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내내 서 있던 사모님의 비서인 젊은 여자가 그제야 한쪽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뭐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눈치껏 혜원이 다가가 물었다.
“블랙커피 한 잔하고, 당직 선생님 회진 시간이 언제 언제지?”
저가 모시고 있는 사람이 사라지자 당장에 목소리부터 바뀌었다.
“열두 시, 네 시지만 수술 후에는 두 시간마다 오십니다. 이따 열 시에 오실 거예요.”
“알았어요. 일 봐요.”
“주변 정리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손님이 많이 오셨어서.”
“관장님 쉬시니까 조용히 소리 안 나게 해요.”
관장님이라……. 아마 재벌들의 안주인들이 그렇듯이 저 사모님도 미술관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듯했다. 전에 엄마도 그 ‘관장’이란 걸 한번 해 본다고 이리저리 알아보지 않았었나. 혜원은 혼자 실소를 내뱉고는 비가 오는 덕에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마무리된 바닥을 일일이 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비서는 오히려 푹신한 소파에 깊숙이 앉아 휴대폰을 뒤적거리며 느긋하게 향기 좋은 고급 커피를 마시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저쪽 격리 병실에서는 이따금 간호사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릴 뿐 한동안 붐비던 병실은 고요를 되찾고 있었다. 넓은 바닥의 얼룩을 꼼꼼히 닦아 내고, 다른 물걸레로 탁자나 소파 등을 닦기 시작했다.
“커피 잔 좀 치워요.”
느긋하지만 누군가 올 수도 있었다. 비서는 한겨울이지만 여전히 살색의 스타킹에 검은색의 타이트한 정장과 블라우스 재킷 차림이었다. 활동하기 좋게 굽이 두꺼운 펌프스를 신었지만 다리가 당기는지 이따금 종아리를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혜원은 커피 잔을 씻고 음료와 차 등을 확인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과일들이 모자라지 않나 살펴보고 아래층 주방에 재고량을 묻기도 했다. 어수선하게 시간을 보내다 언뜻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 시가 돼 가고 있었다.
열 시…….
담당 의사가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이 단 한 건의 수술을 위해 17시간을 날아온 의사이니, 당연히 경과를 보러 집도의가 올라올 것이었다. 집도의의 이름은 Dr. Jason Gill……. 그 피디에이에 사인된 머리글자와 같다. 왜 갑자기, 마치 인쇄한 궁서체같이 단정했던 ‘그’의 노트 필기가 생각나는 것일까. 아닐 거라 외쳐도,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그건 제 생각에 불과한 거였다.
멍하니 탕비실에 서 있었던 게 몇 분일까.
“오셨습니까!”
다이닝 룸의 비서가 놀라서 소리치는 것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가 봐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녀의 그런 번민을 잠재워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죠?”
낯선 목소리였다.
“네.”
“어디죠?”
“간병인!”
저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작은 거울에 있는 제 모습을 흘끗 살피고 탕비실을 나섰다. 검은 옷의 비서는 사모님을 깨우러 가야 했다. 다이닝 룸의 옅은 베이지 색 소파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밖에서 왔는지 남자의 어깨가 약간 젖어 있었다. 또 눈이 오나…….
“회장님께 안내해 드려요.”
회장님은 오늘 수술을 받은 중환자였다. 그런 회장님께 안내를 하라는 것은 저 키 큰 남자가 회장님의 가까운 가족이라는 증거였다. 짙은 베이지 색의 블레이저를 입은 남자는 멋스럽게 둘러져 있던 체크무늬의 캐시미어 목도리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약간의 곱슬기가 있고 어깨가 딱 벌어져 마치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이었다. 아주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넓은 어깨가 탄탄해 보여 훨씬 덩치가 커 보였다.
“태 이사님, 들어가시죠.”
“도련님보다는 훨씬 듣기 좋으니까 재미없는 이사 그만두지 말아야겠네.”
“원…… 이사님도…….”
한 번도 굳은 미간을 푼 것을 본 적이 없는 검은 옷의 비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묘하게 울리는 깊은 미성이었다. 비서는 웃음을 머금은 채 사모님을 깨우러 반대쪽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새 혼자가 된 남자는 재킷을 벗더니 두리번거리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혜원은 얼른 가서 옷을 받아 들었다.
남자의 키는 180이 될까 말까. 작은 키는 아니었다. 게다가 균형 잡힌 운동선수 같은 몸 덕에 훨씬 체구가 있어 보이는 체형이었다. 블레이저 안에는 베이지 색의 고급스러운 브이넥 니트만 걸친 듯했고 얇은 니트는 남자의 다부지고 탄탄한 윗몸을 타고 내려 균형 있게 근육 잡힌 몸매를 보여 주고 있었다. 혜원은 재빨리 구석에 있는 옷걸이에 고가임이 분명한 블레이저를 모양이 잡히게 걸었다. 비록 이름은 간병인이었지만 이런 일들도 그녀에게 주어진 일들이었다.
“이쪽입니다.”
“정혜원?”
그새 제 가슴에 달려 있는 신분증의 이름을 보았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밑에 깊은 쌍꺼풀이 진 굵직굵직한 선을 지닌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남자의 각진 입술에서 제 이름이 새 나오자 혜원은 약간의 난처함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를 돌아 중환자실로 향할 뿐이었다.
“그냥, 내 첫사랑이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 겁니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울렸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심 걱정 없이 윤택한 삶을 누리는 전형적인 재벌 3세다운 관용미 넘치는 성격의 사람일 것이었다. 아마 한두 가지 남들이 이해 못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버릇이 있을 거고, 자유로운 삶이 좋아서 경영 일선에 눈이 시뻘게져 뛰어들지도 않을 것이었고, 그저 여기저기 그룹에서 벌여 놓은 일에 후계자라는 이름으로 이사니 하는 그런 직분이나 명함에 박아 넣고 널찍하고 근사한 인테리어가 된 사무실과 할 일 없는 비서를 거느리고 있을 터였다. 매너도 좋지만 얽매이길 싫어해서 집안에서 정해 주는 결혼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고 아마 비서니 아니면 제가 드나드는 골프장의 여직원이니 하는 여자와 연애를 해서 집안에서 골 아프게 생각하겠지……. 중환자실까지는 채 십여 미터가 되지 않는 거리였다. 일반 병실이 있고 그 안쪽에 있으니까. 그 짧은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녀는 한 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여깁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남자는 의외로 말을 잘 듣고 있었다. 중환자실은 처음인지 그보다 훨씬 키가 작은 널스화를 신은 혜원의 어깨 너머로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가족 분 면회 오셨습니다.”
벨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이야기하자 안쪽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나오는 게 보였다.
<주치의 선생님 회진 오실 시간입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선생님 오시면 면회 여부를 확인 받으세요.>
혜원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통상 수술 당일은 면회가 금지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뇌경색으로 인한 뇌수술이면 개두술을 했을 것이다. 아까 자신의 근무 전에는 직계 가족의 면회가 가능했었나?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교대를 하다니.
“면회 안 된답니까?”
“담당 주치의 선생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라는데요. 열 시니까 시간 다 되셨습니다.”
“정혁이 왔구나!”
뒤에서 중년의 여자가 반가운 목소리로 반기는 게 느껴졌다.
“볼 때마다 젊어지시니 다음에는 그냥 영숙 씨하고 불러야겠네요.”
“원, 얘도!”
그러나 그 농담이 싫지만은 않은지 다가가 포옹을 하는 모자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혜원은 밖에서 들리는 문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머리 뒤꼭지가 찌릿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10시 정각 회진 시간……. 눈앞에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둘과 당직 수간호사 둘이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 선생님!”
예의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약간은 거만한 듯 보이게 목례로 답하는 맨 앞에 선 의사는 의사 가운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훤칠하고 눈에 확 띄는 외모였다. 금테 안경 밑의 싸늘한 외모는 섣불리 말을 꺼내기 힘들 정도였다. 중년의 여인 옆에 선 남자는 듬직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훤칠한 의사의 큰 키에는 못 미쳤다.
“수술은 잘 됐습니다만, 조금 살펴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싸늘한 목소리는 명료하게 울렸다. 그와 의사 간호사들은 자동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ICP(Increassed intracranial Pressure 뇌압상승)는 없었고?”
“네. 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