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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귀인 1화
1. 5월, 점괘, 운명적
점괘가 잘못 나왔다.
미신이란 믿는 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 동일한 결과를 두고서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과 주위 환경에 따라 점괘의 해석은 각양각색이 된다.
사람의 인생 또한 선택과 집중의 연속이다. 그러나 수많은 인생의 길 중에서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블 코믹스의 영웅이 짠, 하고 나타나 세상을 구해 주는 것처럼 누군가가 이 애타고 막막한 상황에서 건져 주면 좋으련만.
간절한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잡을 수는 더더욱 없는 무형 무색 무취의 미혹 덩어리.
원은 볼펜으로 콕콕 노트를 찔렀다.
용하기는 개뿔. 낙서로 지저분해진 노트 위로 볼펜이 싼 똥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마 전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도이의 손에 붙들려 찾아간 강남의 유명한 타로 점집. 황금 같은 주말 오후에 장장 두 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5월에는 꼭 귀인이 나타나 꼬인 인생이 풀린다고 했다.
물론 그 귀인이 ‘연인 맞죠, 연인?’이라는 질문에 타로 점을 보던 아줌마는 ‘귀인이라고요, 귀인!’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귀인이라면 귀한 사람, 귀한 사람은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원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하준을 훔쳐보았다. 샤프하기도 하여라. 지성미가 뚝뚝 떨어지는 저 안경을 보고 있자니 하다못해 저 안경다리라도 되어 보고 싶구나.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준은 정면을 주시하다 이따금 노트북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꿈결 같은 장면이었다. 점괘대로라면 연인은 분명 저 사람이어야 할 텐데. 두둥실 하늘로 오르던 꿈이 툭 털어졌다. 5월은 이미 이틀 전에 지나갔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대책 없는 짝사랑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점괘를 믿고 차분함을 유지했던 짝사랑은 미친년 널뛰듯 제모습을 찾아간다.
“원?”
혹시 음력 5월이 아닐까? 보통 무속인들은 날짜 기준을 음력으로 하잖아. 아니야, 타로는 서양 점인데? 서양 점이라도 점이니까 음력이 맞는 거겠지. 점을 보고 지출한 복비 3만 원이 아까워서라도 우기고 싶었다.
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배시시 웃었다.
“이봐, 백 기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우스워?”
“네?”
“왜, 증권가에 돌고 있는 찌라시라서? 비웃음이 절로 나와?”
“비웃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누가 우리 편집장님의 말을 찌라시라고 폄하하는 겁니까?”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데?”
“그러니까 편집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장 편집장의 눈꼬리가 하늘로 쭉 올라가더니 끝내 찢어지고 말았다.
“네가 얼마나 하찮게 흘려들었으면 여기 모인 저것들조차도 아무 반응이 없겠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회의실에 모인 동료들은 심드렁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귀지를 파서 훅 날리거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킥킥거리거나, 혹은 부러진 손톱에 울상을 짓거나.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가 원의 귓가를 울렸다.
“편집장님, 채령 열애설이 증권가에서 돌고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태껏 채령의 열애설을 특종으로 보도한 매체는 단 한 곳도 없었어요. 작년에 찌라시 믿고 잠입 취재 들어갔던 ‘데츠패치’가 주거 침입 및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한 걸 설마 잊으신 겁니까?”
부편집장 하준의 지적에 장 편집장의 표정이 한순간에 우울하게 변했다.
“맞아요, 편집장님. 열애설을 터트리지도 않았는데 근거 없는 열애설을 취재하려고 한 이유만으로 명예 훼손으로 언론사가 고소당한 건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을걸요? 소속사가 너무 막강해요. 우리는 고소당하면 그날로 폐업이라고요.”
최 기자가 거들자 편집장의 얼굴에 더욱 먹구름이 꼈다.
“그건 데츠패치가 채령 이전에 MJ엔터미디어를 건드려서 그렇게 된 거잖아.”
원은 편집장의 얼굴이 안되어 두둔해 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순간 편집장의 얼굴에 햇살이 돋아났다.
“바로 그거라고요! 백 선배, 데츠패치는 팩트를 보도했어요. 결국 고이다가 무진그룹의 도 회장과 결혼했으니까. 근데 사람들은 되레 언론사를 욕했죠. 왜? 만인의 스타가 눈앞에서 죽을 뻔했거든요. 데츠패치가 아니었다면 기자 회견도 없을 테고, 기자 회견만 없었어도 고이다는 칼에 찔리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대중들은 그네들이 오매불망 기다린 미니를 장장 반년이나 더 기다리지 않았겠죠. 전 아직도 기억나요. 드라마 방영 늦어졌다고 데츠패치를 테러하던 무수한 댓글들이!”
하나는 숨을 쉬지도 않고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원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데츠패치가 그 이후로 MJ엔터미디어의 주적이 된 건 잘 아시죠? 자기네 최고의 톱스타인 채령에게도 접근하니까 어디 한번 죽어 봐라, 하면서 먼저 똥을 투척했다고요. 데츠패치가 소송 공방 기간 동안 회사가 휘청거렸다는 건 업계가 다 아는 사실이니 우린 그걸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요. 채령을 건들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원의 소리 없는 동의에 힘을 얻었는지 하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차라리 신지민 열애설은 어때요? 제 친구가 청담동 호텔에서 일하는데 신지민이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봤대요.”
사진 기자인 박 기자가 묵언 수행하던 입을 열고 회의에 동참했다.
“박 선배, 신지민은 금사빠라 걔 열애설은 흔템이에요! 흔템!”
“금사빠는 알겠는데 흔템은 뭐냐?”
“흔한 아이템! 아무리 찾아봐도 먹을 게 없어 아사 직전일 때도 굶어 죽을까? 주워 먹어 볼까? 고민하게 만드는 아이템이라고요.”
하나는 선배들 앞에서 거침없이 제 의견을 피력했다. 원은 내심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기자라니 내가 참 한심하고 부끄럽다. 기자라고 하는 것들이 용기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연예인 뒤꽁무니만 쫓는 우리가 뭔 사명감?”
편집장의 말에 하나가 옆자리의 원에게 속삭였다.
“적어도 우리끼리는 그런 식으로 비하하지 말자. 우리, 편집장님 말씀대로 기자 맞잖아.”
“네, 실수 인정. 잘못했어요, 선배.”
하나가 고개를 까딱했다.
“지난해부터 우리 회사 영업 실적이 엉망이라는 거 모두 알고 있지? 까딱하다가는 있는 광고도 다 떨어져 나가게 생겼어. 그렇게 되면 내 밥줄은 물론 너네 밥줄도 끊겨. 특종 물어 와. 안 그럼 당장 폐업하게 생겼다고!”
“우리에겐 사장님이 계시잖아요.”
박 기자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자 편집장은 용암처럼 불타올랐다.
“우리 아버지가 언제까지 화수분 해 준다고 하시던? 올해 1분기 실적 보시고 기함하셨다! 2분기 실적도 엉망이면 지원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어.”
“네에? 정말이요?”
“그럼 진짜 폐업하게 되는 겁니까?”
편집장의 말 한 마디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아마 그렇게 될 거야. 명색이 언론산데, 자급자족이 아니라 모회사의 돈으로 연명한다면 회사 간판을 내려야지. 안 그래?”
장 편집장의 고뇌하는 얼굴이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회의실은 단번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들의 회사 ‘프라이버시’는 실상 데츠패치보다 1년 앞선 연예 방송 인터넷 신문사다. 정확한 팩트만 보도한다는 신념 아래 연예 방송계의 신변잡기를 취재했다. 그런데 4년 전에 느닷없이 출현한 데츠패치는 파파라치처럼 탐사 보도 형식으로 연예인들의 기사를 썼다. 일단 터트리고 보자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의 보도에 지쳐 있던 대중들은 환호했다. 톱스타에 관한 열애설 및 불법에 관한 사건들이 있다면 대중들은 데츠패치가 나서 주길 기대했다. 어느새 프라이버시는 데츠패치의 아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프라이버시는 장유신 편집장의 아버지, 장준식 옹이 경영하는 혜민그룹의 지원이 없으면 자력갱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졌다.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프라이버시의 기사를 클릭하는 조회수가 미미하다 보니 홈페이지 광고를 통한 수익 창출도 점점 희박해져 갔다.
“편집장님, 채령의 열애설을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찌라시라니까.”
“편집장님이 회사의 사활을 찌라시에 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부편집장 하준의 지적에 편집장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무서운 놈.”
“취재원이 있죠?”
“그래. 채령의 동선까지 알고 있는 확실한 사람이 있지. 게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고. 귀신같은 데츠패치도 말이야.”
회의실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채령의 열애설을 이용해 데츠패치를 눌러 버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회의적이라고 피를 토하던 하나의 표정도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그렇다면 채령의 열애설 취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야 하는 거네요?”
“맞아. 어때, 몸이 근질근질하지? 피도 막 뜨거워지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세요? 그럼 제가 목이 터져라 반대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긴장이 풀린 하나는 금방 조잘거렸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팀을 꾸려야지. 취재 팀장은 류하준 부편, 사진은 박석호, 그리고 보조 취재는 백원이다.”
“저는요? 원이 선배보단 제가 한 살이나 더 어려서 짱짱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나가 반기를 들었다.
“취재가 체력전이기만 하냐?”
“체력이 좋아야 밤을 새죠.”
“체력보단 두뇌전이고 성실전이지.”
“두뇌도 제가 더 말랑말랑하다고요.”
“그렇겠지, 잔머리의 대가니까. 확실하다니까 발 담그려는 네 뻔뻔함에 경의를 표한다. 이 불성실과 안티의 아이콘아.”
“편집장님, 이런 식의 보복은 거절합니다.”
“나도 거절은 거절한다. 이상 회의 끝.”
창졸간에 채령 열애설의 취재팀 일원이 된 원은 눈만 끔뻑끔뻑했다. 대박 아이템 취재팀의 일원이 된 것보다 하준과 24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심장이 둥둥거리기 시작했다.
“백 기자, 표정이 왜 그래? 하기 싫으냐?”
“아, 아닙니다. 편집장님.”
원은 꿈속을 헤매는 듯한 멍한 표정을 금방 지웠다.
“편집장님, 제게 따로 해 주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준의 말에 장유신 편집장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용한 놈.”
“백 기자, 어서 집에 가서 짐 꾸려 와. 오늘이라도 당장 취재 들어갈지 모르니까. 석호 너도.”
“네!”
원은 하준의 말에 경쾌하게 대답한 다음 씩씩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5월은 분명 음력 5월이 맞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점괘는 오락가락하나 보다. 맞을 듯하다 핀트가 야금야금 어긋난다. 복비 3만 원의 점괘라 그런가?
강원도 원주, 남한강이 보이는 으리으리한 저택 옆 인근 숲가 도로에서 잠복근무를 한 지 사흘째.
원은 승합차의 문을 열고 하얀 봉지를 들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햄버거는?”
석호가 허기진 얼굴로 물었다.
“밥버거 사 왔는데?”
“난 고기가 좋은데.”
“불고기 밥버거야.”
“역시 넌 진정한 내 친구다.”
원은 석호가 안으려고 손을 뻗자 허리를 숙여 피했다.
“선배님도 드세요.”
“고마워.”
사흘간 잠복근무를 했는데도 피로한 기색 하나 없이 버텨 내는 남자. 역시 하준을 짝사랑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원의 대학선배였다.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후 지상파 삼사 언론고시를 모두 합격한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데 멀쩡한 직장에 돌연 사표를 내고 장유신 선배와 인터넷 신문사를 차렸다.
우연히 동아리 모임에서 하준을 만나 현재 짝사랑만 5년째. 그녀는 졸업 후 유수 언론사에서 인턴을 마치고 정식 기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까지 마다하고 프라이버시에 입사했다. 프라이버시에 기자라곤 장 편집장과 하준 선배밖에 없었던 그때, 입사를 한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가장 잘한 선택이기도 했다. 원은 현재 창업 공신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1. 5월, 점괘, 운명적
점괘가 잘못 나왔다.
미신이란 믿는 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 동일한 결과를 두고서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과 주위 환경에 따라 점괘의 해석은 각양각색이 된다.
사람의 인생 또한 선택과 집중의 연속이다. 그러나 수많은 인생의 길 중에서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블 코믹스의 영웅이 짠, 하고 나타나 세상을 구해 주는 것처럼 누군가가 이 애타고 막막한 상황에서 건져 주면 좋으련만.
간절한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일 뿐이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잡을 수는 더더욱 없는 무형 무색 무취의 미혹 덩어리.
원은 볼펜으로 콕콕 노트를 찔렀다.
용하기는 개뿔. 낙서로 지저분해진 노트 위로 볼펜이 싼 똥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마 전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도이의 손에 붙들려 찾아간 강남의 유명한 타로 점집. 황금 같은 주말 오후에 장장 두 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5월에는 꼭 귀인이 나타나 꼬인 인생이 풀린다고 했다.
물론 그 귀인이 ‘연인 맞죠, 연인?’이라는 질문에 타로 점을 보던 아줌마는 ‘귀인이라고요, 귀인!’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귀인이라면 귀한 사람, 귀한 사람은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원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하준을 훔쳐보았다. 샤프하기도 하여라. 지성미가 뚝뚝 떨어지는 저 안경을 보고 있자니 하다못해 저 안경다리라도 되어 보고 싶구나.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준은 정면을 주시하다 이따금 노트북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꿈결 같은 장면이었다. 점괘대로라면 연인은 분명 저 사람이어야 할 텐데. 두둥실 하늘로 오르던 꿈이 툭 털어졌다. 5월은 이미 이틀 전에 지나갔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대책 없는 짝사랑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점괘를 믿고 차분함을 유지했던 짝사랑은 미친년 널뛰듯 제모습을 찾아간다.
“원?”
혹시 음력 5월이 아닐까? 보통 무속인들은 날짜 기준을 음력으로 하잖아. 아니야, 타로는 서양 점인데? 서양 점이라도 점이니까 음력이 맞는 거겠지. 점을 보고 지출한 복비 3만 원이 아까워서라도 우기고 싶었다.
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배시시 웃었다.
“이봐, 백 기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우스워?”
“네?”
“왜, 증권가에 돌고 있는 찌라시라서? 비웃음이 절로 나와?”
“비웃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누가 우리 편집장님의 말을 찌라시라고 폄하하는 겁니까?”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데?”
“그러니까 편집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장 편집장의 눈꼬리가 하늘로 쭉 올라가더니 끝내 찢어지고 말았다.
“네가 얼마나 하찮게 흘려들었으면 여기 모인 저것들조차도 아무 반응이 없겠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회의실에 모인 동료들은 심드렁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귀지를 파서 훅 날리거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킥킥거리거나, 혹은 부러진 손톱에 울상을 짓거나.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가 원의 귓가를 울렸다.
“편집장님, 채령 열애설이 증권가에서 돌고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태껏 채령의 열애설을 특종으로 보도한 매체는 단 한 곳도 없었어요. 작년에 찌라시 믿고 잠입 취재 들어갔던 ‘데츠패치’가 주거 침입 및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한 걸 설마 잊으신 겁니까?”
부편집장 하준의 지적에 장 편집장의 표정이 한순간에 우울하게 변했다.
“맞아요, 편집장님. 열애설을 터트리지도 않았는데 근거 없는 열애설을 취재하려고 한 이유만으로 명예 훼손으로 언론사가 고소당한 건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을걸요? 소속사가 너무 막강해요. 우리는 고소당하면 그날로 폐업이라고요.”
최 기자가 거들자 편집장의 얼굴에 더욱 먹구름이 꼈다.
“그건 데츠패치가 채령 이전에 MJ엔터미디어를 건드려서 그렇게 된 거잖아.”
원은 편집장의 얼굴이 안되어 두둔해 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순간 편집장의 얼굴에 햇살이 돋아났다.
“바로 그거라고요! 백 선배, 데츠패치는 팩트를 보도했어요. 결국 고이다가 무진그룹의 도 회장과 결혼했으니까. 근데 사람들은 되레 언론사를 욕했죠. 왜? 만인의 스타가 눈앞에서 죽을 뻔했거든요. 데츠패치가 아니었다면 기자 회견도 없을 테고, 기자 회견만 없었어도 고이다는 칼에 찔리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대중들은 그네들이 오매불망 기다린 미니를 장장 반년이나 더 기다리지 않았겠죠. 전 아직도 기억나요. 드라마 방영 늦어졌다고 데츠패치를 테러하던 무수한 댓글들이!”
하나는 숨을 쉬지도 않고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원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데츠패치가 그 이후로 MJ엔터미디어의 주적이 된 건 잘 아시죠? 자기네 최고의 톱스타인 채령에게도 접근하니까 어디 한번 죽어 봐라, 하면서 먼저 똥을 투척했다고요. 데츠패치가 소송 공방 기간 동안 회사가 휘청거렸다는 건 업계가 다 아는 사실이니 우린 그걸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요. 채령을 건들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원의 소리 없는 동의에 힘을 얻었는지 하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차라리 신지민 열애설은 어때요? 제 친구가 청담동 호텔에서 일하는데 신지민이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봤대요.”
사진 기자인 박 기자가 묵언 수행하던 입을 열고 회의에 동참했다.
“박 선배, 신지민은 금사빠라 걔 열애설은 흔템이에요! 흔템!”
“금사빠는 알겠는데 흔템은 뭐냐?”
“흔한 아이템! 아무리 찾아봐도 먹을 게 없어 아사 직전일 때도 굶어 죽을까? 주워 먹어 볼까? 고민하게 만드는 아이템이라고요.”
하나는 선배들 앞에서 거침없이 제 의견을 피력했다. 원은 내심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기자라니 내가 참 한심하고 부끄럽다. 기자라고 하는 것들이 용기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연예인 뒤꽁무니만 쫓는 우리가 뭔 사명감?”
편집장의 말에 하나가 옆자리의 원에게 속삭였다.
“적어도 우리끼리는 그런 식으로 비하하지 말자. 우리, 편집장님 말씀대로 기자 맞잖아.”
“네, 실수 인정. 잘못했어요, 선배.”
하나가 고개를 까딱했다.
“지난해부터 우리 회사 영업 실적이 엉망이라는 거 모두 알고 있지? 까딱하다가는 있는 광고도 다 떨어져 나가게 생겼어. 그렇게 되면 내 밥줄은 물론 너네 밥줄도 끊겨. 특종 물어 와. 안 그럼 당장 폐업하게 생겼다고!”
“우리에겐 사장님이 계시잖아요.”
박 기자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자 편집장은 용암처럼 불타올랐다.
“우리 아버지가 언제까지 화수분 해 준다고 하시던? 올해 1분기 실적 보시고 기함하셨다! 2분기 실적도 엉망이면 지원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어.”
“네에? 정말이요?”
“그럼 진짜 폐업하게 되는 겁니까?”
편집장의 말 한 마디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계속 이런 식이라면 아마 그렇게 될 거야. 명색이 언론산데, 자급자족이 아니라 모회사의 돈으로 연명한다면 회사 간판을 내려야지. 안 그래?”
장 편집장의 고뇌하는 얼굴이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회의실은 단번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들의 회사 ‘프라이버시’는 실상 데츠패치보다 1년 앞선 연예 방송 인터넷 신문사다. 정확한 팩트만 보도한다는 신념 아래 연예 방송계의 신변잡기를 취재했다. 그런데 4년 전에 느닷없이 출현한 데츠패치는 파파라치처럼 탐사 보도 형식으로 연예인들의 기사를 썼다. 일단 터트리고 보자 아니면 말고, 라는 식의 보도에 지쳐 있던 대중들은 환호했다. 톱스타에 관한 열애설 및 불법에 관한 사건들이 있다면 대중들은 데츠패치가 나서 주길 기대했다. 어느새 프라이버시는 데츠패치의 아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프라이버시는 장유신 편집장의 아버지, 장준식 옹이 경영하는 혜민그룹의 지원이 없으면 자력갱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졌다.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프라이버시의 기사를 클릭하는 조회수가 미미하다 보니 홈페이지 광고를 통한 수익 창출도 점점 희박해져 갔다.
“편집장님, 채령의 열애설을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찌라시라니까.”
“편집장님이 회사의 사활을 찌라시에 걸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부편집장 하준의 지적에 편집장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무서운 놈.”
“취재원이 있죠?”
“그래. 채령의 동선까지 알고 있는 확실한 사람이 있지. 게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고. 귀신같은 데츠패치도 말이야.”
회의실이 또다시 술렁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채령의 열애설을 이용해 데츠패치를 눌러 버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회의적이라고 피를 토하던 하나의 표정도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그렇다면 채령의 열애설 취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야 하는 거네요?”
“맞아. 어때, 몸이 근질근질하지? 피도 막 뜨거워지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세요? 그럼 제가 목이 터져라 반대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긴장이 풀린 하나는 금방 조잘거렸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팀을 꾸려야지. 취재 팀장은 류하준 부편, 사진은 박석호, 그리고 보조 취재는 백원이다.”
“저는요? 원이 선배보단 제가 한 살이나 더 어려서 짱짱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나가 반기를 들었다.
“취재가 체력전이기만 하냐?”
“체력이 좋아야 밤을 새죠.”
“체력보단 두뇌전이고 성실전이지.”
“두뇌도 제가 더 말랑말랑하다고요.”
“그렇겠지, 잔머리의 대가니까. 확실하다니까 발 담그려는 네 뻔뻔함에 경의를 표한다. 이 불성실과 안티의 아이콘아.”
“편집장님, 이런 식의 보복은 거절합니다.”
“나도 거절은 거절한다. 이상 회의 끝.”
창졸간에 채령 열애설의 취재팀 일원이 된 원은 눈만 끔뻑끔뻑했다. 대박 아이템 취재팀의 일원이 된 것보다 하준과 24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심장이 둥둥거리기 시작했다.
“백 기자, 표정이 왜 그래? 하기 싫으냐?”
“아, 아닙니다. 편집장님.”
원은 꿈속을 헤매는 듯한 멍한 표정을 금방 지웠다.
“편집장님, 제게 따로 해 주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준의 말에 장유신 편집장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용한 놈.”
“백 기자, 어서 집에 가서 짐 꾸려 와. 오늘이라도 당장 취재 들어갈지 모르니까. 석호 너도.”
“네!”
원은 하준의 말에 경쾌하게 대답한 다음 씩씩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5월은 분명 음력 5월이 맞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점괘는 오락가락하나 보다. 맞을 듯하다 핀트가 야금야금 어긋난다. 복비 3만 원의 점괘라 그런가?
강원도 원주, 남한강이 보이는 으리으리한 저택 옆 인근 숲가 도로에서 잠복근무를 한 지 사흘째.
원은 승합차의 문을 열고 하얀 봉지를 들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햄버거는?”
석호가 허기진 얼굴로 물었다.
“밥버거 사 왔는데?”
“난 고기가 좋은데.”
“불고기 밥버거야.”
“역시 넌 진정한 내 친구다.”
원은 석호가 안으려고 손을 뻗자 허리를 숙여 피했다.
“선배님도 드세요.”
“고마워.”
사흘간 잠복근무를 했는데도 피로한 기색 하나 없이 버텨 내는 남자. 역시 하준을 짝사랑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원의 대학선배였다.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후 지상파 삼사 언론고시를 모두 합격한 입지전적인 인물. 그런데 멀쩡한 직장에 돌연 사표를 내고 장유신 선배와 인터넷 신문사를 차렸다.
우연히 동아리 모임에서 하준을 만나 현재 짝사랑만 5년째. 그녀는 졸업 후 유수 언론사에서 인턴을 마치고 정식 기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까지 마다하고 프라이버시에 입사했다. 프라이버시에 기자라곤 장 편집장과 하준 선배밖에 없었던 그때, 입사를 한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가장 잘한 선택이기도 했다. 원은 현재 창업 공신으로 대접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