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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귀인 2화
“선배님, 밥버거에 계란 추가했어요.”
“어?”
원의 말에 하준이 밥버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추가된 계란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달걀 좋아하시잖아요! 그것도 반숙으로.”
“반숙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선배님과 제가 함께 한 세월도 5년이 넘었는데.”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가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될 텐데. 원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근데 왜 내 밥버거엔 계란이 없어? 차별하냐?”
밥버거의 포장지를 벗기던 석호가 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달걀 안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안 좋아한다고! 나 삶은 달걀 앉은 자리에서 열 개도 먹을 수 있거든.”
“응, 집에 가서 많이 삶아 먹어.”
“야, 백원! 정말 이러기야? 하준 선배만 챙기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설마…….”
석호의 미묘한 뉘앙스에 원의 심장 소리가 쿵쿵 망치질을 했다. 둔감하기로 유명한 이 녀석이 눈치를 챈 거야? 내 짝사랑을!
“하준 선배가 부편집장이고 편집장님과 친하니까 잘 보이려고 수 쓰는 거지? 나보다 먼저 승진하려고! 그니까 너답지 않게 콧소리 내며 아부하는 거지, 지금?”
“아부?”
애교로 안 보이는 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심장에서 푸시시 바람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원은 하준도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여겼는지 궁금해 그를 쳐다보았다. 하룻밤을 새웠는데도 석호와 달리 하준에게서는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백 기자는 창업 공신이라서 석호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하준 선배! 지금 계란 두 개의 청탁에 넘어가시는 겁니까?”
석호가 불을 뿜는 용처럼 발끈했다. 원은 하준의 멋진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
“전 아직도 학사 주점에서 선배님이 펼친 달걀 예찬론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달걀 예찬론? 그게 뭔데?”
되물은 사람은 석호였다.
“그때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달걀이라고 대답한다고요. 유대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달걀이라면서 그 뜻을 알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고요.”
“내가 그랬어?”
하준의 얼굴이 머쓱해졌다.
“유대인들이 왜 달걀을 좋아하는데?”
석호의 얼굴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달걀은 익히면 익힐수록 단단해지니까. 그때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어떤 회유와 외압이 들어와도 달걀처럼 굴하지 않고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인이 되자고.”
“그렇게 멋진 말을! 그럼 나도 이제부터 달걀만 먹겠어.”
석호의 아이 같은 말에 원과 하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내가 허세를 좀 부린 모양이야.”
“허세라고 하셔도 멋있었어요.”
원의 말에 하준이 고맙다고 말하며 밥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원은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준의 그 한마디에 기자로서의 사명감이 가슴에 새겨졌으니까.
우뚝 솟은 태산 같은 선배와 함께 일하게 된 현재가 자랑스러웠다.
어떤 곳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 기자로서.
원은 밥버거를 우적우적 씹어 대는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야, 나 카메라 하나만 줘라. 제임스 본드 뺨치는 걸로다가.”
“그게 무슨 소리야?”
질문은 하준이 했다.
“저, 주방보조원으로 별장에 잠입합니다.”
“엥? 네가? 무슨 수로?”
석호가 입가에 밥풀을 묻히며 물었다.
“내일 파티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오나 봐요. 모텔 앞 식당 아줌마가 별장 파티 때문에 분주하더라고요. 지인들에게 고기 만질 사람 없냐고 전화하길래 제가 고기 좀 썰어봤다고 했죠. 당장 채용되던데요? 시간당 2만 원짜리 알바입니다.”
“나도 식육 식당 전문점의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
석호는 아깝다는 듯 주먹을 허공으로 휘둘렀다. 석호의 엉뚱함에도 아랑곳없이 하준이 물었다.
“언제?”
“아침 일찍 오라고 하던데요. 대규모 파티라서 준비할 요리들이 많다고 했어요.”
“어떻게 하려고? 계획은?”
“오전에 고기 해체 작업을 끝낸 후, 오후에는 초대받은 사람처럼 둘러보며 채령을 찾아보려고요.”
“그러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원은 블랙 봉투에 든 황금빛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들킬 일 없어요. 여기 초대장이 있으니까요.”
“초대장? 어디에서 났어?”
석호가 원의 초대장을 빼앗아 봉투에 적힌 이름을 읽어 보았다.
“백결? 너 백 배우 만났어?”
“이번 주 압구정 숍에서 우연히. 들어가는 작품 없느냐고 근황 물어봤는데 요즘 이것저것 바쁘다고 하더라. 근데 곽 전무가 이런 쓸데없는 파티에 초대한다며 비웃더라고.”
“백결이 네게 초대장을 줬어? 취재하라고?”
“아니,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슬쩍했어.”
“이상해. 백결이 널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우호적인 기사 하나 써 준 적도 없고만.”
“나쁜 기사도 쓴 적이 없지. 왜냐하면 난 팩트만 취재하니까.”
“백결 사생활이 깨끗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나도 박석호가 아니라 백석호였다면 백 배우가 친근감을 느꼈을 텐데. 성씨 같은 걸로 이토록 수월하게 접근하다니. 넌 이제 아예 가족처럼 느껴지겠다?”
“그럼, 가족이나 다름없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원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기자와 배우 관계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원과 결은 이란성 쌍둥이였다. 백결은 한류 스타이자 최고의 배우였다. 직업의 특성상 취재 반경이 좁아질까 염려되어 동료들에게 비밀로 함구하고 있을 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초대장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석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부편집장님, 성일그룹의 차남 곽동욱과 채령의 열애설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초대박이겠죠? 곽 전무는 유부남 아닙니까? 채령이 뭐가 아쉽다고 유부남을 만나는 걸까요?”
“아직 단정 지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 곽 전무는 사람 모으기를 좋아하는 인사라, 정·재계는 물론 연예계도 가리지 않아. 채령이 곽 전무와 어떤 사이인지는 취재가 끝나 봐야 알 수 있어. 우리 수중에 있는 건 채령이 성일그룹으로 들어가는 사진 한 장밖에 없다고. 채령이 성일그룹과 광고 계약을 맺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아니라니까요! 촉이 딱 왔습니다. 편집장님의 취재원이 이 별장을 꼭 집어 주는 순간, 모종의 냄새가 났다고요. 채령은 아마 곽 전무와 그렇고 그런 사이일 겁니다. 원래 광고 찍다가 광고주가 스폰서 되고, 스폰에서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고 하면서 재벌가의 이혼이 떠들썩하게 되는 거라고요.”
“곽 전무가 파티광이라는 걸 몰라? 비즈니스도 파티장에서 한다고 소문났어. 연예계 마당발인 곽 전무는 파티를 열 때 의례적으로 톱스타들에겐 초대장을 보낸다고.”
하준의 침착한 어조에 어쩐지 짜증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원은 석호에게 눈을 흘기며 답답해했다. 소도둑처럼 생긴 대학 동기는 눈만 끔뻑끔뻑했다.
“채령이 스폰서라니? MJ엔터미디어가 그렇게 우스운 소속사였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회사 소송당하면 네가 책임질래?”
“아니, 소속사 몰래 스폰서 끼고 있는지 누가 알아?”
“퍽이나! MJ엔터미디어가 잘도 그러게 놔두겠다. 어쩌면 채령은 이 별장에서 진짜 열애 상대자를 만날지도 몰라. 곽 전무는 그저 장소 제공을 하는 지인일 수 있다고.”
“백 기자 말에 한 표.”
하준의 동의에 원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건 분명 칭찬의 눈빛이었다. 석호 옆에 있다 보니 빛이 나 보이는 것이다. 고맙다, 친구야.
“장비나 줘. 사용법도 알려 주고.”
“오케이.”
사진 담당 전문 기자인 석호는 신이 나 초소형 몰래 카메라를 클러치 백에 설치하고 원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 기자, 드레스와 구두는 준비했어? 드레스 코드도 있는데?”
“네. 시내에서 빌려 왔으니 염려 마세요. 부편집장님.”
원은 하준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아가씨,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발골을 잘했어? 닭이면 닭, 소면 소, 돼지면 돼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예쁘게 다듬었잖아. 심지어 스테이크용은 중량도 딱 맞아. 생활의 달인에 나가도 되겠어.”
“부모님이 정육점을 하시거든요. 곁눈질로 배웠어요.”
“곁눈질로 배운 것치곤 너무 깔끔하다! 가업을 이을 생각인가?”
“가업이요? 네. 가업은 이으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금방 끝내 버렸네. 여기 일당 10만 원. 오늘 정말 수고했어요.”
원은 주방 아주머니가 쥐여 준 10만 원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별장 밖으로 나오는 척하며 이목을 피해 잽싸게 저택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지금 숨어 있는 곳은 별장의 물품들을 처박아 놓은 창고. 5층 건물의 맨 꼭대기였다. 성일그룹 차남, 곽 전무의 별장은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넓은 정원과 분수가 있는 중세풍의 건물이었다.
원은 핑크 립스틱으로 화장을 마무리했다. 거울을 보니 꾀죄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화사한 복숭앗빛 뺨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만하면 괜찮은걸?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 사돈의 팔촌, 처조카의 친구 여동생 즈음으로는 보일만 했다.
하지만 드레스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튜브톱 화이트 미니 드레스는 대체로 몸에 꽉 낀 편이지만 유달리 헐렁한 부분이 있다. 한숨을 내쉬었다. A컵이 B컵 가슴을 어찌 따라갈까. 원은 백팩에서 손수건과 티슈를 찾아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다. 겨드랑이 살도 영혼까지 끌어 모았다. 가까스로 품앗이한 가슴이 옹골지게 드레스를 채웠다.
드러난 어깨와 봉긋한 가슴이 어색해 질끈 묶었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드러났던 가슴이 가려져 안심이 됐다.
본드 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취재를 위한 잠입은 언제나 짜릿했다. 역동적인 느낌까지 들게 한다. 여기서 특종을 낚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원은 살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갔다.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높은 담벼락 너머 저곳에 그녀의 팀이 있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원이 연회장으로 향했다.
현재 시간 5시. 공식적인 파티 시간은 7시. 초대받은 이들은 속속 도착해 리셉셔니스트의 안내를 받았다. 1층에는 꽤 넓은 연회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벌써부터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TV를 종횡무진하는 유명 셰프도 얼핏 눈에 들어왔다. 식자재 트럭에 실린 어마어마한 양의 식재료로 가늠해 볼 때 하루에 끝날 파티가 아니었다.
메이드들이 쉴 새 없이 각 층에 있는 룸을 들락날락거렸다. 룸에는 특이하게도 레드, 블랙, 화이트, 블루 등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치 사생활을 보호하는 암호같이 보였다. 파티를 즐기다 피곤하면 각자의 방에서 쉴 수 있게 한 것은 유명인들에게는 꽤 쓸모 있는 배려였다. 곽 전무는 진정한 파티광인 모양이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대장 좀 볼 수 있을까요? 등록을 안 하신 듯해서요.”
원은 뜨악한 표정을 얼른 지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여유로운 웃음도 함께였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초대장을 내밀었다. 연회장을 구경하려다 그만 딱 걸린 것이다. 눈썰미 좋은 리셉셔니스트는 용케 초대장 검사를 받지 않은 원을 알아보았다.
“백결님의 파트너분이시군요. 한데 백결님은……?”
“오빠는 좀 뒤에 온대요. 우리 오빠 얼굴이면 초대장은 없어도 되잖아요. 안 그래요?”
“실례가 안 된다면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최상의 파티를 제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 수집은 필수라서요.”
“아, 여동생이에요. 친여동생. 이런 파티는 처음이라 구경시켜 준다고 오빠가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답니다. 중국 팬미팅 때문에 참석이 늦는다고 연락이 왔어요.”
“동생분의 성함을 알려 주시면 저희들이 더욱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전, 백원이에요.”
“백원요?”
“네.”
“백결님의 여동생다운 이름이시네요. 백결님의 방은 3층 화이트입니다. 그 방을 편하게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리셉셔니스트의 인증을 받고 보니 숨어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다로운 초청자의 대행인도 무사히 속여 넘겼으니까. 한결 편한 마음으로 석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입은 성공적. 그쪽은?>
<채령 벤은 아직 안 보임. 나타나는 즉시 연락하겠음. 이상 무전 끝. 오버.>
석호는 형사 놀이에 빠져 있는 듯하다. 우린 기잔데. 하지만 불법의 경계를 얼쩡거리고 있다 보니 외려 범인에 가까웠다.
“선배님, 밥버거에 계란 추가했어요.”
“어?”
원의 말에 하준이 밥버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추가된 계란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달걀 좋아하시잖아요! 그것도 반숙으로.”
“반숙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선배님과 제가 함께 한 세월도 5년이 넘었는데.”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가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될 텐데. 원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근데 왜 내 밥버거엔 계란이 없어? 차별하냐?”
밥버거의 포장지를 벗기던 석호가 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달걀 안 좋아하잖아.”
“누가 그래? 안 좋아한다고! 나 삶은 달걀 앉은 자리에서 열 개도 먹을 수 있거든.”
“응, 집에 가서 많이 삶아 먹어.”
“야, 백원! 정말 이러기야? 하준 선배만 챙기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설마…….”
석호의 미묘한 뉘앙스에 원의 심장 소리가 쿵쿵 망치질을 했다. 둔감하기로 유명한 이 녀석이 눈치를 챈 거야? 내 짝사랑을!
“하준 선배가 부편집장이고 편집장님과 친하니까 잘 보이려고 수 쓰는 거지? 나보다 먼저 승진하려고! 그니까 너답지 않게 콧소리 내며 아부하는 거지, 지금?”
“아부?”
애교로 안 보이는 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심장에서 푸시시 바람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원은 하준도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여겼는지 궁금해 그를 쳐다보았다. 하룻밤을 새웠는데도 석호와 달리 하준에게서는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백 기자는 창업 공신이라서 석호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하준 선배! 지금 계란 두 개의 청탁에 넘어가시는 겁니까?”
석호가 불을 뿜는 용처럼 발끈했다. 원은 하준의 멋진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
“전 아직도 학사 주점에서 선배님이 펼친 달걀 예찬론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달걀 예찬론? 그게 뭔데?”
되물은 사람은 석호였다.
“그때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달걀이라고 대답한다고요. 유대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달걀이라면서 그 뜻을 알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고요.”
“내가 그랬어?”
하준의 얼굴이 머쓱해졌다.
“유대인들이 왜 달걀을 좋아하는데?”
석호의 얼굴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달걀은 익히면 익힐수록 단단해지니까. 그때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어떤 회유와 외압이 들어와도 달걀처럼 굴하지 않고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인이 되자고.”
“그렇게 멋진 말을! 그럼 나도 이제부터 달걀만 먹겠어.”
석호의 아이 같은 말에 원과 하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내가 허세를 좀 부린 모양이야.”
“허세라고 하셔도 멋있었어요.”
원의 말에 하준이 고맙다고 말하며 밥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원은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준의 그 한마디에 기자로서의 사명감이 가슴에 새겨졌으니까.
우뚝 솟은 태산 같은 선배와 함께 일하게 된 현재가 자랑스러웠다.
어떤 곳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 기자로서.
원은 밥버거를 우적우적 씹어 대는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야, 나 카메라 하나만 줘라. 제임스 본드 뺨치는 걸로다가.”
“그게 무슨 소리야?”
질문은 하준이 했다.
“저, 주방보조원으로 별장에 잠입합니다.”
“엥? 네가? 무슨 수로?”
석호가 입가에 밥풀을 묻히며 물었다.
“내일 파티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오나 봐요. 모텔 앞 식당 아줌마가 별장 파티 때문에 분주하더라고요. 지인들에게 고기 만질 사람 없냐고 전화하길래 제가 고기 좀 썰어봤다고 했죠. 당장 채용되던데요? 시간당 2만 원짜리 알바입니다.”
“나도 식육 식당 전문점의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
석호는 아깝다는 듯 주먹을 허공으로 휘둘렀다. 석호의 엉뚱함에도 아랑곳없이 하준이 물었다.
“언제?”
“아침 일찍 오라고 하던데요. 대규모 파티라서 준비할 요리들이 많다고 했어요.”
“어떻게 하려고? 계획은?”
“오전에 고기 해체 작업을 끝낸 후, 오후에는 초대받은 사람처럼 둘러보며 채령을 찾아보려고요.”
“그러다가 들키면 어쩌려고?”
원은 블랙 봉투에 든 황금빛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들킬 일 없어요. 여기 초대장이 있으니까요.”
“초대장? 어디에서 났어?”
석호가 원의 초대장을 빼앗아 봉투에 적힌 이름을 읽어 보았다.
“백결? 너 백 배우 만났어?”
“이번 주 압구정 숍에서 우연히. 들어가는 작품 없느냐고 근황 물어봤는데 요즘 이것저것 바쁘다고 하더라. 근데 곽 전무가 이런 쓸데없는 파티에 초대한다며 비웃더라고.”
“백결이 네게 초대장을 줬어? 취재하라고?”
“아니,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슬쩍했어.”
“이상해. 백결이 널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우호적인 기사 하나 써 준 적도 없고만.”
“나쁜 기사도 쓴 적이 없지. 왜냐하면 난 팩트만 취재하니까.”
“백결 사생활이 깨끗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나도 박석호가 아니라 백석호였다면 백 배우가 친근감을 느꼈을 텐데. 성씨 같은 걸로 이토록 수월하게 접근하다니. 넌 이제 아예 가족처럼 느껴지겠다?”
“그럼, 가족이나 다름없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원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기자와 배우 관계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원과 결은 이란성 쌍둥이였다. 백결은 한류 스타이자 최고의 배우였다. 직업의 특성상 취재 반경이 좁아질까 염려되어 동료들에게 비밀로 함구하고 있을 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초대장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석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부편집장님, 성일그룹의 차남 곽동욱과 채령의 열애설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초대박이겠죠? 곽 전무는 유부남 아닙니까? 채령이 뭐가 아쉽다고 유부남을 만나는 걸까요?”
“아직 단정 지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어. 곽 전무는 사람 모으기를 좋아하는 인사라, 정·재계는 물론 연예계도 가리지 않아. 채령이 곽 전무와 어떤 사이인지는 취재가 끝나 봐야 알 수 있어. 우리 수중에 있는 건 채령이 성일그룹으로 들어가는 사진 한 장밖에 없다고. 채령이 성일그룹과 광고 계약을 맺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아니라니까요! 촉이 딱 왔습니다. 편집장님의 취재원이 이 별장을 꼭 집어 주는 순간, 모종의 냄새가 났다고요. 채령은 아마 곽 전무와 그렇고 그런 사이일 겁니다. 원래 광고 찍다가 광고주가 스폰서 되고, 스폰에서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고 하면서 재벌가의 이혼이 떠들썩하게 되는 거라고요.”
“곽 전무가 파티광이라는 걸 몰라? 비즈니스도 파티장에서 한다고 소문났어. 연예계 마당발인 곽 전무는 파티를 열 때 의례적으로 톱스타들에겐 초대장을 보낸다고.”
하준의 침착한 어조에 어쩐지 짜증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원은 석호에게 눈을 흘기며 답답해했다. 소도둑처럼 생긴 대학 동기는 눈만 끔뻑끔뻑했다.
“채령이 스폰서라니? MJ엔터미디어가 그렇게 우스운 소속사였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회사 소송당하면 네가 책임질래?”
“아니, 소속사 몰래 스폰서 끼고 있는지 누가 알아?”
“퍽이나! MJ엔터미디어가 잘도 그러게 놔두겠다. 어쩌면 채령은 이 별장에서 진짜 열애 상대자를 만날지도 몰라. 곽 전무는 그저 장소 제공을 하는 지인일 수 있다고.”
“백 기자 말에 한 표.”
하준의 동의에 원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건 분명 칭찬의 눈빛이었다. 석호 옆에 있다 보니 빛이 나 보이는 것이다. 고맙다, 친구야.
“장비나 줘. 사용법도 알려 주고.”
“오케이.”
사진 담당 전문 기자인 석호는 신이 나 초소형 몰래 카메라를 클러치 백에 설치하고 원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 기자, 드레스와 구두는 준비했어? 드레스 코드도 있는데?”
“네. 시내에서 빌려 왔으니 염려 마세요. 부편집장님.”
원은 하준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아가씨,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발골을 잘했어? 닭이면 닭, 소면 소, 돼지면 돼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예쁘게 다듬었잖아. 심지어 스테이크용은 중량도 딱 맞아. 생활의 달인에 나가도 되겠어.”
“부모님이 정육점을 하시거든요. 곁눈질로 배웠어요.”
“곁눈질로 배운 것치곤 너무 깔끔하다! 가업을 이을 생각인가?”
“가업이요? 네. 가업은 이으라고 있는 것이니까요.”
“금방 끝내 버렸네. 여기 일당 10만 원. 오늘 정말 수고했어요.”
원은 주방 아주머니가 쥐여 준 10만 원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별장 밖으로 나오는 척하며 이목을 피해 잽싸게 저택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지금 숨어 있는 곳은 별장의 물품들을 처박아 놓은 창고. 5층 건물의 맨 꼭대기였다. 성일그룹 차남, 곽 전무의 별장은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넓은 정원과 분수가 있는 중세풍의 건물이었다.
원은 핑크 립스틱으로 화장을 마무리했다. 거울을 보니 꾀죄죄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화사한 복숭앗빛 뺨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만하면 괜찮은걸?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 사돈의 팔촌, 처조카의 친구 여동생 즈음으로는 보일만 했다.
하지만 드레스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튜브톱 화이트 미니 드레스는 대체로 몸에 꽉 낀 편이지만 유달리 헐렁한 부분이 있다. 한숨을 내쉬었다. A컵이 B컵 가슴을 어찌 따라갈까. 원은 백팩에서 손수건과 티슈를 찾아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다. 겨드랑이 살도 영혼까지 끌어 모았다. 가까스로 품앗이한 가슴이 옹골지게 드레스를 채웠다.
드러난 어깨와 봉긋한 가슴이 어색해 질끈 묶었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드러났던 가슴이 가려져 안심이 됐다.
본드 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취재를 위한 잠입은 언제나 짜릿했다. 역동적인 느낌까지 들게 한다. 여기서 특종을 낚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원은 살그머니 문을 열어 보았다. 해는 벌써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갔다.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높은 담벼락 너머 저곳에 그녀의 팀이 있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원이 연회장으로 향했다.
현재 시간 5시. 공식적인 파티 시간은 7시. 초대받은 이들은 속속 도착해 리셉셔니스트의 안내를 받았다. 1층에는 꽤 넓은 연회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벌써부터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TV를 종횡무진하는 유명 셰프도 얼핏 눈에 들어왔다. 식자재 트럭에 실린 어마어마한 양의 식재료로 가늠해 볼 때 하루에 끝날 파티가 아니었다.
메이드들이 쉴 새 없이 각 층에 있는 룸을 들락날락거렸다. 룸에는 특이하게도 레드, 블랙, 화이트, 블루 등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치 사생활을 보호하는 암호같이 보였다. 파티를 즐기다 피곤하면 각자의 방에서 쉴 수 있게 한 것은 유명인들에게는 꽤 쓸모 있는 배려였다. 곽 전무는 진정한 파티광인 모양이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대장 좀 볼 수 있을까요? 등록을 안 하신 듯해서요.”
원은 뜨악한 표정을 얼른 지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여유로운 웃음도 함께였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초대장을 내밀었다. 연회장을 구경하려다 그만 딱 걸린 것이다. 눈썰미 좋은 리셉셔니스트는 용케 초대장 검사를 받지 않은 원을 알아보았다.
“백결님의 파트너분이시군요. 한데 백결님은……?”
“오빠는 좀 뒤에 온대요. 우리 오빠 얼굴이면 초대장은 없어도 되잖아요. 안 그래요?”
“실례가 안 된다면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최상의 파티를 제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 수집은 필수라서요.”
“아, 여동생이에요. 친여동생. 이런 파티는 처음이라 구경시켜 준다고 오빠가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답니다. 중국 팬미팅 때문에 참석이 늦는다고 연락이 왔어요.”
“동생분의 성함을 알려 주시면 저희들이 더욱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전, 백원이에요.”
“백원요?”
“네.”
“백결님의 여동생다운 이름이시네요. 백결님의 방은 3층 화이트입니다. 그 방을 편하게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리셉셔니스트의 인증을 받고 보니 숨어 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다로운 초청자의 대행인도 무사히 속여 넘겼으니까. 한결 편한 마음으로 석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입은 성공적. 그쪽은?>
<채령 벤은 아직 안 보임. 나타나는 즉시 연락하겠음. 이상 무전 끝. 오버.>
석호는 형사 놀이에 빠져 있는 듯하다. 우린 기잔데. 하지만 불법의 경계를 얼쩡거리고 있다 보니 외려 범인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