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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라는 여자는

1화

프롤로그


<이혼을 전제로 한 합의서>
1. 기간은 3년으로 한다.
2.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다.
3. 의무를 다한다.
4. 성행위는 양측 합의하에만 가능하다.
5. 아이는 갖지 않는다. 만약 생길 경우 모든 권리는 남자 측이 갖는다.
6. 기간 연장은 양측의 합의하에 이루어진다.
7. 만약 위 조항 중 하나라도 어길 시에는 상대가 원하는 조건대로 배상한다.


주 골자는 7가지 조항뿐이었지만 아래 빼곡히 적힌 세부 조항은 세밀함 그 자체였다. 특정 사실 또는 법률관계에 관한 증거를 보전하고 공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행위 공증이 이루어졌다.
양식에 맞게 준비된 계약서를 읽은 그녀가 마지막 칸의 서명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부부간 각서는 공증을 받더라도 효력이 없지만, 이건 이혼을 전제로 한 합의서라 예외에 해당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양측이 대동한 입 무겁고 몸값 비싼 변호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만, 서희는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3년간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들고 귀찮은 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더구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이강민이 남편이니 더더욱. 이 계약서는 사실상 족쇄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드니 날카로운 인상의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체된 것이 못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서희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인생을 저당 잡히는 중요한 계약서를 대충 읽고 사인할 수 없지 않은가. 의문이 생기면 콕 짚어 질문했고 충분히 납득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큐와 이큐가 160이 넘는다는 그에 비해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녀 또한 한때는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었다.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판단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흘깃대며 초조해하든 말든 계약 당사자인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28시간이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는 오늘 하루만은 그녀에게 시간을 할애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결국 스케줄 하나를 포기했는지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짧게 지시 사항을 내렸다. 전화를 끊은 뒤에야 다소 여유를 되찾은 그가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검토는 다 한 건가?”
“아직이요.”
“……새삼스럽지만, 최 사장님을 닮았군.”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서희의 부친인 최명렬은 재계의 이단아라 불리는 인물로 서희를 이곳에 앉아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 약속은 칼같이 지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하지 않으며 서희의 엄마가 죽은 뒤에도 재혼하지 않은 기인이기도 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문 강민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손깍지를 꼈다. 오만함이 몸에 밴 건방진 자세에도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커피 드릴까요?”
짓누르는 압박감과 침묵을 견디다 못한 변호사 박지웅이 말을 꺼내자 그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해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변호사 사무실은 꽤 큰 편이었다. 그가 앉아 있는 가죽 소파 또한 질감과 색감으로 미루어 볼 때 수백을 호가할 게 분명해 보였다.
오늘을 위해 며칠 전부터 직원을 닦달해 소파를 포함한 사무실 전체를 청소한 걸 그가 알아주기나 할는지. 이강민이 워낙 유명한 거물이기 때문도 하지만 깔끔한 걸 선호하기로 소문난 그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강민은 변호사가 건네준 커피를 홀짝이며 여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 보고 있었다. 덕분에 경제 차관과의 약속 시간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젠장,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선 믿음이 가기도 했다. 최서희는 처음 만남부터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갔던 여자였다. 자연스레 강민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인연이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들처럼.

이강민, 그의 인생에는 지금까지 티끌만 한 오점도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갖고 싶은 것을 가졌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젊은이였다. 결혼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가 도달할 위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는데, 주위에서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여자가 아쉬운 건 아니었다. 손 내밀면 당장 옷을 벗는 여자가 지천이었다. 돈으로 안 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맞선을 종용했고, 해외 바이어들도 그가 혼자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누군가와 연결시켜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앞으로 3년, 3년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룹을 정상에 올려놓으리라. 그의 목표는 오로지 그거 하나였다.
그런데 명목뿐인 아내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귀찮다. 하지만 거슬린다. 짜증 난다. 그녀의 호수같이 잔잔한 평온을 깨뜨리고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불쑥불쑥 치민다. 가끔은 목을 졸라 버리고 싶다. 그럼 살려 달라 매달릴 테니까. 살 이유를 찾을 테니까. 그에게만 집중하고 한눈팔지 않을 테니까.
까다롭게 골랐다. 곁에 두기 적당하고, 버려도 부담스럽지 않은 여자로. 그런데 무늬만 아내인 이 여자가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으면 미친놈처럼 찾아다니게 한다.

최서희,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 서서 균형을 잡고 있던 그녀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명목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면 그건 과연 정당한 일일까.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찾다 지쳐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며 마음이 만든 감옥에 갇혀 있었다.
웃고 있어도 슬퍼 보이던 얼굴에 매번 가슴이 죄였다. 그래서 더 웃게 만들고 싶었다.
하얀 가슴에 찍힌 낙인처럼 그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아 어둠 속을 헤매듯 자취를 찾았다. 하지만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지워졌다. 나라도 기억해야지, 그가 살아 있었다는 걸. 여기 바로 이 자리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말없이 우산을 내밀던 깊고 깊은 속내를 가진 사람, 추운 날 차가 없어 미안하다며 제 목도리를 양보하던 미소마저 슬픈 그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여기 이곳에, 내 가슴에.
그댄 지금 어디에…….



1


그랜드 하얏트 로비 라운지 커피숍은 남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선한 바람과 남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커피숍으로 유명했다. 유리창을 통해 따스한 햇볕이 커피숍 안을 채웠고 피아니스트가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멋들어지게 연주했다.
서희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막 1층에 들어섰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방금 도착했어요. 걱정 마세요. 약은 챙겨 드셨죠? 10분 전이에요. 바쁜 사람이니 늦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아버지의 걱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걱정도 병이라 늦지 않아야 한다, 잘할 거라 믿는다는 등의 말을 흘려들으면서도 서희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깊은 한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왔다.
늦지 않게 나선 탓에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제법 더운 날씨에도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켜지 않고 운전했더니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몸이 땀으로 젖은 것 같아 씻고 싶었다.
약속 장소로 이곳을 택한 건 서울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점과 몇 번 와 본 적이 있어 길을 헤매는 실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녀는 1층 안쪽에 위치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손을 씻은 그녀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앞에 비친 제 모습이 영 낯설었다. 평소보다 두터운 화장은 잡티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했고 척 봐도 명품인 게 분명한 가방과 원피스로 치장한 그녀가 거기 있었다.
“네. 그렇군요. 아…… 그러세요. 좋네요……. 하.”
조신한 몸가짐으로 연습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외우던 그녀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짓인지. 내가 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건지. 현실감이 없어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멍하니 세면대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아, 정말 짜증 나 죽겠네! 이거 왜 이러는 건데!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옆 세면대에 선 여자가 물이 나오지 않는지 씩씩대며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수도꼭지 앞에서 짜증을 내던 여자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서희를 거의 밀치다시피 해 자리를 차지했다. 화가 날 법도 했지만 그녀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여자가 손을 대고 있을 땐 잠잠하던 수도꼭지의 물은 서희가 손을 내밀자마자 졸졸 흘러나왔다. 수도꼭지의 민감한 센서는 손을 대고 몇 초 기다려야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빨리빨리’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운다는 외국인의 우스갯소리처럼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주 실수를 저지르고 답답함에 화를 냈다. 지금처럼.
“아, 알았다니까요! 몇 번을 말해, 도착했다니까! 그리고 30분 정도 좀 늦으면 어때? 남자가 그것도 못 기다려? 됐어, 됐다고. 엄만 왜 또 그 얘기를 들먹여?”
듣지 않으려 해도 그녀와 상황이 비슷해 보여 신경이 쓰였다. 아마 토요일 오후인 지금 커피숍 안엔 맞선을 보는 남녀가 절반일 거다. 그녀 역시 그중 한 사람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30분이라, 많이 늦었는데 가 봐야 하지 않나? 서희는 손목시계를 보고 약속 시간 정각임을 확인했다.
“그게 왜 내 탓이야? 이강민인지, 이강철인지 하는 그 남자가 비정상이지. 고작 30분 늦었다고 가 버려? 코리안 타임도 모른대? 내가 얼마나 신경 쓰고 갔는데 바람을 맞히냐고! 한 달 전 생각하면 아직도 천불 나, 흥! 그때 내가 입은 손해가 얼만 줄 알아? 마사지 숍이랑 네일 아트 비용에, 그 전날 친구들이 보트 타러 가자는 것도 다 취소했는데! 아우, 짜증 나! 알았다고! 지금 나간다잖아!”
전화를 끊은 여자는 잽싸게 화장을 고친 후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강민……?’
오늘 서희가 맞선을 보기로 한 상대 남자의 이름이었다.
여자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그녀는 이강민과 한 달 전 맞선을 보기로 했던 상대로, 그날 30분 늦어 그를 만나지도 못하고 퇴짜를 맞았던 모양이었다. 듣던 대로 시간을 황금같이 사용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 점은 높이 사 줄 만했다. 부친인 최명렬 사장도 약속을 칼같이 지키기로 유명하신 분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남의 시간도 소중하다고 가르치셨다.
긴장해서 경직됐던 몸이 조금은 유연해지고 느슨하게 풀렸다. 맞선이 처음인 그녀와는 달리 그는 이미 수많은 맞선을 경험한 남자였다. 그녀는 그가 만나는 수많은 맞선 상대 중 하나일 뿐이니 어색하지 않을 것이고 자연스레 리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