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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버지.”
긴 한숨이 내쉬어졌다. 맞선이라니…….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을 선택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고 결혼하라 종용한 것도 아니었다. 회사가 어려워져 도움이 필요해 팔려 가는 막장 이야기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그녀 외에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그녀를 키우는 것에 평생을 바치지만 않으셨더라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담낭암이었다. 발견했을 땐 이미 전이가 진행된 후라 손쓸 도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아니, 명색이 의사 가운을 입었던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신경 썼더라면…….
‘구역질, 체중 감소를 동반한 피로, 아마 통증 횟수도 늘어날 겁니다. 담낭암이 진행이 더뎌 갑자기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로 완치가 어려운 질병입니다. 부친의 경우 암의 위치가 절제하기 어려운 부분에 있어 현재로선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병행하시는 게 최선입니다. 워낙 완치가 어려운 병이니 보호자분이 인내심을 가지시고 환자분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주치의의 당부와 설명을 들으며 그동안 안일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후회했다.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기다려 주고 참아 주었기에 믿고 괜찮겠지 하며 버려두었다. 그랬던 결과가 비보가 되어 그녀를 괴롭게 했다.
강요 한 번 받은 적 없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으셨다.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라는 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부친의 사업을 잇지 않고 의대를 선택했을 때도, 나이를 먹어 가며 초조해하신다는 걸 눈치챘지만 애써 외면했을 때도, 레지던트 과정도 그만두고 3년 동안 미친 듯 그 사람을 찾아 헤맬 때도 부친은 그저 묵묵히 참고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1차 수술 후, 요양 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부친이 오수에 빠져 있었기에 그녀가 전화를 대신 받았던 게 화근이었다. 웬만한 집안은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공 여사는 그녀가 최 사장의 딸 최서희임을 알고 끈덕지게 졸라 대기 시작했다.
‘아유, 한 번만 만나 보라니까요. 만나 보고 아니면 그만인 거지. 인연이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닌데. 호호.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최 사장님이 따님 예쁘고 똑똑하다고 얼마나 자랑하셨다고요. 얼굴 한번 보여 줘요, 효도하는 셈 치고.’
효도……. 효도라는 말에 울컥하고 아래에서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제 자랑을요?’
‘네. 세상에, 그 깐깐하고 완고한 분이 자식 자랑 하실 땐 얼굴에 빛이 나시더라니까요.’
‘그럼…… 한번 만나 볼게요.’
그녀는 충동적인 감정으로 실언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아버지는 눈에 띄게 기뻐하셨다. 병으로 수척해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가슴이 메었다.
‘공 여사가 네가 맞선을 보겠다고 했다더라. 정말이냐?’
‘네…….’
‘잘못 들었나 했는데, 허허허. 정말이란 말이지.’
‘아버지.’
‘가만있어 봐라, 그러면……. 아무 놈이나 만나게 할 수는 없고 제대로 된 놈으로 부탁을, 아니다, 내가 최고로…….’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차마 그냥 해 본 소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목 끝에 걸려 안으로 삼켜 들어갔다.
그래, 효도가 별건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면 그게 효도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맞선 한번 보는 건데 그거 못 해 드릴까. 아버지만 기뻐하신다면 수십 번, 수백 번도 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그동안 속만 썩여 드리고…….’
부친을 뵐 낯이 없었다. 저 하나 행복하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누군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병이 깊어져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모든 게 제 탓 같았다. 병이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데 부친의 병의 원인 제공자가 저인 것만 같았다.
서희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커피숍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낯익은 두 얼굴이 눈에 확 띄었다. 화장실에서 신경질을 부리던 여자와 서희의 맞선 상대 이강민이었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서희는 그들을 스쳐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강민이야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얼굴을 볼 수 있는 유명인이었지만 그녀는 철저히 부친의 보호 아래서 자랐다. 강민이 먼저 그녀를 알아볼 일은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그녀가 앉아야 옳았지만 이 흥미진진한 상황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있었다.
“……져.”
“네?”
“꺼지라고.”
“뭐…… 뭐라구요? 날 뭘로 보고!”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건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대체 손 사장님은 딸을 어떻게 교육시킨 거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르르 떠는 기다란 손가락이 물컵을 콱 움켜쥐는 모습도 시야에 잡혔다. 여자와 달리 그는 동요 없는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뿌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당한 일은 배로 갚아 주는 게 내 철칙이거든.”
그에게 물을 뿌리려던 하얀 손이 컵을 쥔 채로 부들거렸다. 아마도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의 욱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아닌지.
여자는 이윽고 쾅, 하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물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컵을 내려놓았는지, 테이블을 덮고 있는 천에 물이 잔뜩 튀어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의 몸이 분노를 차마 숨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두고 봐요! 이대로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요?”
“가만히 있든 말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고, 자리 좀 비켜 주지. 다른 맞선 상대가 올 시간이 됐거든.”
“이…….”
그녀는 끝끝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아쉽게도 카펫에 묻혔지만 그녀가 신은 하이힐 소리가 제법 요란했을 것 같다. 강민은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또 다른 여자가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최서희입니다.”
단아한 이미지의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이미지만큼이나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스캔한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뱉어 냈다.
“10분 늦으셨네요. 막 일어나려던 참…….”
“시트콤 구경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
“앉아도 될까요?”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얌전한 몸가짐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철저히 교육받은 여자처럼 행동했다. 그녀가 구경했다던 시트콤이 어떤 것인지 그는 모르지 않았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한다 이건가?
죽을 시간도 없이 바쁜 요즘, 이런 자리에 나와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여자가 10분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미련 없이 일어나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데도 두꺼운 화장을 한 여자가 그를 가로막고 서서 눈알을 부라리며 덤벼들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물컵을 움켜쥘 때 경고성 멘트를 날려 주니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었는지 콧바람만 씩씩거리다 사라졌다. 배불뚝이처럼 배가 툭 튀어나온 욕심쟁이 두꺼비, 손 사장과 아주 꼭 닮은 유전자였다.
그 불쾌함이 가시기도 전에 나타난 여자가 그녀였다. 사진이 없어 얼굴도 몰랐지만 최명렬 사장의 딸이라는 말에 수락했다. 그녀가 최 사장의 절반이라도 닮아 있길 고대하며.
그런데…… 그런 광경을 봤으면, 최소한 궁금한 점은 물어봐야 하지 않나?
“시트콤에 대한 감상을 물어봐도 됩니까?”
“감상이 궁금하신 건가요, 아님 제가 묻지 않은 게 자존심 상하신 건가요?”
적어도 머리가 나쁜 여잔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돌려서 물어본 이유를 정확히 간파했다. 성격대로라면 무시하거나 알아서 해석하라고 내버려 두겠지만 돌아가 혹여나 최 사장에게 말을 옮기기라도 한다면 모친에게 쓴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요.”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말투였다. 애인이 있는데도 억지로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떨지도 않고……. 게다가 확연히 느껴지는 이 거리감은 대체 뭐지? 기분이 상했다고나 할까, 자만심에 상처를 입었다고나 할까.
“시간 낭비 하지 맙시다. 내가 마음에 듭니까?”
당황할 법한데도 여자는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답이 없었다.
“최서희 씨.”
“죄송합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천하의 이강민이. 하!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라더니 아까 일을 마음에 둔 겁니까?”
일종의 오기이자 심술이었다.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해는 이강민 씨가 하시는 것 같네요. 넘겨짚는 것이 버릇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적어도 세 번은 만나야 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강민 씨와는 오늘 처음 만났고 아주 잠깐 함께 있었을 뿐이에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신 건 그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세 치 혀로는 이 여자를 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일어나 나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럼 볼일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죠.”
“앉으세요.”
“뭐라고요?”
“아직 제 잔이 비지 않았어요.”
이제 막 나온 서희의 주스 잔은 당연히 비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체 이건 무슨 경우지?
“여기까지 나오는 데 1시간, 나온다고 치장하는 데 1시간, 시트콤 감상하는 데 소비한 15분, 합산 2시간 15분 걸렸어요. 주스 한 잔 마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구할 권리 정돈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면 그냥 가셔도 되고요.”
그가 계산서에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시간에 집착하는 걸로 보아 최 사장님을 닮으셨나 봅니다.”
남자는 억울한지 그녀의 속을 긁으려 했다. 하지만 서희는 그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네, 닮았어요. 하지만 그런 이유보단 너무 일찍 일어나면 아버지가 걱정하시지 않을까 해서예요.”
강민의 눈동자에 이해의 빛이 나타났다 사그라졌다. 서희의 말이 옳았다. 맞선이란 둘만의 약속이 아니라 집안끼리의 약속도 된다. 너무 일찍 일어나도, 너무 늦게 헤어져도 문제인 만남이었다. 그 점을 그녀가 꼬집어 준 것이다.
“……입장이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
“글쎄요. 이강민 씨 입장은 어떠신데요?”
밑져야 본전, 패를 던져 볼까? 그는 그녀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걸 눈치챘다. 어쩌면 이 짜증 나는 상황을 정리할 기회인지도…….
“최서희 씨,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아버지.”
긴 한숨이 내쉬어졌다. 맞선이라니…….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을 선택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고 결혼하라 종용한 것도 아니었다. 회사가 어려워져 도움이 필요해 팔려 가는 막장 이야기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그녀 외에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그녀를 키우는 것에 평생을 바치지만 않으셨더라도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담낭암이었다. 발견했을 땐 이미 전이가 진행된 후라 손쓸 도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아니, 명색이 의사 가운을 입었던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신경 썼더라면…….
‘구역질, 체중 감소를 동반한 피로, 아마 통증 횟수도 늘어날 겁니다. 담낭암이 진행이 더뎌 갑자기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로 완치가 어려운 질병입니다. 부친의 경우 암의 위치가 절제하기 어려운 부분에 있어 현재로선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병행하시는 게 최선입니다. 워낙 완치가 어려운 병이니 보호자분이 인내심을 가지시고 환자분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주치의의 당부와 설명을 들으며 그동안 안일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후회했다.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기다려 주고 참아 주었기에 믿고 괜찮겠지 하며 버려두었다. 그랬던 결과가 비보가 되어 그녀를 괴롭게 했다.
강요 한 번 받은 적 없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으셨다.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라는 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전부였다. 부친의 사업을 잇지 않고 의대를 선택했을 때도, 나이를 먹어 가며 초조해하신다는 걸 눈치챘지만 애써 외면했을 때도, 레지던트 과정도 그만두고 3년 동안 미친 듯 그 사람을 찾아 헤맬 때도 부친은 그저 묵묵히 참고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1차 수술 후, 요양 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부친이 오수에 빠져 있었기에 그녀가 전화를 대신 받았던 게 화근이었다. 웬만한 집안은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공 여사는 그녀가 최 사장의 딸 최서희임을 알고 끈덕지게 졸라 대기 시작했다.
‘아유, 한 번만 만나 보라니까요. 만나 보고 아니면 그만인 거지. 인연이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닌데. 호호.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최 사장님이 따님 예쁘고 똑똑하다고 얼마나 자랑하셨다고요. 얼굴 한번 보여 줘요, 효도하는 셈 치고.’
효도……. 효도라는 말에 울컥하고 아래에서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제 자랑을요?’
‘네. 세상에, 그 깐깐하고 완고한 분이 자식 자랑 하실 땐 얼굴에 빛이 나시더라니까요.’
‘그럼…… 한번 만나 볼게요.’
그녀는 충동적인 감정으로 실언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아버지는 눈에 띄게 기뻐하셨다. 병으로 수척해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가슴이 메었다.
‘공 여사가 네가 맞선을 보겠다고 했다더라. 정말이냐?’
‘네…….’
‘잘못 들었나 했는데, 허허허. 정말이란 말이지.’
‘아버지.’
‘가만있어 봐라, 그러면……. 아무 놈이나 만나게 할 수는 없고 제대로 된 놈으로 부탁을, 아니다, 내가 최고로…….’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차마 그냥 해 본 소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목 끝에 걸려 안으로 삼켜 들어갔다.
그래, 효도가 별건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면 그게 효도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맞선 한번 보는 건데 그거 못 해 드릴까. 아버지만 기뻐하신다면 수십 번, 수백 번도 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그동안 속만 썩여 드리고…….’
부친을 뵐 낯이 없었다. 저 하나 행복하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누군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줄도 모르고, 병이 깊어져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모든 게 제 탓 같았다. 병이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데 부친의 병의 원인 제공자가 저인 것만 같았다.
서희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커피숍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낯익은 두 얼굴이 눈에 확 띄었다. 화장실에서 신경질을 부리던 여자와 서희의 맞선 상대 이강민이었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서희는 그들을 스쳐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강민이야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얼굴을 볼 수 있는 유명인이었지만 그녀는 철저히 부친의 보호 아래서 자랐다. 강민이 먼저 그녀를 알아볼 일은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그녀가 앉아야 옳았지만 이 흥미진진한 상황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있었다.
“……져.”
“네?”
“꺼지라고.”
“뭐…… 뭐라구요? 날 뭘로 보고!”
“내 시간을 낭비하는 건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대체 손 사장님은 딸을 어떻게 교육시킨 거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르르 떠는 기다란 손가락이 물컵을 콱 움켜쥐는 모습도 시야에 잡혔다. 여자와 달리 그는 동요 없는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뿌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당한 일은 배로 갚아 주는 게 내 철칙이거든.”
그에게 물을 뿌리려던 하얀 손이 컵을 쥔 채로 부들거렸다. 아마도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의 욱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아닌지.
여자는 이윽고 쾅, 하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물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찌나 세게 컵을 내려놓았는지, 테이블을 덮고 있는 천에 물이 잔뜩 튀어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의 몸이 분노를 차마 숨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두고 봐요! 이대로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요?”
“가만히 있든 말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고, 자리 좀 비켜 주지. 다른 맞선 상대가 올 시간이 됐거든.”
“이…….”
그녀는 끝끝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아쉽게도 카펫에 묻혔지만 그녀가 신은 하이힐 소리가 제법 요란했을 것 같다. 강민은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또 다른 여자가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최서희입니다.”
단아한 이미지의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이미지만큼이나 사근사근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스캔한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뱉어 냈다.
“10분 늦으셨네요. 막 일어나려던 참…….”
“시트콤 구경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
“앉아도 될까요?”
강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얌전한 몸가짐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철저히 교육받은 여자처럼 행동했다. 그녀가 구경했다던 시트콤이 어떤 것인지 그는 모르지 않았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한다 이건가?
죽을 시간도 없이 바쁜 요즘, 이런 자리에 나와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여자가 10분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미련 없이 일어나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데도 두꺼운 화장을 한 여자가 그를 가로막고 서서 눈알을 부라리며 덤벼들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물컵을 움켜쥘 때 경고성 멘트를 날려 주니 그래도 이성은 남아 있었는지 콧바람만 씩씩거리다 사라졌다. 배불뚝이처럼 배가 툭 튀어나온 욕심쟁이 두꺼비, 손 사장과 아주 꼭 닮은 유전자였다.
그 불쾌함이 가시기도 전에 나타난 여자가 그녀였다. 사진이 없어 얼굴도 몰랐지만 최명렬 사장의 딸이라는 말에 수락했다. 그녀가 최 사장의 절반이라도 닮아 있길 고대하며.
그런데…… 그런 광경을 봤으면, 최소한 궁금한 점은 물어봐야 하지 않나?
“시트콤에 대한 감상을 물어봐도 됩니까?”
“감상이 궁금하신 건가요, 아님 제가 묻지 않은 게 자존심 상하신 건가요?”
적어도 머리가 나쁜 여잔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돌려서 물어본 이유를 정확히 간파했다. 성격대로라면 무시하거나 알아서 해석하라고 내버려 두겠지만 돌아가 혹여나 최 사장에게 말을 옮기기라도 한다면 모친에게 쓴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요.”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말투였다. 애인이 있는데도 억지로 나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떨지도 않고……. 게다가 확연히 느껴지는 이 거리감은 대체 뭐지? 기분이 상했다고나 할까, 자만심에 상처를 입었다고나 할까.
“시간 낭비 하지 맙시다. 내가 마음에 듭니까?”
당황할 법한데도 여자는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답이 없었다.
“최서희 씨.”
“죄송합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천하의 이강민이. 하!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라더니 아까 일을 마음에 둔 겁니까?”
일종의 오기이자 심술이었다.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해는 이강민 씨가 하시는 것 같네요. 넘겨짚는 것이 버릇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적어도 세 번은 만나야 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강민 씨와는 오늘 처음 만났고 아주 잠깐 함께 있었을 뿐이에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신 건 그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세 치 혀로는 이 여자를 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일어나 나갈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럼 볼일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죠.”
“앉으세요.”
“뭐라고요?”
“아직 제 잔이 비지 않았어요.”
이제 막 나온 서희의 주스 잔은 당연히 비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대체 이건 무슨 경우지?
“여기까지 나오는 데 1시간, 나온다고 치장하는 데 1시간, 시트콤 감상하는 데 소비한 15분, 합산 2시간 15분 걸렸어요. 주스 한 잔 마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구할 권리 정돈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면 그냥 가셔도 되고요.”
그가 계산서에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시간에 집착하는 걸로 보아 최 사장님을 닮으셨나 봅니다.”
남자는 억울한지 그녀의 속을 긁으려 했다. 하지만 서희는 그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네, 닮았어요. 하지만 그런 이유보단 너무 일찍 일어나면 아버지가 걱정하시지 않을까 해서예요.”
강민의 눈동자에 이해의 빛이 나타났다 사그라졌다. 서희의 말이 옳았다. 맞선이란 둘만의 약속이 아니라 집안끼리의 약속도 된다. 너무 일찍 일어나도, 너무 늦게 헤어져도 문제인 만남이었다. 그 점을 그녀가 꼬집어 준 것이다.
“……입장이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
“글쎄요. 이강민 씨 입장은 어떠신데요?”
밑져야 본전, 패를 던져 볼까? 그는 그녀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걸 눈치챘다. 어쩌면 이 짜증 나는 상황을 정리할 기회인지도…….
“최서희 씨,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