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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서희는 야경을 바라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그와 자리를 옮긴 곳은 최상층의 바(bar)였다. 그녀는 그가 사라졌어도 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누가 알게 된다면 미친 개소리고 웃기는 시트콤이라고 할 거다. 말로만 듣던 계약 결혼의 주인공이 최서희와 이강민이란다. 평범한 계약과 다른 점은 그도 그녀도 이후 대가 없이 깔끔히 헤어진다는 점이었다.
절대적으로 그녀 쪽이 손해인 계약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절실한 건, 시간이었다. 부친이 건강을 되찾을 시간, 아버지를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시간, 그 사람을 찾아다닐 수 있는 자유까지. 그가 그걸 제공하겠다는데, 이보다 이상적일 수 없었다.
강민은 그녀에게 계약 기간인 3년간의 자유 대신 명목뿐인 아내 역할을 요구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다소 명확했다. 서희는 자신이 본분을 잊지 않고 행동하기만 한다면 다른 간섭은 일절 받지 않기로 그에게서 약속을 받아 냈다. 두 사람의 계약 조건은 그게 전부였다.
남들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그의 그런 무모한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도전, 하면 이강민이다. 사업처럼 결혼도 그가 주도하고 밀어붙이면 만사형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음에 들면 데리고 쭉 살면 되는 거고, 아니면 합의한 대로 이혼해 버리면 되는 거다. 뭐가 문제인가.
사실 그답지 않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도박이었고 모험이었다. 과감한 편이라 알려진 그였지만 리스크를 여러 번 고려한 끝에 배팅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엇을 보고 이런 제의를 한 것인지, 그 역시 제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는 늘 자심감에 차 있었고, 여잘 만족시킬 능력과 매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최서희라는 여자는 그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그게 그를 미치게 한다. 초조하게 만든다.
* * *
서희는 부친 최명렬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전보다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허허, 결혼이라고? 몇 번 봤다고 그런 결정을 해?”
“싫으세요? 맞선이란 게 그렇잖아요. 혹 이강민 씨가 마음에 드시지 않은 거라면…….”
“그런 말이 아니다. 내가 널 아는데, 어련히 고심하고 결정했으려고.”
“아버지도 약속하셔야 해요. 건강 되찾을 때까지 일 줄이시기로 한 거요. 아셨죠?”
“그거야 그렇지만…….”
“그동안 저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군 거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서희는 급히 고개를 돌려 부친을 외면했다. 아버지의 병을 알고 나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감정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명색이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해, 레지던트 과정을 순조로이 밟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가장 가까운 혈육인 부친의 건강을 간과하다니.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난 괜찮다. 의료진들도 우수하고 요샌 기술이 많이 발전했으니. 네가 결혼해도…….”
“아버지의 병을 감출 생각은 없어요.”
“서희야.”
“제가…… 알아서 해요. 아버진 빨리 나을 생각만 하시면 돼요. 아셨죠?”
오늘은 기뻐하시는 모습만 보고 싶었다.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 왔다. 육체적 고통만큼 심적 고통과 싸우는 환자들이 많았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본인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입원비와 약값, 수술비 등 돈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도 그나마 그녀에게 다행인 건 돈에 구애받지 않고 부친의 병에만 신경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애정도 아이도 원하지 않는다. 강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서희는 내다보고 준비하고 있었다. 결혼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돌아선다고 무 자르듯 잘라지지 않는 인연 중에 가장 질기고 독한 억겁의 인연이라는 걸 그가 알긴 하는지. 아마 강민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처음부터 줄 수 없는 건 요구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화병에 꽂아 둔 장식용 꽃, 그게 그가 원하는 아내상이었다. 서희는 그가 만족할 만큼 연기할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결정되고 나서, 결혼식은 두 달 뒤로 잡혔다. 상견례에서 예식장 예약까지, 지체할 시간도 없이 논스톱으로 결정되었다. 초호화는 아니더라도 이강민의 결혼식인 탓에 세간의 관심을 모은 만큼 구색을 갖추어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일을 모두 제가 하는 것처럼 바쁜 척, 신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비서는 그녀에게 대뜸 누군가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알려 주었다.
웨딩플래너 이수정. 웨딩드레스, 혼수, 웨딩 촬영 상담, 신혼여행 자문 등 결혼과 관련된 모든 일을 기획, 관리할 수 있고 활발한 성격과 수준 높은 대화 능력을 갖춘 전문 베테랑이란다.
각오하고 있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처음엔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났고, 이성을 찾고 나니 실소를 금치 못했다.
‘뭘 기대한 거지? 최서희, 이럴 줄 모르고 시작한 거야? 여왕 대접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 너도 참 웃긴다.’
“알았어요, 그렇게 진행하죠. 그런데 남편에게 연락해야 할 중요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죠? 바꿔 줄 수 있나요? 통화하고 싶은데.”
― 오늘 미국으로 출국하셨어요. 연락 못 받으셨어요?
연락은 개뿔, 문자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결혼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래요? 권한을 내게 넘기고 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알았어요. 참, 이강민 씨 사이즈는 비서실에서 알고 있죠?”
― 네.
“내 쪽에서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아닌 것도 있을 거예요. 맞춤은 내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나머진 비서실에서 이수정 씨에게 연락해야 할 거예요. 아아, 이미 연락을 취했겠네요.”
계약 결혼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서로 좋아해서 한 결혼이 아닌, 필요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 남녀 간의 결합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절감하며 서희는 피곤한 몸을 소파에 깊숙이 파묻었다. 예의를 갖추고 성의를 다해 임하려던 그녀가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필요가 없다 판단되자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녀도 똑같이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 * *
“네?”
“진행하시라고요.”
“저…… 하지만 신부님.”
웨딩플래너 이수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서희에게 말을 붙여 왔다. 웨딩플래너 경력 10년,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였지만 이런 경우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신부님, 저와 함께 다니실 곳이 몇 군데나 돼요. 신랑님께서 제게 모든 일을 일임하셨습니다. 가격대는 상관하지 말고 모두 맞춰 드리라고도 하셨어요. 원하시는 모든 걸 가지실 수 있는데…….”
“그래요?”
“네!”
수정은 정말 다급해 보였다. 모든 걸 쥘 수 있는 기회,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와 값비싼 보석. 여자라면 모두가 꿈꾸는 로망이 아닌가. 그런데 신부는 그녀에게 모든 걸 다 일임할 테니 알아서 하란다. 이 얼토당토않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좋네요. 그럼 이렇게 하죠. 이수정 씨가 골라 사진으로 전송해요. 그럼 내가 선택할게요.”
“네에?”
“요새 휴대폰 화질 좋던데. 사진이 힘들면 동영상으로 보내든가, 뭐 마음대로 해요. 난 상관없으니까.”
“저, 웨딩드레스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대까지 다양한데,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시는지 디자인은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브랜드 원하는 거 없어요. 디자인이야 뭐, 화려한 장식 없이 깔끔하면 되고요. 다른 건요?”
“그럼 반, 반지는요? 이건 절대적으로 신부님이 고르셔야 해요! 나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면 제가 무척 곤란해집니다.”
“흠…… 말을 들어 보니 일리가 있긴 한데…….”
“그렇죠? 신부님, 시간 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이강민 씨도 해외로 나갔고 나도 지방을 수시로 다녀야 하는 처지라 힘들겠어요. 보석은 다이아로 하죠. 시간도 절약할 겸 요즘 가장 잘나가는 예물 세트 세 종류로 압축해 전송해 주세요. 셋 중 하나로 결정할게요. 내 반지 사이즈는 12호예요.”
“신부님…….”
수정은 거의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신부에게 전부 맞추기만 하라며, 식장에서나 만날 신랑.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초연한 유령 신부. 뭐 이런 조합이 다 있냔 말이다. 결혼하려면 웨딩드레스, 예복, 예물, 혼수품까지 얼마나 준비할 게 많은데 전부 믿고 맡길 테니 알아서 하라니. 웨딩드레스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물을 사진으로 전송하라는 신부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신부님,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조금만 내 주시면…….”
“이수정 씨, 나름 그 분야에선 최고라고 들었는데요?”
“네? 네…… 그거야…….”
“이런 경우, 흔치 않을 거라는 거 알아요. 능력 한번 발휘해 봐요. 이수정 씨를 우연히 선택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복잡하던 머리가 일시 개운해졌다. 제 몫이 아닌 것을 탐하는 마음을 내려 두니 비로소 자유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속 좁은 여자의 복수가 아니었다. 그가 이만큼 하니 나도 이만큼만 하겠다는 옹졸함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한국에 없다는 걸 감사하고 있었다. 하기 싫은 것, 받기 싫은 것을 강요받는 일만큼 고역인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웨딩플래너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희가 요구한 대로 예물과 드레스가 찍힌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진을 확인하고 선택만 하면 되는 스마트한 시대에 그녀는 살고 있었다.
그녀가 그나마 마음에 드는 예물과 드레스를 골라 답장을 보내자 이윽고 수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 신부님, 숍에서 드레스 가봉은 꼭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사이즈 알려 드렸잖아요.”
― 네, 하지만 식전에 숍에서 꼭 한 번 입어 보고 가봉을 해야 한답니다. 참, 남편분께서도 그날 참석하신다고 해요.
제 딴엔 엄청 반길 거라 생각하고 내놓은 패였나 보다. 하지만 그녀는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웨딩플래너도 알고 있는 그의 귀국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귀찮…… 아뇨, 알았어요.”
서희는 야경을 바라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그와 자리를 옮긴 곳은 최상층의 바(bar)였다. 그녀는 그가 사라졌어도 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누가 알게 된다면 미친 개소리고 웃기는 시트콤이라고 할 거다. 말로만 듣던 계약 결혼의 주인공이 최서희와 이강민이란다. 평범한 계약과 다른 점은 그도 그녀도 이후 대가 없이 깔끔히 헤어진다는 점이었다.
절대적으로 그녀 쪽이 손해인 계약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절실한 건, 시간이었다. 부친이 건강을 되찾을 시간, 아버지를 행복하게 만들어 드릴 시간, 그 사람을 찾아다닐 수 있는 자유까지. 그가 그걸 제공하겠다는데, 이보다 이상적일 수 없었다.
강민은 그녀에게 계약 기간인 3년간의 자유 대신 명목뿐인 아내 역할을 요구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다소 명확했다. 서희는 자신이 본분을 잊지 않고 행동하기만 한다면 다른 간섭은 일절 받지 않기로 그에게서 약속을 받아 냈다. 두 사람의 계약 조건은 그게 전부였다.
남들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그의 그런 무모한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도전, 하면 이강민이다. 사업처럼 결혼도 그가 주도하고 밀어붙이면 만사형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음에 들면 데리고 쭉 살면 되는 거고, 아니면 합의한 대로 이혼해 버리면 되는 거다. 뭐가 문제인가.
사실 그답지 않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도박이었고 모험이었다. 과감한 편이라 알려진 그였지만 리스크를 여러 번 고려한 끝에 배팅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엇을 보고 이런 제의를 한 것인지, 그 역시 제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는 늘 자심감에 차 있었고, 여잘 만족시킬 능력과 매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최서희라는 여자는 그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아무것도.
그게 그를 미치게 한다. 초조하게 만든다.
서희는 부친 최명렬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전보다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허허, 결혼이라고? 몇 번 봤다고 그런 결정을 해?”
“싫으세요? 맞선이란 게 그렇잖아요. 혹 이강민 씨가 마음에 드시지 않은 거라면…….”
“그런 말이 아니다. 내가 널 아는데, 어련히 고심하고 결정했으려고.”
“아버지도 약속하셔야 해요. 건강 되찾을 때까지 일 줄이시기로 한 거요. 아셨죠?”
“그거야 그렇지만…….”
“그동안 저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군 거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서희는 급히 고개를 돌려 부친을 외면했다. 아버지의 병을 알고 나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감정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명색이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해, 레지던트 과정을 순조로이 밟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가장 가까운 혈육인 부친의 건강을 간과하다니. 이렇게 관심이 없어서야.
“난 괜찮다. 의료진들도 우수하고 요샌 기술이 많이 발전했으니. 네가 결혼해도…….”
“아버지의 병을 감출 생각은 없어요.”
“서희야.”
“제가…… 알아서 해요. 아버진 빨리 나을 생각만 하시면 돼요. 아셨죠?”
오늘은 기뻐하시는 모습만 보고 싶었다.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 왔다. 육체적 고통만큼 심적 고통과 싸우는 환자들이 많았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본인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입원비와 약값, 수술비 등 돈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도 그나마 그녀에게 다행인 건 돈에 구애받지 않고 부친의 병에만 신경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애정도 아이도 원하지 않는다. 강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서희는 내다보고 준비하고 있었다. 결혼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돌아선다고 무 자르듯 잘라지지 않는 인연 중에 가장 질기고 독한 억겁의 인연이라는 걸 그가 알긴 하는지. 아마 강민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처음부터 줄 수 없는 건 요구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화병에 꽂아 둔 장식용 꽃, 그게 그가 원하는 아내상이었다. 서희는 그가 만족할 만큼 연기할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결정되고 나서, 결혼식은 두 달 뒤로 잡혔다. 상견례에서 예식장 예약까지, 지체할 시간도 없이 논스톱으로 결정되었다. 초호화는 아니더라도 이강민의 결혼식인 탓에 세간의 관심을 모은 만큼 구색을 갖추어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일을 모두 제가 하는 것처럼 바쁜 척, 신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비서는 그녀에게 대뜸 누군가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알려 주었다.
웨딩플래너 이수정. 웨딩드레스, 혼수, 웨딩 촬영 상담, 신혼여행 자문 등 결혼과 관련된 모든 일을 기획, 관리할 수 있고 활발한 성격과 수준 높은 대화 능력을 갖춘 전문 베테랑이란다.
각오하고 있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처음엔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났고, 이성을 찾고 나니 실소를 금치 못했다.
‘뭘 기대한 거지? 최서희, 이럴 줄 모르고 시작한 거야? 여왕 대접이라도 받을 줄 알았어? 너도 참 웃긴다.’
“알았어요, 그렇게 진행하죠. 그런데 남편에게 연락해야 할 중요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죠? 바꿔 줄 수 있나요? 통화하고 싶은데.”
― 오늘 미국으로 출국하셨어요. 연락 못 받으셨어요?
연락은 개뿔, 문자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결혼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래요? 권한을 내게 넘기고 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알았어요. 참, 이강민 씨 사이즈는 비서실에서 알고 있죠?”
― 네.
“내 쪽에서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아닌 것도 있을 거예요. 맞춤은 내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나머진 비서실에서 이수정 씨에게 연락해야 할 거예요. 아아, 이미 연락을 취했겠네요.”
계약 결혼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서로 좋아해서 한 결혼이 아닌, 필요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 남녀 간의 결합이 아름답지 않다는 걸 절감하며 서희는 피곤한 몸을 소파에 깊숙이 파묻었다. 예의를 갖추고 성의를 다해 임하려던 그녀가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필요가 없다 판단되자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녀도 똑같이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네?”
“진행하시라고요.”
“저…… 하지만 신부님.”
웨딩플래너 이수정이 다급한 목소리로 서희에게 말을 붙여 왔다. 웨딩플래너 경력 10년,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였지만 이런 경우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신부님, 저와 함께 다니실 곳이 몇 군데나 돼요. 신랑님께서 제게 모든 일을 일임하셨습니다. 가격대는 상관하지 말고 모두 맞춰 드리라고도 하셨어요. 원하시는 모든 걸 가지실 수 있는데…….”
“그래요?”
“네!”
수정은 정말 다급해 보였다. 모든 걸 쥘 수 있는 기회,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와 값비싼 보석. 여자라면 모두가 꿈꾸는 로망이 아닌가. 그런데 신부는 그녀에게 모든 걸 다 일임할 테니 알아서 하란다. 이 얼토당토않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좋네요. 그럼 이렇게 하죠. 이수정 씨가 골라 사진으로 전송해요. 그럼 내가 선택할게요.”
“네에?”
“요새 휴대폰 화질 좋던데. 사진이 힘들면 동영상으로 보내든가, 뭐 마음대로 해요. 난 상관없으니까.”
“저, 웨딩드레스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대까지 다양한데,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시는지 디자인은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브랜드 원하는 거 없어요. 디자인이야 뭐, 화려한 장식 없이 깔끔하면 되고요. 다른 건요?”
“그럼 반, 반지는요? 이건 절대적으로 신부님이 고르셔야 해요! 나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면 제가 무척 곤란해집니다.”
“흠…… 말을 들어 보니 일리가 있긴 한데…….”
“그렇죠? 신부님, 시간 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이강민 씨도 해외로 나갔고 나도 지방을 수시로 다녀야 하는 처지라 힘들겠어요. 보석은 다이아로 하죠. 시간도 절약할 겸 요즘 가장 잘나가는 예물 세트 세 종류로 압축해 전송해 주세요. 셋 중 하나로 결정할게요. 내 반지 사이즈는 12호예요.”
“신부님…….”
수정은 거의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신부에게 전부 맞추기만 하라며, 식장에서나 만날 신랑.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초연한 유령 신부. 뭐 이런 조합이 다 있냔 말이다. 결혼하려면 웨딩드레스, 예복, 예물, 혼수품까지 얼마나 준비할 게 많은데 전부 믿고 맡길 테니 알아서 하라니. 웨딩드레스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물을 사진으로 전송하라는 신부는 살다 살다 처음이었다.
“신부님, 그러지 마시고 시간을 조금만 내 주시면…….”
“이수정 씨, 나름 그 분야에선 최고라고 들었는데요?”
“네? 네…… 그거야…….”
“이런 경우, 흔치 않을 거라는 거 알아요. 능력 한번 발휘해 봐요. 이수정 씨를 우연히 선택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복잡하던 머리가 일시 개운해졌다. 제 몫이 아닌 것을 탐하는 마음을 내려 두니 비로소 자유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속 좁은 여자의 복수가 아니었다. 그가 이만큼 하니 나도 이만큼만 하겠다는 옹졸함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한국에 없다는 걸 감사하고 있었다. 하기 싫은 것, 받기 싫은 것을 강요받는 일만큼 고역인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웨딩플래너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희가 요구한 대로 예물과 드레스가 찍힌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진을 확인하고 선택만 하면 되는 스마트한 시대에 그녀는 살고 있었다.
그녀가 그나마 마음에 드는 예물과 드레스를 골라 답장을 보내자 이윽고 수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 신부님, 숍에서 드레스 가봉은 꼭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사이즈 알려 드렸잖아요.”
― 네, 하지만 식전에 숍에서 꼭 한 번 입어 보고 가봉을 해야 한답니다. 참, 남편분께서도 그날 참석하신다고 해요.
제 딴엔 엄청 반길 거라 생각하고 내놓은 패였나 보다. 하지만 그녀는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웨딩플래너도 알고 있는 그의 귀국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귀찮…… 아뇨,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