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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 이즈 네버 오버 1화


이른 아침의 라스베이거스 거리는 지난밤의 화려함이 꿈인 양 한적하고 깨끗했다. 침대 위에 머리를 풀고 누워 요염한 미소를 짓던 여인이, 아침이 오자 정숙한 옷을 입고 새침을 떠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누가 이 풍경을 보고 사치와 향락을 떠올리겠는가.
에드워드는 그저 평범한 관광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단정함이 재밌어 피식 웃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 관광버스를 타고 레드락 캐년에라도 다녀올까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호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뭉치들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기분 좋은 아침임은 틀림없었다.
바로 뒤에 앉아 고약한 술 냄새를 풍겨 대는 존재를 제외하기만 하면―
“…….”
에드워드는 커피를 마시려다 잘생긴 눈썹을 살짝 구겼다. 커피 향에 술 냄새가 섞여, 자신이 마시려고 했던 것이 술인지 커피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이 주정뱅이는 카페테라스의 많고 많은 자리를 두고 딱 뒤에 붙어 앉아 기분을 망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드워드는 짜증이 일어 자리를 옮길까 고민했다. 그러나 막 카페테라스 입구에 들어선 사람을 보곤 관두었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 벤 올리버였다.
“여기야, 벤.”
벤은 에드워드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라니까.”
“음? ……아, 에디!”
“안경 다시 맞춰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안경엔 아무 문제없거든? 네가 수트를 안 입고 있어서 못 알아본 거라고.”
벤은 왜 내 안경에 시비냐고 투덜거리면서 에드워드 앞으로 와 앉았다. 둘은 동갑내기였으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삼촌과 조카로 보일 정도로 외관 차이가 심했다. 그걸 의식한 벤이 괜히 자신의 벗겨진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옷이라도 젊게 입고 오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멋을 부리고 와도 에드워드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에드워드가 워낙 동안인 탓이다. 더군다나 그는 오늘 수트만 입고 있던 평소와 달리,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거기다 머리도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어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벤은 에드워드를 흘겨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잘생긴 놈이 동안이기까지 하다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했다. 그것도 모자라 잘나가는 사업가에 재벌 3세라는 점이 더욱더.
“일은 잘 끝냈어? 합병 건 때문에 잠잘 시간도 없이 바쁘다더니만.”
“대충. 아직 마무리가 남았지만 잘 해결될 거야.”
“……소문엔 웬 신생 투자회사가 훼방을 놓았다면서?”
“뭐, 조금 귀찮게 하긴 하더군.”
에드워드는 심드렁한 말투완 달리 속 시원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는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최근 한 회사의 투자 합병 건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 잘 진행되어 가던 일에 멋모르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끼어들어 분탕질을 쳐 놓은 것이다. 덕분에 에드워드가 골치 아파 한다는 소문이 업계에 쫙 퍼졌다.
벤은 처음 그 소문을 듣고 친구보다 중간에 끼어든 신생 투자회사의 안녕이 먼저 걱정됐다. 아무리 신생 회사라 뭘 몰라도 그렇지, 하필 에드워드를 중간에 훼방 놓다니. 그건 일종의 자살행위였다. 에드워드는 은근히 승부사 기질이 다분한 데다, 누가 뒤통수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므로. 그리고 에드워드의 시원한 표정으로 보건데 아마 그 회사는 시작부터 비싼 수업료를 치렀을 것이리라.
벤이 쓸데없는 남 걱정을 하는 사이, 에드워드는 주머니에서 카드키와 초대장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벤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네가 묵을 호텔 키야. 이건 초대장.”
“초대장?”
“오늘 밤 VIP 파티가 있거든. 거기서 널 회장님께 소개하려고.”
“회장님이라면…… 네 조부님 말이지? 그래서 날 라스베이거스로 불렀어?”
“맞아. 포커 칠 줄 알지?”
“칠 줄이야 알지. ……그런데 잘해야 하냐, 아니면 못해야 하냐?”
“너무 잘하지 않으면서, 또 못하지도 않게 해야지.”
모호한 말이지만 정답이었다. 에드워드의 조부인 다니엘 웰스 회장은 소문난 포커광이었다. 포커를 너무 사랑하여 라스베이거스부터 시작해 리노와 아틀랜틱 시티까지 다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포커판이 열린다는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일도 팽개치고 달려갔다. 회장이 실력과 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패가망신을 여러 번 하고도 남았을 수준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도박판이 실력과 운으로만 진행되는 곳이던가. 그곳엔 회장의 부를 뜯어먹기 위해 더러운 수를 쓰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작정하고 속이면 실력과 운도 아무 소용없는 법이라 회장도 여러 번 큰돈을 잃었다. 한 번은 중요한 계약이 날아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회장에게 속임수를 쓰는 이들은 사라졌다. 더러운 수법으로 그를 속이고 뒤통수친 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목격한 탓이었다. 물론 그것이 회장의 짓이라는 증거는 없었으나, 그를 기만한 대가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다니엘 웰스 회장은 복수의 화신으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이제 나이를 먹어 고집과 의심이 깊어진 회장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기만 하면 잡아먹을 듯이 구는 쪼잔한 폭군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바로 벤이 회장 앞에서 포커를 너무 잘하지 않으면서, 또 못하지도 않아야 하는 이유였다. 벤은 오늘 밤 회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적절한 수준’의 포커를 쳐야만 했다.
“걱정하지 말고 적당히 쳐. 얕보이지만 않으면 돼.”
“……회장님한테 포커로 얕보이지 않는 게 쉬운 일이냐?”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네가 잘 보여야 우리 사업이 힘을 얻겠지? 금전적인 도움도 좀 받고 말이야.”
에드워드는 남 이야기하듯 웃으며 초대장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그와 벤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현재 벤이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를 인수해 몇 개 회사와 합병시킨 후, 새로이 경영해 볼 계획인 것이다.
한데 예상외로 이 일에 돈이 많이 들어갔다. 물론 에드워드가 돈을 긁어모은다면야 해결될 문제긴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M&A 회사를 경영 중이었으며, 몇몇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다른 사업에도 돈을 투자해 놓은 터라 자금을 쉬이 끌어올 수가 없었다.
하여 그들은 새 투자자를 찾기로 했다. 위험성이 높은 엔터사업에 거액을 투자할 수 있으며, 회사 경영에 관해선 그들을 지지해 줄 투자자. 에드워드의 조부인 다니엘 웰스 회장은 그런 면에서 이상적인 상대였다.
“너도 같이 포커 칠 거지?”
“아니, 구경만. 포커엔 흥미가 없어서 말이야.”
“……중독될까 봐 손 안 대는 게 아니고?”
“난 중독 같은 거 안 돼. 너도 알잖아.”
에드워드는 자신 있게 이야기했지만 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조부인 웰스 회장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에드워드가 폭군에 도박광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합리적인 것을 좋아했으며 이성적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망가뜨리는 데 힘쓰기보단 그 시간에 서류나 한 장 더 볼 인간이었다. 하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승부사 기질이나 집요함 탓에 역시 회장의 핏줄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니 에드워드의 저 냉정하고 차분한 겉가죽 속 어딘가엔 그의 조부와 같은 열정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지금은 사업 외엔 아무 것도 관심 없다는 듯 냉철하게 굴지만, 분명 언젠가 그는 뭔가에 미치게 되리라.
“그래도 가끔씩 넌 이상한 것에 꽂힐 때가 있잖아. 조심하라고, 에디. 그러다 뭔가에 중독돼서 왕창 잃을 줄 누가 알아.”
“충고는 고맙게 듣도록 하지. 그러니 너도 오늘 회장님의 신임을 왕창 잃지 않도록 해 줘, 벤.”
“……노력은 해 볼게.”
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오늘밤 회장님과 포커 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에드워드는 웬만하면 회장님께서도 사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실 테니까 너무 어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려다 말았다.
그의 친구인 벤에겐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군 앞에서 긴장이 풀려 맹하게 있느니, 차라리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이 낫다. 에드워드는 일의 성공을 위해 친구의 곤란함을 잠시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번 일이 잘되면 한동안 여유가 생기겠군. 그간 하룻강아지 한 마리가 귀찮게 구는 바람에 내 애인한테 전화조차 못할 정도로 바빴거든.”
“이번엔 얼마나 못 했는데?”
“글쎄. ……한 3주쯤?”
“뭐? 3주……?! 그러고도 안 차였어?!”
“……이번 애인은 마음이 넓어서 괜찮아. 다 이해해 줄 거야.”
3주나 연락이 안 됐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만약 그래도 괜찮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방치나 포기일 것이다. 벤은 비난이 가득한 얼굴로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야, 저거 노아 아니야?!”
그때 갑자기 카페테라스 밖 도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와 벤이 돌아보니 젊은 여자와 남자 두 명이 이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에드워드 뒤에 앉아 자고 있는 주정뱅이를.
“맞지? 옷이 똑같은데?”
“뒤통수가 때리고 싶게 생긴 게 노아 맞네.”
“아오, 저 새낀 호텔 놔두고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찾기 힘들게…….”
그들은 투덜거리며 카페테라스 안으로 들어왔다. 주정뱅이의 친구들인 것 같았다.
“으…… 술 냄새. 이 녀석 우리랑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마신 거 같은데? 아침까지 혼자 마신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삼촌한테 좀 깨졌냐, 얘가.”
“노아! 노아! 일어나 봐! ……아휴, 침 흘리는 것 좀 봐. 그나마 봐줄 만한 건 얼굴뿐인데 완전히 망가졌네.”
“푸핫, 이거 사진 찍어 놔야지!”
술 냄새도 짜증 나는데 이젠 소음까지 더해졌다. 에드워드는 이곳에서 벤을 만나기로 한 것을 후회했다. 아니, 그냥 아까 벤이 왔을 때 바로 자리를 옮겼어야 했다. 불쾌함을 참지 못한 에드워드는 벤에게 일어나자고 눈짓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반쯤 일어선 순간, 잠에서 깨어난 주정뱅이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쇳소리 섞인 푹 잠긴 목소리가 에드워드의 귀를 긁었다. 어쩐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 같았다. 그러고 보니 노아라는 이름도 낯이 익었다. 너무 흔한 이름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묘하게 이 목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걸 본 벤도 따라서 궁둥이를 의자에 붙였다.
“너 도대체 얼마나 더 마신 거야?”
“술값은? 네 지갑 내 가방 속에 있던데. ……설마 먹고 튀었냐?”
먹고 튀었냐는 말에 욱한 주정뱅이가 인상을 쓰며 품을 뒤적거렸다. 그는 한참 주머니 근처를 더듬거리더니, 새카만 카드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 카드 있거든……? 너도 하워드처럼 날 멍청이로 아냐?! ……아, 시발! 더 마실 거야!”
“여기서 뭘 더 마셔?! 안 돼!”
“시끄러워. 난 더 마실 거라고……. 너도 같이 마시자! 내가 다 계산할게……! 더 시켜!”
“이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 엇, 이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든데? 게다가 블랙이야!”
노아를 말리던 여자가 테이블 위의 카드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떻게 부의 상징이라는 이 카드를 얘가 가지고 있는 걸까. 셋은 당황해 다시 잠든 노아와 카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훔친 건…….”
“얘는 멍청해서 도둑질 못 해. 주웠겠지.”
“야, 노아! 일어나! 이 카드 뭔데?”
“그만…… 아, 그만 흔들라고……. 머리 아파.”
“너 밤새 이걸 쓰고 다녔어?! 네 것도 아니면서?!”
노아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감쌌다. 속은 메슥거리고 머리는 지끈거려 죽겠는데, 친구들이 자꾸 자신을 흔들어 대니 미칠 것 같았다.
“이 카드 어디서 난 거야?! 주웠으면 신고를 해야지, 네가 쓰면 어떡해?!”
“……내 카드야.”
“웃기고 있네! 너 가난뱅이잖아! 어떻게 이걸 발급받아?!”
“내거 맞다니까!!”
“훔친 거 아니지? 응?!”
“야, 그냥 솔직히 불어! 돈 빌려줄 테니까 일단 쓴 것은 갚고…!”
“아, 내 거야!! 내 거 맞다고!! 잘난 애인이 줬다! 됐냐…?!”
넷이서 투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에드워드가 씩 웃었다. 그는 문제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와 노아라는 이름의 주정뱅이의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갔다. 어쩐지 목소리가 사람을 잡아끈다 했더니, 침대 위에서 듣던 목소리여서 그랬던 것 같았다. 놀랍게도 아까부터 뒤에 앉아 술 냄새를 풍겨 대던 주정뱅이의 정체는 바로 그의 애인인 노아 우드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생각나던 참에 이런 황당한 방법으로 마주치니 신기하고 놀라워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벤의 얼굴은 점점 당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뒤쪽의 대화를 엿들으며 웃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저 주정뱅이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일로 만난 사이라기보다는 사적으로 만난 것 같은 눈치였다. 좀 끈적한 의미의 사적인 만남 말이다.
게다가 분명 저 주정뱅이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를 자신의 애인에게서 받았다고 말했다. 한데 그걸 사귀는 사람에게 선뜻 내줄 수 있는 사람은 부자들 중에서도 드물었다. 맘만 먹으면 비행기도 살 수 있는 카드를 어떻게 막 주겠는가. ……물론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기는 했다. 벤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에드워드 웰스 같은 미친놈이.
“……너 애인 없잖아. 주말마다 우리랑 같이 놀았으면서.”
“시발……. 좀 믿어라. 나 애인 있다고오. 그리고 존나 부자야…….”
노아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 억울함만큼 벤의 얼굴도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입모양으로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혹시 저 주정뱅이가 말하는 애인이 바로 너냐고. 에드워드가 웃으며 고갤 끄덕이자, 벤의 입이 놀라움으로 쩍 벌어졌다. 정말 황당한 우연이었다.
한편, 에드워드는 애인인 노아의 억울함을 풀어 줄지 말지를 고민했다. 마침 뒤에 앉아 있으니 억울함을 풀어 주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애인이라고 나서도 저들이 믿을까 하는 것과 마지막으로 본 것이 3주 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마저도 한밤중에 찾아가 섹스만 하고 헤어진 게 전부였다.
그 후론 너무 바빠 전화 한 통 못했던 탓에 지금 여기서 나서기엔 좀 서먹한 감이 있었다. 하필 재회 장소가 라스베이거스의 카페테라스인 데다, 한쪽이 엄청나게 취한 상태라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또한 선뜻 나서기엔 에드워드가 너무 유명인이었다. 그는 종종 잡지나 TV의 ‘젊고 잘생긴 부자’ 리스트에 올라가곤 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지금이야 친구인 벤도 못 알아볼 정도로 편한 차림이긴 했지만, 얼굴을 제대로 맞대면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에드워드로선 그로 인해 야기될 소란이 부담스러웠다.
“뭐 하는 사람인데 너한테 이런 카드를 줘?”
“……몰라. 그냥 부자야.”
“말 못하는 거 보니까 지어낸 거 확실하네!”
“야, 일단 카드사에 연락부터 하자. ……카드를 주인 찾아 주려고 지갑에 넣어 뒀다가, 실수로 썼다고 하면 믿지 않을까?”
“아, 진짜 애인 있다니까……! 부자야! 부자라고!”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그렇지,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는단 말인가. 에드워드는 억울해서 혼자 끙끙 앓는 노아가 안타까웠다. 그는 그동안 노아를 혼자 내버려둔 것이 미안해서라도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호텔로 주워가 푹 재우고 해장도 시키자. 결심한 에드워드는 돌아앉으려고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노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한마디가 그를 또다시 멈춰 세웠다.
“부자인데…… 존나 못해.”
“……뭐?”
“시발, 나쁜 새끼……. 자기만 싸고 튀고…….”
카페테라스에 침묵이 찾아왔다. 뒤늦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친구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벤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딴 카드 하나 던져 주고선……. 시발, 나쁜 놈이야, 그놈…….”
노아는 좋지 못한 기억을 되새기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풀어져 병신처럼 헤죽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나쁘니깐 괜찮다? 나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런데 그놈은 내가 자기한테 뿅 간 줄 안다니까……!”
“……애인 사이라며.”
“애인 맞는데…… 아닐걸?”
“무슨 소리야……?”
“……몰라, 짜증 나.”
부자 애인 있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이젠 또 애인이 아니라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노아의 말에 친구들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아는 혼자 신나 카드를 들고 웃었다.
“……히히, 그냥 이대로 헤어지면 정말 좋겠다! 나 아파트 있거든! 카드도 있어! 이거 봐…… 내 블랙 카…… 우욱, 웩……!”
“노아!!”
급기야 주정뱅이는 구역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테이블보로 그의 입을 막는 바람에 물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다른 친구 중 한 명이 그걸 잘못 밟고 넘어져 멍청한 소릴 냈다. 남은 하나는 웨이터를 부르러 카페 안으로 들어가다가 테이블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아주 가관이었다.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어 피식거렸다. 하지만 웃고 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엔 냉기가 가득했으므로.
“에, 에디……?”
벤이 눈치를 보며 땀을 흘려 댔다. 불쌍하게도 그는 뒤의 대화를 엿듣는 5분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 얼굴이 폭삭 삭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에드워드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정도에 비례해 점점 더 겉늙어 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에드워드는 진짜 그걸 못하나?
곤란과 호기심이 뒤죽박죽 뒤섞인 가운데 갑자기 어디선가 발랄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뮤지컬 그리스의 ‘Summer Nights’을 연주한 것이었는데, 경악스럽게도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에드워드의 휴대폰이었다. 벤은 다시 입을 떡 벌렸다. ‘Summer Nights’과 에드워드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음……?”
그건 에드워드의 애인도 동감인 모양이었다. 구역질 중이던 노아가 소릴 듣고 식겁해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을 느낀 에드워드는 재빨리 휴대폰을 벤의 앞으로 밀었다. 네가 대신 받아 보라는 소리였다. 액정화면엔 에드워드의 비서 이름이 떠 있었다. 벤은 얼떨떨한 얼굴로 화면만 쳐다보다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보스?
“무, 무슨 일이지? 내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전화하지 말랬잖아! 벤과 심각한 이야기 중이라고!”
-벤 올리버 님, 중요한 사안이니 보스 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하여튼 우리 비서들은 나 없인 아무 일도 못 한다니깐! 안 중요한 사안이 없어!”
-따로 시간을 내서 전화하겠으니 농담은 그때 해 주십시오. 재미없습니다.
“뭐? 이게 농담으로 들려?! 해고당하고 싶나!!”
그냥 적당히 받아넘기면 될 것을 꼭 이렇게 오버해야 하나. 에드워드는 친구의 어설픈 연기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주정뱅이에겐 먹힌 모양이었다.
“……아니네.”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던 노아는 휴대폰 주인이 대머리인 것을 확인하고 크게 안도해 몸에 힘을 쫙 뺐다. 그는 조금 전 존나 못한다고 욕을 했던 부자 애인, 에드워드 웰스의 휴대폰 벨소리를 ‘Summer Nights’으로 설정해 놓은 적이 있었다. 이것과 똑같은 피아노 연주, 똑같은 구절을.
그래서 순간적으로 에드워드가 이곳에 와 있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었다. 한데 그냥 저 대머리가 같은 벨소리를 설정해 놓은 것뿐이었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안심한 노아는 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를 부축해 카페테라스에서 데리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