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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 이즈 네버 오버 2화


“……여보세요, 스티븐? 이제 끝났어요. 에디 바꿔 줄게요.”
-그것 참 고맙군요.
휴대폰을 돌려받은 에드워드는 몇 가지 명령을 하는 것으로 비서와의 통화를 짧게 끝냈다. 그리고 바로 다른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로 에드워드의 사적인 스케줄과 제반 업무를 관리하는 수잔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보스.
“수잔, 내 애인인 노아 우드는 요즘 어떻게 지내지?”
-……조용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저번 주인데, 보스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우울해하더군요. 그래서 손목시계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진짜 우울해하던가?”
-예. 매우 슬픈 목소리였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에드워드는 더 열 받은 얼굴을 했다. 그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다가, 수잔에게 노아의 카드 사용 내역을 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저 업무를 지시하듯 평온한 말투였지만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화가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닌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워드는 현재 자신의 애인인 노아 우드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단순히 예쁘장한 얼굴과 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늘 자신을 배려해 주는 노아의 마음 씀씀이가 편하고 좋았다.
나보다 당신의 일이 더 중요하니 미안해하지 말라며 한 걸음 물러나 주던 노아가 얼마나 어여뻤는지 모른다. 쳐다보면 곧바로 시선을 피하는 묘한 수줍음까지도 다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 여겨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은 별로 안 좋아한다라……. 에드워드는 이대로 헤어지면 정말 좋겠다던 해맑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이를 빠득 갈았다. 싸고 튀기만 할 뿐, 존나 못한다던 최악의 평가도.
“너, 너무 화내지 마. 에디……. 술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 네 애인.”
“…….”
“아니면 널 오해한 것일 수도 있지. 원래 남자끼리는…… 잘 안 되잖아.”
같은 동성과 자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벤이 아는 척 입을 달싹거렸다. 딴엔 위로랍시고 한 말인 것 같은데 기분만 더 상하게 할 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하필 포인트가 그 짓을 못한다는 데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게다가 최근에 너 계속 바빴잖아. 바쁘면 확실히 그게 힘들…….”
“한마디만 더 하면 나랑 자고 싶은 걸로 알겠어.”
“…….”
“그러면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게 되겠지.”
유부남인 벤은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에드워드는 한다면 하는 놈이니 계속 입방정을 떨었다간 진짜 침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친구와 섹스라니. 벤은 끔찍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에드워드는 남자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놈이지만 벤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푸근하고 다정한 자신의 아내가 취향이었다.
하지만 벤은 무시무시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어 계속 눈치를 살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에드워드는 섹스 실력과 상관없이 애인에게 욕을 먹어도 쌌기 때문이다. 3주 동안 애인한테 전화 한 통 없을 정도로 에드워드는 늘 상대를 방치했다. 벤은 그가 교감이라고 눈곱만큼도 없는 돈만 처바른 연애를 하다가, 냉혈한이라는 이유로 차이는 모습을 지겹게 보아왔다.
이제와 그 편리만을 위한 연애 스타일이 바뀌진 않았을 테니, 에드워드는 아까 그 청년과도 비슷한 일을 반복했으리라.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만나고, 그것을 불평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쥐여 주는 일을. 그 탓에 결국 혼자 사랑하는 일에 지쳐 버린 노아라는 청년은 돈을 펑펑 쓰고 다니게 되었을 터.
벤은 혼자 되도 않는 망상을 펼치며 사라진 주정뱅이를 동정했다. 그의 아내가 알면 또 오버한다고 옆구리를 꼬집을 일이었다.
“……그런데 너도 참 너무한 거 아니야? 네 애인이 바로 뒤에 있는데도 못 알아보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무신경할 수가 있어?”
“서로 못 알아봤으니 공평한 거 아닌가.”
“그런 말이 아니잖아. ……넌 진짜 그 태도 좀 고쳐야 해.”
“이제부터 관심 가질 테니 신경 끄도록 해, 벤 올리버.”
에드워드는 냉정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카페테라스에서 나오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용주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숨어 있던 경호원들이었다. 이어서 매끄럽게 잘빠진 리무진이 나타나 에드워드 앞에 멈춰 섰다.
“밤 9시에 보도록 하지. 준비 잘 하고 있어.”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리무진에 올라탔다. 벤은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허허 웃었다. 자신이 편을 들어 주지 않고 비난해서 삐진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관심을 가지겠다니. 큰일인데, 그 청년.”
벤은 떠나는 리무진을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드워드는 다니엘 웰스 회장의 손자였다. 그는 웰스가 특유의 승부욕과 뒤통수를 때린 인간은 용서하지 못하는 쪼잔함을 물려받았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의 조부만큼 다혈질도 아니거니와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하지만 이번엔 감이 좋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대놓고 감정적 뒤통수를 친 데다, 에드워드가 자기 입으로 관심을 가지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노아라는 그 청년은 날벼락 좀 맞으리라.
“뭐, 불쌍하긴 하지만 내 알 바 아니지.”
더 관심을 가졌다간 침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 웃긴 헤프닝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

술 냄새로 가득한 호텔 방 안에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침대 밑에서 나뒹굴고 있는 휴대폰에서 나는 벨소리였다. 침대 위의 휴대폰 주인은 그 소리를 듣고도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해 끙끙거렸다. 아니, 눈을 뜨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소리를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벨소리는 끈질겼다. 한 세 번쯤 소리가 더 반복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 시발……. 누구야아…….”
노아는 휴대폰을 찾아 소리가 나는 침대 밑을 더듬거렸다. 눈이 잘 떠지질 않는 데다 방 안도 어두운 탓에 휴대폰이 쉽게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사이 벨소리는 끊어졌다 다시 울리길 두어 번 더 반복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전화를 끈질기게 하는 것일까. 노아는 지끈거리는 머릴 부여잡고 짜증스레 휴대폰을 잡아챘다. 그러나 그 짜증은 휴대폰 액정화면에 떠 있는 ‘♥♥’를 본 순간 증발하고 말았다.
“힉……! 뭐, 뭐야! 이 인간이 왜……?!”
그는 휴대폰을 든 채로 받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이름 대신 하트로 저장해 놓은 이가 어마어마한 부자에 잘생기기까지 한 뭇 여성들의 왕자님, 에드워드 웰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노아의 연인이기도 했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 아직 사귀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긴 했지만 말이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보다 왜 나한테 전화한 거지? 혹시 최근에 카드를 너무 많이 사용했나? 그랬다면 수잔이 경고했을 텐데? 노아는 휴대폰을 붙잡고 고민했다. 밤새 마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러나 노아는 곧 이성을 되찾았다. 이제 자신과 에드워드 웰스 사이에 남은 용건은 단 하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고 헤어지는 것뿐이었다. 3주 만에 걸려 온 전화에 그것 외에 또 무슨 용건이 있겠는가. 내심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노아는 히죽 웃었다.
이제 적당히 지치고 슬픈 척 연기하다가 헤어지기만 하면 끝이었다. 앞으로 못 쓰게 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그래도 에드워드가 준 아파트는 남을 터. 이만하면 결실이 아름다운 연애였다. 이젠 남자답게 물러서서 에드워드의 안녕을 빌어 줘야 할 때였다. 노아는 억지 눈물을 쥐어짤 준비를 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야, 노아.
“에드워드……. 3주 만이네요. 이제 나 같은 건 잊은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당신한테 난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는 거 아니까.”
-아무 의미 없다니. 난 언제나 네 생각뿐이야, 노아.
……방금 엄청 이상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액정화면을 확인하니 하트 두 개가 보였다. 분명 에드워드 웰스가 맞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낯간지러운 말을 할 리가 없으니 숙취 때문에 헛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빨리 전화 끊고 해장이나 하러 가야지.’
그는 다시 침통한 연기를 시작했다.
“전화해 줘서 기뻐요. 하지만…… 전 이제 우리 관계에 지쳤어요. 나 혼자서 당신을 사랑하고 기다리고 애태우는 바보 같은 짝사랑에 지쳤다고요.”
-……음.
“더 이상 에드워드 당신 때문에 우울해하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그래. 잘 알겠어.
됐구나! 노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언젠가 들었던 시시껄렁한 사랑노래에 감사를 표했다. 역시 이별엔 노래 가사가 최고였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은 잠깐일 뿐이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에드워드의 대답이 그의 기쁨을 와자작 무너뜨렸다.
-네가 날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네?”
-그동안 외롭고 지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이제부턴 짝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내가 잘하도록 하지.
“아, 아니 뭐 그런 수고를……. 전 괜찮거든요, 에드워드?”
-또 괜찮다고 하는군. 나를 진짜 안심시키고 싶으면 괜찮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고 말해 줘.
으악, 이 미친 새끼가! 노아는 오그라드는 손발을 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댔다. 에드워드 입에서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닭살도 이런 닭살이 없었다. 자신이 한 말도 유치해서 머리에서 삭제시키고 싶은데 이놈은 더했다.
노아는 에드워드에게 미쳤냐고 묻고 싶었다. 몸뿐인 관계였는데 이제 와 사랑 타령이라니! 이 인간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맛이 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더 빼먹을 생각하지 말고 얼른 아파트나 챙겨서 도망가야지. 노아는 필사적으로 에드워드의 사랑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에드워드. 난 이제 너무 지쳐서 그냥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사, 사, 사랑하는 제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이젠 그냥 다 내려놓고 싶어서요. 무슨 뜻인지 알죠?”
-……상처가 크다는 말이잖아. 모두 내 탓이겠지.
“아니, 물론 상처가 크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는 우리 관계에 지쳤다고요! 관계에……! 자, 생각을 해 봐요, 에드워드! 연인끼리 서로 사귀다가 지치면 누구 잘잘못을 가릴 게 아니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요! 상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그다음 단계! 뭔지 알겠죠?”
-이런, 난 그 단계가 뭔지 영 모르겠는걸. 그런데 노아, 목소리가 왜 이렇지? 어디 아파?
“내 목소리요?”
-그래. 너무 안 좋군. ……혹시 술 마셨나?
“아, 아니요! 감기 때문인데요!”
뜨끔한 노아는 괜한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이리로 튀는 이야기 때문에 당황해서 듣기 싫은 삑사리까지 났다.
-병원은 갔다 왔어?
“난 병원 따윈 안…… 흠, 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에드워드. 당신이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냥 말할게요. 우리 헤어져요. 나는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이제 그만 헤어져야 할 것 같아요.”
-나도 널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지?
“……사랑하니까요. 사랑하니까 서로 힘들게 하지 말고 헤어지자고요. 진짜 날 사랑한다면 그냥 이쯤에서 헤어져요, 에드워드.”
-웃기는군. 사랑하는데 헤어지는 병신이 어디 있어.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던가?
망했다.
노아는 온몸을 관통하는 패배감과 오글거림에 괴로워했다. 아무래도 계산을 잘못한 모양이다. ‘사랑하지만 이제 당신을 놓아줄게요. 헤어져요. 지쳐서 그래요. 그리고 내가 지친 건 전부 당신 탓이고 난 아무 잘못 없으니까 원한 같은 거 품지 말고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해 줘요. 댁 할아버지처럼 복수 같은 거 하지 말고’ 콘셉트면 1분 안에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할 걸! 아니, 그랬다간 안전이별이 안 될 수도 있어 또 문제였다. 노아는 풍문으로 들었던 웰스가의 복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소박하게 아파트만 챙겨 가고 싶을 뿐이었다.
-노아?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에드워드가 노아를 불렀다. 노아는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요.”
-많이 아픈가 보군.
그래. 그러니까 이만 전화 끊어라. 이별은 다음에 술 깨고 하자. 노아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이마를 만졌다. 잊고 있던 숙취가 다시 밀려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럼 문 좀 열어 봐, 노아.
“문?”
-현관문 말이야. 지금 바로 앞이거든.
“……!!”
노아는 식겁해 호텔 방문을 쳐다보았다.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러나 노아는 곧 에드워드가 말하는 문이 이곳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방문이 아니라, 맨해튼의 현관문임을 깨달았다. 그곳에 없기에 열 수 없는 자신의 고급 아파트 문 말이다.
-노아, 어서 문 좀 열어 봐. 걱정돼서 그래. 그리고 아까 하던 이야기도 얼굴 보면서 마저 하도록 하지.
“무, 무, 무, 무슨 이야기요? 전 더 할 얘기가 없는데……! 하하하!”
-헤어지자고 그랬잖아.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니니까 얼굴 보고 하자고.
“아니, 됐어요! 그냥 다음에 해요, 에드워드! 다음에……! 지, 지금은 당신 얼굴 볼 기분이 아니라서 그래요!”
-왜? 이젠 얼굴도 보기 싫을 만큼 내가 미운 건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혼자 있고 싶어서……!!”
-넌 환자잖아, 노아. 아픈 널 어떻게 혼자 두겠어. 괜찮은지 얼굴만이라도 확인하게 해 줘. 아, 그러고 보니 나한테 열쇠가…….
“안 돼―!!”
-뭐가?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노아는 너무 다급하고 정신없는 탓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난……!! 지, 집이 아니라 카페에 있어요! 카페! 음……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그 문 열지 말아요, 에드워드!”
-흐음……. 그럼 내가 그 카페로 가도록 하지.
이 미친 스토커 새끼야! 노아는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섹스만 하고 가던 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에드워드 제발……. 오늘만큼은 혼자 있고 싶어요. 당신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구요.”
-너무하는군.
“…….”
-……그럼 내일 주치의를 보낼 테니 진찰받도록 해.
“그럴 필요까진…….”
-더 이상 거절하지 마, 노아.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아, 이놈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노아는 울고 싶어졌다. 이제라도 미안하지만 사실 사랑한다는 거 뻥이고 이해심 많은 애인 노릇 하는 거 지겨우니까 헤어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악명이 자자한 ‘웰스가의 복수’ 때문에 후환이 두려웠다. 어젯밤 좍좍 긁어 댄 카드 역시 양심에 찔렸다. 재벌 3세에게 그 정돈 돈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쪼잔해져서 그거 다 물어내라고 하면 나는 어쩌나. 아직 어마어마하게 남은 학비 대출과 쥐꼬리 만한 주급이 노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낭패였다.
-듣고 있어? 노아?
“듣고 있어요, 에드워드. 미안해요. 또 머리가 아파서…….”
-아픈데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나 보군.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편히 쉬어.
다행히 에드워드는 더 귀찮게 굴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노아는 전화가 끊기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허공을 발로 차고, 베개를 주먹으로 후려 팼다. 에드워드의 사랑 어쩌고 하는 말들이 정신에 큰 타격을 입힌 탓이었다.
“악……! 그 자식 미친 게 틀림없어! 언제나 내 생각뿐이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시발, 그 에드워드 웰스가……! 저 혼자 잘난 놈이!! 시발, 오글거려서 내일 어떻게 보…… 헉!!”
한참 난리를 피우며 뒹굴던 노아의 머릿속에 에드워드의 마지막 말이 스쳤다. 바로 내일 보자는 말이었다. 그리고 주치의를 보내 준다던 말도. 한데 노아는 지금 라스베이거스에 있었으며,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은 내일 저녁 8시로 끊어 놓았다.
“아, 시발…….”
내가 왜 감기라고 거짓말을 했을꼬. 짜증 때문에 울먹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노아는 옷을 대충 껴입고 지갑만 챙겨 호텔방을 나섰다. 당장 맨해튼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

에드워드는 휴대폰을 수트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연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안은 적당히 밝고 흥겨운 분위기였다. 여느 파티들처럼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했고, 정장 차림을 한 남녀들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파티답게 중간중간 가벼운 게임을 위한 테이블이 놓여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 테이블 앞에 앉은 이들은 돈을 잃고도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선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면 이곳의 환한 조명은 은밀해지고, 무거운 주머니를 가진 몇몇만이 남아 치열한 승부를 가리게 되리라.
“오, 에드워드. 늦었구나!”
연회장 안쪽에서 포커를 즐기는 중이던 한 노신사가 에드워드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에드워드의 조부인 다니엘 웰스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엔 곤란한 표정으로 끙끙대는 벤이 있었다. 앞에 놓인 칩의 양으로 보아 내리 잃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제 친구를 파산시키고 계셨군요, 회장님.”
“파산이라니. 젊은 친구가 혈기 좋게 덤비기에 실력 좀 보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회장은 들고 있던 카드를 모두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딜러가 회장의 카드와 다른 플레이어의 카드를 맞춰 보더니 회장의 승리를 축하했다. 벤은 씁쓸한 표정으로 칩을 앞으로 내밀었다. 에드워드의 말처럼 그는 곧 파산할 것 같았다.
“표정 좀 풀어, 벤.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지.”
“그래, 벤 올리버라고 했나? 자네는 표정에 다 나타나는 게 문제야. 이래서야 어린애 사탕 뺏는 것만큼 쉽질 않나.”
“……그럼 뺏지 말고 쥐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회장님.”
“그건 안 되지. 뺏겨 봐야 소중한 것을 아는 법이니까. 게다가 내 손자의 동업자가 될 예정이라면서? 그럼 이 기회에 사탕 지키는 법을 단단히 배워 가게나.”
회장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포커를 하기에 벤은 썩 좋은 상대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에드워드는 계속 힘내 주라는 의미로 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딴 위로 필요 없으니 칩이나 빌려줘.”
“그거야 얼마든지.”
에드워드가 근처에 서 있던 비서에게 눈짓하자 그가 칩을 바꾸러 갔다. 손이 큰 에드워드인 만큼 칩은 충분한 양일 터. 벤은 판돈이 떨어지고 있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한 번은 이기고 싶은데 쉽지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잘’ 치라던 에드워드가 원망스러워졌다.
“왜?”
벤이 힐끗 쳐다보자 에드워드가 물었다. 곱지 않은 눈길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시치미를 떼는 것이 얄미웠다.
“아니, 뭐. 너는 기분 좋아 보이네.”
“……재미있는 일이 있거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티가 나나 보군. 이러다간 나도 사탕 뺏기겠어.”
“네가 행여나 뺏기겠다.”
“맛있는 이야기엔 이 늙은이도 끼워 주려무나. 에디가 사탕을 가졌다니 괜히 뺏어 보고 싶구먼.”
회장이 껄껄 웃으며 게임 테이블 앞의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에드워드도 게임에 참여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웃으며 회장의 권유를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칠 줄 몰라서요.”
“……매번 그 핑계로군.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배워 보는 건 어떻겠느냐, 에드워드? 내가 싫다면 머레이 양에게 배워 보렴. 잘 가르쳐 줄 게다.”
그렇게 말하면서 회장이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여성을 가리켰다. 크림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단순히 구경꾼인 줄 알았는데 회장의 초대를 받아 온 일행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엘리, 내 손자인 에드워드다. 그리고 에드워드. 이 예쁜 아가씨는 요즘 내 포커 상대가 되어 주고 있지. 또 내 친한 친구의 손녀딸이기도 하단다.”
“엘리자베스 머레이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머레이 양. 에드워드 웰스라고 합니다.”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딱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의 만남이라 보는 사람이 다 흐뭇했다. 특히 회장이 그랬다. 그는 카드도 손에서 놓은 채로 손자와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었는데, 감출 수 없는 흡족함과 기쁨이 얼굴에 묻어나왔다.
벤은 그 사이에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곧 에드워드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