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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 이즈 네버 오버 3화
또 간섭했다간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서 벤은 그냥 자신의 카드로 눈길을 돌렸다. 에드워드는 바보가 아니니 저 여자를 잘 처리해 넘기리라. 그것도 아니면 이번 기회에 동성 애인과 헤어지고 저 여자와 사귀든지.
실없는 칭찬이 오가는 가운데 어디선가 휴대폰 진동음이 들렸다. 에드워드의 수트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짧게 두 번 울리고 끊긴 걸로 보아 연속으로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진동음을 들은 에드워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분명 웃고 있는데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이었다.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아직 합병이 진행 중이라 했지?”
“마무리 단곕니다. 곧 의도했던 대로 전부 합의될 겁니다.”
“흠……. 걱정은 안 한다만 대체 언제까지 기업사냥꾼 짓을 할 게냐, 에드워드? 이제 그만 이 할애비 좀 도와주질 않고. 너도 안정된 일을 해야지.”
회장은 대놓고 에드워드가 하는 일을 무시했다. 그것이 자신의 후계자로 거대한 웰스 기업을 물려받는 것보단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아직 기업의 후계자 자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언젠간 별수 없이 조부의 모든 것을 물려받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웃기만 하지 말고 그만 가 보거라. 네 일까지 방해해 가면서 여기 붙잡아 두고 싶진 않으니.”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머레이 양,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에드워드는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두 건의 메시지 알림이 화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회장이 짐작한 것처럼 업무 관련 내용이 아니었다. 비서에게 시킨 ‘노아 우드 감시’ 관련 문자였다.
메시지 한 건은 노아 우드가 방금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건은 공항에서 찍은 노아의 사진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공항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는데,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것이 노아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저 늘씬하고 예쁜 몸이 그동안 안아 왔던 이의 것임을―
에드워드는 새삼스럽게 노아가 의식이 되었다. 그는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노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잊고 지냈던 것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래에서 흔들리던 육체와 젖은 숨, 갈색 머리카락에서 나던 샴푸 냄새 같은 것들이.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무슨 색깔이었더라.”
사진엔 얼굴이 똑바로 나오질 않아 노아의 눈 색깔을 알 수가 없었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 것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그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가 노아에게 처음 흥미를 느꼈던 이유가 바로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 호박색이었지…….”
어릴 때 길렀던 고양이와 같은 색깔. 에드워드는 노아의 눈동자 색깔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노아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에드워드와 노아가 만난 곳은 어느 문화재단의 후원 파티였다. 아니, 만났다기보다 에드워드가 노아를 발견한 곳이 그 파티였다.
그때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적당히 어울리다가 주최자가 원하는 금액을 적은 수표를 건네는 것이 에드워드의 역할이었다. 평생 지긋지긋하게 불려 다닌 것이 이런 파티인지라 그는 사람들과 능숙하게 어울리며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몇몇 사람들이 자꾸 어딘가를 힐끔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지루했던 에드워드는 거기에라도 흥미를 붙여 보려고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술에 취해 헤실헤실 웃어 대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 바로 노아였다.
에드워드가 노아를 보고 느낀 첫 감상은 ‘곧 먹히겠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술에 취한 노아 주변엔 그를 유혹해 어딘가로 데리고 가고 싶은 이들이 서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여자부터 엉큼한 인상의 중년 사내까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싸움이었다.
에드워드는 저 얼굴 반반한 멍청이를 누가 잡아먹을지 궁금해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싸움은 금방 끝나질 않았고, 노아는 술 취해 맹한 표정으로 경쟁자들만 계속 불러 모았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떠, 모두를 닭 쫓던 개로 만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다.
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사람치곤 제법이었다. 아니면 너무 순진하고 멍청해 그게 유혹인 줄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것이 정답일까. 에드워드는 그것이 궁금해 눈으로 계속 노아를 찾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스에 몸을 기댄 채 쉬고 있는 노아를 발견했다.
노아는 도통 생각이라곤 없어 보이는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 얼굴을 보곤 노아가 백치라고 결론을 내렸다. 너무 멍청해서 가진 얼굴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배우 지망생 정도일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심드렁해져 관심을 끄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아에 대한 그의 인상은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파티장 안쪽을 쳐다보며 웃는 눈빛 하나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표정이긴 했지만 분명 에드워드는 보았다. 노아가 자신이 따돌리고 온 이들을 향해 슬쩍 웃는 것을. 그 짧은 순간 반짝하고 빛나던 호박색 눈동자 안엔 환멸과 지겨움, 그리고 짓궂은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이겼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어린아이 같은 승부욕도.
비록 취기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긴 했으나 그것들이 에드워드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속 무엇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아가 같은 성별을 가진 남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학생 시절, 동성과 관계를 가져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에드워드는 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노아를 찾던 또 다른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양손에 칵테일 잔을 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취한 노아를 더 취하게 만들어 데리고 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도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는 남자보다 먼저 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술을 권하는 대신, 노아에게 술을 쏟았다.
‘이런, 내가 실수를 하고 말았군.’
누가 봐도 고의였지만 에드워드는 뻔뻔하게 실수를 주장했다. 그런 다음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노아를 데리고 파티장을 나가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음…….’
노아는 살짝 인상을 쓰며 에드워드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디선가 본 사람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웃으며 자신의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긴 했어도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는 않을 터. 그는 노아에게 말했다.
‘싫으면 말해. 보내 줄 테니.’
‘어……. 목소리가…….’
‘목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네.’
첫 만남에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목소리가 좋다는 말은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마음에 드는 유혹이었다. 에드워드는 노아에게 입을 맞췄다. 노아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몸에 힘을 풀었다. 확실한 승낙이었다.
그렇게 같이 밤을 보냈다. 비록 한 쪽이 술에 취해 있어 모든 욕심을 다 채울 순 없는 밤이었지만, 그래도 에드워드는 꽤 만족스러웠다. 노아의 몸은 발그레한 얼굴만큼이나 예쁘고 유연했으며, 농익은 열매처럼 달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에드워드는 지쳐 잠든 노아를 보며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애초에 하룻밤 욕망으로 안은 몸이긴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웠던 것이다. 노아는 몸뿐만 아니라 외모도 에드워드의 취향이었다. 마냥 잘생겼다기엔 예쁘장한 감이 있는, 단정하면서도 묘한 색기가 흐르는 얼굴. 왜 그렇게 사람들이 꾀어 보려고 애를 태웠는지 알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노아의 입술에 머물렀다. 그리고 붉은 자국들이 남은 목덜미와 가슴께를 지나, 시트에 가려진 허리 아래까지 시선이 내려왔다. 다시 가라앉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자극하는 이는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노아와 조금 더 관계를 가지기로 했다. 동성의 파트너, 혹은 애인을 둔 적은 없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그 괜찮을 것이라는 느낌대로 지금까진 모든 것이 좋았다. 술이 깬 후의 노아는 순하고 착했으며, 에드워드의 유명세에 요란을 떨며 사람을 귀찮게 만들지도 않았다. 사귀는 동안 항상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에드워드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래, 참 괜찮은 관계였었지.”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에드워드는 이를 빠득 갈았다. 오늘 아침 카페테라스에서 들었던 말과 노아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생각나 열이 올랐다. 이렇게 열 받는 건 태어나 처음이다. 어릴 적 박스로 만들었던 ‘노틸러스호’를 조부가 갖다 버렸던 일을 뺀다면.
그는 노아의 사진을 노려보며 의지를 불태웠다. 노아는 이제 헤어지기를 원하는 모양이지만, 에드워드는 그렇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괘씸한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겠는가. 나는 이렇게 열 받아 미칠 것 같은데.
“이대로 곱게 헤어져 줄 순 없지. 어림없어, 노아 우드.”
받은 만큼 돌려주는 웰스 가문의 복수심을 두고 사람들은 쪼잔하다고 뒤에서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에드워드는 그것이 너무 싫고 조부인 회장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부를 닮지 않으려고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에드워드는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웰스 가문 사람임을 깨닫고야 말았다. 믿고 있던 상대에게 속았다는 분노와 상처 입은 남자의 자존심이 그의 안에 잠들어 있던 복수의 피를 들끓게 만든 것이다.
에드워드는 살벌하게 웃으며 다짐했다. 노아에게 그 가증스러운 사랑을 되돌려 주겠노라고. 반드시 노아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사랑을 구걸하도록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잔인하게 차 버려야지. 그 좋아하던 카드와 아파트도 모두 빼앗아 버리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남은 일들을 모두 처리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일 밤 노아를 만나러 갈 수 있을 테니. 에드워드는 휴대폰을 다시 수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자신의 호텔 방으로 향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
환하게 불이 켜진 넓은 거실 한가운데 노아가 팬티만 입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는 에어컨 바람을 등지고서 얼음 양동이를 안고 있었다. 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아침저녁으론 추운 이 시기에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나 노아는 그것을 매우 원했다. 에드워드에게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핑계를 댄 탓이다. 그가 보낸 주치의가 도착하기 전까진 꼭 감기에 걸려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아픈 티가 나야 하는데…… 워낙 건강한 체질이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콧물만 조금 나고 말 뿐이었다.
“엣취! 아, 에…… 에취! 아니, 콜록 콜록으로 할까. 아니야, 이건 너무 꾸민 티가 나.”
그는 콧물을 닦으며 어떻게 해야 환자처럼 보일지를 연구했다.
“감기야 걸려라! 감기야! 제발!! 감기, 감기, 감기, 감기, 감기 얍―!!”
노아는 목이라도 쉬게 만들려고 큰 소리를 냈다. 소음으로 신고가 들어와도 할 말이 없는 성량이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시원찮았다. 노아는 인상을 쓰며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이 얼음이 에드워드 웰스라고 생각하면서.
“젠장, 그 자식은 왜 갑자기 사랑타령을 해선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카드까지 정지시키고.”
아, 내 불쌍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
이제 쓸 수 없는 그 카드를 생각하니 노아의 얼굴이 절로 울상으로 변했다. 그가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였다. 누군가 취소한 뉴욕행 좌석을 다시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내밀었는데 정지되었다는 것이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비서인 수잔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에 관해 물으니, 그녀는 카드가 라스베이스에서 결제 돼서 정지시켰다고 말했다. 에드워드가 아파트로 주치의를 보내라고 명령했는데, 정작 카드는 맨해튼이 아닌 라스베이거스에서 쓰여서 도난당한 건 줄 알았노라고 말이다.
뜨끔한 노아는 수잔에게 잘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도 카드를 잃어버려서 정지시켜 달라고 전화를 건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핑계까지 댔다. 다행히 수잔은 그 말을 믿어 주었으며 곧 카드를 재발급 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나마 반가운 일이긴 했다. 사랑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돌아온다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좀 찝찝하단 말이지.”
어젯밤엔 숙취와 에드워드 웰스의 미친 사랑 타령 때문에 그냥 넘어갔었는데,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 상황이 뭔가 좀 이상했다. 그리고 그중 제일 이상한 건 에드워드였다. 그는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사랑 같은 달콤한 감정과는 별 관련이 없는 남자였다. 있는 놈들이 다 그렇듯 자기중심적이고,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냉정했다.
그런데 이제와 나를 사랑한다고? 만날 때마다 몸만 섞고 가는 놈이? 심지어 3주 동안 연락도 없었는데? 노아는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꿈인지 현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자의 뒷모습과 친구들, 그리고 익숙한 휴대폰 벨소리였다. 그때 노아는 밤새 마신 술 때문에 많이 취해 있었다. 그 탓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헛소리를 좀 지껄이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남자의 자존심에 아주 치명적인 말을. 만약 그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자신은 크게 경을 치게 되리라.
“아니야, 그래도 이름을 말하진 않았잖아……. 또 라스베이거스에 에드워드가 왜 있었겠어? 그놈은 바빠서 그런데 놀러도 못 가는 놈이라고. ……전화도 안경 낀 대머리가 받았었잖아.”
노아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확신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지만 솔직히 별 자신은 없었다. 자꾸만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닐까, 혹시 그때 에드워드가 어디선가 험담을 듣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다.
“만약 에드워드가 내 말을 들었다면……. 아, 시발. 완전 무섭잖아.”
그는 방정맞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몸으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생얼음을 부숴 먹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소름과 오한이 이제와 느껴졌다. 잘하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선 반가운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 감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약 진짜 에드워드가 그 말을 들었다면 노아는 당장 도망가야만 했다. 그가 악명이 자자한 ‘웰스가의 복수’를 시작하기 전에 말이다.
“소, 소송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그럼 난 평생 노숙자로 살아야 할 텐데…… .”
노아의 입에서 절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그가 에드워드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전날 밤 에드워드와 밤을 보내고 사귀자는 말을 들어 얼떨떨해 있는데, 비서인 수잔이라는 여자가 노아를 찾아왔다. 그녀는 노아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설명하면서 아파트 열쇠와 함께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엔 에드워드와 만나면서 지켜야 할 조항들이 빼곡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조항이 바로 비밀엄수였다. 에드워드와 나눈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사귄다는 사실 자체도 비밀로 할 것. 거듭되는 수잔의 협박에 가까운 강조와 설명 때문에 노아는 간이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술이 모든 것을 망쳤다. 이제 남은 것은 피의 복수와 소송뿐이었다.
“아니야! 전화 받은 건 대머리였다고! 분명 대머리였어……!”
노아는 고집스럽게 외치며 만약의 가능성을 외면했다. 벨소리가 거슬리긴 했지만 전화를 받은 이는 분명 대머리였다. 아침 햇살에 빤짝거리던 그 정수리는 술 취한 자신의 머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섬세했으니까.
다만 뒤돌아 앉아 있던 금발 사내가 문제였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사내가 너무 수상했다. 뒷모습이 묘하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사내가 혹시……?
“으…….”
노아는 겁에 질려 머리를 쥐어뜯다가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그러곤 가장 친하고 만만한 친구인 루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라면 어제 아침 카페테라스에 에드워드 웰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루시!”
-내가 당분간 전화 걸지 말랬잖아!
루시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노아가 혼자 맨해튼에 돌아온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 네가 오자고 해 놓고선 혼자 돌아가 버리는 게 어딨어?! 이렇게 마음대로 할 거면 왜 우릴 데리고 온 거냐고!
“미안해, 루시. 내가 잘못했어……. 나도 좋아서 혼자 돌아온 거 아니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나 지금 엄청 심각하다고……. 잘못했다간 소송당할지도 몰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너 설마 카드 무단 사용으로 신고당했어? 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 말이야! 역시 그거 네 거 아니지?!
“맞거든.”
-……믿어 줄 테니까 짐이랑 케빈 앞에서 한 번만 아니라고 말해 주면 안 돼? 나 아니라는데 20불 걸었단 말이야.
친구가 말도 없이 돌아가 화는 났어도 내기는 한 모양이었다. 과연 라스베이거스에서 할 만한 행동이었다.
“해 줄 테니까 뭐 하나만 묻자, 루시. 어제 카페테라스에 나 데리러 왔을 때 기억나? 혹시 그때 내 뒤에 앉아 있던 사람 얼굴 봤어?”
-전화 받던 사람?
“아니, 대머리 말고 앉아 있던 금발 머리 남자.”
-……아! 그 잘생긴 남자?
“뭐? 잘생겨?!”
하마터면 에드워드 웰스만큼 잘생겼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루시의 입에서 그 잘생긴 남자를 TV나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말이 나올까 봐 너무 무서웠다. 노아는 ‘소송’과 ‘비밀유지’ 이 두 단어를 속으로 외우면서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잘생겼다니까 왜 이렇게 흥분해? 너 애인 있다면서? ……그거 못하는 부자 애인.
“아, 아니야! 그건 내가 취해서 실수한 거야! 사실은 엄청 잘해. 진짜 끝내주게 잘하거든. 그러니까 좀 잊어 주라. 응……?”
-그렇게 강렬한 걸 어떻게 잊어? 평생 못 잊을 거 같은데.
노아는 할 수만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주둥이를 꿰매고 싶었다. 루시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건 적어도 반년 이상 갈 놀림감이었다.
“됐어. 금발 이야기나 해 봐. 그 남자 나이는 어땠어? 젊었어? 아니면 대머리랑 비슷해? 설마 30대 초반은 아니겠지……?”
-어리던데? 대머리랑은 삼촌이랑 조카 사이 같더라.
“그래……?”
대머리 조카면 나보다 어리겠네. 안심한 노아는 방긋 웃었다. 그가 알기로 에드워드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나름 동안이긴 했지만 대머리랑 조카로 보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고로 그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던 남자는 에드워드가 아니고, 난 복수당할 걱정 따윈 안 해도 된다는 거지.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 노아는 미친놈처럼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히히힛”
-……뭐야, 갑자기 왜 웃어? 불길하게.
“루시, 사랑해!”
-고맙지만 난 게이는 별로라서.
“나 여자랑도 되거든? 바이야.”
-그게 더 싫으니까 꺼져. 아, 그런데 너 소송당할 수도 있다는 게 무슨 소리야? 혹시 네 못하는 애인하고 관련 있어?
“끊자.”
노아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제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해결되었으니 계속 통화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뒷수습을 한답시고 더 이야길 하다가 말실수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또 간섭했다간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서 벤은 그냥 자신의 카드로 눈길을 돌렸다. 에드워드는 바보가 아니니 저 여자를 잘 처리해 넘기리라. 그것도 아니면 이번 기회에 동성 애인과 헤어지고 저 여자와 사귀든지.
실없는 칭찬이 오가는 가운데 어디선가 휴대폰 진동음이 들렸다. 에드워드의 수트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짧게 두 번 울리고 끊긴 걸로 보아 연속으로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진동음을 들은 에드워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분명 웃고 있는데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이었다.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아직 합병이 진행 중이라 했지?”
“마무리 단곕니다. 곧 의도했던 대로 전부 합의될 겁니다.”
“흠……. 걱정은 안 한다만 대체 언제까지 기업사냥꾼 짓을 할 게냐, 에드워드? 이제 그만 이 할애비 좀 도와주질 않고. 너도 안정된 일을 해야지.”
회장은 대놓고 에드워드가 하는 일을 무시했다. 그것이 자신의 후계자로 거대한 웰스 기업을 물려받는 것보단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아직 기업의 후계자 자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언젠간 별수 없이 조부의 모든 것을 물려받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웃기만 하지 말고 그만 가 보거라. 네 일까지 방해해 가면서 여기 붙잡아 두고 싶진 않으니.”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머레이 양,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에드워드는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두 건의 메시지 알림이 화면에 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회장이 짐작한 것처럼 업무 관련 내용이 아니었다. 비서에게 시킨 ‘노아 우드 감시’ 관련 문자였다.
메시지 한 건은 노아 우드가 방금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건은 공항에서 찍은 노아의 사진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공항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는데,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것이 노아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저 늘씬하고 예쁜 몸이 그동안 안아 왔던 이의 것임을―
에드워드는 새삼스럽게 노아가 의식이 되었다. 그는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노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잊고 지냈던 것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래에서 흔들리던 육체와 젖은 숨, 갈색 머리카락에서 나던 샴푸 냄새 같은 것들이.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무슨 색깔이었더라.”
사진엔 얼굴이 똑바로 나오질 않아 노아의 눈 색깔을 알 수가 없었다. 별로 중요하진 않은 것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그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가 노아에게 처음 흥미를 느꼈던 이유가 바로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 호박색이었지…….”
어릴 때 길렀던 고양이와 같은 색깔. 에드워드는 노아의 눈동자 색깔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노아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에드워드와 노아가 만난 곳은 어느 문화재단의 후원 파티였다. 아니, 만났다기보다 에드워드가 노아를 발견한 곳이 그 파티였다.
그때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적당히 어울리다가 주최자가 원하는 금액을 적은 수표를 건네는 것이 에드워드의 역할이었다. 평생 지긋지긋하게 불려 다닌 것이 이런 파티인지라 그는 사람들과 능숙하게 어울리며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몇몇 사람들이 자꾸 어딘가를 힐끔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지루했던 에드워드는 거기에라도 흥미를 붙여 보려고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술에 취해 헤실헤실 웃어 대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 바로 노아였다.
에드워드가 노아를 보고 느낀 첫 감상은 ‘곧 먹히겠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술에 취한 노아 주변엔 그를 유혹해 어딘가로 데리고 가고 싶은 이들이 서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여자부터 엉큼한 인상의 중년 사내까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싸움이었다.
에드워드는 저 얼굴 반반한 멍청이를 누가 잡아먹을지 궁금해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싸움은 금방 끝나질 않았고, 노아는 술 취해 맹한 표정으로 경쟁자들만 계속 불러 모았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떠, 모두를 닭 쫓던 개로 만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다.
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사람치곤 제법이었다. 아니면 너무 순진하고 멍청해 그게 유혹인 줄 몰랐던 건지도 모른다. 둘 중 어느 것이 정답일까. 에드워드는 그것이 궁금해 눈으로 계속 노아를 찾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라스에 몸을 기댄 채 쉬고 있는 노아를 발견했다.
노아는 도통 생각이라곤 없어 보이는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 얼굴을 보곤 노아가 백치라고 결론을 내렸다. 너무 멍청해서 가진 얼굴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배우 지망생 정도일 것이라고. 에드워드는 심드렁해져 관심을 끄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아에 대한 그의 인상은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파티장 안쪽을 쳐다보며 웃는 눈빛 하나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표정이긴 했지만 분명 에드워드는 보았다. 노아가 자신이 따돌리고 온 이들을 향해 슬쩍 웃는 것을. 그 짧은 순간 반짝하고 빛나던 호박색 눈동자 안엔 환멸과 지겨움, 그리고 짓궂은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이겼다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어린아이 같은 승부욕도.
비록 취기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긴 했으나 그것들이 에드워드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속 무엇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아가 같은 성별을 가진 남자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학생 시절, 동성과 관계를 가져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에드워드는 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노아를 찾던 또 다른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양손에 칵테일 잔을 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취한 노아를 더 취하게 만들어 데리고 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도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는 남자보다 먼저 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술을 권하는 대신, 노아에게 술을 쏟았다.
‘이런, 내가 실수를 하고 말았군.’
누가 봐도 고의였지만 에드워드는 뻔뻔하게 실수를 주장했다. 그런 다음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노아를 데리고 파티장을 나가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음…….’
노아는 살짝 인상을 쓰며 에드워드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디선가 본 사람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웃으며 자신의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긴 했어도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는 않을 터. 그는 노아에게 말했다.
‘싫으면 말해. 보내 줄 테니.’
‘어……. 목소리가…….’
‘목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네.’
첫 만남에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목소리가 좋다는 말은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마음에 드는 유혹이었다. 에드워드는 노아에게 입을 맞췄다. 노아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몸에 힘을 풀었다. 확실한 승낙이었다.
그렇게 같이 밤을 보냈다. 비록 한 쪽이 술에 취해 있어 모든 욕심을 다 채울 순 없는 밤이었지만, 그래도 에드워드는 꽤 만족스러웠다. 노아의 몸은 발그레한 얼굴만큼이나 예쁘고 유연했으며, 농익은 열매처럼 달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에드워드는 지쳐 잠든 노아를 보며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애초에 하룻밤 욕망으로 안은 몸이긴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웠던 것이다. 노아는 몸뿐만 아니라 외모도 에드워드의 취향이었다. 마냥 잘생겼다기엔 예쁘장한 감이 있는, 단정하면서도 묘한 색기가 흐르는 얼굴. 왜 그렇게 사람들이 꾀어 보려고 애를 태웠는지 알 것 같았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노아의 입술에 머물렀다. 그리고 붉은 자국들이 남은 목덜미와 가슴께를 지나, 시트에 가려진 허리 아래까지 시선이 내려왔다. 다시 가라앉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자극하는 이는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노아와 조금 더 관계를 가지기로 했다. 동성의 파트너, 혹은 애인을 둔 적은 없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그 괜찮을 것이라는 느낌대로 지금까진 모든 것이 좋았다. 술이 깬 후의 노아는 순하고 착했으며, 에드워드의 유명세에 요란을 떨며 사람을 귀찮게 만들지도 않았다. 사귀는 동안 항상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에드워드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래, 참 괜찮은 관계였었지.”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는.
에드워드는 이를 빠득 갈았다. 오늘 아침 카페테라스에서 들었던 말과 노아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생각나 열이 올랐다. 이렇게 열 받는 건 태어나 처음이다. 어릴 적 박스로 만들었던 ‘노틸러스호’를 조부가 갖다 버렸던 일을 뺀다면.
그는 노아의 사진을 노려보며 의지를 불태웠다. 노아는 이제 헤어지기를 원하는 모양이지만, 에드워드는 그렇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괘씸한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겠는가. 나는 이렇게 열 받아 미칠 것 같은데.
“이대로 곱게 헤어져 줄 순 없지. 어림없어, 노아 우드.”
받은 만큼 돌려주는 웰스 가문의 복수심을 두고 사람들은 쪼잔하다고 뒤에서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에드워드는 그것이 너무 싫고 조부인 회장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부를 닮지 않으려고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에드워드는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웰스 가문 사람임을 깨닫고야 말았다. 믿고 있던 상대에게 속았다는 분노와 상처 입은 남자의 자존심이 그의 안에 잠들어 있던 복수의 피를 들끓게 만든 것이다.
에드워드는 살벌하게 웃으며 다짐했다. 노아에게 그 가증스러운 사랑을 되돌려 주겠노라고. 반드시 노아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사랑을 구걸하도록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잔인하게 차 버려야지. 그 좋아하던 카드와 아파트도 모두 빼앗아 버리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남은 일들을 모두 처리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일 밤 노아를 만나러 갈 수 있을 테니. 에드워드는 휴대폰을 다시 수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자신의 호텔 방으로 향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
환하게 불이 켜진 넓은 거실 한가운데 노아가 팬티만 입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는 에어컨 바람을 등지고서 얼음 양동이를 안고 있었다. 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아침저녁으론 추운 이 시기에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감기에 걸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나 노아는 그것을 매우 원했다. 에드워드에게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핑계를 댄 탓이다. 그가 보낸 주치의가 도착하기 전까진 꼭 감기에 걸려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아픈 티가 나야 하는데…… 워낙 건강한 체질이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콧물만 조금 나고 말 뿐이었다.
“엣취! 아, 에…… 에취! 아니, 콜록 콜록으로 할까. 아니야, 이건 너무 꾸민 티가 나.”
그는 콧물을 닦으며 어떻게 해야 환자처럼 보일지를 연구했다.
“감기야 걸려라! 감기야! 제발!! 감기, 감기, 감기, 감기, 감기 얍―!!”
노아는 목이라도 쉬게 만들려고 큰 소리를 냈다. 소음으로 신고가 들어와도 할 말이 없는 성량이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시원찮았다. 노아는 인상을 쓰며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이 얼음이 에드워드 웰스라고 생각하면서.
“젠장, 그 자식은 왜 갑자기 사랑타령을 해선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카드까지 정지시키고.”
아, 내 불쌍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
이제 쓸 수 없는 그 카드를 생각하니 노아의 얼굴이 절로 울상으로 변했다. 그가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였다. 누군가 취소한 뉴욕행 좌석을 다시 결제하기 위해 카드를 내밀었는데 정지되었다는 것이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비서인 수잔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에 관해 물으니, 그녀는 카드가 라스베이스에서 결제 돼서 정지시켰다고 말했다. 에드워드가 아파트로 주치의를 보내라고 명령했는데, 정작 카드는 맨해튼이 아닌 라스베이거스에서 쓰여서 도난당한 건 줄 알았노라고 말이다.
뜨끔한 노아는 수잔에게 잘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신도 카드를 잃어버려서 정지시켜 달라고 전화를 건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핑계까지 댔다. 다행히 수잔은 그 말을 믿어 주었으며 곧 카드를 재발급 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나마 반가운 일이긴 했다. 사랑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돌아온다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좀 찝찝하단 말이지.”
어젯밤엔 숙취와 에드워드 웰스의 미친 사랑 타령 때문에 그냥 넘어갔었는데,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 상황이 뭔가 좀 이상했다. 그리고 그중 제일 이상한 건 에드워드였다. 그는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사랑 같은 달콤한 감정과는 별 관련이 없는 남자였다. 있는 놈들이 다 그렇듯 자기중심적이고,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냉정했다.
그런데 이제와 나를 사랑한다고? 만날 때마다 몸만 섞고 가는 놈이? 심지어 3주 동안 연락도 없었는데? 노아는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꿈인지 현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자의 뒷모습과 친구들, 그리고 익숙한 휴대폰 벨소리였다. 그때 노아는 밤새 마신 술 때문에 많이 취해 있었다. 그 탓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헛소리를 좀 지껄이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남자의 자존심에 아주 치명적인 말을. 만약 그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자신은 크게 경을 치게 되리라.
“아니야, 그래도 이름을 말하진 않았잖아……. 또 라스베이거스에 에드워드가 왜 있었겠어? 그놈은 바빠서 그런데 놀러도 못 가는 놈이라고. ……전화도 안경 낀 대머리가 받았었잖아.”
노아는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확신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지만 솔직히 별 자신은 없었다. 자꾸만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닐까, 혹시 그때 에드워드가 어디선가 험담을 듣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다.
“만약 에드워드가 내 말을 들었다면……. 아, 시발. 완전 무섭잖아.”
그는 방정맞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몸으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생얼음을 부숴 먹을 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소름과 오한이 이제와 느껴졌다. 잘하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선 반가운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 감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약 진짜 에드워드가 그 말을 들었다면 노아는 당장 도망가야만 했다. 그가 악명이 자자한 ‘웰스가의 복수’를 시작하기 전에 말이다.
“소, 소송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그럼 난 평생 노숙자로 살아야 할 텐데…… .”
노아의 입에서 절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그가 에드워드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전날 밤 에드워드와 밤을 보내고 사귀자는 말을 들어 얼떨떨해 있는데, 비서인 수잔이라는 여자가 노아를 찾아왔다. 그녀는 노아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설명하면서 아파트 열쇠와 함께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엔 에드워드와 만나면서 지켜야 할 조항들이 빼곡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조항이 바로 비밀엄수였다. 에드워드와 나눈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사귄다는 사실 자체도 비밀로 할 것. 거듭되는 수잔의 협박에 가까운 강조와 설명 때문에 노아는 간이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술이 모든 것을 망쳤다. 이제 남은 것은 피의 복수와 소송뿐이었다.
“아니야! 전화 받은 건 대머리였다고! 분명 대머리였어……!”
노아는 고집스럽게 외치며 만약의 가능성을 외면했다. 벨소리가 거슬리긴 했지만 전화를 받은 이는 분명 대머리였다. 아침 햇살에 빤짝거리던 그 정수리는 술 취한 자신의 머리가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섬세했으니까.
다만 뒤돌아 앉아 있던 금발 사내가 문제였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사내가 너무 수상했다. 뒷모습이 묘하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사내가 혹시……?
“으…….”
노아는 겁에 질려 머리를 쥐어뜯다가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그러곤 가장 친하고 만만한 친구인 루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라면 어제 아침 카페테라스에 에드워드 웰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루시!”
-내가 당분간 전화 걸지 말랬잖아!
루시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노아가 혼자 맨해튼에 돌아온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 네가 오자고 해 놓고선 혼자 돌아가 버리는 게 어딨어?! 이렇게 마음대로 할 거면 왜 우릴 데리고 온 거냐고!
“미안해, 루시. 내가 잘못했어……. 나도 좋아서 혼자 돌아온 거 아니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나 지금 엄청 심각하다고……. 잘못했다간 소송당할지도 몰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너 설마 카드 무단 사용으로 신고당했어? 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 말이야! 역시 그거 네 거 아니지?!
“맞거든.”
-……믿어 줄 테니까 짐이랑 케빈 앞에서 한 번만 아니라고 말해 주면 안 돼? 나 아니라는데 20불 걸었단 말이야.
친구가 말도 없이 돌아가 화는 났어도 내기는 한 모양이었다. 과연 라스베이거스에서 할 만한 행동이었다.
“해 줄 테니까 뭐 하나만 묻자, 루시. 어제 카페테라스에 나 데리러 왔을 때 기억나? 혹시 그때 내 뒤에 앉아 있던 사람 얼굴 봤어?”
-전화 받던 사람?
“아니, 대머리 말고 앉아 있던 금발 머리 남자.”
-……아! 그 잘생긴 남자?
“뭐? 잘생겨?!”
하마터면 에드워드 웰스만큼 잘생겼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루시의 입에서 그 잘생긴 남자를 TV나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말이 나올까 봐 너무 무서웠다. 노아는 ‘소송’과 ‘비밀유지’ 이 두 단어를 속으로 외우면서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잘생겼다니까 왜 이렇게 흥분해? 너 애인 있다면서? ……그거 못하는 부자 애인.
“아, 아니야! 그건 내가 취해서 실수한 거야! 사실은 엄청 잘해. 진짜 끝내주게 잘하거든. 그러니까 좀 잊어 주라. 응……?”
-그렇게 강렬한 걸 어떻게 잊어? 평생 못 잊을 거 같은데.
노아는 할 수만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주둥이를 꿰매고 싶었다. 루시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건 적어도 반년 이상 갈 놀림감이었다.
“됐어. 금발 이야기나 해 봐. 그 남자 나이는 어땠어? 젊었어? 아니면 대머리랑 비슷해? 설마 30대 초반은 아니겠지……?”
-어리던데? 대머리랑은 삼촌이랑 조카 사이 같더라.
“그래……?”
대머리 조카면 나보다 어리겠네. 안심한 노아는 방긋 웃었다. 그가 알기로 에드워드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나름 동안이긴 했지만 대머리랑 조카로 보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고로 그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던 남자는 에드워드가 아니고, 난 복수당할 걱정 따윈 안 해도 된다는 거지.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 노아는 미친놈처럼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히히힛”
-……뭐야, 갑자기 왜 웃어? 불길하게.
“루시, 사랑해!”
-고맙지만 난 게이는 별로라서.
“나 여자랑도 되거든? 바이야.”
-그게 더 싫으니까 꺼져. 아, 그런데 너 소송당할 수도 있다는 게 무슨 소리야? 혹시 네 못하는 애인하고 관련 있어?
“끊자.”
노아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제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해결되었으니 계속 통화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뒷수습을 한답시고 더 이야길 하다가 말실수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