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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게임 이즈 네버 오버 6화


“목소리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노아. 감기 걸린 건가?”
-아, 이건…… 어젯밤에…….
노아는 부끄러운 척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았어. 널 너무 울린 것 같아서 말이야. 일하는 내내 신경 쓰이더군.”
-아니에요, 에드워드 전 괜찮아요. 어젠 저도 좋았는걸요.
“……그래? 좋았단 말이지.”
이게 또 거짓말이다. 말은 이렇게 해 놓고 속으론 지루라고 비웃을 걸 생각하니 열이 확 뻗쳤다.
“그럼 오늘 밤에 또 해도 되겠네.”
-네?
“오늘 밤에 또 하자고. 젤이랑 콘돔 새로 사 갈게.”
-콘……! 코, 콜록, 콜록!! 엣취―! 콜록 콜록!!
노아가 갑작스럽게 기침을 터뜨렸다. 누가 들어도 다분히 작위적인 기침소리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닥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 뜻을 무시했다.
“이런. 감기가 심하네. ……그런데 노아. 집에 젤이 얼마나 남아 있지? 이왕이면 넉넉한 게 좋잖아.”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아 머리야!!
“기침을 너무 해도 머리가 아프더라고. 좀 참아 봐. 그리고 젤은 그냥 박스째로 사 갈게.”
-뭐?! 이 씨…… 콜록, 콜록!!
“이 씨…? 설마 씨발이라고 욕하려다 만 건 아니겠지, 노아?”
정답이었다. 젤을 박스째로 사 와서 박겠다는데 욕이 안 나오고 버티겠는가. 없는 욕도 갖다 붙여 더 심한 욕을 해 대도 모자랄 상황인데. 노아는 순간 뜨끔했지만 착한 연인인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수는 없기에 바락바락 우기기 시작했다.
-하, 하, 하. 에드워드도 참! 욕은 무슨 욕이에요? ……기침! 그래! 내 기침 소리를 착각한 거 아니에요? 제가 좀 기침을 특이하게 하거든요! 씨에취! 씨에취! 하고…!
“정말 특이한 기침 소리군! 그런데 이렇게 기침이 심하면 그냥 병원에 가는 게 어때? 내가 같이 가 줄 테니까. ……아니면 다 나을 때까지 입원하는 것도 괜찮지. 환자인 네 엉덩이에 다른 종류의 주사를 놓아 주는 것도 퍽 재미가 있을 것 같거든.”
전화가 뚝 끊겠다. 변태 같은 말에 더 버티지 못하고 노아가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다. 에드워드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빨개져 씩씩대고 있을 노아를 생각하니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기분도 좋아졌다. 에드워드는 상쾌해진 표정으로 던져뒀었던 보고서를 다시 펼쳐 들었다.
원래의 능률을 되찾은 그는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급한 결제 건과 보고서를 체크하고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늘 오후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을 다른 날로 미루고 나니 좀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여유가 생기니 잊고 있던 단어가 또 슬금슬금 생각나 에드워드를 괴롭혀 댔다.
그 망할 ‘지루’라는 단어가.
에드워드는 갑자기 노아가 아까보다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지, 섹스가 좋았다고 말해 놓고 욕을 가장한 기침은 왜 하느냔 말이다. 물론 마지막에 당황해서 전화를 끊은 건 통쾌하긴 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전화를 끊은 후 연락이 없는 게 또 분하고 밉살스러웠다.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말도 없이 전화를 끊은 건 큰 무례이니, 다시 전화해서 사과하고 핑계를 대야 하는 것 아닌가.
“뭐, 그렇게 했어도 열 받겠지만 말이야.”
에드워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어쩌지 못하고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새삼 자신이 이렇게까지 뒤끝이 풍부한 놈이라는 걸 실감한 에드워드였다. 게다가 이왕 쪼잔하고 뒤끝 있는 변태가 된 바에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오기도 생겨났다.
그는 또다시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통화 연결음만 계속 들릴 뿐, 노아는 전화를 받질 않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에드워드가 네 번째로 전화를 했을 때야 겨우 받았다. 오기의 승리였다.
-에드워드……!!
“이제야 전화를 받는군.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걱정했잖아.”
-그게…… 배가 많이 아파서요.
“배가? 기침이랑 두통 때문이 아니고?”
전화할 때마다 아픈 곳이 늘어나는 모양이다. 참 신비한 신체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배가 많이 아파서 지금도 화장실이에요. 아침부터 설사가 그치질 않아요. 아주 줄줄…….
“저런, 안 됐네. 아침을 잘못 먹은 건가?”
-잘못 먹은 게 아니라 누가 배 속에 뭘 잔뜩 싸 놔서요.
“아하. 그 누군가 콘돔을 안 꼈나 보군.”
에드워드는 그 누군가가 자신임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뗐다. 이유는 단순했다. 노아를 열 받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기침에 두통, 이젠 설사까지 추가되었어도 노아의 목소리에선 아픈 기색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 받는 곳도 화장실이 아니었다. 화장실이라면 목소리 뒤로 기타와 피아노, 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것들이 들리지는 않을 테니까. 노아는 그저 섹스하기 싫다는 말을 아프다는 말로 대체한 것일 뿐이다. 거기에 굳이 설사라는 병명을 추가한 것은 그 소릴 듣고 성욕도 뚝 떨어지라는 일종의 저주였으리라. 이 정도면 아주 노골적인 의사표시였다.
-아…… 또 배가……! 미안해요, 에드워드. 전화 끊어야겠어요.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지야. 내 정액을 낳으러 간다는데.”
-이런 씨…….
“그럼 내 아이들을 건강하게 낳아 줘. 조금 있다 또 전화하지.”
-아니, 안 해도 되는―
에드워드는 노아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5분 뒤에 또 전화를 걸었다.
-진짜로 전화했네요, 에드워드! 오늘 많이 한가한가 봐요? 하하하!
“그럴 리가. 책상 위에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는걸.”
-산더미요? 그럼 그거 얼른 처리해야죠. 자꾸 이렇게 전화할 게 아니라……!
노아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려 있었다. 에드워드의 전화가 어지간히도 귀찮은 모양이다. 반대로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점점 가벼워져 갔다. 그는 노아가 약이 오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콘돔을 쓰지 않은 것은 매너 없는 짓이고, 노아를 자신에게 반하게 만들기 위해선 이렇게 놀려선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랬다. 이상하게 재미가 있었다.
“나도 일하고 싶은데 노아 네가 자꾸 아른거려서 버틸 수가 있어야지. 특히 어젯밤 끝내주게 조이던 네 엉덩이가…….”
-콜록, 콜록, 콜록!!
“내 걸 빨 때 짓던 표정도 생각나고.”
-씨엣취!! 엣취!! 에취이이이!!
“박아 달라고 조르던 것도 귀여웠지.”
-이이익!! 야!! 내가 언제 그랬……! 그랬었죠!! 아이, 부, 부끄러워! 놀리지 말아요, 에드워드!
부들부들 떨리는 쉰 목소리 사이로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도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왜 멀쩡한 사람한테 지루라는 말을 해. 에드워드는 유치한 승리감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아주 통쾌했다.
“놀리는 거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저도, 사랑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그것 참 감동스럽군. ……아, 젤이랑 콘돔 주문해 놨어. 박스째로 주문하니까 서비스로 돌기형도 끼워 주더라고.”
노아는 할 말을 잃고 씩씩거렸다. 그 소리가 고스란히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잘됐네요. 아아주 잘됐어요.
“역시 그렇지?”
-네. 그런데 전 이제 끊어야겠어요.
“설마 또 내 정액을 낳으러 가는 건가.”
-하, 하, 하. 아니요. 일해야 해서요. 전 누구처럼 마음대로 놀 수 없는 처지라.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요.
정색하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제 한계인 모양이다. 더 놀렸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여기서 물러나기로 했다. 2차전은 직접 돌기형 콘돔을 전해 주면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데 노아의 말 중에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마음대로 놀 수 없는 처지라니. 에드워드는 그 말이 이해되질 않았다. 그가 알기로 노아는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백수였다. 아니, 아직 한 번도 배역을 얻지 못한 연기자가 더 정확하던가. 어쨌든 당장 전화를 끊어야 할 만큼 바쁜 일 따위 노아에겐 없었다.
“약속이라도 있나 보군. 안 그래도 지금 바깥인 것 같은데. ……설마 바람피우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 싶은데 여긴 괜찮은 남자가 없어서요. 바람은 직장을 옮기면 시도해 볼게요.
“직장? 오디션을 보러 가는 모양이군.”
-오디션……? 무슨 소리에요?
“그야 당연히 네가…… 아.”
에드워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노아가 일을 한다는 투로 말하기에 당연히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착각일 수도 있음을 에드워드는 막 깨달았다. 노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꿈이 배우라고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냥 에드워드 혼자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아가 배우 지망생일 거라고. 그리고 그걸 들켜버렸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침묵이 바로 그 증거였다.
-…….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노아를 놀려대던 에드워드는 입을 다물었다. 무관심을 이런 방식으로 티 내다니. 이번은 자신이 정말 경솔했다.
-그럼 전화 끊을게요.
먼저 정신을 차린 노아가 전화를 끊었다. 에드워드는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아주 통쾌했었는데, 단숨에 찝찝해졌다. 설마 상처받았을까. 에드워드는 노아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 봤지만, 이미 너무 놀려서 화가 나 있던 목소리에서 섬세한 감정을 읽어 내기는 힘들었다.
괜히 바람피우냐고 물었던 것 같다. 아니, 연인인 노아에 대해 똑바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자기 자신도 한심했다. 에드워드는 일단 노아에 대한 괘씸함을 옆으로 제쳐 놓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26살. 갈색 머리, 호박색 눈동자. 키는 6피트 정도. 카드 사용내역으로 보건데 먹는 걸 매우 좋아하며, 나를 사랑하는 척한다. 사실은 입이 꽤 거칠고 섹스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몸은 예민한 것 같은데…….
한참 고민했지만 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노아에게 무관심했던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그건 인정이고 뭐고 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누군가와 사귈 때마다 ‘무관심하다’, ‘정이 없다’, ‘몸만 필요한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곤 했으므로.
하지만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일 때문에 연인에게 신경을 못 쓰긴 했어도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옆에서 끊임없이 쫑알거리며 관심을 요구하니 싫어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노아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는 에드워드에게 감정적인 것을 요구하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에드워드를 기다리고, 그의 편리에 맞춰 행동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드워드는 그런 노아가 좋았다. 귀찮게 굴지 않는 데다 신경 써서 맞춰 줘야 할 것도 없고, 언제나 방긋방긋 웃으며 반겨 주는 상냥한 연인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노아는 에드워드가 자신의 연인에게 바라는 모든 것들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이제 에드워드는 그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노아의 그 ‘편함’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명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별 마음이 없으니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아도 상관없고, 어떤 실수를 해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화를 내거나 더 설명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은 것이리라.
“……은근히 열 받게 만드는군.”
주는 만큼 받는 법이다. 애초에 노아를 편한 섹스파트너 취급을 한 건 자신이었으니, 그에게 돈 많은 호구 취급받는 것을 억울해하진 말아야 한다. 그것을 머리로 알고는 있는데 자꾸만 화가 났다. 이대로 헤어지면 정말 좋겠다던 노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존나 못한다던 비웃음과 지루라는 짧은 단어도. 에드워드는 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수잔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수잔. 혹시 내 애인인 노아 우드에 대해 조사해 놓은 자료가 있나?”
-……예. 간단하게 조사를 하긴 했었습니다. 필요하시면 보고서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당장 가져오도록 해.”
그녀는 에드워드의 사적인 일을 처리하는 비서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에드워드의 연인들에 관한 일도 맡게 되었는데, 주로 그를 대신해 선물을 보내거나 기념일을 챙기고, 약속을 잡는 등의 일을 했다. 한마디로 섹스 빼고 거의 모든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물론 수잔이 단순히 에드워드를 대신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에드워드의 모든 사생활을 관리했다. 그가 누군가와 사귀게 되면 그 사람이 누군지 조사해 혹시라도 생길 트러블에 대비했다. 헤어진 후에 에드워드와의 관계를 언론에 팔거나 음험한 소문을 내지 않도록 회유하고 입막음도 시켰다. 필요하다면 협박과 고소를 곁들여서라도 말이다. 그런 수잔이라면 이미 노아의 뒷조사를 해 놓았을 터. 에드워드는 그녀에게서 노아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작정이었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수잔이 문서 파일을 들고 나타났다. 에드워드는 반색하며 파일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노아의 직업을 찾았다. 한데 종이엔 영 의외의 것이 적혀 있었다.
“잠깐, 이거 잘못된 거 아닌가?”
“왜 그러십니까.”
“노아의 직업 말이야. 여기엔 작곡가라고 되어 있는데.”
“네. 작곡가가 맞습니다. 브로드웨이의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어요.”
“뭐……? 배우나 모델 아니었나? ……그 얼굴로 작곡가라고? 너무 안 어울리잖아.”
“……꼭 배우나 모델을 해야 할 정도로 예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에드워드가 너무 충격 받은 듯해 오히려 수잔이 얼떨떨해졌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노아는 배우를 할 만큼 화려하고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핸섬한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물론 반반한 얼굴이긴 했다. 키도 크고 단정해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귀하게 자란 도련님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에드워드가 전에 만나던 여자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외모였다. 절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외모로 직업을 골라야 하는 거라면 보스야말로 배우를 하셔야지요. 백마 탄 왕자님이라든가.”
백마 탄 왕자님은 여성잡지에서 에드워드에게 붙여 준 별명 중 하나였다. 잘생긴 외모와 재벌 3세라는 배경이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데렐라를 꿈꾸는 이들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쓰던 카드를 새로 발급 받았습니다. ……바쁘시다면 제가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그 블랙카드 말이로군. 두고 가도록 해. 내가 직접 전해 줄 테니.”
에드워드는 보고서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수잔은 조용히 카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어이가 없군.”
보고서엔 에드워드가 알지 못했던 노아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단어와 문장으로 보는 노아는 에드워드가 알고 있던 노아와 많이 달랐다. 애틀랜타에서 미혼모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우수한 성적으로 음대를 졸업해 유명 음악감독 밑에서 일을 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귀긴 하지만 남자와 만나는 비율이 조금 더 높다. 그러나 연애를 오래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등록금 때문에 대출을 받아 빚이 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세 명이며 모두 SNS를 하니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정보가 에드워드에겐 새로웠다. 반년 이상을 사귀었는데 이렇게 아는 것이 없었다니. 에드워드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것들을 직접 말해 주지 않은 노아도 괘씸했다. 그래도 애인 사이인데 이 정도는 말해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에드워드는 잠시 씩씩거렸지만 곧 자신이 원인임을 깨닫고 열을 가라앉혔다. 그래. 누굴 원망하겠는가. 알고자 하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인 것을.
어찌 됐든 열심히 잘 살고 있는 노아를 얼굴이 전부인 무명 배우라고 생각했던 것은 미안했다. 일하는 중인데 바람피우러 가냐며 되지도 않는 농담을 했던 것도 부끄러웠다. 에드워드는 노아에게 사과하기 위해 다시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또! 전화했네요, 에드워드!
노아가 ‘또’에 악센트를 강하게 주며 말했다. 목소리가 밝긴 했지만 그 속에 배인 짜증을 숨길 수는 없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전화가 귀찮은 모양이었다. 사과하려고 전화한 에드워드까지 따라서 날이 섰다.
“또 전화하면 안 되나? 귀찮으면 끊어도 돼.”
-귀찮다니……. 그냥 어색해서 그래요. 원랜 이렇게 자주 통화하지 않았잖아요.
자주 통화하지 않는 것뿐이겠는가. 두 사람은 아예 통화다운 통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노아는 에드워드에게 절대 먼저 전화하지 않았고, 에드워드는 볼일이 있을 때만 노아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그 볼일이라는 것도 대부분 오늘 밤에 보자는 통보였다.
“……오늘따라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자꾸 전화하게 된다고. 아무래도 어젯밤이 너무 인상에 남았나 봐.”
에드워드는 또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노아가 전화를 귀찮아하니 멋쩍은 맘에 싫어하는 말을 뱉어 버리고 만 것이다. 휴대폰에서 노아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드도 자신이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통쾌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 참. 에드워드! 대낮부터 내 얼굴을, 빨갛게, 만들지, 말아요…….
“미안해. 이제 안 놀리도록 하지.”
-역시 놀리는 거였구나, 이 씨…… 이 멋쟁이!
‘이 시발새끼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노아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노아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진짜 멋쟁이라면 그 정돈 알아들어야 할 게 아닌가.
“오늘 전화로 멋쟁이처럼 굴었던 거 다 사과하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랬어. ……뭐, 너도 내 목소리 좋아하잖아.”
-목소리……?
“그래. 내 목소리.”
-안 좋아하는데요.
“……좋다고 했었잖아.”
-안 했는데요.
“했어.”
-안 했어요.
“했다니까.”
-안 했다니까요.
에드워드는 뒤통수가 뻣뻣하게 당기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 노아는 에드워드를 보고 분명 말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라고. 설령 술에 취해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취향까지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좋았다면 지금도 좋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안 좋아한다니. 에드워드는 화가 났다. 겨우 목소리일 뿐,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냥 화가 났다.
“그래. 내가 착각하고 있었나 보군. 미안해, 노아.”
-그럴 수도 있죠. 신경 쓰지 말아요, 에드워드.
노아가 죄인을 용서하듯 자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회개하는 대신 화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인상을 쓰느라 구겨진 그의 얼굴엔 짜증과 울화가 몽글몽글 맺혔다.
에드워드는 화를 억누르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책상 위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곳엔 수잔이 두고 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블랙카드가 있었다. 에드워드는 악당처럼 눈을 빛냈다.
“사실 좋은 소식을 알려 주려고 전화했어.”
-좋은 소식이요?
“네 카드 말이야. 그거 재발급 받았거든.”
-……아. 그렇군요.
대답은 그저 그랬지만 노아의 목소리에선 반가움이 확 묻어났다. 다정한 척하지만 짜증이 묻어났던 목소리가 아주 화사하고 부드러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화했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 놓고선, 카드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렇게 순해지다니.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그럼 수잔이 곧 전해 주러 오겠네요.
“아니, 내가 가지고 있어. 수잔은 바쁘거든.”
-아아……. 수잔이 바쁘구나. 그렇구나.
노아는 마른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카드가, 사랑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살아 돌아왔다니까 보고 싶어서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럼 누가 가지고 오나요……?
“내가.”
-……와, 기뻐라! 오늘 또 데이트하겠네요.
“네가 기뻐하니까 나도 기뻐, 노아. 하지만 오늘 또 날 만나면 힘들지 않을까? 아프다면서?”
-아프니까 에드워드를 만나야죠. 얼굴 보면 싹 나을 것 같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있군. 에드워드는 삐딱하게 웃었다.
“그런데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나도 마음대로 놀고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하자고.”
-네?!
“그래. 나도 사랑해.”
에드워드는 재빠르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자신이 노아를 엿 먹인 것도, 참 치사한 행동을 했다는 것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 속이 시원한데 그깟 매너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에드워드는 콧노래를 부르며 한쪽으로 밀쳐 둔 일거리들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노아는―
“아아아악!! 이, 이 망할 자식이―!!”
길 한복판에 서서 한참을 씩씩거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