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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1화
第一章. 이우

나는 황후로 자랐다. 존귀한 태양의 옆자리가 내 자리라, 이 나라 어느 여인보다 고귀한 여인이 되리라 그리 들었다. 나는 황후로 자랐고,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존귀한 태양의 옆자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 * *

“태후마마, 황후마마 드시었습니다.”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황후, 매일 이리 늙은이를 보러 오시느라 고생이 많소.”
“어마마마, 자식이 부모를 찾아뵙는 것이 어찌 고생이겠습니까. 이리 마마를 뵙는 것이 제 낙이니 그런 말씀은 마옵소서.”
태후는 눈앞의 고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궐 안에서 이보다 더 고운 이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제각기 어여쁘다 여기는 이가 다르다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이 여인에게 눈을 빼앗기기 마련이었다.
그 미색과 배경만 하더라도 충분히 놀랍건만, 황후는 내명부를 제대로 다스리고 있었다. 핏줄이 귀해서인가 타고난 것이 우아하고, 윗사람으로 능숙하였다. 그런데 어찌 황제만이 황후를 외면하는지 태후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본인이 직접 고르고 골라 자리에 앉힌 이라 더욱 안타까웠다.
문안 인사를 마치고 황후는 처소로 돌아갔다. 본디 황제와 함께해야 하는 문안 인사였건만 황제는 그의 작은 꽃을 만난 후 그녀와 하는 모든 일을 거부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황제의 작은 꽃,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표정도 없이 평소처럼 우아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처소를 향해 걸었다.
황후, 우가 지날 때마다 궐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절로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 행색이 화려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미색이 놀라워 저들도 모르게 입을 헤 하고 벌리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우의 뒤를 따르는 궁녀들이 괜스레 우쭐해 고개를 쳐들곤 하였다.
“마마, 다음부터는 가마를 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곧 여러 비빈들께서 문안을 여쭈러 오실 터인데 이리 걸어가시면 준비 시간이 촉박할 듯합니다.”
우의 뒤를 따르던 상궁이 조심스레 말을 여쭈었다. 준비 시간이 모자란 것은 핑계일 뿐, 그저 궐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인 황후가 가마 하나 타고 다니지 않는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되었네. 궐 안에선 황제폐하가 아닌 이는 가마를 타는 것이 아니네.”
우가 고운 목소리로 단호히 대답했다. 박 상궁은 한숨이 절로 났다. 목소리마저 어여쁜 그네 주인은 참으로 고지식하였다. 황후의 집안이 귀비보다 못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비교 자체가 불가하였다. 송 귀비의 집안이라고 해 보았자 고작 주나라의 몰락한 귀족 집안일 뿐이고, 더욱이 공녀가 아니던가. 그에 반하여 황후의 집안은 기나라 건국부터 이어 오던 일등 공신 가문으로 유서 깊으며 재상이 그 아비요, 대장군이 그 오라비다. 황제의 총애가 없다 하여도 그 누구도 무시하기는커녕 떠받들어야 할 배경을 가지고도 이러는 황후가 박 상궁은 대단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였다.
“하오나 귀비께서는…….”
박 상궁이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어디 송 귀비뿐이던가? 송 귀비가 황제에게 가마를 하사받은 후, 여러 비빈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화려한 가마를 만들어 타고 다니고 있었다. 물론, 송 귀비를 제외한 비빈들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
우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작은 꽃, 송 귀비 송소화. 황제는 귀비가 작은 발로 널따란 궁을 걸어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직접 가마를 내렸다. 본래 황궁에서 황제 이외의 누군가가 가마를 타는 것은 저어되어 왔으나 황실, 혹은 귀족 가문의 누군가가 몸이 여의치 않을 때만을 예외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직접 귀비에게 가마를 하사하고 타고 다닐 것을 명하였기에 귀비는 항상 가마를 타고 궐을 누볐다.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 가마는 황제의 총애가 귀비에게 있다는 것을 확고히 느낄 수 있는 증거였다.
우는 그저 걸었다. 박 상궁 역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뒤따랐다. 어찌 알겠는가. 곁에 이리 꽃 같은 여인을 두고 그 앵앵거리기만 하는 모자란 계집이 좋다는 황제의 마음을.
우는 처소로 돌아온 후 다시 단장하였다. 여러 비빈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더욱 황후로서 몸가짐에 신경 써야 했다. 주마다 한 번씩 하는 일이니만큼 우에게도 궁녀들에게도 익숙한 일이었으나 익숙한 일임에도 역시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송 귀비가 나타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녀가 국가 간의 화친을 연유로 나타나기 전만 하여도 황제는 누구에게나 같은 태도를 보였고, 공평했다. 그러니 절로 집안이 귀하고, 품계가 높은 순서로 서열이 정해져 그럭저럭 평안한 분위기였으나 뒷배가 좋지 않으면서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송 귀비가 나타난 후 비빈들은 파벌을 이루기 시작했다. 귀비의 편에서 황제의 총애 한 자락 받아 보려 하는 이들과 뒷배가 좋지 않은 귀비를 무시하고 쫓아내려는 이들, 숨죽이며 몸을 사리는 이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황후가 있었다.
집안으로 따지나 품계로 따지나 황제의 여인들 중에서 우보다 귀한 이는 없었다. 다만 황제가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송소화, 송 귀비는 그야말로 이름같이 작고 고운 꽃 같은 여인이었다. 동그란 얼굴과 분홍빛 뺨, 그리고 웃음도 눈물도 많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여느 비빈들과 달리 몸가짐이 단정하진 않으나 아이 같은 사랑스러움에 다들 차마 그를 벌주지 못하였고, 곱고 정이 많은 마음씨로 부리는 사람들과도 격 없이 지내며 사랑받았다. 송 귀비보다 높은 이들 중 그를 벌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후, 우뿐이었다.
우는 접견실로 나섰다. 이미 열세 명의 비빈들이 품계 순서로 자리에 서 황후를 맞았다. 저마다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 화려하게 꾸몄으나 자세히 보면 옷감과 장신구에서 격차가 느껴졌는데, 그것은 집안의 재력을 나타내기도 했다. 궁 안에서는 품계 순서대로 비빈들에게 녹봉이 내려지나 본디 그걸로 만족하는 여인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들이 집안의 재물을 가져다 쓰곤 하였다.
“황후를 뵙습니다.”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우의 눈이 절로 오른편으로 향했다. 황후의 오른편 제일 상석에 송 귀비가 있었다. 분홍빛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은 송 귀비는 매우 사랑스러웠다. 이 많은 비빈들 중 그녀는 궁에서 내어 주는 녹봉만으로 지내는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대단치 못한 집안을 지닌 송 귀비를 안타깝게 여겨 그이에게 귀한 패물들을 수없이 내려 주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본디 재물이나 화려한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그 귀한 패물들은 그이의 처소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는 알지도 못하고, 그저 그 모든 것들을 준비하면서 저를 생각했을 황제를 떠올리며 설레곤 하였다. 그이가 관심 가지는 것은 꽃이나 궁궐 밖 나들이, 처소의 궁녀들이거나 혹은 황제 정도였다. 꽃같이 사랑스러운 송 귀비, 마음씨도 고운 귀비마마, 황제의 작은 꽃…… 그를 가리키는 수많은 칭찬 일색의 수식어가 떠오르자 우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가 자리에 앉아 송 귀비를 바라보았을 때, 다른 비빈들은 모두 황후를 바라보았다. 천하절색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여인들이 보기에도 우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송 귀비가 고운 것은 사실이나 황후와 함께 앉아 있는 송 귀비에게는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황후에게만 허락되는 붉은 비단에 황금으로 수놓아진 봉황 무늬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것인 양 어울렸다. 집안을 닦달해 구해 온 귀한 패물들로 장식한 그네들보다 황후에게 주어지는 봉잠 하나를 꽂은 우가 아름답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었고, 그 집안도 좋으며 아름답기까지 한 황후가 아니라 그 옆 못난 송 귀비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한다는 것은 더욱더 기분 나쁜 일이었다. 송 귀비는 잘난 집안과 미모를 가진 비빈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송 귀비 역시 흘끔 황후를 훔쳐보았다. 언제 보아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한숨이라도 내쉬면 세상 모든 이가 그 우환거리를 없애 주겠다며 달려들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송 귀비는 우가 어려웠다. 황제도 태후도 모두 그녀를 어여뻐했다. 크고 작은 실수를 하여 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아도 결국 모두 넘어가 주었다. 황제가 그러하니 여타 비빈들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고, 태후 역시 그랬다. 게다가 그 자체가 성품이 곱고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사람이라 궁 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황후만큼은 아니었다. 황제가 용서하여도, 태후가 용서하여도 황후는 귀비에게 벌을 주었다. 모든 벌이 합당한 것은 알고 있으나 묘하게 그가 어렵고 그에게는 눈치가 보였다. 워낙에 몸짓 하나하나, 말투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법도에 맞으며 엄숙한 사람인지라 괜스레 움츠리게 되는 것이다.
“날이 점점 추워집니다. 다들 건강에 신경 쓰세요. 아직 단풍이 한창이라고는 하나 겨울이 오기 전 처소를 보수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겁니다. 내 박 상궁에게 겨울을 대비하여 각 처소에 보급품과 녹봉을 내리라 하였으니 모두 확인하여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게 일러 주세요.”
“예, 마마.”
단풍이 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찾아보면 아마 궐 안 어느 한구석엔 아직 물들지 않은 푸른 잎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는 항상 조금 먼저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후의 자리는 가장 높은 여인의 자리이기는 하나 어찌 보면 가장 무거운 자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궁 안 살림을 이끌어 가는 것이 황후이다 보니 결국 그 그릇이 모자란 이는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매월 규칙적으로 주어지는 녹봉 외에도 비빈들에게는 특별한 날에 종종 추가적으로 귀한 하사품이 주어지곤 했다. 태후의 탄신일과 같은 황실의 행사를 비롯해 그 해의 농사가 풍년이었을 때가 그 특별한 날에 속했고, 비빈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녹봉과 하사품은 황후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우는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고, 비빈들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비빈들에게 품계에 맞는 녹봉뿐 아니라 하사품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항상 각 비빈들의 취향을 헤아렸다. 어리숙한 이들이야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며 마냥 좋아할 뿐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눈치가 빠른 이들은 우의 일 처리에 혀를 내둘렀다. 우는 누구 하나 토를 달거나 불만을 제기할 수 없게끔 공평하고 깔끔하게 황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혜비.”
우가 송 귀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혜비, 최이란을 바라보았다. 은사로 꽃을 수놓은 자주색 치마와 남색 저고리를 입은 그녀는 여러 비빈들 중 가장 화려했다. 짙고 붉은 입술과 시원하게 긴 눈매가 묘하게 휘어지며 우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예, 황후마마.”
“내 혜비의 다리가 편치 않다 들었습니다. 태의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비빈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황후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저 콧대 높은 혜비가 송 귀비에게 지기 싫어 멀쩡한 다리를 아프다고 하며 가마를 타고 다닌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 말을 건네는 황후나 당황하지 않고 계속 미소 짓고 있는 혜비나 그네들이 보기엔 똑같이 대하기 어렵고 힘든 인물이었다. 게다가 비빈 대부분이 가마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대표로 그중 가장 품계가 높은 혜비에게 화살이 꽂힌 것이었기에 다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황후는 모두에게 말하고 있었다. 다들 가마 사용을 중지하라고 말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우가 말하는 바를 알고 있었고, 태연하려 노력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사가에서 보내 준 의원이 있나이다. 소첩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의원이니 그이로도 충분하다고 사료됩니다. 마마의 성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까? 허나 벌써 의원이 다녀간 지 수십 일이 지났고, 나아지는 바가 없어 보입니다. 혜비의 사가에서 보내 준 의원이니 부족할 리 없을 테지만 내 마음을 보아서라도 태의에게 진찰을 받으세요.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폐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비빈들이 편치 않다면 다 이 못난 사람의 책임이지요.”
혜비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저리 나온다면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태의는 진료하자마자 멀쩡타 할 것이고, 혜비는 황후에게 거짓을 고하고, 궁 안의 법도를 어지럽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혜비는 물러서고야 말았다.
“황후마마, 사가에서 온 의원이 진료하기를 며칠만 쉰다면 걷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하였답니다. 다음 문안 인사 때는 소첩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하오나, 황후마마. 이는 불공평한 처사이옵니다. 황후마마께옵서는 그 귀하신 걸음을 몸소 옮기시는데 귀비마마께서는 가마를 타고 다닌다니요?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귀비마마께서 황후마마를 내려다보는 일이 생길까 저어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