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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한동안 궁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후가 드디어 폐위될 것이며, 송 귀비가 회임을 했다는 것이 주된 소문의 내용이었다. 우가 한 달이 넘도록 여러 비빈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지 않는 것도 소문을 더욱 들끓게 하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전날 가마의 일로 황제를 알현한 우의 일이 소문이 난 것이었다. 민가의 평범한 내자도 아닌 황후가 그런 일을 당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소문이 날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귀비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변함이 없어서 그이가 회임이라도 한다면 황후에 오를 거라 말이 많았다.
공식적인 비빈들의 문안 인사를 거절한 우의 처소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나마 혜비가 그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알현을 청하고 있었다.
우는 되도록 아무도 만나지 않고 처소에 칩거하여 모든 것과 저를 차단하고 있었다. 너무 치쳐서 쉬고 싶었다. 예법 따위, 황제 따위, 귀비 따위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다.
박 상궁은 그런 우를 말리지 못하였고, 황제는 그런 우에게 일말의 동정과 관심도 없었다. 태후는 모든 일의 방관자였으나, 그저 간혹 서찰을 보내 조금이나마 우를 위로하려 하였다.
우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다. 몸에서 받지 않는지 속을 게우기 일쑤였고, 잠이 들었다가도 금방 다시 깨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허다했다. 마음의 병이 깊어서인가, 몸은 하루가 다르게 점차 약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는 꾸역꾸역 음식을 먹고, 일을 처리했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쉬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제 역할을 놓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박 상궁, 내 어찌해야 하겠나?”
“마마.”
잠자리에 누운 우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함축한 그 말에 상궁이 뭐라 답할 길이 없어 애꿎은 치맛자락만 붙들었다.
“되었네, 나가 보게.”
차마 박 상궁이 뭐라 위로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조용히 울었다. 황제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했다. 설사 그가 원한다면 어떤 악역이라도 맡을 수 있건만, 그는 제 모든 것을 거부했다. 모든 것을 바쳤으나,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그 잔인한 현실이 견딜 수 없이 슬퍼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무엇을 위해 이리 노력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게 주어진 이 자리, 허울뿐인 자리가 무엇이라고 이리 노력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에 우가 울었다.
우가 칩거를 멈춘 것은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였다. 그 메마른 얼굴과 한층 가늘어진 몸 때문에 말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궐은 항상 새로운 소문과 말들로 끊임없었다.
우가 칩거를 멈추고 가장 바빠진 것은 박 상궁이었다. 한층 더 쇠약해진 우가 전처럼 모든 일을 소화하기 시작하자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박 상궁은 태의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온갖 약재를 받아다가 약을 고아 먹이기 바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가 제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박 상궁이 가져다주는 것을 별말 하지 않고 항상 다 받아 주는 것이었다.
* * *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모든 비빈들이 우에게 절을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우는 그네들의 눈에도 병약해 보였다. 우습게도 평상시 한 치의 틈도 없었던 이는 그런 모습조차도 아름다워 다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연약한 여인의 표상 같은 모습이었다.
겉치레뿐인 인사가 오갔다. 별다를 것 없는 문안 인사였다. 송소화는 여러 비빈들 사이에서 조용히 침묵한 채 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좇아가느라 정신없었던 이는 조용히 우를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 시선을 알고 있음에도 우는 그저 태연히 여러 비빈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나저나 귀비마마, 마마께서 전날 황후마마와 담소를 나누고 난 뒤, 황후마마께서 크게 앓으셨다 하던데 그게 참말인가요?”
혜비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일을 대놓고 꺼낸 혜비는 태연히 긴 눈매에 미소를 걸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송 귀비는 당황하였고, 다른 비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아, 그……. 예, 그랬지요.”
송 귀비가 더듬더듬 대답하였다. 우를 바라보느라 넋을 놓고 있기도 하였고,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 어리숙한 대답에 바짝 얼어 있던 몇몇 비빈들이 그만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귀비마마께서 무엇을 하였기에 정정하시던 황후마마께서 그리 호되게 앓으셨는지 소첩 매우 궁금해서 말입니다.”
혜비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송 귀비를 바라보았다. 반달같이 휘어지는 눈과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입을 살짝 가린 자태가 묘하게 눈길을 잡아끌었다. 송 귀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혜비가 송 귀비를 싫어하는 것이야 물론 다들 잘 아는 바였지만 그렇다 하여 혜비가 황후의 편에 서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혜비가 황후의 편에 선 것인지, 아니면 송 귀비와 황후 모두를 깎아내리기 위함인지 모두가 단정 짓지 못했다.
“그게 제가, 아니 내…….”
“그만.”
송 귀비가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려는 순간이었다. 우가 입을 열었고,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오랜만의 자리에 분위기가 엉망이지 않습니까. 혜비의 걱정은 고맙게 받겠으나 애꿎은 이는 잡지 마세요. 처소의 꽃이 고와 나를 위해 가져다준 정성이 갸륵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알았다. 우의 말이 거짓인 것을. 그렇다 하여 그것을 거짓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우가 그렇다 하고, 송 귀비가 그렇다 한다면 그것은 없던 일이어도 진실이 될 터였다.
“그렇습니까? 소첩은 또 어느 미련한 이가 황후마마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한 줄 알았지 뭡니까.”
혜비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우를 향한 대답이었으나 그 눈만은 송 귀비를 향하고 있었다. 그 미소에 가려진 적대감이 피부를 찌르는 듯 따가워 송 귀비는 그만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리고 송 귀비는 알았다. 매번 이래 왔다는 것을.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조차 늘 황후의 아래에 있었다. 기억조차 다 할 수 없을 만큼 보호받아 왔었다. 그이는 어쩌면 황제인 희윤보다 저를 더 감싸 안아 준 것은 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혜비.”
우가 나직하게 혜비를 불렀다. 경고였다. 그를 알아들은 혜비가 눈짓으로 우에게 답한 뒤 조용히 차를 입에 머금었다.
“차향이 아주 좋습니다.”
태연한 그 말에 여러 비빈이 혀를 내둘렀다. 혜비는 제가 던진 가벼운 말조차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는 송 귀비가 우스워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귀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자격 없는 이가 황제의 애정으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니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혜비는 송 귀비에게 친절히 가르침을 내려 줄 생각으로 기분이 고조되었다. 한번 느껴 보라지, 제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혜비는 앞으로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의 품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송 귀비를.
문안 인사는 다행히 우로 인해 잘 마무리되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의 속내는 비록 평화롭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평안하게 마무리가 된 것이다. 우는 지친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혜비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친우인 것처럼 살갑다가도, 정적을 대하듯 살벌하게 굴기 일쑤였다.
송 귀비는 그런 혜비에게 항상 당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저는 그런 송 귀비를 위한 방패막이가 되곤 하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연인을 위해 방패막이 노릇이나 하고 있는 현실이, 그리고 제 꼴이 우스웠다. 우는 그렇게 한참을 식은 차를 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 * *
“귀비마마.”
“아, 혜비.”
모두가 돌아가는 길에 멈추어 서서 혜비와 송 귀비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체구를 가진 둘이었으나 그 분위기와 모양새는 아주 달랐다. 연노란색의 옷을 입은 송 귀비는 어여쁜 소녀였고, 진한 청보라 비단을 두른 혜비는 그 묘한 색기가 남다른 여인이었다.
“오늘은 어찌 가마를 아니 타고 오셨는지요?”
빙그레 웃는 그 얼굴이 압박하고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송 귀비는 한 발 물러섰다. 송 귀비의 상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인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궁궐의 법도에 아직 미숙하여 가마를 이용하였지만, 앞으로는 그리하지 않을 겁니다.”
송 귀비는 앞에 선 혜비가 두려웠으나 그것을 이겨 내고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저 나름대로는 용기를 낸 것이었으나, 혜비에겐 통하지 않았다. 혜비는 송 귀비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크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그 압도적인 소리에 놀라 여러 비빈들이 입을 벌렸다. 송 귀비는 그 매서움에 놀라 휘청거렸고, 그녀의 상궁은 뺨을 부여잡았다.
“네 주인 모시기를 이같이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혜비가 나직하게 읊조리듯 말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한 이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저에게도 화가 미칠까 싶어 조심스러웠으나 차마 그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혜비마마, 어찌하여……?”
철썩철썩. 뺨을 부여잡은 상궁이 입을 열자마자 반대쪽 뺨으로 혜비의 손이 날아들었다. 송 귀비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얼이 빠져 무어라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황후마마께옵서 네 주인에게 일렀다 하셨다. 헌데 귀비마마께서 예법을 몰랐다 하시지 않느냐. 궐 안에서 평생을 산 상궁이 주인을 업신여기지 않고서야 어찌 보필을 이따위로 하느냐? 왜 너 역시 가마 타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몰랐다고 하고 싶으냐?”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른 상궁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황후가 직접 일렀다 하였으니 이제 와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혜비, 어찌 이러세요? 그만하세요. 저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송 귀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혜비에게 매달렸다. 혜비는 그를 냉정하게 물리치고는 송 귀비의 궁녀들에게 그녀를 부축하라 일렀다. 궁녀들은 충실히 송 귀비를 부축하여 혜비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귀비마마께서 이리 무르시니 아랫것들이 저리 방자하게 행동하지요. 소첩이 알아서 할 테니 마음 놓으세요.”
해사하게 웃는 그 얼굴에 결국 송 귀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궁녀들은 제 주인을 부축하며 위로하였다. 그네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혜비를 말려 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송 귀비와 혜비보다 지위가 낮은 이들이었고, 그렇다 하여 송 귀비나 혜비의 허락 없이 황후인 우에게 이를 전할 수도 없었다. 설사 송 귀비가 우에게 전하라 명한다 하여도 윗사람인 송 귀비가 혜비를 다스리지 못함은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되기에 그이의 궁녀들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저들에게 명을 내려 줄 상궁은 혜비에게 혼쭐나는 중이었고, 송 귀비는 그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궁녀들은 그저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송 귀비를 부축할 따름이었다. 송 귀비는 계속해서 눈물 흘리며 혜비에게 애원하였으나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모시는 주인이 모르고 있다면 네가 알려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귀비마마는 주나라에서 오셨으니 모를 수도 있고 잊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궐에서 평생을 보낸 상궁이 궐의 법도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으니 필시 이는 귀비마마를 업신여긴 것이 분명하다. 주인을 기만하면 어찌 되는지 내 본을 보여 주겠다.”
상궁이 용서를 빌었다. 너무 안일했던 것이다. 황제의 총애와 황후의 용납,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혜비는 회초리를 가져오라 명하였고, 신이 난 혜비전의 어린 궁녀 하나가 회초리를 품에 가득 안고 돌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입을 놀려야 할 때와 놀리지 못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는 궐에 있을 필요가 없지. 이번 한 번만 내 귀비마마의 체면을 보아 회초리로 넘어가겠다.”
“감사합니다, 혜비마마.”
혜비의 눈짓에 혜비 처소의 상궁이 앞으로 나서 바닥에 앉아 회초리를 들었다. 처소도 아닌 길에서 귀비의 상궁이 혜비의 상궁에게 회초리를 맞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회초리 소리도 무서웠으나 더욱 무서운 것은 혜비였다. 혜비는 그렇게 송 귀비의 체면을 깎은 것도 모자라 바닥에 놓고 질끈질끈 밟고 있었다.
있는 힘껏 내리치는 바람에 회초리가 하나씩 부러져 나갔다.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부러졌을 때, 그녀가 만족한 듯 말하였다.
“또 입을 놀려라. 귀비마마를 잘 모시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보거라. 너를 궐에서 내쫓는 거 따위는 일도 아니다. 내 말 알아들었느냐?”
“예, 혜비마마.”
상궁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였다. 바닥엔 핏방울이 튀어 있었고 그 뺨에는 선명하게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이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그 엉망이 된 모습에 만족한 것인지 혜비가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송 귀비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 더 이상은 마마를 이리 허투루 모시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그런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럼 이만 소첩은 물러가겠습니다.”
혜비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는 돌아섰고, 그가 돌아서자마자 송 귀비의 상궁이 쓰러졌다. 그 모습에 놀란 송 귀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구경하던 비빈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각기 제 처소로 향하였다.
우가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제 처소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결국 제 처소 앞이었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 우는 박 상궁을 시켜 심신 안정에 좋은 약과 흉에 좋은 연고를 준비하여 귀비전에 전하도록 하였다.
우는 혜비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뒷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송 귀비를 그리 잡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궁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후가 드디어 폐위될 것이며, 송 귀비가 회임을 했다는 것이 주된 소문의 내용이었다. 우가 한 달이 넘도록 여러 비빈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지 않는 것도 소문을 더욱 들끓게 하였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전날 가마의 일로 황제를 알현한 우의 일이 소문이 난 것이었다. 민가의 평범한 내자도 아닌 황후가 그런 일을 당하였으니 당연히 그런 소문이 날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귀비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변함이 없어서 그이가 회임이라도 한다면 황후에 오를 거라 말이 많았다.
공식적인 비빈들의 문안 인사를 거절한 우의 처소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나마 혜비가 그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알현을 청하고 있었다.
우는 되도록 아무도 만나지 않고 처소에 칩거하여 모든 것과 저를 차단하고 있었다. 너무 치쳐서 쉬고 싶었다. 예법 따위, 황제 따위, 귀비 따위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다.
박 상궁은 그런 우를 말리지 못하였고, 황제는 그런 우에게 일말의 동정과 관심도 없었다. 태후는 모든 일의 방관자였으나, 그저 간혹 서찰을 보내 조금이나마 우를 위로하려 하였다.
우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다. 몸에서 받지 않는지 속을 게우기 일쑤였고, 잠이 들었다가도 금방 다시 깨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허다했다. 마음의 병이 깊어서인가, 몸은 하루가 다르게 점차 약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는 꾸역꾸역 음식을 먹고, 일을 처리했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쉬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제 역할을 놓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박 상궁, 내 어찌해야 하겠나?”
“마마.”
잠자리에 누운 우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함축한 그 말에 상궁이 뭐라 답할 길이 없어 애꿎은 치맛자락만 붙들었다.
“되었네, 나가 보게.”
차마 박 상궁이 뭐라 위로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조용히 울었다. 황제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했다. 설사 그가 원한다면 어떤 악역이라도 맡을 수 있건만, 그는 제 모든 것을 거부했다. 모든 것을 바쳤으나,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그 잔인한 현실이 견딜 수 없이 슬퍼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무엇을 위해 이리 노력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게 주어진 이 자리, 허울뿐인 자리가 무엇이라고 이리 노력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에 우가 울었다.
우가 칩거를 멈춘 것은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였다. 그 메마른 얼굴과 한층 가늘어진 몸 때문에 말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궐은 항상 새로운 소문과 말들로 끊임없었다.
우가 칩거를 멈추고 가장 바빠진 것은 박 상궁이었다. 한층 더 쇠약해진 우가 전처럼 모든 일을 소화하기 시작하자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박 상궁은 태의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온갖 약재를 받아다가 약을 고아 먹이기 바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가 제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박 상궁이 가져다주는 것을 별말 하지 않고 항상 다 받아 주는 것이었다.
* * *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모든 비빈들이 우에게 절을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우는 그네들의 눈에도 병약해 보였다. 우습게도 평상시 한 치의 틈도 없었던 이는 그런 모습조차도 아름다워 다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연약한 여인의 표상 같은 모습이었다.
겉치레뿐인 인사가 오갔다. 별다를 것 없는 문안 인사였다. 송소화는 여러 비빈들 사이에서 조용히 침묵한 채 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좇아가느라 정신없었던 이는 조용히 우를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 시선을 알고 있음에도 우는 그저 태연히 여러 비빈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나저나 귀비마마, 마마께서 전날 황후마마와 담소를 나누고 난 뒤, 황후마마께서 크게 앓으셨다 하던데 그게 참말인가요?”
혜비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일을 대놓고 꺼낸 혜비는 태연히 긴 눈매에 미소를 걸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송 귀비는 당황하였고, 다른 비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아, 그……. 예, 그랬지요.”
송 귀비가 더듬더듬 대답하였다. 우를 바라보느라 넋을 놓고 있기도 하였고,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 어리숙한 대답에 바짝 얼어 있던 몇몇 비빈들이 그만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귀비마마께서 무엇을 하였기에 정정하시던 황후마마께서 그리 호되게 앓으셨는지 소첩 매우 궁금해서 말입니다.”
혜비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송 귀비를 바라보았다. 반달같이 휘어지는 눈과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입을 살짝 가린 자태가 묘하게 눈길을 잡아끌었다. 송 귀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혜비가 송 귀비를 싫어하는 것이야 물론 다들 잘 아는 바였지만 그렇다 하여 혜비가 황후의 편에 서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혜비가 황후의 편에 선 것인지, 아니면 송 귀비와 황후 모두를 깎아내리기 위함인지 모두가 단정 짓지 못했다.
“그게 제가, 아니 내…….”
“그만.”
송 귀비가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려는 순간이었다. 우가 입을 열었고,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오랜만의 자리에 분위기가 엉망이지 않습니까. 혜비의 걱정은 고맙게 받겠으나 애꿎은 이는 잡지 마세요. 처소의 꽃이 고와 나를 위해 가져다준 정성이 갸륵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알았다. 우의 말이 거짓인 것을. 그렇다 하여 그것을 거짓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우가 그렇다 하고, 송 귀비가 그렇다 한다면 그것은 없던 일이어도 진실이 될 터였다.
“그렇습니까? 소첩은 또 어느 미련한 이가 황후마마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한 줄 알았지 뭡니까.”
혜비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우를 향한 대답이었으나 그 눈만은 송 귀비를 향하고 있었다. 그 미소에 가려진 적대감이 피부를 찌르는 듯 따가워 송 귀비는 그만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리고 송 귀비는 알았다. 매번 이래 왔다는 것을.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조차 늘 황후의 아래에 있었다. 기억조차 다 할 수 없을 만큼 보호받아 왔었다. 그이는 어쩌면 황제인 희윤보다 저를 더 감싸 안아 준 것은 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혜비.”
우가 나직하게 혜비를 불렀다. 경고였다. 그를 알아들은 혜비가 눈짓으로 우에게 답한 뒤 조용히 차를 입에 머금었다.
“차향이 아주 좋습니다.”
태연한 그 말에 여러 비빈이 혀를 내둘렀다. 혜비는 제가 던진 가벼운 말조차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는 송 귀비가 우스워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귀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자격 없는 이가 황제의 애정으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니 책임져야 하지 않겠는가. 혜비는 송 귀비에게 친절히 가르침을 내려 줄 생각으로 기분이 고조되었다. 한번 느껴 보라지, 제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혜비는 앞으로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의 품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송 귀비를.
문안 인사는 다행히 우로 인해 잘 마무리되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의 속내는 비록 평화롭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평안하게 마무리가 된 것이다. 우는 지친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혜비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친우인 것처럼 살갑다가도, 정적을 대하듯 살벌하게 굴기 일쑤였다.
송 귀비는 그런 혜비에게 항상 당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저는 그런 송 귀비를 위한 방패막이가 되곤 하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연인을 위해 방패막이 노릇이나 하고 있는 현실이, 그리고 제 꼴이 우스웠다. 우는 그렇게 한참을 식은 차를 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 * *
“귀비마마.”
“아, 혜비.”
모두가 돌아가는 길에 멈추어 서서 혜비와 송 귀비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체구를 가진 둘이었으나 그 분위기와 모양새는 아주 달랐다. 연노란색의 옷을 입은 송 귀비는 어여쁜 소녀였고, 진한 청보라 비단을 두른 혜비는 그 묘한 색기가 남다른 여인이었다.
“오늘은 어찌 가마를 아니 타고 오셨는지요?”
빙그레 웃는 그 얼굴이 압박하고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송 귀비는 한 발 물러섰다. 송 귀비의 상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인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궁궐의 법도에 아직 미숙하여 가마를 이용하였지만, 앞으로는 그리하지 않을 겁니다.”
송 귀비는 앞에 선 혜비가 두려웠으나 그것을 이겨 내고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저 나름대로는 용기를 낸 것이었으나, 혜비에겐 통하지 않았다. 혜비는 송 귀비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크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그 압도적인 소리에 놀라 여러 비빈들이 입을 벌렸다. 송 귀비는 그 매서움에 놀라 휘청거렸고, 그녀의 상궁은 뺨을 부여잡았다.
“네 주인 모시기를 이같이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혜비가 나직하게 읊조리듯 말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한 이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저에게도 화가 미칠까 싶어 조심스러웠으나 차마 그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혜비마마, 어찌하여……?”
철썩철썩. 뺨을 부여잡은 상궁이 입을 열자마자 반대쪽 뺨으로 혜비의 손이 날아들었다. 송 귀비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얼이 빠져 무어라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황후마마께옵서 네 주인에게 일렀다 하셨다. 헌데 귀비마마께서 예법을 몰랐다 하시지 않느냐. 궐 안에서 평생을 산 상궁이 주인을 업신여기지 않고서야 어찌 보필을 이따위로 하느냐? 왜 너 역시 가마 타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몰랐다고 하고 싶으냐?”
얼굴이 빨갛게 부어오른 상궁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황후가 직접 일렀다 하였으니 이제 와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혜비, 어찌 이러세요? 그만하세요. 저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송 귀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혜비에게 매달렸다. 혜비는 그를 냉정하게 물리치고는 송 귀비의 궁녀들에게 그녀를 부축하라 일렀다. 궁녀들은 충실히 송 귀비를 부축하여 혜비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귀비마마께서 이리 무르시니 아랫것들이 저리 방자하게 행동하지요. 소첩이 알아서 할 테니 마음 놓으세요.”
해사하게 웃는 그 얼굴에 결국 송 귀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궁녀들은 제 주인을 부축하며 위로하였다. 그네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혜비를 말려 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송 귀비와 혜비보다 지위가 낮은 이들이었고, 그렇다 하여 송 귀비나 혜비의 허락 없이 황후인 우에게 이를 전할 수도 없었다. 설사 송 귀비가 우에게 전하라 명한다 하여도 윗사람인 송 귀비가 혜비를 다스리지 못함은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되기에 그이의 궁녀들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저들에게 명을 내려 줄 상궁은 혜비에게 혼쭐나는 중이었고, 송 귀비는 그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궁녀들은 그저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송 귀비를 부축할 따름이었다. 송 귀비는 계속해서 눈물 흘리며 혜비에게 애원하였으나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모시는 주인이 모르고 있다면 네가 알려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귀비마마는 주나라에서 오셨으니 모를 수도 있고 잊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궐에서 평생을 보낸 상궁이 궐의 법도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으니 필시 이는 귀비마마를 업신여긴 것이 분명하다. 주인을 기만하면 어찌 되는지 내 본을 보여 주겠다.”
상궁이 용서를 빌었다. 너무 안일했던 것이다. 황제의 총애와 황후의 용납,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혜비는 회초리를 가져오라 명하였고, 신이 난 혜비전의 어린 궁녀 하나가 회초리를 품에 가득 안고 돌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입을 놀려야 할 때와 놀리지 못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는 궐에 있을 필요가 없지. 이번 한 번만 내 귀비마마의 체면을 보아 회초리로 넘어가겠다.”
“감사합니다, 혜비마마.”
혜비의 눈짓에 혜비 처소의 상궁이 앞으로 나서 바닥에 앉아 회초리를 들었다. 처소도 아닌 길에서 귀비의 상궁이 혜비의 상궁에게 회초리를 맞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회초리 소리도 무서웠으나 더욱 무서운 것은 혜비였다. 혜비는 그렇게 송 귀비의 체면을 깎은 것도 모자라 바닥에 놓고 질끈질끈 밟고 있었다.
있는 힘껏 내리치는 바람에 회초리가 하나씩 부러져 나갔다. 결국 하나도 남김없이 부러졌을 때, 그녀가 만족한 듯 말하였다.
“또 입을 놀려라. 귀비마마를 잘 모시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보거라. 너를 궐에서 내쫓는 거 따위는 일도 아니다. 내 말 알아들었느냐?”
“예, 혜비마마.”
상궁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였다. 바닥엔 핏방울이 튀어 있었고 그 뺨에는 선명하게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이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그 엉망이 된 모습에 만족한 것인지 혜비가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송 귀비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 더 이상은 마마를 이리 허투루 모시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그런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럼 이만 소첩은 물러가겠습니다.”
혜비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는 돌아섰고, 그가 돌아서자마자 송 귀비의 상궁이 쓰러졌다. 그 모습에 놀란 송 귀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구경하던 비빈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각기 제 처소로 향하였다.
우가 그 일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제 처소 밖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나 결국 제 처소 앞이었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미 벌어진 일, 우는 박 상궁을 시켜 심신 안정에 좋은 약과 흉에 좋은 연고를 준비하여 귀비전에 전하도록 하였다.
우는 혜비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뒷일을 어찌 감당하려고 송 귀비를 그리 잡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