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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다
<1화>
시작하는 글


비 올 거라던 기상예보가 엇나갔다. 눈이 온다. 눈과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조합은 운전자의 인내심을 테스트한다. 이런 날 굳이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기에는 솔직히 귀찮았다. 취소를 해도 무례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거리를 내다보던 진혁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안 받는다.
한동안 설계 도면을 붙잡고 있다 창밖을 확인하자 그새 눈이 쌓여 있었다.
“안 그치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길게 울리던 발신음이 자동 응답기로 넘어갔다.
예상보다 더 혼잡한 도로에 승용차들이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자 핸들을 두드리는 진혁의 손가락에서 옅은 짜증이 묻어났다.
주차를 하고서도 잠시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다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운전석을 벗어났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진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영주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차 많이 막히죠? 전 지하철 타고 왔어요. 이런 날에는 지하철이 확실히 편해요.”
터틀넥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건넨 영주가 물었다.
“오기 전에 친구랑 잠시 만났거든요. 휴대폰 진동 모드로 돌려놓고 핸드백에 넣어 두는 바람에 전화 온 거 미처 확인 못 했어요. 할 얘기 있었어요?”
“오늘 약속 취소가 용건이었죠.”
“급한 일 생겼어요?”
“도로 상태가 저 지경이라 다른 날 만나는 게 합리적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살짝 얼굴을 굳힌 영주가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실은 부재중 통화 목록에 뜬 진혁의 번호를 확인했지만 모른 척 덮었다. 왠지 약속을 미루는 게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어서.
“겨우 그런 이유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절 바람맞히려고 했단 말이에요? 나 여기 예약하느라 정말 힘들었다고요. 셰프 요리 맛보고 나면 아까 통화 안 됐던 게 오히려 고마울걸요.”
“그래요?”
진혁은 메뉴판을 짚어 가며 요리를 추천해 주는 영주를 관찰했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처럼 오늘도 세련된 차림새였다. 패션 감각만큼이나 센스도 있고 성격도 모나지 않다. 흔히 말하는 스펙 역시 빠지지 않고. 대학 은사의 말에 의하면 어느 자리에서도 칭찬 들을 만한 신붓감이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드물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다 보니 사내 연애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선이든 소개팅이든 누군가의 소개를 통하지 않으면 만남 자체가 힘들었다. 운명적인 만남을 꿈꿀 만큼 어린 나이도, 그런 성격도 아니라 이런 인위적인 만남에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어떤 형태로 만나든 어차피 연애라는 건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늘 같은 패턴으로 흘러가니까. 연애 상대가 누가 되든 비슷한 과정을 거치다 결국엔 지루해진다. 지루해질 연애를 그럼에도 해 보려는 건 결혼과 아이를 그의 인생에서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좀 쌓이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만나는 일이 귀찮아지는 사람과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라…….’
하지만 다른 여자를 사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았다. 일정 온도 이상으로는 끓어오르지 않는 자신은 어쩌면 적당한 사람과 적당한 연애를 하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진혁은 명치를 짓누르는 답답함을 풀어 보려는 듯 숨을 들이켰다.
연인들을 위해 한껏 꾸며 놓은 달달한 장식과 음악으로 가득 찬 공간을 벗어나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발레파킹 직원이 승용차를 가져오길 기다리며 담배를 꺼내던 진혁은 갑작스러운 웅성거림에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 건너 영화관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무심히 쳐다보던 진혁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사람들과 좀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여자.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혼자 왔는지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 보다 코트에 달린 후드를 둘러쓰고는 총총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너갔다.
“뭘 보고 있어요?”
진혁의 관심을 끄는 게 뭔가 싶어 눈길이 향한 곳을 찾던 영주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엔 뭐든 혼자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지만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가, 유독 신기해 보이네요.”
진혁의 입술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연인의 날이라고 칭해지는 오늘 같은 날 솜사탕만큼이나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혼자 보러 가는 여자를 알고 있다. 그 여자에게 스치듯 처음 시선이 간 곳이 영화관이었다.
그날, 비가 왔었지. 아마도.



‘사귀다 1’
서로 엇걸리어 지나가다
1


민정이 눈을 흘겼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건데 좀 신나 해 주면 안 돼? 귀찮은데 억지로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러고는 작게 덧붙였다.
“자존심 상하게.”
“귀찮은 게 아니라 피곤한 거야.”
대꾸하는 진혁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짜증이 묻어났다. 나 만나는 건 피곤하고 야구하는 건 안 피곤해? 민정은 혀끝까지 올라온 불평을 힘겹게 삼켰다. 작업량 많기로 소문난 건축과라 밤새는 일이 잦다는 걸 알고 있다. 공모전 준비 중이라 평소보다 더 정신없다는 것도. 피곤하다는 말이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서운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밸런타인데이인데. 이벤트를 준비하기는커녕 전화하기 전까지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면서. 입 안에서 맴도는 불만을 억지로 넘겼지만 그래도 마음 상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민정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진혁은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대로 눈 좀 붙였으면 싶게 노곤했다.
극장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 소리에 얼핏 선잠이 들었던 진혁의 어깨가 움찔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프러포즈 장면에 부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민정이 속닥였다.
“프러포즈는 저렇게 무릎 꿇고 반지 주면서 정석으로 하는 게 젤 멋진 거 같아.”
진혁은 별다른 대꾸 없이 저려 오는 다리를 쭉 펴고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숫자가 20분만 견디면 된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영화관에 들어설 때보다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핸드백에 빗방울이 묻을세라 어깨를 움츠리던 민정이 진혁의 팔을 흔들었다.
“오빠, 저 여자 좀 봐 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우산을 펼쳐 드는 여자는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이지만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진혁은 이어지는 민정의 말에 다시금 여자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우리랑 같은 영화 봤거든. 근데 혼자 온 거 있지? 오늘 같은 날, 이런 영화를 보러.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난 혼자서는 영화관에 못 오겠던데.”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진혁이 중얼거렸다.
“넌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잖아.”
틀린 말도 아니었고, 민정의 단점 중 진혁을 가장 피곤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오늘처럼 피곤이 뇌를 잠식한 상태가 아니라면 하지 않았을 거다.
“왜 말을 그렇게 해? 나는 뭐든 오빠랑 같이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나 때문에 귀찮아? 내가 귀찮게 해?”
“가끔은.”
대충 얼버무리는 대신 굳이 솔직하게 대답한 이유는 피곤함을 탓할 수만은 없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민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 친구가 하는 행동들이 가끔은 귀찮다는 남자에게 방금 한 말을 따지고 드는 것 역시 귀찮아할 행동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요즘 들어 거리가 느껴지는 진혁의 태도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둔하지도 않고. 그래서 민정은 말꼬리를 잡는 대신 팔짱을 끼며 눈웃음 지었다.
“근데, 우리 뭐 먹지? 파스타 먹을까?”
영화를 봤으니 레스토랑이다. 마치 연인들이 따라야만 하는 데이트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영화관, 레스토랑, 카페를 순회한다. 진혁의 얼굴에 피곤함이 더해졌다.

❀❀❀

햇살을 받은 벚꽃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통통했다. 무감한 사람조차도 조금은 들뜨게 만드는 봄이다. 볕이 잘 드는 건축과 대학원 작업실은 봄에 물든 캠퍼스와는 무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가로등을 도로가에 고정한 정훈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뒷목을 툭툭 두드렸다. 몇 시간째 모형을 붙들고 있었더니 눈이 시려 왔다.
“좀 쉬자. 출출한데 밥도 먹고. 나 공모전 끝나면 앓아누울 것 같다야.”
아크릴의 단면에 사포질을 마무리한 진혁이 바람막이 점퍼를 챙겼다.
“자전거 타고 가자.”
진혁의 말에 정훈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힘 없어. 수면 부족이라 다리 풀렸단 말이야.”
“대신 메뉴는 너 좋아하는 연탄 돼지갈비.”
“……콜.”
배고프고 기운 없다더니, 봄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이 썩 괜찮았는지 돌아가는 길을 택했는데도 정훈은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점심시간을 넘겨서인지 식당은 빈자리가 더 많았다. 단일 메뉴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반찬들이 나왔고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 위에 석쇠가 놓였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진혁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창가에 앉은 여자. 여자는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이니 밥 먹는 거야 당연하지만, 여자는 혼자였다. 고깃집에서 홀로 밥 먹는 여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흥미롭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진혁이 중얼거렸다.
“귀엽네.”
젓가락으로 콩나물 무침을 한 움큼 집던 정훈이 진혁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네. 귀엽게 생겼다.”
귀엽다는 뜻을 오해한 정훈이 맞장구를 치다 새삼 깨달은 듯 소란을 떨었다.
“일행이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했는데, 혼자잖아! 우와, 혼자서 고기 구워 먹는 여자 처음 본다. 고기 사랑하는 나도 그건 힘들던데. 인정.”
그게 뭐라고 엄지까지 척 치켜세우던 정훈은 처음 보는 광경보다는 위를 채우는 일이 더 급한지 석쇠 위에 놓인 고기를 뒤집는 데 열중했다.
깔끔한 얼굴선을 가진 여자를 쳐다보며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사람인데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마주쳤던 거 같은데, 어디지. 타인의 얼굴을, 그것도 지극히 사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밥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무례한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디서 봤지?”
고기를 뒤집던 정훈이 힐끔 돌아보았다.
“저 여자애?”
“분명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안 떠오르는 거 뭘 애쓰고 그래. 어쨌든 혼자 고깃집에 오는 거 보니까 혼자서 영화관이나 여행 가는 거쯤은 일도 아니겠다 싶긴 하다.”
“아.”
영화관이었다.
“영화도 혼자서 잘 보긴 하더라.”
정훈의 눈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 어떻게 마주친 사인데?”
“마주쳤다기보다는 밸런타인데이에 영화관 갔다가 혼자 왔길래 눈에 띄었어.”
어지간히 놀란 정훈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밸런타인데이에 홀로 영화 보러 가는 여자의 심리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그런 거에 아예 무심한 성격인가, 아니면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자학하듯이 일부러 그런 날을 고른 건가? 어쨌든 여기서 밥 먹는 거 보니까 우리 학교 다니거나 이 근처 사는 것 같은데. 보기와는 달리 성격이 좀 특이한가 보다.”
청바지와 후드 티 차림의 얼핏 평범한 여자의 외양을 보며 중얼거리던 정훈이 슬쩍 덧붙였다.
“그런데 너 민정 씨 계속 만나는 거야? 좀 안 맞는다고 하더니.”
“생각 중.”
무슨 생각 중이냐고 조금 더 물어볼까 하던 정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기를 뒤집었다. 어쨌든 아직은 진행 중이라는 말이니 진혁을 소개해 달라고 끈덕지게 졸라 대는 동아리 후배 녀석에게는 위로의 학식이나 한번 쏴야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