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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학생 식당을 나오던 재희는 움찔 놀랐다. 누가 분무기로 장난이라도 치듯 얼굴에 물방울이 부서졌다. 고개를 들자 온통 파랗다. 말끔한 하늘에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해가 떠 있는데 비라니.
“반칙 아냐?”
손을 내밀자 안개 같은 물방울 몇 개가 손바닥을 간질이고는 증발해 버렸다. 이런 비를 뭐라고 하더라.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데, 비라고 불러도 되나.
“날씨 묘하네.”
기차 타고 강원도로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 기분을 다잡고 작업실을 향해 몇 걸음 걷다가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방향을 틀었다.
딱. 딱. 야구 배트로 공을 때리는 소리. 퍽. 퍽. 고무 타이어에 스윙 연습을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겨울과 여름에 눌려 점점 짧아지는 봄의 햇살이 마치 여름처럼 따가웠다. 그 속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뛰고 있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들은 누가 누군지 얼른 구분이 가지 않아 재희는 키가 큰 사람들부터 훑었다.
“어, 왜 마운드에 서 있지?”
분명 중견수라고 했는데. 마운드에 서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있는 투수를 실눈을 뜨고 살피던 재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었네.”
한순간 착각했을 만큼 체격과 체형이 중현과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야구부원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스치듯 몇 번 봤지만 중현만큼 큰 사람을 본 적은 없어서 착각했다.
야구광이라 수업 있을 때 말고는 잘 안 빠진다더니.
“약속이라도 있나?”
재희는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종이를 몇 장 넘겨 야구 유니폼 디자인 시안을 펼쳤다. 중현이 부탁한 야구부 동아리의 새로운 유니폼 디자인 작업이었다. 졸업 작품전 준비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지만 중현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 알겠다고 했다. 밥 먹을 틈도 없다고 동동거리다가도 어떻게든 짜내다 보면 또 생기는 게 시간이라는 거니까.
그런데, ‘이거다!’ 하는 디자인이 떠오르지 않아 2주가 넘게 미적거리고 있었다. 야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으려나.
재희는 4B 연필 꽁지를 잘근거리며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는 야구부원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죽어라 공을 던지고 또 그걸 이 악물고 받아 치는 남자들. 덩치 큰 남자들이 조그만 공 하나를 쫓느라 숨을 헐떡이며 뛰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안 그래도 더운데.
“어느 부분이 재밌는 거지?”
운동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데다 야구 룰을 제대로 모르는 그녀로서는 공감대를 찾기 힘들었다. 유니폼에 야구공 패턴을 그려 넣어 보던 재희는 연필 꽁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야구하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해서 딱히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 않는구나. 중현이도 없고 햇살도 따가워지는데 일어날까.
변화구를 원하는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들어 올리던 진혁이 동작을 멈췄다. 어서 던지라는 듯 손에 낀 글러브를 팡팡 치는 포수 뒤쪽에 정훈이 ‘혼자서도 잘해요’라고 별명을 붙인, 영화도 밥도 혼자 즐기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입에 문 연필을 까딱까딱하면서.
“미대생이었나.”
중얼거린 진혁이 공을 던졌다. 쌩하니 날아간 공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포수의 글러브에 정확히 꽂혔다.
팡!
딴생각에 빠졌던 건지 멍하니 운동장 한편을 바라보던 여자가 흠칫 놀라며 마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만 4B 연필 꽁지를 입에 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진혁은 팔을 털었다.
여자의 눈이 한순간 커진다 싶더니 실눈을 떴다. 실눈이 반달이 되더니 입에 문 연필을 빼고 웃었다. 그러고는 작게 손을 흔들며 알은척을 해 왔다. 야구 모자 챙을 슬쩍 들어 올린 진혁이 중얼거렸다.
“나를 아나?”
마주 손을 흔들어 주기에는 인사를 나눈 기억이 전혀 없었다. 기억을 되짚으며 스탠드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진혁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재희! 음료수? 아이스크림?”
뒤를 돌아보자 과외비 받은 기념으로 음료수를 쏘겠다던 중현이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재희라고 불린 여자의 목소리가 스탠드에서 들려왔다.
“아이스크림.”
얼굴을 보는 건 세 번째지만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는데.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준 상대는 진혁 자신이 아니라 중현이었나 보다. 하긴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눈웃음을 지을 리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착각이지만 진혁은 조금 머쓱해져 이마를 긁적였다.
마운드 근처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은 중현이 다들 와서 먹으라는 말을 던지고는 아이스크림콘 하나를 꺼내 들고서 스탠드로 뛰었다. 성큼성큼 두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중현을 지켜보는 진혁에게 포수 희철이 포카리 스웨트 페트병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진혁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나이스 캐치.”
희철이 장난스럽게 외쳤다. 글러브를 벗어 옆구리에 낀 진혁은 중현과 재희에게 눈길을 둔 채 이온 음료의 뚜껑을 땄다. 등을 보이고 선 중현이 아이스크림콘의 껍질을 벗기는 재희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다.
“하지 마.”
재희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중현의 손등을 탁 쳤다. 어째 머리카락 가지고 장난치는 버릇은 유치원 때부터 변하지를 않는다.
“아야! 쪼그만 게 손은 무지 매워요.”
엄살을 떤 중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 일이야? 야구 구경을 다 오고. 시합 때마다 응원 오라고 그렇게 졸라 대도 꿈쩍도 않더니.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연습 경기 하는 거라 구경하기에는 덜 재밌을 텐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유니폼 디자인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너도 잠깐 보고.”
불쑥 중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실컷 봐.”
눈앞에 바짝 다가온 장난스러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자 중현이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서 도움은 됐어?”
“아니.”
스케치북을 흘끔 내려다본 중현이 디자인들 중 하나를 짚었다. 바지 라인에 상큼한 핑크색 줄무늬가 그려진 시안이었다.
“요거 괜찮네.”
재희가 코웃음을 쳤다.
“빈말하지 마. 지난번에 보고 핑크색이 뭐냐, 우리가 여자 야구부냐, 해 놓고는. 핑크는 여자 색이라며.”
민망한 기색도 없이 중현이 대꾸했다.
“그랬나? 근데 ‘핑크는 여자 친구들 색깔, 파랑은 남자 친구들 색깔이에요.’라고 내 첫사랑 유치원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첫사랑님의 말씀은 진리지. 그나저나 언제쯤 끝날 것 같아? 동아리 회장 형이 새 유니폼 나오면 고맙다고 한턱 거하게 쏜다던데.”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디자인 시안 넘겨주도록 해 볼게. 그리고 먹은 걸로 할 테니까 밥 안 사 줘도 된다고 전해 줘.”
“너 낯가림쟁이라는 거 아는데, 고맙다고 밥 사 준다는 걸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도 있잖아.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야.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니까. 와라, 응?”
“됐어.”
딱 잘라 거절한 재희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자 중현은 뻔히 답을 알면서도 입을 벌렸다.
“한 입만.”
“싫어.”
아이스크림 꽁다리까지 톡 털어 넣은 재희가 스케치북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려고? 온 김에 내 야구 실력 좀 구경해.”
“재미없어.”
“쌀쌀맞기는.”
장난치듯 재희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중현이 싱그럽게 웃었다. 봄볕에 잘 그을린 피부가 건강하게 빛났다.
“너! 선크림 또 안 발랐지?”
“아차차.”
아차차는 무슨.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 또 이런다.
“선크림 잊지 말고. 모자도 꾹꾹 눌러쓰고. 얼굴 태우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랬잖아. 새카맣게 탄 얼굴로 런웨이에 설 거야? 더구나 웨딩슈트인데, 너 정말 이럴래?”
웬만한 아마추어 모델보다 옷을 잘 소화해 내는 비율인 데다 무대 공포증과는 무관한 성격이라 졸업 작품전 때 모델로 서 달라고 부탁했었다. 더불어 그때까지는 절대 얼굴을 그을리지 말라는 당부도 했고. 그런데도 자외선 강한 봄볕에 신나게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얼굴 좀 까매진다고 이 인물이 어디 가겠어? 알았어, 알았어. 째려보지 마. 졸업 작품전 아직 한참 남았잖아. 지금부터 조심하면 되지. 봐, 모자 쓰잖아.”
유니폼 바지 뒷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야구 모자를 빼내 탁탁 모양을 잡은 중현이 눈썹 위까지 바짝 눌러썼다.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레몬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이다.
“됐지?”
“못 말려.”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갈게. 재미있게 놀아.”
손을 흔든 재희가 계단을 오르자 중현은 운동장을 향해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남은 음료수를 찾아 비닐봉지를 뒤적이는 중현에게 진혁이 다가섰다.
“한재희, 여자 친구야?”
남아 있는 아이스티 레몬 맛과 복숭아 맛 중 어느 걸 마실까 고민하던 중현이 의아한 얼굴로 진혁을 쳐다보았다.
“선배, 재희 알아요? 어떻게요? 선배 안다는 얘기 못 들었는데?”
“네가 불렀잖아. 한재희라고.”
“아, 그랬지. 여자 친구 아니고, 예전 이웃사촌이자 꼬꼬마 때부터 친구예요. 초등학교랑 중학교도 같이 다녔고요. 고등학교 때 제가 서울로 전학 오면서 한동안 못 보다가 대학은 또 동문이 됐죠. 친구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관계라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재희 녀석 일곱 살에 입학해서 실제로도 내가 오빠지만. 그래도 오빠라고는 절대 안 불러요. 같은 학년인 데다 친오빠도 아닌 사람한테 오빠라고 하는 거 간지럽다나. 선배도 봤죠, 귀엽게 생긴 거. 근데 생긴 거랑 달리 하는 짓은 영 퉁명스러워요. 그래서 놀려 먹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그래?”
포수 희철이 연습 안 하냐며 소리를 지르자 진혁은 글러브를 꼈다. 단숨에 페트병 하나를 비운 중현도 글러브를 들고서 자기 자리로 재빨리 뛰어갔다. 희철이 글러브를 팡팡 치며 받아 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서도 민정은 카페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진혁이 보였다. 더 늦지 않으려면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데. 약속 시간 지키지 않는 거 질색하는 진혁인데. 그런데도 막연한 불안감이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버릴 것 같은 예감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드물게도 진혁이 먼저 만나자며 연락을 해 왔다. 부풀었던 기분은 할 얘기가 있다는 진혁의 말을 듣고 한순간에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조심스레 물었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뭐냐고. 얼굴 보고 얘기하자는 대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러 번 약속을 미뤘었다.
휴대폰에 진혁의 이름이 뜨자 더 이상 미적거릴 수 없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아직 주문 안 했네. 뭐 마실까?”
긴장을 감추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넌?”
“카푸치노 마실래.”
내내 걱정을 했던 것과는 달리 진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건가 싶어 조금은 안심하며 카푸치노 거품을 맛보던 민정은 자신을 부르는 진혁의 목소리에 다시금 긴장했다.
“김민정.”
“……응.”
“그만 만나자.”
민정의 낯빛이 한순간에 하얘졌다. 떨리는 손으로 머그잔을 내려놓은 민정이 어렵게 목소리를 뱉어 냈다.
“왜?”
“더 이상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민정은 떨리는 양손을 비틀 듯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왜. 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건데? 내가 뭐 실수했어?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거야?”
“그래서 그만하자는 거 아니야. 계속 만나기에는 서로 잘 안 맞아. 또, 더 이상…….”
흥분한 목소리가 진혁의 말을 잘랐다.
“뭐가 안 맞는데? 내가 다 맞춰 주잖아. 맞춰 주는데…… 오빠는 자기 작업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취미 생활이고, 여자 친구인 나는! 시간 넘쳐 날 때에야 겨우 만나 주잖아. 그런데도 가끔 투덜거리기만 했지,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요구하지 않았어. 피곤한 스타일 질색이라기에 오빠 친구들 만난다고 할 때도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았어. 내 친구들이 남자 친구한테서 받은 커플링, 100일 기념 선물 자랑할 때면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그런데도 나 오빠한테 크게 내색하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까지 애썼는데 안 맞는다는 말이 나와? 어떻게 나한테 그만하자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언제까지 맞춰 줄 생각이었는데?”
“뭐?”
“지금까지 나한테 다 맞췄다며? 그거 자연스러운 일도 아닐뿐더러 결국엔 한계가 오는 거잖아. 그리고 나한테 맞춰 주는 줄 몰랐어. 표현을 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나한테 맞추지 말고 네 성격대로 대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너도 덜 힘들었을 테고. 그럼 아마도 우리 둘 다 감정 낭비, 시간 낭비 하지 않고 좀 더 일찍 끝냈을 수도 있었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왜 날 맞추고 있었겠어?”
“아까 하려던 말 잘렸는데. 호감이 가서 시작했지만, 더 이상 너한테 그런 감정 없어. 그게 헤어지자고 하는 가장 큰 이유야.”
민정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이해가 안 돼. 무조건 다 맞춰 주는데도 안 맞는다 그러고. 별다른 일 없었는데 갑자기 더 이상 안 좋아한다 그러면.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갑작스럽다고 하기에는 우리 만나는 것도 뜸해졌고, 만나서도 즐겁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잖아?”
민정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자주 못 만난 건 오빠가 늘 바빴던 탓이잖아. 그리고 난 즐거웠어. 오빠 만나는 거 즐겁다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그런 거지? 혹시…… 여자 생긴 거야?”
더 이상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데, 그게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다니. 소모적인 대화에 진혁은 피곤해졌다.
학생 식당을 나오던 재희는 움찔 놀랐다. 누가 분무기로 장난이라도 치듯 얼굴에 물방울이 부서졌다. 고개를 들자 온통 파랗다. 말끔한 하늘에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해가 떠 있는데 비라니.
“반칙 아냐?”
손을 내밀자 안개 같은 물방울 몇 개가 손바닥을 간질이고는 증발해 버렸다. 이런 비를 뭐라고 하더라.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데, 비라고 불러도 되나.
“날씨 묘하네.”
기차 타고 강원도로 훌쩍 떠나 버리고 싶은 기분을 다잡고 작업실을 향해 몇 걸음 걷다가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방향을 틀었다.
딱. 딱. 야구 배트로 공을 때리는 소리. 퍽. 퍽. 고무 타이어에 스윙 연습을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겨울과 여름에 눌려 점점 짧아지는 봄의 햇살이 마치 여름처럼 따가웠다. 그 속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뛰고 있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들은 누가 누군지 얼른 구분이 가지 않아 재희는 키가 큰 사람들부터 훑었다.
“어, 왜 마운드에 서 있지?”
분명 중견수라고 했는데. 마운드에 서서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있는 투수를 실눈을 뜨고 살피던 재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었네.”
한순간 착각했을 만큼 체격과 체형이 중현과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야구부원들이 연습하는 장면을 스치듯 몇 번 봤지만 중현만큼 큰 사람을 본 적은 없어서 착각했다.
야구광이라 수업 있을 때 말고는 잘 안 빠진다더니.
“약속이라도 있나?”
재희는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었다. 종이를 몇 장 넘겨 야구 유니폼 디자인 시안을 펼쳤다. 중현이 부탁한 야구부 동아리의 새로운 유니폼 디자인 작업이었다. 졸업 작품전 준비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지만 중현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 알겠다고 했다. 밥 먹을 틈도 없다고 동동거리다가도 어떻게든 짜내다 보면 또 생기는 게 시간이라는 거니까.
그런데, ‘이거다!’ 하는 디자인이 떠오르지 않아 2주가 넘게 미적거리고 있었다. 야구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으려나.
재희는 4B 연필 꽁지를 잘근거리며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는 야구부원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죽어라 공을 던지고 또 그걸 이 악물고 받아 치는 남자들. 덩치 큰 남자들이 조그만 공 하나를 쫓느라 숨을 헐떡이며 뛰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안 그래도 더운데.
“어느 부분이 재밌는 거지?”
운동에는 전혀 취미가 없는 데다 야구 룰을 제대로 모르는 그녀로서는 공감대를 찾기 힘들었다. 유니폼에 야구공 패턴을 그려 넣어 보던 재희는 연필 꽁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야구하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해서 딱히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는 않는구나. 중현이도 없고 햇살도 따가워지는데 일어날까.
변화구를 원하는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들어 올리던 진혁이 동작을 멈췄다. 어서 던지라는 듯 손에 낀 글러브를 팡팡 치는 포수 뒤쪽에 정훈이 ‘혼자서도 잘해요’라고 별명을 붙인, 영화도 밥도 혼자 즐기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입에 문 연필을 까딱까딱하면서.
“미대생이었나.”
중얼거린 진혁이 공을 던졌다. 쌩하니 날아간 공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포수의 글러브에 정확히 꽂혔다.
팡!
딴생각에 빠졌던 건지 멍하니 운동장 한편을 바라보던 여자가 흠칫 놀라며 마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까만 4B 연필 꽁지를 입에 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진혁은 팔을 털었다.
여자의 눈이 한순간 커진다 싶더니 실눈을 떴다. 실눈이 반달이 되더니 입에 문 연필을 빼고 웃었다. 그러고는 작게 손을 흔들며 알은척을 해 왔다. 야구 모자 챙을 슬쩍 들어 올린 진혁이 중얼거렸다.
“나를 아나?”
마주 손을 흔들어 주기에는 인사를 나눈 기억이 전혀 없었다. 기억을 되짚으며 스탠드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진혁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재희! 음료수? 아이스크림?”
뒤를 돌아보자 과외비 받은 기념으로 음료수를 쏘겠다던 중현이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재희라고 불린 여자의 목소리가 스탠드에서 들려왔다.
“아이스크림.”
얼굴을 보는 건 세 번째지만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는데.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 준 상대는 진혁 자신이 아니라 중현이었나 보다. 하긴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눈웃음을 지을 리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착각이지만 진혁은 조금 머쓱해져 이마를 긁적였다.
마운드 근처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은 중현이 다들 와서 먹으라는 말을 던지고는 아이스크림콘 하나를 꺼내 들고서 스탠드로 뛰었다. 성큼성큼 두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중현을 지켜보는 진혁에게 포수 희철이 포카리 스웨트 페트병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진혁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나이스 캐치.”
희철이 장난스럽게 외쳤다. 글러브를 벗어 옆구리에 낀 진혁은 중현과 재희에게 눈길을 둔 채 이온 음료의 뚜껑을 땄다. 등을 보이고 선 중현이 아이스크림콘의 껍질을 벗기는 재희에게 장난을 걸고 있었다.
“하지 마.”
재희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중현의 손등을 탁 쳤다. 어째 머리카락 가지고 장난치는 버릇은 유치원 때부터 변하지를 않는다.
“아야! 쪼그만 게 손은 무지 매워요.”
엄살을 떤 중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 일이야? 야구 구경을 다 오고. 시합 때마다 응원 오라고 그렇게 졸라 대도 꿈쩍도 않더니.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연습 경기 하는 거라 구경하기에는 덜 재밌을 텐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유니폼 디자인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너도 잠깐 보고.”
불쑥 중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실컷 봐.”
눈앞에 바짝 다가온 장난스러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자 중현이 킥킥대며 웃었다.
“그래서 도움은 됐어?”
“아니.”
스케치북을 흘끔 내려다본 중현이 디자인들 중 하나를 짚었다. 바지 라인에 상큼한 핑크색 줄무늬가 그려진 시안이었다.
“요거 괜찮네.”
재희가 코웃음을 쳤다.
“빈말하지 마. 지난번에 보고 핑크색이 뭐냐, 우리가 여자 야구부냐, 해 놓고는. 핑크는 여자 색이라며.”
민망한 기색도 없이 중현이 대꾸했다.
“그랬나? 근데 ‘핑크는 여자 친구들 색깔, 파랑은 남자 친구들 색깔이에요.’라고 내 첫사랑 유치원 선생님이 그러셨다고. 첫사랑님의 말씀은 진리지. 그나저나 언제쯤 끝날 것 같아? 동아리 회장 형이 새 유니폼 나오면 고맙다고 한턱 거하게 쏜다던데.”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디자인 시안 넘겨주도록 해 볼게. 그리고 먹은 걸로 할 테니까 밥 안 사 줘도 된다고 전해 줘.”
“너 낯가림쟁이라는 거 아는데, 고맙다고 밥 사 준다는 걸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나도 있잖아.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야.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니까. 와라, 응?”
“됐어.”
딱 잘라 거절한 재희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자 중현은 뻔히 답을 알면서도 입을 벌렸다.
“한 입만.”
“싫어.”
아이스크림 꽁다리까지 톡 털어 넣은 재희가 스케치북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려고? 온 김에 내 야구 실력 좀 구경해.”
“재미없어.”
“쌀쌀맞기는.”
장난치듯 재희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중현이 싱그럽게 웃었다. 봄볕에 잘 그을린 피부가 건강하게 빛났다.
“너! 선크림 또 안 발랐지?”
“아차차.”
아차차는 무슨.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 또 이런다.
“선크림 잊지 말고. 모자도 꾹꾹 눌러쓰고. 얼굴 태우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랬잖아. 새카맣게 탄 얼굴로 런웨이에 설 거야? 더구나 웨딩슈트인데, 너 정말 이럴래?”
웬만한 아마추어 모델보다 옷을 잘 소화해 내는 비율인 데다 무대 공포증과는 무관한 성격이라 졸업 작품전 때 모델로 서 달라고 부탁했었다. 더불어 그때까지는 절대 얼굴을 그을리지 말라는 당부도 했고. 그런데도 자외선 강한 봄볕에 신나게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얼굴 좀 까매진다고 이 인물이 어디 가겠어? 알았어, 알았어. 째려보지 마. 졸업 작품전 아직 한참 남았잖아. 지금부터 조심하면 되지. 봐, 모자 쓰잖아.”
유니폼 바지 뒷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야구 모자를 빼내 탁탁 모양을 잡은 중현이 눈썹 위까지 바짝 눌러썼다.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레몬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이다.
“됐지?”
“못 말려.”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갈게. 재미있게 놀아.”
손을 흔든 재희가 계단을 오르자 중현은 운동장을 향해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남은 음료수를 찾아 비닐봉지를 뒤적이는 중현에게 진혁이 다가섰다.
“한재희, 여자 친구야?”
남아 있는 아이스티 레몬 맛과 복숭아 맛 중 어느 걸 마실까 고민하던 중현이 의아한 얼굴로 진혁을 쳐다보았다.
“선배, 재희 알아요? 어떻게요? 선배 안다는 얘기 못 들었는데?”
“네가 불렀잖아. 한재희라고.”
“아, 그랬지. 여자 친구 아니고, 예전 이웃사촌이자 꼬꼬마 때부터 친구예요. 초등학교랑 중학교도 같이 다녔고요. 고등학교 때 제가 서울로 전학 오면서 한동안 못 보다가 대학은 또 동문이 됐죠. 친구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관계라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재희 녀석 일곱 살에 입학해서 실제로도 내가 오빠지만. 그래도 오빠라고는 절대 안 불러요. 같은 학년인 데다 친오빠도 아닌 사람한테 오빠라고 하는 거 간지럽다나. 선배도 봤죠, 귀엽게 생긴 거. 근데 생긴 거랑 달리 하는 짓은 영 퉁명스러워요. 그래서 놀려 먹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그래?”
포수 희철이 연습 안 하냐며 소리를 지르자 진혁은 글러브를 꼈다. 단숨에 페트병 하나를 비운 중현도 글러브를 들고서 자기 자리로 재빨리 뛰어갔다. 희철이 글러브를 팡팡 치며 받아 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서도 민정은 카페 밖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진혁이 보였다. 더 늦지 않으려면 카페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하는데. 약속 시간 지키지 않는 거 질색하는 진혁인데. 그런데도 막연한 불안감이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버릴 것 같은 예감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드물게도 진혁이 먼저 만나자며 연락을 해 왔다. 부풀었던 기분은 할 얘기가 있다는 진혁의 말을 듣고 한순간에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조심스레 물었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뭐냐고. 얼굴 보고 얘기하자는 대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러 번 약속을 미뤘었다.
휴대폰에 진혁의 이름이 뜨자 더 이상 미적거릴 수 없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아직 주문 안 했네. 뭐 마실까?”
긴장을 감추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넌?”
“카푸치노 마실래.”
내내 걱정을 했던 것과는 달리 진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건가 싶어 조금은 안심하며 카푸치노 거품을 맛보던 민정은 자신을 부르는 진혁의 목소리에 다시금 긴장했다.
“김민정.”
“……응.”
“그만 만나자.”
민정의 낯빛이 한순간에 하얘졌다. 떨리는 손으로 머그잔을 내려놓은 민정이 어렵게 목소리를 뱉어 냈다.
“왜?”
“더 이상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민정은 떨리는 양손을 비틀 듯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왜. 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건데? 내가 뭐 실수했어?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거야?”
“그래서 그만하자는 거 아니야. 계속 만나기에는 서로 잘 안 맞아. 또, 더 이상…….”
흥분한 목소리가 진혁의 말을 잘랐다.
“뭐가 안 맞는데? 내가 다 맞춰 주잖아. 맞춰 주는데…… 오빠는 자기 작업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취미 생활이고, 여자 친구인 나는! 시간 넘쳐 날 때에야 겨우 만나 주잖아. 그런데도 가끔 투덜거리기만 했지,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요구하지 않았어. 피곤한 스타일 질색이라기에 오빠 친구들 만난다고 할 때도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았어. 내 친구들이 남자 친구한테서 받은 커플링, 100일 기념 선물 자랑할 때면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그런데도 나 오빠한테 크게 내색하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까지 애썼는데 안 맞는다는 말이 나와? 어떻게 나한테 그만하자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언제까지 맞춰 줄 생각이었는데?”
“뭐?”
“지금까지 나한테 다 맞췄다며? 그거 자연스러운 일도 아닐뿐더러 결국엔 한계가 오는 거잖아. 그리고 나한테 맞춰 주는 줄 몰랐어. 표현을 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나한테 맞추지 말고 네 성격대로 대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너도 덜 힘들었을 테고. 그럼 아마도 우리 둘 다 감정 낭비, 시간 낭비 하지 않고 좀 더 일찍 끝냈을 수도 있었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왜 날 맞추고 있었겠어?”
“아까 하려던 말 잘렸는데. 호감이 가서 시작했지만, 더 이상 너한테 그런 감정 없어. 그게 헤어지자고 하는 가장 큰 이유야.”
민정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이해가 안 돼. 무조건 다 맞춰 주는데도 안 맞는다 그러고. 별다른 일 없었는데 갑자기 더 이상 안 좋아한다 그러면.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갑작스럽다고 하기에는 우리 만나는 것도 뜸해졌고, 만나서도 즐겁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잖아?”
민정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자주 못 만난 건 오빠가 늘 바빴던 탓이잖아. 그리고 난 즐거웠어. 오빠 만나는 거 즐겁다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그런 거지? 혹시…… 여자 생긴 거야?”
더 이상은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데, 그게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다니. 소모적인 대화에 진혁은 피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