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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해야만 헤어지자는 게 납득되겠어?”
“여자…… 있어?”
민정이 멍하니 되물었다. 다른 사람 생겼냐고 물은 건 그녀였지만 정말로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잔정도 없고 냉정한 부분도 많은 남자지만 흔히 말하는 양다리를 걸치는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싸구려 짓거리를 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었다.
“오빠가 나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고? 그걸 믿으라고?”
“만나는 사람 없어.”
“싫어.”
다른 여자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민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안 헤어져. 난 납득 못 해.”
납득하기 힘든 건 진혁이었다. 연애라는 건 두 사람이 하는 건데. 어느 한쪽이 사귀고 싶다고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어느 한쪽이 헤어지자고 하면 그걸로 끝나는 관계다. 그런데도 싫다니. 억지로 붙들고 혼자서라도 좋아하겠다는 건 짝사랑이지. 그리고 짝사랑은 말 그대로 혼자 하는 거지 상대방 붙잡고 하는 게 아니다.
“안 헤어져?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그럴 마음 없는데도 너랑 계속 만나 줘야 돼? 언제까지? 네가 헤어지고 싶을 때까지? 나는 네 억지가 납득이 안 가는데?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어? 만나는 게 의무처럼 느껴지고, 만나면 지루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민정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건가. 머릿속에서 들끓는 말을 있는 대로 다 토해 내 버릴까.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면 제자리로 돌아올 가망성이 있는 걸까. 되돌릴 수 없는 관계에 자존심 버려 가며 매달리기는 싫었다. 하지만 경솔한 감정 표출로 인해 이 남자를 영영 잃어버리는 짓 역시 하고 싶지 않았다.
떼쓰는 아이처럼 고집스럽던 민정이 그를 달래듯 말을 건넸다.
“오빠, 있잖아. 사귀다 보면 누구나 가끔은 지겹다고 느낄 때가 있어. 지겹고 권태롭다고 그때마다 헤어지면 남아 있는 커플은 드물 거야. 오빠 요즘 특히나 더 바쁘고 힘들었던 거 알아. 원래 피곤하면 모든 게 다 짜증 나고 거슬리는 법이잖아. 여유 생길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때 우리 다시 얘기해, 응?”
“지금 이 자리 이후로 만나는 일 없어. 번복하지 않아.”
입술을 질근 깨무는 민정의 낯빛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기가 서렸다.
“……참 쉽게도 끊어 낸다. 나는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억울하고 답답하고 미치겠는데,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아? 헤어지자는 말 하면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그만 만나자는 게 미안해야 할 일인 거였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미안해야 하지? 감정이 없어진 게 잘못한 일은 아니잖아? 사귀게 된 게 고마운 일이 아니듯이, 헤어지는 것 역시 미안한 일이 아니야.”
말문이 막혀 버린 민정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훑고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진혁에게 잘 보이려 애썼던 지난 시간들이 아깝고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나 버릴 관계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나는 내가 꽤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왜냐면 빈말로라도 잘 지내라는 소리가 안 나오거든. 그만하자는 말이 왜 미안하냐고 했지? 오빠한테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길 빌어. 그래서 그 여자한테 헤어지자는 소리도 듣게 되길 빌어. 그럼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이 어떨지 조금은 이해될 테니까. 아니다. 지극히 이성적이신 강진혁 씨는 그깟 연애가 좀 깨졌다고 마음 아플 사람이 아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하다 보니 더 울컥하는지 진혁을 노려보던 민정이 카페를 뛰쳐나갔다.
2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에 자전거 타는 건 조금 더 좋아하고. 비가 오는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 안개비 말고. 앞이 보이지도 않게 내리붓는 소낙비 말고. 지금처럼 툭툭툭 빗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드리는 이런 날, 자전거를 타면 머릿속까지 씻기는 기분이다. 그래서 진혁은 창문에 매달린 빗방울을 구경하다 사물함에서 레인 점퍼를 꺼내 들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취미 한번 요상하다는 정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즐겨 지나는 캠퍼스 뒷길로 접어든 진혁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비가 와 인적이 드문 길에 커다란 우산 하나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겨자색 우산이 갑자기 사라락 옆으로 움직였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우산이 저절로 날아갈 일은 없고. 우산에 발이라도 달렸나 했더니 우산 밑으로 진짜 발 두 개가 보였다. 정확히는 장화 한 쌍이. 장화와 우산이 도도도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귀여운 풍경이었다.
핸들에 팔꿈치를 얹고 잠깐 구경을 하던 진혁은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서 다시금 핸들을 잡았다. 페달에 발을 얹어 막 출발하려는데, 우산이 벌떡 일어났다. 우산 속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혁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우산 속 말간 얼굴, 한재희다.
카메라에 빗방울이 묻지 않도록 조심히 품 안에 끌어안은 재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의 남자를 주시했다. 비 오는 날 레인 점퍼를 입고서 자전거를 끌고 나온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냥 눈이 마주친 건가 했는데 자신에게 붙박인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안 가고 계속 쳐다보는 거지? 재희는 조심스레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비가 와서인지 인적이 없었다. 순간 재희는 긴장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지만, 겉모습과 내용물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
비가 와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말갛게 보이는 재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혁의 눈동자가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켜쥔 손으로 향했다가 다시 올라와 눈을 맞췄다.
“강진혁. 김중현 야구부 동아리 선배.”
재희의 몸에서 힘이 확 풀렸다.
“……안녕하세요.”
자신은 처음 보는데 알은척을 해 오는 걸 보면 중현이와 같이 있는 모습을 봤나 보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낯선 사람은 아닌 것도 같아서 살피듯 쳐다보던 재희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혹시 포지션이 투수예요?”
“투수.”
아, 역시. 재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잠시 중현이라고 착각했던 그 사람이구나. 그때는 거리가 좀 멀기도 했고 야구 모자 챙 때문에 콧등까지 그늘졌던 터라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눈매가 꽤 매서워 보이는 인상이다.
잘 모르는 사람과 쉽게 말을 나누는 성격이 아니다. 이만 가 보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살짝 까딱이고 진혁의 옆을 지나치려던 재희가 어어 하며 버둥거렸다. 놀라 뒤돌아보자 진혁이 우산 끝을 붙들고 있었다. 조심스레 힘을 주어 우산을 잡아 뺀 재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요?”
“구경 좀 하죠.”
“뭘요?”
진혁이 우산을 가리켰다. 의아한 표정을 하던 재희가 쑥스러운 듯 윗입술을 깨물며 우산을 들어 올려 뒤로 살짝 젖혔다. 우산 안쪽 바탕이 온통 빗방울로 가득했다.
설마 우산 안쪽에도 빗방울이 맺힌 건가.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진 물방울들을 유심히 감상하던 진혁이 검지로 우산을 툭툭 튕겼다.
재희가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짓자 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했다.
“이렇게 치면 정말로 빗방울이 쏟아지나 싶었는데, 아니네요.”
진짜처럼 보이도록 공들여 그렸는데 이런 소릴 들으니 반갑다. 재희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관심 없는 사람들은 여러 번 봐도 잘 모르던데. 혹시 그림 쪽 전공이세요?”
“건축.”
“멋진 분야 공부하시네요.”
우산 속 빗방울을 알아봐 준 게 고마워 몇 마디 나눴지만 잘 모르는 사람과 살갑게 대화를 이어 가는 건 좀 힘들다. 어색해서 발끝으로 땅을 톡톡 치던 재희가 그럼, 하고 말을 꺼냄과 동시에 진혁이 장화를 가리켰다.
“그것도 그렸어요?”
엄지손톱만 한 청개구리가 마치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듯 앞다리를 쭉 뻗어 장화를 움켜쥐고 있었다. 진혁과 함께 개구리를 내려다보던 재희가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작은 녀석인 데다 장화의 바탕색과 비슷해 몇 번을 보고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답게 관찰력이 아주 뛰어난가 보다.
개구리가 그려진 오른쪽 장화를 탁 굴리며 재희가 웃었다. 어쩐지 개구리가 폴짝 뛰어오를 것만 같았다.
“네. 귀엽죠? 큰 개구리는 좀 징그러운데 요만한 녀석들이 팔짝거리는 건 귀여워요.”
예쁘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끌어 올린 진혁이 곱게 휘어진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화도 본인 작품?”
“방금 내가 그렸다고 대답했잖아요.”
“다른 사람 작품을 응용한 건지 아님 한재희 씨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궁금해서 물었어요.”
디자인과 학생에게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질문에 신경을 빼앗겨 진혁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
“눈을 넓혀야 하는 학생이니까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접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 디자인을 따라 하지는 않아요.”
자존심을 건드린 건가. 턱을 치켜든 채 뾰족하니 대답하는 모습이 꽤나 쌀쌀맞았다. 진혁의 눈에 웃음이 어렸다. 작품의 분위기가 늘 그것을 만든 사람을 투영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재희가 들고 있는 우산과 신고 있는 장화는 그 주인만큼이나 귀엽고 눈이 갔다.
새초롬하게 굳은 얼굴이 어쩐지 더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핸들에 팔을 기댄 채 찬바람이 도는 자그만 얼굴을 바라보던 진혁이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재희의 머리로 향하던 손이 방향을 틀어 핸들을 잡았다. 그러고는 페달을 굴렸다.
재희는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이 들어가 붕 뜬 레인 점퍼가 자전거의 속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자전거는 어느새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우산을 잡아채 사람을 세워 두더니 인사도 없이 휙 가 버린다.
이상한 사람이다.
❀❀❀
재봉틀을 멈췄는데도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린 탓에 귓속이 울리는가 했더니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중현이라고 떠오른 이름에 재희의 얼굴 위로 반가움이 번졌다.
― 어디야?
중현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였다.
“작업실.”
― 저녁 먹었어?
“아직.”
― 나와. 밥 사 줄게.
“갑자기 왜?”
― 왜는. 그냥 밥 같이 먹자는 거지. 보고 싶으니까 빨리 나와라.
별다른 뜻 없이 설렁설렁 던져 오는 말인 걸 아는데도 가슴이 조금 살랑였다.
“하던 거 좀만 더 마무리하고. 어디서 만나?”
― ‘이모네’ 알지? 여덟 시까지 거기로 와.
식당 앞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현이 재희를 보자마자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숨 막혀.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오늘 연대랑 시합 있었거든. 8회까지 내내 고전하다가! 홈런으로 시원하게 역전했지. 오늘 누가 역전 홈런 쳤는지 물어봐 봐.”
“관심 없어.”
“관심 없어도 있는 척 좀 못 하지? 가끔 애교도 좀 부려 봐라. 그럼 이 오빠가 마구마구 귀여워해 줄 테니까.”
“오빠는 무슨.”
코웃음을 치는 재희의 볼을 잡아당긴 중현이 브이를 그려 보였다. 그러고는 고른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 몸이 홈런을 친 덕분에 2 대 1로 폼 나게 역전승했어. 멋지지?”
개구쟁이처럼 자랑을 하는 중현에게 이끌려 식당 안으로 들어서던 재희가 주춤 멈춰 섰다. 테이블 몇 개를 붙이고 앉아 왁자지껄 술잔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손을 들어 열렬히 알은척을 해 왔다. 야구부원들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먹는다는 말 안 했잖아.”
“같이 안 먹는다는 말도 안 했는데?”
중현은 재희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자취생이 공짜 밥 먹을 기회가 생겼으면 무조건 감사히 먹어야지.”
“너 미워한다?”
“네, 네. 실컷 미워하세요.”
잘 모르는 사람들 틈 속에서 밥 먹는 거, 굉장히 불편한 일이다. 낯가림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새 유니폼 멋지다며 인사를 던져 오는 동아리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로 대답을 한 재희는 옆에 앉아 수저를 챙겨 주는 중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진짜 얄미워.”
“고기 먹기 전에 시원한 맥주부터 할래?”
중현이 능청스럽게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하얀 맥주 거품에 입을 가져가던 재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를 채우는 남자는 얼마 전 비 오는 날 마주쳤던 중현의 선배였다.
진혁에게 맥주를 따라 준 중현이 재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소개했다.
“선배, 저번에 운동장에서 잠깐 봤었죠? 의디과 4학년 한재희예요. 인사해. 우리 동아리 강진혁 선배님.”
“저번에 인사했어. 비 오는 날 우연히 마주쳐서.”
재희의 말에 중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 그랬어? 그런데 선배 요즘 자주 뵙네요. 한동안 동아리 활동 뜸해서 서운했는데.”
“머리 식히는 데는 몸 움직이는 게 최고잖아.”
“그 말은 요즘 스트레스 게이지가 최고치라는 뜻이군요. 제가 맛있게 맥주 따라 드릴 테니까 기운 충전 하세요.”
싹싹한 태도로 동아리 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틈틈이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챙겨 주는 중현의 옆에서 재희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해야만 헤어지자는 게 납득되겠어?”
“여자…… 있어?”
민정이 멍하니 되물었다. 다른 사람 생겼냐고 물은 건 그녀였지만 정말로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잔정도 없고 냉정한 부분도 많은 남자지만 흔히 말하는 양다리를 걸치는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싸구려 짓거리를 하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었다.
“오빠가 나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고? 그걸 믿으라고?”
“만나는 사람 없어.”
“싫어.”
다른 여자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민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안 헤어져. 난 납득 못 해.”
납득하기 힘든 건 진혁이었다. 연애라는 건 두 사람이 하는 건데. 어느 한쪽이 사귀고 싶다고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듯, 어느 한쪽이 헤어지자고 하면 그걸로 끝나는 관계다. 그런데도 싫다니. 억지로 붙들고 혼자서라도 좋아하겠다는 건 짝사랑이지. 그리고 짝사랑은 말 그대로 혼자 하는 거지 상대방 붙잡고 하는 게 아니다.
“안 헤어져?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그럴 마음 없는데도 너랑 계속 만나 줘야 돼? 언제까지? 네가 헤어지고 싶을 때까지? 나는 네 억지가 납득이 안 가는데?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어? 만나는 게 의무처럼 느껴지고, 만나면 지루해.”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민정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건가. 머릿속에서 들끓는 말을 있는 대로 다 토해 내 버릴까.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면 제자리로 돌아올 가망성이 있는 걸까. 되돌릴 수 없는 관계에 자존심 버려 가며 매달리기는 싫었다. 하지만 경솔한 감정 표출로 인해 이 남자를 영영 잃어버리는 짓 역시 하고 싶지 않았다.
떼쓰는 아이처럼 고집스럽던 민정이 그를 달래듯 말을 건넸다.
“오빠, 있잖아. 사귀다 보면 누구나 가끔은 지겹다고 느낄 때가 있어. 지겹고 권태롭다고 그때마다 헤어지면 남아 있는 커플은 드물 거야. 오빠 요즘 특히나 더 바쁘고 힘들었던 거 알아. 원래 피곤하면 모든 게 다 짜증 나고 거슬리는 법이잖아. 여유 생길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때 우리 다시 얘기해, 응?”
“지금 이 자리 이후로 만나는 일 없어. 번복하지 않아.”
입술을 질근 깨무는 민정의 낯빛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기가 서렸다.
“……참 쉽게도 끊어 낸다. 나는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억울하고 답답하고 미치겠는데,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아? 헤어지자는 말 하면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그만 만나자는 게 미안해야 할 일인 거였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미안해야 하지? 감정이 없어진 게 잘못한 일은 아니잖아? 사귀게 된 게 고마운 일이 아니듯이, 헤어지는 것 역시 미안한 일이 아니야.”
말문이 막혀 버린 민정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훑고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진혁에게 잘 보이려 애썼던 지난 시간들이 아깝고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나 버릴 관계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나는 내가 꽤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왜냐면 빈말로라도 잘 지내라는 소리가 안 나오거든. 그만하자는 말이 왜 미안하냐고 했지? 오빠한테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길 빌어. 그래서 그 여자한테 헤어지자는 소리도 듣게 되길 빌어. 그럼 어쩌면 지금 내 마음이 어떨지 조금은 이해될 테니까. 아니다. 지극히 이성적이신 강진혁 씨는 그깟 연애가 좀 깨졌다고 마음 아플 사람이 아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하다 보니 더 울컥하는지 진혁을 노려보던 민정이 카페를 뛰쳐나갔다.
2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에 자전거 타는 건 조금 더 좋아하고. 비가 오는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 안개비 말고. 앞이 보이지도 않게 내리붓는 소낙비 말고. 지금처럼 툭툭툭 빗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드리는 이런 날, 자전거를 타면 머릿속까지 씻기는 기분이다. 그래서 진혁은 창문에 매달린 빗방울을 구경하다 사물함에서 레인 점퍼를 꺼내 들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취미 한번 요상하다는 정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즐겨 지나는 캠퍼스 뒷길로 접어든 진혁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비가 와 인적이 드문 길에 커다란 우산 하나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겨자색 우산이 갑자기 사라락 옆으로 움직였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우산이 저절로 날아갈 일은 없고. 우산에 발이라도 달렸나 했더니 우산 밑으로 진짜 발 두 개가 보였다. 정확히는 장화 한 쌍이. 장화와 우산이 도도도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귀여운 풍경이었다.
핸들에 팔꿈치를 얹고 잠깐 구경을 하던 진혁은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서 다시금 핸들을 잡았다. 페달에 발을 얹어 막 출발하려는데, 우산이 벌떡 일어났다. 우산 속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혁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우산 속 말간 얼굴, 한재희다.
카메라에 빗방울이 묻지 않도록 조심히 품 안에 끌어안은 재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의 남자를 주시했다. 비 오는 날 레인 점퍼를 입고서 자전거를 끌고 나온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냥 눈이 마주친 건가 했는데 자신에게 붙박인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안 가고 계속 쳐다보는 거지? 재희는 조심스레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비가 와서인지 인적이 없었다. 순간 재희는 긴장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지만, 겉모습과 내용물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
비가 와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말갛게 보이는 재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혁의 눈동자가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켜쥔 손으로 향했다가 다시 올라와 눈을 맞췄다.
“강진혁. 김중현 야구부 동아리 선배.”
재희의 몸에서 힘이 확 풀렸다.
“……안녕하세요.”
자신은 처음 보는데 알은척을 해 오는 걸 보면 중현이와 같이 있는 모습을 봤나 보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낯선 사람은 아닌 것도 같아서 살피듯 쳐다보던 재희가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혹시 포지션이 투수예요?”
“투수.”
아, 역시. 재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잠시 중현이라고 착각했던 그 사람이구나. 그때는 거리가 좀 멀기도 했고 야구 모자 챙 때문에 콧등까지 그늘졌던 터라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눈매가 꽤 매서워 보이는 인상이다.
잘 모르는 사람과 쉽게 말을 나누는 성격이 아니다. 이만 가 보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살짝 까딱이고 진혁의 옆을 지나치려던 재희가 어어 하며 버둥거렸다. 놀라 뒤돌아보자 진혁이 우산 끝을 붙들고 있었다. 조심스레 힘을 주어 우산을 잡아 뺀 재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요?”
“구경 좀 하죠.”
“뭘요?”
진혁이 우산을 가리켰다. 의아한 표정을 하던 재희가 쑥스러운 듯 윗입술을 깨물며 우산을 들어 올려 뒤로 살짝 젖혔다. 우산 안쪽 바탕이 온통 빗방울로 가득했다.
설마 우산 안쪽에도 빗방울이 맺힌 건가.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진 물방울들을 유심히 감상하던 진혁이 검지로 우산을 툭툭 튕겼다.
재희가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짓자 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했다.
“이렇게 치면 정말로 빗방울이 쏟아지나 싶었는데, 아니네요.”
진짜처럼 보이도록 공들여 그렸는데 이런 소릴 들으니 반갑다. 재희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관심 없는 사람들은 여러 번 봐도 잘 모르던데. 혹시 그림 쪽 전공이세요?”
“건축.”
“멋진 분야 공부하시네요.”
우산 속 빗방울을 알아봐 준 게 고마워 몇 마디 나눴지만 잘 모르는 사람과 살갑게 대화를 이어 가는 건 좀 힘들다. 어색해서 발끝으로 땅을 톡톡 치던 재희가 그럼, 하고 말을 꺼냄과 동시에 진혁이 장화를 가리켰다.
“그것도 그렸어요?”
엄지손톱만 한 청개구리가 마치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듯 앞다리를 쭉 뻗어 장화를 움켜쥐고 있었다. 진혁과 함께 개구리를 내려다보던 재희가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작은 녀석인 데다 장화의 바탕색과 비슷해 몇 번을 보고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답게 관찰력이 아주 뛰어난가 보다.
개구리가 그려진 오른쪽 장화를 탁 굴리며 재희가 웃었다. 어쩐지 개구리가 폴짝 뛰어오를 것만 같았다.
“네. 귀엽죠? 큰 개구리는 좀 징그러운데 요만한 녀석들이 팔짝거리는 건 귀여워요.”
예쁘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끌어 올린 진혁이 곱게 휘어진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화도 본인 작품?”
“방금 내가 그렸다고 대답했잖아요.”
“다른 사람 작품을 응용한 건지 아님 한재희 씨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궁금해서 물었어요.”
디자인과 학생에게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질문에 신경을 빼앗겨 진혁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
“눈을 넓혀야 하는 학생이니까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접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 디자인을 따라 하지는 않아요.”
자존심을 건드린 건가. 턱을 치켜든 채 뾰족하니 대답하는 모습이 꽤나 쌀쌀맞았다. 진혁의 눈에 웃음이 어렸다. 작품의 분위기가 늘 그것을 만든 사람을 투영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재희가 들고 있는 우산과 신고 있는 장화는 그 주인만큼이나 귀엽고 눈이 갔다.
새초롬하게 굳은 얼굴이 어쩐지 더 건드려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핸들에 팔을 기댄 채 찬바람이 도는 자그만 얼굴을 바라보던 진혁이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재희의 머리로 향하던 손이 방향을 틀어 핸들을 잡았다. 그러고는 페달을 굴렸다.
재희는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이 들어가 붕 뜬 레인 점퍼가 자전거의 속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자전거는 어느새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우산을 잡아채 사람을 세워 두더니 인사도 없이 휙 가 버린다.
이상한 사람이다.
❀❀❀
재봉틀을 멈췄는데도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린 탓에 귓속이 울리는가 했더니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중현이라고 떠오른 이름에 재희의 얼굴 위로 반가움이 번졌다.
― 어디야?
중현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였다.
“작업실.”
― 저녁 먹었어?
“아직.”
― 나와. 밥 사 줄게.
“갑자기 왜?”
― 왜는. 그냥 밥 같이 먹자는 거지. 보고 싶으니까 빨리 나와라.
별다른 뜻 없이 설렁설렁 던져 오는 말인 걸 아는데도 가슴이 조금 살랑였다.
“하던 거 좀만 더 마무리하고. 어디서 만나?”
― ‘이모네’ 알지? 여덟 시까지 거기로 와.
식당 앞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현이 재희를 보자마자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숨 막혀.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오늘 연대랑 시합 있었거든. 8회까지 내내 고전하다가! 홈런으로 시원하게 역전했지. 오늘 누가 역전 홈런 쳤는지 물어봐 봐.”
“관심 없어.”
“관심 없어도 있는 척 좀 못 하지? 가끔 애교도 좀 부려 봐라. 그럼 이 오빠가 마구마구 귀여워해 줄 테니까.”
“오빠는 무슨.”
코웃음을 치는 재희의 볼을 잡아당긴 중현이 브이를 그려 보였다. 그러고는 고른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 몸이 홈런을 친 덕분에 2 대 1로 폼 나게 역전승했어. 멋지지?”
개구쟁이처럼 자랑을 하는 중현에게 이끌려 식당 안으로 들어서던 재희가 주춤 멈춰 섰다. 테이블 몇 개를 붙이고 앉아 왁자지껄 술잔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손을 들어 열렬히 알은척을 해 왔다. 야구부원들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이랑 같이 먹는다는 말 안 했잖아.”
“같이 안 먹는다는 말도 안 했는데?”
중현은 재희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자취생이 공짜 밥 먹을 기회가 생겼으면 무조건 감사히 먹어야지.”
“너 미워한다?”
“네, 네. 실컷 미워하세요.”
잘 모르는 사람들 틈 속에서 밥 먹는 거, 굉장히 불편한 일이다. 낯가림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새 유니폼 멋지다며 인사를 던져 오는 동아리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로 대답을 한 재희는 옆에 앉아 수저를 챙겨 주는 중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진짜 얄미워.”
“고기 먹기 전에 시원한 맥주부터 할래?”
중현이 능청스럽게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하얀 맥주 거품에 입을 가져가던 재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어 있던 맞은편 자리를 채우는 남자는 얼마 전 비 오는 날 마주쳤던 중현의 선배였다.
진혁에게 맥주를 따라 준 중현이 재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소개했다.
“선배, 저번에 운동장에서 잠깐 봤었죠? 의디과 4학년 한재희예요. 인사해. 우리 동아리 강진혁 선배님.”
“저번에 인사했어. 비 오는 날 우연히 마주쳐서.”
재희의 말에 중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 그랬어? 그런데 선배 요즘 자주 뵙네요. 한동안 동아리 활동 뜸해서 서운했는데.”
“머리 식히는 데는 몸 움직이는 게 최고잖아.”
“그 말은 요즘 스트레스 게이지가 최고치라는 뜻이군요. 제가 맛있게 맥주 따라 드릴 테니까 기운 충전 하세요.”
싹싹한 태도로 동아리 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틈틈이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챙겨 주는 중현의 옆에서 재희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